국궁

 




1. 개요
3. 형태
4. 국궁의 역사
4.1. 고대의 국궁
4.2. 조선시대의 국궁
5. 국궁의 재료
6. 국궁의 종류
6.1. 시대/재료별
6.1.1. 맥궁
6.1.2. 단순궁/환목궁
6.1.3. 죽궁/목궁
6.1.5. 합성궁/각궁
6.1.6. 복합궁/목제장궁
6.1.7. 철궁
6.1.8. 철태궁
6.1.9. 동궁/칠궁
6.2. 용도/명칭별
7. 외국의 활들과의 비교?
8. 국궁의 현대적인 분석
9. 현대의 국궁
10. 배우는 단계
10.1. 국내 사극에서의 잘못된 사법
10.2. 국궁장비와 각종 가격 일체
11. 현대 국궁의 논쟁거리
11.1. 대한궁도협회 관련 문제
11.2. 사법 논쟁
11.2.1. 이른바 '온깍지 논쟁'에 대한 반박과 보론
11.2.1.1. 무엇을 두고 논쟁하는지도 불분명하다
11.2.1.2. 비방보다는 논증이 필요하다
11.2.1.3. 깍지손의 문제에 대하여
11.2.1.4. 줌손과 발디딤의 문제에 대하여
11.2.1.5. 분석적 활쏘기가 필요하다
11.3. 사풍 논쟁
11.3.1. 궁도라는 용어에 대한 논쟁
11.3.2. 대한궁도협회의 입승단제도
12. 국궁을 이용하는 대회
13. 관련 문서
14. 둘러보기


1. 개요



[1]

한국인의 전통 궁술. 또는 전통 활을 일컫는다. 택견, 씨름에 이어 2020년 7월 3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2] 씨름과 마찬가지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제의 영향으로 궁도라는 명칭으로도 부르지만 현재에는 궁술 등의 명칭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많다.

2. 국궁의 사법(쏘는 법)


'''사법 문서 참고.'''

3. 형태


앞서 아래에 있는 사진들을 포함해, 현대 활터와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국궁은 전부 조선후기 민간용 각궁을 기본으로 한다. 조선군과 무인들이 사용하던 전투용 각궁과 비교해서 활의 폭도 매우 얇고 고자[3]의 모양, 만드는 재료,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가 매우 다르다. 이 때문에 현대 활터에서 쓰는 개량궁이나 아래 사진 같은 민간각궁을 사극의 조선군이 사용한다면 말그대로 고증오류다. [4]
[image]
흔히 알려진 각궁의 모습이다.[5] 완전히 C자로 말린 것이 특징이다.
[image]
각궁과 화살의 부분 명칭을 설명한 그림이다.

4. 국궁의 역사


한반도에 대한 기록은 고대 중국의 기록에서도 '맥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국궁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도 같이 긴 편인데, 군주들 중에도 명궁이 많아서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6], 조선을 세운 이성계[7], 그리고 정조도 명궁이었다고 전해진다.[8] 심지어 고려의 혼군이자 무신정변에 맥없이 당하는 모습만 연상되는 의종이 의외로 뛰어난 궁술을 보여줬고 후삼국 시대의 폭군 궁예도 활을 잘 쏜다는 이름일 정도인 걸 보면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활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군주는 아니나, 오늘날 해상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장보고 역시 본명은 궁복으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궁복'의 '궁'은 말그대로 弓, 즉 활이고 '복'이 먹보, 심술보 할 때 우리말 접미사 '-보'의 음차라는 것이다.
한민족이 활을 중시하는 풍습이 더욱 심화된 시기는 조선시대 이다. 태조 이성계만 봐도, 활을 들고 전장을 휩쓸던 희대의 명궁이었고, 공자의 가르침인 육예[9] 六藝에 대한 상세 설명 참조 에서도 활쏘기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유교를 공부하는 선비들 또한 활쏘기를 정신수양의 도구로 사용했다. 또한 조선군의 군사교리도 활을 중시하였기에, 무과시험에서도 활에 대한 과목만 5가지를 훌쩍 넘어간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무사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모두 활을 쏘는 사람들을 칭했다. 당시에는 민간에서도 활이 유희용으로 발달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활쏘기를 즐겼으며, 이 때문에 방태기 활, 탄궁, 교자궁처럼 다양한 민간용 활이 존재했다.
따라서 우스갯소리로 '중국, 일본, 한국'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0]

4.1. 고대의 국궁


우리나라는 '''고대에도 중세와 흡사한 개념'''의 합성궁/복합궁을 사용했다.[11] 하지만 처음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합성궁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극소수 발견되는 삼국시대 이전의 유물 중에는 단순 목궁도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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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환목궁(신창동 저습지 출토), 삼한시대 목궁. 두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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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소갈비뼈를 사용해 만들기도 했다. 위 사진이 고구려 골제 활고자(긴것 4개)와 줌통(짧은 것 2개). 평양 영화9년명 고분 출토품으로, 일반적인 고자와 달리 길이가 길어 활채까지 이어진다. 저 길이와 형태 때문에 학계 일각[12]에서는 활고자가 아닌 궁간(弓幹)으로 보고 있으며, 고분벽화 그림에 근거해 활 중간중간 마디에 탄성력 강화를 위해 추가로 다른 부재를 덧붙였다고 보고 있다. 사진출처

4.2. 조선시대의 국궁


사예(射藝)는 곧 우리 집안의 법도이니, 다만 내가 천성으로 활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매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여 더욱 노력하였다.

- 정조, 일득록 #

죠션에 궁시(弓矢)가 잇슨지 임의여러쳔년이오 따라서궁시의 발달(發達)은 여러나라를 압도(壓倒)하얏나니 이는 궁시가 잇슴으로써가 안이오 오래됨으로써가 안이오 오직 궁술(弓術)의 묘기(妙技)가 잇섯슴이라. 텰젼이 잇섯고 편젼이 잇섯고 류업젼이 잇섯슨즉 텰젼은 텰젼의 묘법이 편젼은 편젼의 긔술(奇術)이 류엽젼은 류엽젼의 신기(神技)가 다 따로 잇섯슬 것이라 그러한대 이 묘법과 기술과 신기를 발휘하야 국위(國威)와 국광(國光)을 낫하내얏슴은 공인(共認)하는 바이나, 이러한 묘법 긔술, 신기를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주엇슬 따름이오 문자(文字)로 젼함이 잇지 못함은 이실로 유감(遺感)이라 안이치 못할지라. 그러함으로 이제 로사(老師)와 숙무(宿武)의게 톄육에 가장 적합한 류엽젼을 쏘는 법의 대개(大槪)를 젼하기를 청하야 아래에 긔록(記錄)하게 됨이니라..

- 朝鮮의 弓術 중 弓術의 敎範 중에서 .

조선시대에도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에는 평민들까지 활쏘기를 즐겼다. 활쏘기는 유교의 육예[13]에 들었기 때문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으로 보았다. 또 군사적으로도 '''갑오개혁 이전(1894년)'''까지 군대의 제식무기였다. 따라서 무과시험에도 멀리 쏘기와 기사(騎射: 말 타고 활쏘기)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서 첫 실패를 경험한 과목도 기마사격이었다.
구한말 외국인의 기록에는 '''어린아이나 여자들도 활쏘기에 능했다'''고 적고 있다. 기록에는 활터에서 활쏘기로 '''돈내기'''를 자주 했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말단 무관들이 술내기를 하다가 수백발을 겨뤘다는 기록도 있다. 10발을 쏴서 더 잘 맞춘 이가 승리하는 내기로 시작했으나, 양쪽 모두 계속 적중하는 바람에 승부를 낼 수가 없으니, 그때마다 술 한 잔 더하고 다시 10발을 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술 마시고 활을 쏘는 데도 양쪽이 모두 수백 발을 적중시켜서 승부가 안 나더라는 이야기(...).
중국의 기록에서도 한민족은 활을 잘 다룬다고 평했으며, 조선 말기에는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조선사람들은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에서는 조선 병사가 활을 쏘는 그림이 그려진 우표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의 후손들이 올림픽에서 양궁을 잘 하는 것도 선조들의 덕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용불용설도 아니고 그럴 리 없고(...) 한국 양궁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비인도적일 정도의 빡센 훈련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장궁으로 유명한 영국 양궁의 성적이 신통찮은 반면 활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국 양궁이 한국 다음으로 성적이 좋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실제로 외국에서 한국 양궁을 따라해보려다가 훈련과정을 보고는 고개만 젓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외국으로 코치와 선수진이 수출되고 나서는 이전처럼 압도적인 양상도 줄어들었다고.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 있었던 17세기 이전의 국궁은 연사속도, 사정거리에서는 화약무기를 성능에서 앞서기도 했다.[14] 특히, 병졸들의 승자총통보다는 조선 무관들이 쓰는 각궁의 성능이 우수했다. 물론 조선군에서도 화승총을 빠르게 받아들였는데, 활의 중요성이 감소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활은 숙달하는 데에 '''평생'''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2. 총에 비해 살상력이 압도적으로 '''약하다'''.
3. 활을 숙달한 군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비싸다'''.
4. 각궁의 재료인 물소뿔이 '''비싼''' 수입품이었다.[15][16]
심지어, '''조선 초기부터''' 승자총통류 핸드캐논조차 국궁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국궁은 '''보편무기'''로서 평가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는, 국궁을 조총의 보조용으로 사용하는 사법은 활의 중요성이 감소한 조선 후기의 방법이다. 이때는 직접적인 살상력에 집착하기보다는 무예로서 편의성을 강조하는 편이었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사대부들이 육예로서 연마하던 사정 위주의 활쏘기와 무과 시험 응시를 위해 연마하던 벌터질 위주의 활쏘기 등 여러 양상으로 유행하였다.
양반들, 특히 문반 사대부들은 양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정 射亭 이라 불리는 활터에서 주로 유엽전 활쏘기를 즐겼다. 사정은 무과시험의 유엽전 규격과 유사한 약 120보 거리에 과녁을 설치하여 사용했다. 사대부들은 마을 단위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사계(射契)라 부르는 일종의 동호 모임을 구성하여 다른 사정이나 사계와 활쏘기 기량을 겨루어 술이나 음식을 내기하는 편사 등 시합을 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도 활쏘기를 즐겨 하였는데, 응시 자격에 신분의 제한이 덜하고 학문적 요구도 문과보다는 더 적었던 관계로 무과 시험을 입신양명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3년마다 시행되는 식년시와 나라에 난리가 날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실시된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활을 연마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야생동물이나 산적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실리적 이유로도 활쏘기를 하였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사대부들이 활을 연마하는 射亭에서는 활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너른 벌판에 나뭇가지 두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솔포라 부르는 오늘날의 현수막과 같은 두꺼운 포목을 매달아 걸어놓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는데 이를 벌터질이라 하였다. 무과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각궁과 정량궁 등 규격에 맞는 활을 준비하여 연습해야 했지만, 실용적인 사냥이나 평시 습사용으로는 고가인 활보다 목궁 등 값싸고 성능이 떨어지는 활도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의 무과시험은 경국대전에 이르러 완비되었는데, 6개 실기 시험과 병서 1개 과목으로 구성되었고, 그중 6개 실기 시험 중 활쏘기가 4개에 이를 정도로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무과 급제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활쏘기에 투자해야 했다. 무과 시험과목은 첫째로 나무로 만든 뭉툭한 박두전을 멀리 쏘는 과목으로, 3발 이내에 240보 이상을 보내어야 합격이었다. 둘째로는 애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이라 하는 일반 화살보다 약 3분의 2정도로 짧은 화살을 통아라고 부르는 일반 화살과 같은 길이의 옆이 트인 대롱에 걸어 쏘는 것으로 130보 거리에서 쏘아 과녁에 맞는 개수로 점수를 매겼으며, 셋째로, 철전 혹은 육량시라고 하는, 일반 화살보다 7배 이상 무거운 화살을 정량궁이라 부르는 크고 강한 활로 쏘는 시험으로 최소 80보 이상을 보내야 합격이었다. 넷째는 기사로서,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점수를 주어 평가하였다. 다섯째는 말을 타고 달리며 창으로 목표물을 찌르는 기창이 있었고 여섯째는 말을 타고 작은 공을 다루는 격구 과목이 있었다.
조선 후기 속대전이 간행되면서 상기 실기 6개 실기과목에 전투용 화살인 유엽전 쏘기와 편곤(쇠도리깨) 등이 과목에 추가되었다. 유엽전 쏘기는 각궁으로 무게가 8돈인 촉 모양이 버드나무 잎 모양인 화살을 120보 거리에서 쏘아 3발 중 최소 2발을 맞추어야 하는 과목으로, 유엽전 쏘기가 유일하게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져서 오늘날 활터에서 사용하는 145미터 거리에서 과녁을 쏘게 된 유래가 된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서 무관이 되기 위해 무과를 준비하려면 가장 중요한 과목이 활쏘기와 말타기였다.
위에서 언급한 목전, 철전, 편전, 기사는 조선 후기 무과가 폐지되고 활쏘기가 쇠퇴하면서 그 장비와 쏘는 법이 맥이 끊어졌고 사대부들이 취미로 해오던 유엽전 활쏘기만이 전국 각지의 사정에서 전해온다. 일제시대에 조선궁술연구회에서 간행한 <조선의 궁술>에서 소개된 궁술의 교범도 유엽전 활쏘기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 서문에서 언급한다. 오늘날 국궁장 혹은 궁도장이라는 곳에서 배우게 되는 활쏘기는 이 120보 유엽전 활쏘기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구식군대가 사실상 없어지다시피 하면서 군사기술로서의 궁술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무과 또한 폐지되어 활쏘기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연마하는 한량은 사라지고 민간에서만 간간이 전해지게 되었다. 1899년 6월 독일에서 하인리히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을 때 대한제국 광무황제(조선 고종)는 장안의 이름난 궁수 여섯을 불러 덕수궁 후원에서 활쏘기 시범을 행했는데, 하인리히 친왕[17]이 조선 활쏘기에 큰 관심을 보여 극히 유쾌하게 끝나자, 이에 고무된 광무황제는 궁술을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결과로 궁술 장려를 위해 경희궁 북쪽에 활터를 짓고 황학정이라 이름 붙여 조선의 대표 수사정으로 삼았고 초대 사두로 하인리히 친왕 방문시 시범을 보였던 1894년 마지막 무과 급제자 성문영사진참조이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군사기술보다는 체육활동과 취미로서 맥을 이어 오던 활쏘기는 1928년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상황에서 황학정을 기반으로 궁술의 맥을 잇고자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되었으며 각종 궁술 대회를 주최하여 활쏘기를 장려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의 활쏘기 역사와 제도, 궁시의 규격과 궁술의 교법을 국한문 혼용으로 정리한 조선의 궁술국궁신문기사참조이라는 책을 내놓게 되었다. 조선의 궁술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근세의 활쏘기 관련 서적인데, 특히 한글로 집필되된 궁술의 교법 부분에는 현재도 활터에서 사용되는 중구미, 불거름 등 순 한글 용어가 적혔다. 일제강점기에서 다시 군국주의 색채로 돌아선 민족말살기가 시작된 1932년, 조선 궁술 연구회는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식 무도 정신이 깃든 궁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조선 궁도 연구회로 개칭했고, 광복 후 조선궁도협회로 바뀐 채 근세사의 여러 질곡을 겪으며 현재까지 내려왔다.
화포가 발달한 이후에도 국궁은 기본적인 무예로 중시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중후반기에는 치안을 핑계로 전통 궁술의 맥이 위협받기도 했으나, 고종이 세운 황학정 등 활터에서 꾸준히 활쏘기가 계승되는 데 성공했다. 허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단체의 이름과 공식 명칭이 대한궁도협회궁도로 바뀌었고, 국궁계도 사회의 격동을 견디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난립하여 일본의 궁도처럼 통일된 규격을 정하지 못하며 분열되었다.

5. 국궁의 재료


국궁의 초기 재료는 나무, 대나무, 뼈 등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목재 합성궁, 뼈를 이용한 합성궁이 사용되었다. 한반도 특유의 C자형 각궁은 고대의 맥궁으로부터 이어진 합성궁 제작기술이 조선시대에 극단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활들이 공존했을 가능성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후 단순궁 형태의 활은 민간에서만 사용되었다.
국궁은 각궁, 특히 물소뿔로 만든 흑각궁을 중시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물소가 없다.''' 이 때문에 재료를 중국, 일본, 류큐에서 전량 수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을 견제하려고 수량을 제한했고, 류큐 왕국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츠마 번에게 점령당했으므로, 일본에서만 수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중국과 일본의 물소를 남부지방에서 번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기후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참고로, 물소 뿔은 약재나 화각공예품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어찌되었든, 흑각궁은 조선후기에도 많이 만들었는데, 후기의 활 보유량에 대한 기록을 보자.
하지만 '''각궁은 장마철에 약화되거나 심하면 망가지기도 했다.''' 따라서 장마철은 총이나 말을 다루기에도 좋지 않은데도 국경으로 침입하는 유목민족들에게 유리한 계절이라고 인식했다. 궁사들 사이에서는 "마누라는 윗목에 재워도 활은 아랫목에 재운다." 하는 말이 있었다. [18] 그래서 조선시대 궁사들은 여름을 대비하여 '''합성장궁, 철궁, 간각칠궁'''[19] 등을 준비해두어야 했다. 관련 융원필비 기록 링크.

6. 국궁의 종류



6.1. 시대/재료별



6.1.1. 맥궁


[image][image][image]
역사 항목에서도 가장 먼저 확인되는 고구려 시대의 각궁. 맥국[20]에서 생산되었다 전해지며, 중국에도 수출할 만큼 품질이 좋았다 전해진다. 온전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고구려의 벽화에 그려진 활일 가능성이 높으나 자세한 사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6.1.2. 단순궁/환목궁


한반도에서는 선사 이전에 확인되며, 삼국시대 이후에는 주력으로 쓰인 일이 적다.

6.1.3. 죽궁/목궁


민간용 단순궁. 대나무를 여러겹 포개놓거나 대나무 림에 각(角)을 붙이지 않은 것은 방태기활이라 불렀다. 목궁은 산간지방이나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썼다는 옛 어르신들의 증언이 있다. 전투시에도 이걸 사용할 정도면 '정말 갈 때까지 갔다, 졌다.'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편적으로 단순궁은 사낭용, 습사용, 유희용이었다. 전투용으로는 힘줄을 대거나 하는 식으로 각궁이랑 비슷하게 강화한 목제 강화궁이 쓰였다.[21] 따지고 보면 각궁의 제작기간이나 가격 등을 생각해보면 의병들이나 군수물자가 부족한 관군들도 어느 정도 사용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민간에서 사용된 전통 목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 목궁 복원 및 제작을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현중순 목궁장이다. 모두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각궁에만 치중할때, 진짜 사냥이나 전시에 사용했었을 주력 활인 목궁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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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널리 퍼진 잘못된 오해를 설명하기 위해 남겨둔 항목.
[image]
박극환 궁장이 복원한 조선시대 동개활.(출처) [22]
동개활이라는 명칭 자체가 후대에 생겼고, 전 세계 모든 문화권을 통틀어 봐도 큰 활이건 작은 활이건 전부 동개 일습에 넣고 다녔기 때문에, 동개에 넣고 다닌다는 가정하에 붙인 '동개활' 이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이다. 박극환 궁장이 복원한 동개활의 원래 유물은 제작 재료나 구조 등을 보건대, 전투용이 아닌 의장품, 유품이다.
여러 무예단체에서 동개활을 수련, 공연용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태조 어궁이나 발굴되는 고자목 유물들만 봐도 조선군이 전투에서 그렇게 작은 활을 사용했다고 여길 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크면 컸지..

6.1.5. 합성궁/각궁


대표적인 국궁이다. 재료와 형태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6.1.6. 복합궁/목제장궁


최근 연구로는 우리나라에서도 목제 복합장궁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기병들이 중요했던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만주활과 비슷한 복합장궁이 많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도 180cm 만주활에 버금가는 복합장궁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일반적인 각궁이랑 비슷한 성격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교자궁 문서 참조.

6.1.7. 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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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로 만든 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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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철궁. 놋쇠로 만든 것과는 달리 광택이 나지 않고 시꺼멓다.
쇠를 구부리고 열을 가해서 가공한 활. 장마철 대비용으로서, 무게에 비하면 비효율적이었다고 한다.

6.1.8. 철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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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각궁과 비슷하나 원래 각궁은 활몸 부분(간幹)을 대나무로 만드는데 철태궁은 이 부분만 대나무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활이다.

6.1.9. 동궁/칠궁


동궁은 빨간 도료, 칠궁은 검은 옻을 칠해서 방수성을 높인 활이다. 굳이 이런 분류를 나눈 것은, 계절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활을 번갈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6.2. 용도/명칭별


  • 예궁: 제사를 지내거나 명절에 사용한 예식용 활. 엄청나게 체격이 큰 무관이나 기계를 써서 당겼다. 지배자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한 활이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한 18세기 예궁 유물은 길이가 무려 247 cm에 달한다. 참조링크
  • 교자궁: 민간용 강화궁의 대표. 조선후기에는 활의 중요성이 감소하여 군에서도 교자궁을 주력으로 편성했다. 한때 인터넷에는 우천시 사용한 목궁으로 보는 주장이 퍼졌지만, 교자궁 관련 기록 1, 기록 2들을 참조하자면, 이러한 복합궁도 각궁이랑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교자궁 뉴스
  • 탄궁: 돌 탄환을 쏘는 활.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썼다. 놀이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 육량궁/정량궁: 길이 165 cm 이상. 일반적인 활보다 훨씬 크고 두껍고 파운드 세기도 강한 활로, 김홍도의 활쏘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에 있는 커다란 활이 바로 육량궁이다. 무과시험에서 무관들을 선발하기 위해 사용했던 활로, 파운드가 최소 150파운드가 넘어가는 강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힘이 강한 사람은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쏘고 [23] 힘이 약한 사람은 쏘면서 자빠진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활로 300g이 넘어가는 육량전[24]을 70보 넘어서까지 날려야 비로소 무과시험 합격 커트라인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육량궁은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활이 아니다. 전시에 사용했다거나 군영에 배치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활을 얼마나 강하게 당기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 비치한 시험용 도구이다. 물론 전투용 각궁이 정량궁과 비슷한장력을 쓰겠지만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투용으로 썼을 것이다. 장력도 롱보우와 대등한 파운드를 가진걸 감안하면, 그런데 정량궁은 조선의 궁술이라는 책에는 전쟁용 활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27분 15초

7. 외국의 활들과의 비교?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애초에 활이라는 게 단순히 파운드가 세냐 안 세냐로 따지는 무기가 아니다. 조선도 무관들을 뽑을 때 사용하던 육량궁은 거진 150파운드 이상의 강궁으로, 힘이 약한 사람이 쏘면 앞으로 자빠진다고 서술이 되어있을 정도로 강한 활이지만, 막상 그 강한 활을 무관들이 전시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활이란 건 그냥 세게 만들고 싶으면 덜 깎아서 세게 만들면 되는 물건이라, 높은 파운드로 제작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활의 성능을 논할 수는 없다. 타국 활들과 비교하기 앞서 이점을 유의해야 한다.
현대의 각궁은 기본적으로 민간 각궁이 베이스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전투용 국궁과는 근본적인 재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타국의 전투용 활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감안하고 문서를 읽기 바란다. 또한 이마저도, 개화기~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형으로 보나 구조로 보나 전통 민간 활 유물들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장의 현대 각궁도 타국들의 활들과 비교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이로 인해, 근래 들어 각궁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단체들의 움직임이 많다.
일단 유럽의 경우는 영국의 롱보우가 매우 유명하다. 국내 매체에서도 롱보우와 각궁을 자주 비교하곤 한다. 동유럽에서는 훈족과 기타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의 각궁이 유명하다. 제작방식이 한반도의 각궁과 꽤 유사하다. 또한 역대 중국 왕조와 북방의 유목 민족들의 합성궁은 기본적인 제작방식이 한반도와 매우 유사성이 있다. 고려시대의 복합식 장궁 유물도 만주나 몽골식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활은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진 C자형 활에서 여러 나라의 양식을 연구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연구될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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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화궁은 동북아 내에서 유독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는데, 2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활은 헤이안~가마쿠라 시기 사무라이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였다. 사무라이 자체가 원래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싸우는 기마무사였다. 무로마치 말기 ~ 에도시대 나온 궁태궁(弓胎弓, 히고유미 [25])이나 중등궁(重藤弓, 시게토 유미[26] 은 성능 자체만 놓고 보자면 각궁에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다만 대단히 길기 때문에 휴대성이 매우 떨어지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에 하나가 일본 활이 단일 목궁으로 제작하여, 각궁 같은 합성궁과 다르게 습기에 대한 내구성이 매우 강하다는 부분인데, 사실 일본 활도 아교를 이용해 여러 나무들을 잘라 조합해 만든 복합궁이다. 그래서 습기를 맞으면 아교가 녹아 활이 고장 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합성궁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각궁과 같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 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한 편이다.# 일본 활은 소형화에는 실패했지만 활의 상단을 늘리는 방식으로 기마 사격의 용의함등의 보완점을 얻었다. 현재 전해지는 민간용 국궁의 성능에만 안주해서 외국의 활을 욕하는 행동은 국궁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라도 옳지 못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화궁(和弓, 일본 활)에 대한 오해는 종종 출신지인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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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활을 꼽을 때 언급되는 터키 각궁. 시위를 당긴 모습도 검색해보자. 시위가 없을 때의 독특한 모양이 유명하다. 시위를 걸면 명나라 장궁과 비슷한 선을 그리고, 당기면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탄성이 높은 모양을 보인다. 활을 자주 쓴 민족답게 이밖에도 다양한 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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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각궁. 가까운 한국 활보다 크고 두꺼워 내구성은 높지만, 탄성이 약해서 비거리가 짧은 편이다.
만주족의 만주 활은 유목민족의 활 중에서 가장 거대하며, 비거리는 짧지만 저장되는 운동 에너지(J)가 높아서 무거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기마 사격에는 비거리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발달한 특색이다. 궁기병들은 속력을 이용하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목표물을 정확히 쏘고 지나치는 공격 이탈 능력, 무거운 화살을 이용하여 일격으로도 확실히 살상력이 보장되는 '빠른 단발 사격'이 가능한 활을 선호했다. 한반도에서도 기마병을 많이 편성했던 시대에는 투박한 만주 활을 닮은 국궁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국궁은 약간 작지만 부려놓으면 만주 활과 비슷한 형상이 되며, 고려시대의 국궁은 만주 활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기병의 편성 비중이 높은 시대일수록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국궁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로 고탄성 활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조상들은 만주 지방의 활을 비교한 예시가 많다. '''"만주 활들은 너무 투박해서, 크기에 비하면 성능이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습기에는 우리나라 활보다 훨씬 강하므로 단점만 보면 안 된다. '''우리도 장마철에 쓸만한 활을 만들려면 본받을 점이 많다'''."라고 비평과 반성을 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만주 활은 궁기병에게 중요한 짧은 Draw Length와 파괴력을 중시했고, 한반도의 국궁은 탄성이 높은 재료를 이용하여 비거리와 연사력을 중시했다. 즉, 국궁은 극단적인 탄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탄력이 매우 낮은 만주 활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녔지만, 목재 복합궁은 쌍둥이처럼 닮은 거대한 장궁을 병용해서 만들었기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결과, 고려시대 활이 만주 활과 매우 닮았던 것은 물론이고, 보병용 고탄성 활을 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에도 만주 활처럼 투박하고 큰 목궁을 스스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목제 강궁이 부족할 때는 만주 활을 수입해서 병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국궁과는 형태적으로도 서로 유사하고, 여러모로 국궁과는 교류가 많았던 활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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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죽궁. 출처는 국궁신문. 2007년 국내에서 열린 세계민속궁축전에서 한국 각궁과 더불어 120m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데 성공한 유일한 활이었다. 대나무 재질인데도 뛰어난 성능[28]을 보여줬는데, 이것은 부탄 지역의 특수한 대나무 덕분이다.
당시에 참석한 현대의 몽골, 터키, 헝가리 각궁은 부탄 죽궁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는 부탄에는 근대까지도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있었으며, 현대까지도 활이 스포츠로서 발달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활은 사용자와 필요성이 갖추어져야 발전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질이나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활의 성능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도 준다.

8. '''국궁의 현대적인 분석'''


국궁에도 재미있는 특색이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국궁은 '''에너지 생성량'''이 매우 뛰어난 활이라고 한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탄성에 의지하는 만큼, 무거운 화살을 발사할 경우에는 장궁보다 불리하다고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금 쓰고있는 국궁은 습사용 활이라서 장력이 낮기 때문이다.
또, 시위의 속력 에너지가 굉장히 높기 때문에, 화살을 걸지 않고 빈 활을 쏘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일본의 화궁 명인의 글에 따르면, 145미터 거리의 한국 활터 비거리는 세계적으로도 먼 것이라 한다.
현대 전문가들이 분석한 국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높은 경량성과 휴대성.
2) 극단적으로 작은 몸체가 되돌아가면서 발생하는 폭발적인 에너지 생성량.
3) 'C'형 → '3'형으로 탄성이 집약된 활대가 에너지를 거의 손실하지 않고 전방으로 집중시켜줌.
4)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함.
5) 당기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빠른 정면 조준 및 연사가 이루어지는 디자인.
단점은 다음과 같다.
1) 습기에 약해서 장마철에 쓰기 힘듦. [29]
2) 활에 시위를 올릴 때 상당한 시간이 걸림.
3) 내구도가 약해서 지속적인 관리와 휴대 시 주의가 필요함.
4) 기마 사격 시 무거운 화살을 쏘기에는 불리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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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국궁은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최강의 활이었다기보다는, 중세 기준으로 섬세한 기술을 집약하여 만든 활에 가깝다. 특히, '''고무줄'''에 가까울 정도로 휘어버리는 활대를 '''완벽한 C → 3자 모양'''으로 변형할 수 있는 국궁의 높은 탄성은 중세 기준으로 놀라운 연구가 집약된 것이다.
국궁의 특성은 고구려 시대부터 각궁을 극단적으로 소형화했던 성향과 맞물린다. 국궁은 2개의 손가락을 이용하는 속사형 단궁의 장점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약점은 상쇄하는 데 투자한 활이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소형화에 성공하면서, 컨트롤의 폭이 넓으면서도 비거리가 길고, 전방을 겨냥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 현대까지 전해지는 국궁의 특성이다.
종합하면, 국궁은 다른 활을 사용하는 궁수들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서,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분배하여 화살이 매우 멀리 날아가며, 빠르게 연달아서 조준이 가능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활이라고 볼 수 있다. [31]
현대의 컴파운드 보우식 양궁이 달성한 기술에는 못 미치는 분야도 있지만, 국궁의 장점은 위와 같은 '가볍고 뛰어난 에너지 생성'이라는 특성을 고대와 중세의 재료만 가지고 실현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국궁은 '''습사용'''이라서 군사용보다 '''활이 가늘고 약해져서''' 많은 기술이 손실되었다. 전투용 국궁은 활대를 길고 굵게 만들어서 장력을 키웠으며 이를 제대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예:정량궁, 예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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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중인 조선시대 전투용 활. 특별 전시회를 할 때 공개된 것으로, 큰 표지의 원군(元軍)이라는 글자는 해당 구역 전시물이 원의 일본 침입 당시와 관련된 것이고, 활 바로 앞에 조선 궁이라는 하얀 이름표가 있다.출처 참고로 이런 형태의 각궁은 현대의 국궁들과 여러모로 생김새가 다른데, 이는 군용 활과 민간 활의 모양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진의 각궁을 자세히 보면 현대의 각궁과 전체적인 구조가 매우 다르다. 활 안팎이 시꺼먼 것은 군용품인 만큼 내구도를 올리기 위해 겉에 옻칠을 해서이다.
그 밖에도, 일본 정창원에 소장 중이라는 최영의 신궁(神弓)이나 유인촌이 진행하던 역사스페셜에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소개하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고려시대 활들은 180 cm가 넘는 장궁이었다.참고. 초기에는 전통적인 각궁보다 터키나 유목민족의 각궁과 유사한 장궁들이 발견되는데, 이 시대 국궁 연구는 미비한 편이다.

국내 궁사 연구인들이 유엽전과 착전 [32] 등 전투용 화살촉 유물들을 복원해 실시한 실험이다.
실험에 사용한 철판은 1.6 mm로 서양의 판금갑옷 기준이라면 재질도 무르고 얇은 편이다만 [33] 동북아 철갑옷 갑찰의 두께는 철제 기준으로 평균 0.6~1.5 mm 정도로, 생각보다 무르고 가벼운 재질의 철판인 경우도 많다. [34] 또한 당시에는 방호재의 재질 중에 가죽, 천, 종이 등이 철제의 비해 훨씬 비율이 높았다는 점을 감안해서, 국궁이 철판을 뚫네, 못 뚫네 같은 단편적인 결과를 보기보단, 저 정도 활이 당시 무장한 병사에게 어느 정도의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는지 유추하기 위한 실험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50파운드 영국 장궁으로 판금갑옷을 향해 쏘는 영상이다.
보다시피 극단적으로 강한 파운드를 가진 활로도 판금갑옷에겐 유효한 타격을 주기가 매우 어렵다. [35]

9. 현대의 국궁


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독일 제국의 황자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인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36]는 한국의 전통 무술을 보여 달라고 고종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황자는 그렇게 시연된 여러 무술 중 특히 궁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아예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궁을 직접 쏴 보기까지 했다.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군국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그는, 국가적으로 궁술을 장려해서 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의 제안대로 궁술 클럽 결성을 지원하였다.
전국 체전, 육사배 국궁대회, 전국대회는 아직 존재하지만 '''일부 국궁 매니아들만 즐기는 마이너한 스포츠'''가 되었다. 국궁신문의 일본 규도장 견학문 중에 저자의 모교에도 국궁장을 도입하자고 건의했다가 "양궁을 수련하면 실력에 따라 학교에서 장학금도 받고 아시안 게임, 올림픽 게임에도 나갈 수 있으며, 성적이 좋으면 국가로부터 평생 연금도 받으며, 양궁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대우를 받는데 '''아무 전망도 없는 국궁을 수련하여 세월을 낭비할 학생들이 있겠는가?'''"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는 씁쓸한 얘기가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37] 물론 우리나라 학교 중에 국궁을 가르치는 곳이 전무하지는 않지만[38], 마이너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궁도 문화에 비해 한국의 국궁 문화가 많이 쇠퇴했다며 조선일보에서 신데마스미즈노 미도리를 가지고 비교하는 기사를 썼다. 기사
현재 국궁인구는 국궁신문 등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약 3만 5천여명 가량으로 전국적으로 월에 1~2회 정도의 대회가 개최되고 지역대회까지 감안하면 매주 경기가 열릴 정도로 상당히 열성적인 취미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같은 계열의 양궁과는 달리 일반인의 취미로서의 접근성 자체는 더 좋은 편이라 아무래도 이쪽이 취미영역으로는 더 발전하기도했다.
다만 상술했듯 일제시대의 민족분열과 각종 근현대사의 풍랑으로 인해 통일된 규격을 갖춘 국궁의 표본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며, '''각 활터마다의 전통이 모두 다르다.''' 현재 각종 단체, 수련의 방향이나 노선의 차이로 심하면 키배가 벌어질 정도로 분열이 심한 상태다. 대표적인 것은 사법 논쟁과 대한궁도협회의 부패 문제.
국궁과 활쏘기 문화에 대한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현대사회에서 활쏘기가 본질적으로 취미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한계를 보인다. 이 문단에도 인용된 국궁신문 기사의 필자는 "양궁을 하면 상도 타고 사회적인 보상이 있지만 국궁은 보상이 없어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지인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다. 아무리 영세한 매체더라도 언론이라는 이름을 건 이상 취재원의 발언에 대해 일정한 검토가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국궁은 본질적으로 취미이다. 국내의 양궁 동호인들에게도 활쏘기는 취미일 뿐이다. 중,고등학생이 클럽활동을 하면서 엘리트 체육인으로서 성공할 가능성과 사회적 보상을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전국 각지의 취미 축구인들이 축구선수로 성공하고 싶어서 공을 차는 것이 아니다.
또한 2021년의 시점에서 살피건대 취미 또는 동호인 집단의 규모 면에서는 국내에서는 국궁이 양궁보다 널리 보급된 상태이다. 활쏘기를 하는 활터의 수만 보더라도 정규 사거리를 쏘는 양궁장을 찾기는 쉽지 않은 반면 국궁장은 약 360여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차량으로 1시간 이내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흩어져 있다.
활터에 새로 유입되는 취미인구가 줄어들고 동호인 집단이 고령화되는 것은 2021년 현재 한국의 대중사회가 국궁 활쏘기를 매력적인 취미로 여기지 않거나 또는 매력을 느낄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39] 현대사회에서 활쏘기와 같은 취미가 매력을 가지려면 건강 측면에서든, 재미 측면에서든, 이미지 측면에서든, 사교적인 측면에서든 사람을 끌어들일 이익이 보여야 한다.
지금의 국궁은 건강 측면에서든 (145m의 원사만 쏘는 방식은 운동량이 크지 않음) 재미 측면에서든 (처음 사대에 서려면 1달 이상 걸리는 등 재미를 느끼기까지 오래 걸림) 이미지나 사교적인 면에서든 (국궁을 한들 돈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과 사귀는 기반이 되거나 자신을 뽐낼 수 있는 것도 아님 ) 도움이 안되는 스포츠이다. 따라서 단지 '활쏘기'라는 무술 그 자체에 꽂힌 소수 매니아들의 취미가 되는 것이다.
활쏘기 취미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청소년기의 학교 클럽활동을 확대해 접촉 자체를 늘리고, 30m와 60m 등 근사 종목을 함께 수련하도록 해 재미를 느낄 지점을 늘려야 한다. 더하여 동적인 활쏘기 (일정한 코스를 따라 걷는 보사 등)를 늘려 걷거나 달리는 과정을 추가함으로써 운동량도 늘리는 방안을 고안하는 것도 고려할 법하다.

10. 배우는 단계


국궁을 배워보고 싶다면, 각 지역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국궁활터를 찾아가면 된다. 서울, 수도권부터 지방까지 웬만한 구, 군 단위마다 활터가 존재한다. 이렇듯 배울만한 곳은 꽤 있지만... 실제로 쏘는 데에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하다. 보통 145m 사대에서 쏘기에 장력이 몇 십 파운드는 되기 때문에[40] 의외로 힘과 기술을 많이 요하기 때문. 세상에 안 힘든 일 없다지만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입문했다가는, 생각보다 만만찮은 활에 좌절할 수도 있다. 물론 활터에 찾아가 처음 찾아왔다고 하면 요식으로 30여 분 간단히 쏘는 법을 가르쳐 준 뒤, 실제 화살을 걸고 쏠 수 있게 해주는 곳도 더러 있다. 이 경우에는 양궁 과녁이나 스티로폼을 덧댄 훈련용 과녁이 있는 발시 및 근사 훈련장을 따로 만들어서 해결한다. 그러나 처음을 잘못 배울 경우, 자세가 잘못되어 손목 안쪽이 피멍투성이가 되는 등 대세 흥미를 잃을 수 있으므로, 도전해보고 싶다면 인내를 갖고 배워보도록 하자.
일단 원사가 가능한 40-60파운드대 활을 당길 수 있게 되어도 안전사고를 내지 않을 만한 실력이 되어야 사대에 설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경우도 있다. 서울 내 활터로 예를 들자면, 황학정은 도서관 및 학교와 붙어있기 때문에, 황학정에서는 사대에서 안전하게 습사 가능한지 검증하는 시험을 따로 본다. 석호정은 원사하다가 삐끗하면 화살이 숲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리며, 육사 국궁장(화랑정)은 알다시피 엄연히 군사시설(...)인 사관학교 내부에 있어서 잘못 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사실 활터의 진입장벽이 높기때문에, 나이가 어린 학생등은 쉽게 접근하기는커녕 아예 회원 자체로 받아주질 않는다. 사실 받아주더라도 구세대의 문화를 견디기가 힘들다.
이 또한 현재 궁터문화의 문제 중 하나로, 국궁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쳐나가야 할 문제다..
  • 집궁
처음 활을 잡는 것을 국궁 용어로 집궁이라 한다. 집궁례를 치르는 활터도 있지만 보통은 생략하는 듯. 집궁을 한 신사[41]는 우선적으로 활줄 매기와 풀기 등 기본적인 장비 사용법과 궁도구계훈[42], 집궁제원칙[43] 등 국궁의 기본부터 배우고 시작한다.
  • 빈활 당기기
본격적으로 초보자용 활(대략 20 ~ 30파운드)을 사용하여 빈활을 당기는 단계를 시작한다. 아마도 시위를 끝까지 당기지 못하고 팔이 떨리는 자신을 보며 옛 궁수들의 마음을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18~20 파운드 정도 되는 활은 초등학생들이 대회에서 사용하는 수준의 강도밖에 되지 않는데, 자세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으면 성인 남성이라도 끝까지 당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국궁이 팔만을 써서 당기는 것이 아닌, 하반신의 지지와 등근육, 뱃심 등 포괄적으로 힘이 들어가야 하는 운동이기에 그렇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겨우 궁력(활을 당기는 힘)이 길러지면 단계적으로 더 강한 새로운 활(40 ~ 50파운드)을 써서 다시 이 단계를 밟는다. 그동안 쓰지 않던 근육을 계속해서 써야 하니 팔과 등이 쑤시고, 깍지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엄지손가락에 걸리는 장력이 장난이 아닌지라 상당히 고달프다. 게다가 살을 직접 내지도 않고 설령 시험삼아 몇 발 쏴본다 한들 아직 자세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신사들은 과녁 가까이 살을 보내는 것 조차 어렵기 때문에 상당히 지루한 과정이기도 하다. 젊은 신사들은 이 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두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궁력을 완성시켰다 판단될 때, 사범[44]님의 허가를 통해 주살을 내는 단계에 들어간다.
  • 주살내기와 첫 습사
주살이란, 줄+살의 합성어로 줄을 매달아 회수하기 편하게 만든 화살을 말한다. 본격적으로 사대에 오르기 전에 주살을 내게 되는데, 최초로 살을 매겨 쏴봄으로서 사대에서의 두려움을 줄이고 완전히 당겨 활시위를 놓는 연습을 하는 일종의 트리거 훈련 방식이 되기도 한다. 한번 쏘고 나서 회수가 편리하기 때문에 진짜 화살을 쏘게 된 때에도 자세 연습을 위해 한번쯤 쏴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주살연습을 어느 정도 끝내면 드디어 첫 사대에서 습사(習射)를 실시할 수 있다. 기본 자세를 숙지하고 성실하게 연습에 임했다면 빠르면 한 달 안에 과녁 근처로 화살을 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고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시 연습이 필요하며, 적어도 수 개월은 꾸준히 습사를 실시하여 자세를 완벽히 몸에 익혀야 비로소 원하는 방향으로 살을 보낼 수 있게 된다.
  • 자기수련
이후 습사를 시작하여 평균 1순[45] 중 2발 정도 맞추게 되면 자신과의 싸움 단계가 된다. 국궁은 대련이고 뭐고 없는 철저히 1인 무예기에 좀 외로울 수도 있다. 자세를 제대로 잡고 마음을 다스리며 호흡도 다스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될 것이며, 결국에는 계속 쏴보면서 연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사다성(多射多省)이라 했다.
그래도 한계의 벽에 부딪혀[46] 나아갈 길이 없다면, 선배 접장[47]님들이나 사범님께 여쭈는 편이 좋다. 경험자의 말을 따른다는 점도 있지만, 자신의 잘못은 남이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연습하여 1순을 전부 명중시키게 된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드디어 몰기[48]를 한 것이다. 몰기한 신사는 접장이 되어 승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승단을 하는 데 별다른 제한은 사실상 없지만 이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승단에 용이하다.활 수련에 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10.1. 국내 사극에서의 잘못된 사법


국궁은 기본적으로 몽골리안 사법이기에 깍지를 엄지 손가락에 끼고 사용하며,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의 쌍분(雙分)을 통한 균형의 힘을 갖춘 활쏘기 방식이다. 하지만 서양식으로 검지와 중지 사이를 이용해 활을 당기는 우리나라 사극이 아주 많았고, 지금도 종종 보인다. 더불어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쏠 때 사수의 몸통이 활을 따라 비스듬함을 이루면 잘못된 자세다.[49] 제대로 배운 국궁의 경우, 겨냥 시 상체가 조금 앞으로 쏠리되 사수의 몸통이 정면을 향하며, 활과 사수의 양어깨가 삼각형을 이루는 모양새가 된다. 아예 서는 법을 배울 때부터 단전이 정면을 보게끔 서라고 배울 것이다.
주몽이나 추노 등에서는 깍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50] 몽골리안 사법을 나름대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보였다. 이후 방송된 천추태후에서는 각지와 검지 보호대까지도 완벽히 갖춘 궁시일습을 묘사했고,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사극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깍지를 끼고 정조 앞에서 활을 쏘는 장면이 등장했다. 발여호미라는 전통 사법의 특징 묘사도 이 사극에서 등장한게 최초인 듯.
마침내 최종병기 활에서는 적병의 육량전을 노획해 쏘는 장면에서 숫깍지를 사용하는 장면마저도 등장하게 됐다. 제작 단계부터 대한궁술원의 자문을 받았고 감독부터 주조연배우들이 최소 1회 이상 궁술원 주최의 습사에 참여한 바 있다. 심지어 문채원까지도.
그후 사극에서는 대체로 깍지까진 재현 못해도 엄지손가락을 쓰는 정도로는 고증을 맞추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10.2. 국궁장비와 각종 가격 일체


  • 활 / 화살: 국궁을 하는데 빠져서는 안 된다.'' 카본 등 합성섬유로 만든 개량궁과 전통의 각궁이 있으며, 대한궁도협회 공인 4단 이상부터는 대회에서의 각궁 사용이 의무화되며, 대회에서 동일 점수가 나올 경우 각궁/죽시 사용자를 우대한다. 각궁 산업의 시망을 막고자 함이라나? 마찬가지로 화살 또한 카본 개량살과 대나무살(죽시)이 있다. 가격대는 각궁/죽시 쪽이 넘사벽으로 비싸다. 개량궁/살은 각각 25만원/1만원대지만 각궁/죽시는 대략 65만원/3만원대.''' 개량궁의 경우는 공장제지만 각궁 메이커는 개인제작인 경우가 많기에 가격대와 퀄리티가 아주 다양하다. 활을 한 장 사면 메이커마다 다르지만 보통 활가방, 활을 싸는 궁대[51], 줌통피, 추가 활시위 등이 죄다 따라온다.
  • 깍지: 역시 국궁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엄지손가락에 껴 엄지에 집중되는 활의 압력을 줄이고 손가락을 보호하는 역할이다. 가격대는 대략 3만원 가량. 손에 끼는 물건이기 때문에 전국대회장 같은 곳에서 파는 깍지를 직접 껴 보고 맞추어 사는 것이 좋다.[52] 깍지 수급이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에[53] 신사들이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의외로 있다. 깍지의 종류는 깍지 참조.
  • 과녁: 현대에는 거대한 과녁이 유명하다. 과거에는 나무 사이에 천을 걸거나, 가죽을 씌우고 동물 모양의 그림을 그려서 썼다고 한다. 연구기사 당연히 국궁장으로 가면 설치되어 있다. 습사용이라고는 해도 국궁은 장력에 비해서 탄력이 상당하므로 아무 데서나 과녁을 놓고 쏘려고 하면 안된다. 절대로.
  • 입회비: 국궁장에 입회할 때도 대한궁도협회에 등록비 겸해서 내는 입회비가 있고, 국궁장 사용료로 내는 월회비 등이 있다. 국궁장 자치로 운영되고 있기에 회비는 각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

11. 현대 국궁의 논쟁거리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근현대사의 풍랑 속에서 버텨낸 것이 신기한 국궁계는 현재도 중구난방으로 각종 논쟁을 쏟아내는 상태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11.1. 대한궁도협회 관련 문제


'''대한궁도협회'''는 전국의 국궁장(사정)을 관리하는 국궁계 '''최고위 기관'''으로, 궁시 장비의 '''공인'''이나 국궁 '''대회 주최''' 등 거의 모든 실권을 관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으킨 병크 중 유명한 것이 '''공인 궁시 변경'''과 '''궁시 가격 제한'''이다. 이외에도 많은 병크가 있어 기성 활터를 혐오하는 국궁인들이 따로 떨어져나오는 경우도 속속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 공인 궁시 문제
갑작스러운 공인 궁시의 변경으로 엄청나게 국궁계가 시끄러웠었다. 공인장비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장비로, 원칙적으로 공인필이 없으면 대회 출전을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공인장비의 규격을 갑작스럽게 국궁인의 대다수 장비와 안 맞는 듣보잡 메이커에 맡겼다는 것. 궁시는 자주 바꾸기 힘든 고가품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번 쓰면 평생을 갈 수도 있다. 이러한 처사는 전국 국궁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공인궁시제도는 2007년도에 처음 도입되었고 취지는 소수의 궁시 공급 업체들의 담합으로 가격을 올리는 것을 막자는 데 있었으나 결과는 다수 국궁인들이 선호하는 장비를 활터에서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우리나라에 3명밖에 없는 각궁 무형문화재를 공인 신청에서 배제하기까지 하여 큰 논란을 빚었다. 관련기사 2009년부터 이러한 공인궁시 가격제한에 반대하는 업체들의 반대 시위 및 통보결정 무효 청구 소송이 시작되었다. 2017년,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진행중이던 ‘공인신청제한통보결정 무효확인 청구’에 관한 1심 판결(2017.05.26)에서 대한궁도협회가 패소, 기존 업체 중 하나인 ㅅ 궁시업체가 재판에서 승소했다. 관련기사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문제로 공인이 금지되어 오랫동안 생업이 어려웠던 궁시업체들이 합동으로 가격담합에 대한 사과문을 대한궁도협회 및 각 사정 사두들에게 배포하며 화해를 시도하였다. 이에 2017년 7월 이후 대한궁도협회에서는 상기 송사의 항소를 포기하고 10년간 허용하지 않았던 주류 궁시업체들의 공인 규제를 풀고 공인표식을 모두 공급하여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몇 년만에 보는 대한궁도협회의 대인배스런 행보였다.
  • 궁시가격 제한 문제
대한궁도협회는 앞장서서 국궁장비 가격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개량궁은 25만원, 각궁은 60만원으로 못박아둔 상태.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이러한 행태는 공산당과도 같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가격이 올라도 좋은 활을 쓰고 싶다는 이들의 욕구도 충족을 시켜줘야 국궁계가 발전이 있는 것이 아닌가?[54]

11.2. 사법 논쟁


고대-근대의 사법을 현대에 복원시키려는 고전사법 사용자와 현대의 사법을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도 대표적인 토론거리다. 이 논쟁은 '''정사론'''[55]이라는 옛 무인이 쓴 책에도 나올 정도로 대표적인 논쟁거리며, 지금도 국궁신문 홈페이지에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온다. 국궁 연구 단체에서 애기살, 명적 등을 내거나, 보사[56], 배사[57] 등의 무인들이 쓰던 사법을 재현하기도 한다. 요점은 현대의 국궁 사법과 고대-근대의 사법 중 어느 것이 정통이냐 하는 내용. 이는 수많은 논쟁을 낳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옛 사법이 멋이 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인듯. 주몽 이후의 사극에선 대부분이 뒷손을 크게 떼는 옛 사법을 사용한다.[58]
국궁계에서 사법논쟁이 시작된 것은, 2000년 온깍지궁사회의 모임과 동시에 시작된 일이다. 즉 2000년 겨울에 전통활쏘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존하자는 취지로 출범한 단체가 있었는데, 깍짓손을 크게 뻗는 동작에 주안점을 두어 <온깍지궁사회>라고 이름을 붙였고, 순식간에 <온깍지>는 국궁계외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논쟁의 출발은, 그 동안 국궁계가 양궁사법의 영향을 받아서, 깍짓손을 그 자리에서 때고 마는 방식의 사법을, 전통사법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한발 더 나아가 온깍지궁사회에서 제기한 문제는, 단순히 깍짓손을 크게 떼느냐 그 자리에서 양궁처럼 떼느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궁과 개량궁의 차이에 따라서 온깍지와 반깍지가 만들어졌다는 데까지 논리가 발전하여, 결국 전통사법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 사법논쟁을 구체화한 배경이 되었다.
한국의 전통 사법에 변화를 일으킨 요인은, 새로운 장비인 개량궁의 등장 시기와 교묘히 맞물렸다. 즉 1970년대 중반부터 양궁의 재질을 이용하여 국궁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사람들은 <개량궁>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개량궁이 일반화되어 각궁을 대신하면서, 개량궁의 특성이 사법에 반영되었다. 그것이 반깍지로 나타난 것이다. 개량궁의 등장이라는 점과, 양궁에서 깍짓손을 크게 떼지 않아도 되는 보범을 보임으로써, 국궁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두 가지 조건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사법이 탄생한 것이고, 그것이 반깍지 사법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온깍지 반깍지 논쟁은, 1970년애 이후에 나타난 활터의 큰 변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우리의 진짜 사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현재에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전통 사법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문제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11.2.1. 이른바 '온깍지 논쟁'에 대한 반박과 보론


이른바 '온깍지 반깍지' 논쟁에 대해 상기 서술에 대한 반론과 보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1.2.1.1. 무엇을 두고 논쟁하는지도 불분명하다

현재 사법논쟁의 가장 큰 문제는 논쟁을 하는 사람들도 무엇을 두고 논쟁하는지조차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당장 '온깍지 사법'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찍어 올린 영상만 보더라도 궁체가 하나같지 않다.
크게 보아 온깍지 측에서는 1) 깍지손을 힘차게 빼어서 뒷편으로 팔이 펼쳐지는 동작으로 이어지는 동작 (이른바 반깍지에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온깍지) 2) 줌손을 바깥쪽으로 돌려 짬으로써 발시 후 반동에 의해 윗고자가 과녁을 향하고 아랫고자는 줌팔 아래로 파고드는 이른바 '고자채기'), 또는 위 1)과 2)를 모두 한번에 하는 것을 이른바 '온깍지 사법'이라 부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에 게재된 '온깍지주의자'들의 궁체는 1)만 하거나, 1)을 하되 손을 세게 뿌리지 않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뻗거나, 2)만 하거나, 1)과 2)를 모두 하거나 등 통일돼 있지 않다.

11.2.1.2. 비방보다는 논증이 필요하다

온깍지 측의 논의가 가지는 한계는 그들이 말하는 '반깍지(아래는 '주류사법'이라 함)'사법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사법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양궁과 같은 소재의 개량궁을 써서 양궁처럼 됐다'는 주장만 읊을 뿐 정작 주류사법이 왜 '양궁과 같은' 사법이며 '개량궁을 쓰면서 생긴 나쁜 버릇'인지에 대해 설명조차 않는다는 데 있다.
2021년 시점의 '양궁(올림픽 리커브 활쏘기)'은 세 손가락을 쓰고 화살을 사수 몸쪽에 두는 지중해 사법을 쓴다. 주류사법은 깍지를 끼는 엄지사법을 쓰고 화살을 사수 바깥에 둔다. 이런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 채 그저 '양궁사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비난에 불과하다.
작금의 논쟁이 이처럼 어지러운 것은 깍지를 작게 떼든 크게 뿌리든, 줌을 크게 짜서 고자를 채든 활몸을 살짝 비트는 데 그치든, 그러한 동작이 어째서 나오는지에 대한 고증이나 분석적인 설명시도를 도외시하고 가깝게는 100년, 멀게는 200, 300년 전의 책 내용이 어떤지에만 집중한 결과다.

11.2.1.3. 깍지손의 문제에 대하여

'깍지손을 살살 떼는 문제'을 살펴보자. 온깍지 측에서는 그저 '개량궁에 적합한 사법이라서 양궁처럼 변질됐다'고 주장한다. 각궁으로 활을 배우면 반드시 깍지손을 크게 떼게 되는데 양궁 재질로 만든 개량궁을 쓰니 깍지손을 작게 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주류 사법으로 각궁을 쏘면 활이 망가지는데 개량궁을 쏘면서 나쁜 버릇이 든 신사(新射)들이 각궁을 잡고는 개량궁 사법대로 쏘다가 활을 부숴먹는다'는 주장이 덧붙기도 한다. 활의 재질과 활을 쏘는 사수의 사법 간에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증이 없다.
개량궁은 단지 각궁보다 현대화된 소재로 만든 튼튼하고 관리하기 편한 활일 뿐이다. 주류 사법은 온깍지 사법보다 동작도 작고 줌을 짜거나 활채를 휘두르는 범위도 제한적이다. 활에 무리가 간다면 오히려 동작이 크고 화려한 온깍지 사법이 무리가 가지 움직임을 줄이고 절제된 동작을 하는 주류사법 때문에 '활이 망가진다'는 주장은 논리가 빈약하다.
깍지손을 떼는 동작은 단순히 발시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할지에 따른 선택일 뿐이다. 현대의 올림픽 활쏘기 또는 '반깍지' 사법이 깍지손을 절제된 동작으로 떼는 이유는 깍지손의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매 발시 마다 동작의 편차를 줄이고 일정하게 쏘기 위해서이다. 고정된 과녁을 맞히기에 유리한 사법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대의 스포츠화된 궁술은 모두 장력이 40~60파운드 사이로 맞춰진 연한 활을 쓰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사냥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100파운드 가량의 억센 활을 쏜다면 현대의 양궁이나 국궁 활쏘기처럼 만작 후 3초 이상 과녁을 조준할 여유가 없다. 순발력을 쥐어짜 깍지손을 힘차게 당기고 멈춤 없이 뿌리며 발시를 해야 한다. 앵커포인트에서 깍지손을 멈출 이유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반동으로 손이 뿌려진다. 깍지손을 뿌리는 것은 일정한 목적을 추구한 결과이지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50파운드 내외의 연한 활로 고정된 과녁을 3초 이상 노려 쏘는 현대 국궁 활쏘기에서 뒷손을 뿌리는 것은 보기에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명중률 면에서는 무차별 내지 손해를 보는 군더더기 동작일 뿐이다. 발시 과정의 반동 때문에 손이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시위가 깍지손을 떠난 뒤에 손을 멈추든 뿌리든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다.

11.2.1.4. 줌손과 발디딤의 문제에 대하여

줌손의 문제도 깍지손과 유사하다. 강한 활을 순발력과 이에 따르는 탄성을 이용해 빠르게 쏘아내되 정밀한 명중률에 집착하지 않는 결과가 흘리기줌과 그에 따른 고자채기이다. 반면 고정된 표적을 시간을 들여 정밀하게 쏘는 활쏘기를 위해서는 발시 과정에서 활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방향이 유리하다. 이를 위해 고도로 첨단화된 올림픽 타겟 리커브에서는 스태빌라이저와 레스트, 플런저 따위를 동원해 활몸의 움직임과 화살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국궁의 경우 활몸의 형상과 사법의 특성상 줌손을 짜 주는 것이 화살과 활몸의 간섭을 줄이는 데 유리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윗고자를 과녁 쪽으로 아랫고자를 줌팔 아래로 채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도 활몸을 돌려 고자를 채는 것은 강한 순발력에 따른 '결과'일 뿐 그 자체로 추구할 '목적'이 아니다. 화살이 활몸을 떠난 후에 활몸을 돌리든 고정하든 화살의 비행에 아무런 영향이 있을 수 없다.
발디딤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관찰된다. 국궁계에서는 발디딤을 단순히 '비정비팔(非丁非八)'로 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비정비팔'의 모습을 일관되게 제시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가 아님(非)은 어떤 동작이나 상태에 대한 묘사나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뜻대로 풀이하자면 '반드시 팔자나 정자로 반듯하게 하는 데 집착하지 말고 사수에게 맞도록 딛어라'는 뜻이었을 '비정비팔'이 어떤 불가침의 교시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11.2.1.5. 분석적 활쏘기가 필요하다

상기 지적한 문제들은 공통적으로 '논리적 과학적' 접근이 결여된 데서 유래한다. 과거에는 특정 고수나 스승의 가르침을 교조화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일정한 수준에 오르는 첩경(捷徑)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는 어떤 무예나 스포츠도 철저히 논리적 계량적인 분석과 개량의 대상이어야 한다. 영국 젠트리 계층의 롱보우 활쏘기가 100여년의 기간 동안 현재의 올림픽 타겟 리커브가 된 과정이 그러한 '과학화'이다. 물론 어떠한 부가장비나 외형의 변형 없이 국궁의 원형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재래식 한국 활'의 범주 내라면 사법에 대해서도 비교 분석을 통한 검증과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선의 궁술 내용은 이렇다" "정사론에서는 이렇게 썼다"는 논쟁은 분석적인 논쟁이 아니다.
활쏘기도 전통문화의 일부이지만 전통은 본질상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조선의 궁술'에 묘사된 활쏘기도 2021년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90년 전의 전통이지만 1929년 당시에는 '당대(contemporary)' 문화였을 뿐이다. '정사론'이든 '사법비전공하'든 모두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당대 활쏘기 문화인 것이다. 한국의 활쏘기가 역사 속에서 보인 모습의 일단편을 잘라내어 무조건적인 답습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는 전통의 계승과는 다름을 논쟁자들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11.3. 사풍 논쟁


대다수 국궁장에서 빚어지는 활터 문화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첫번째로 일본 무사도의 영향으로 왜곡된 활터 문화로서, 궁도, 사범, 승단, 사법팔절[59] 등 일본 무도에서 비롯된 용어와 체계에 대한 논쟁이 있고, 둘째로 1970년대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어느새 그 근본을 알 수 없이 생겨나서 각 궁도장에서 엄청난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강요되고 있는 정간례[60]와 같은 풍습이 있다.정간에 대한 연구1. 정간에 대한 연구2 셋째로는 세계민족궁 대회 등에서 드러난 문제로서 현재 궁도장에서 145미터 위주의 습사만을 강조함에 의해 생기는 활쏘기 기량의 문제가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현재 거의 모든 활터에서 전통 수호를 방패막이삼아 표출하고 있는 특유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꼰대" 문화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의 집궁을 꺼리게 만들고 있고 이는 전통 계승에 가장 확실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젊은 층이 유입되지 않는 스포츠는 그 말로는 뻔하다. 전통 수호가 아닌 전통 말살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국궁 또한 하나의 스포츠인데, 과학적인 이론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고 아직까지도 선배 궁사들에게서 내려오는 구전이나 조선의 궁술과 같은 고문헌을 절대적으로 신봉시하면서 과학적으로 납득하기 해괴한 표현들과 주장들이 범람하는 분위기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옛날이야 과학기술의 한계로 어쩔 수 없다 쳐도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러한 스포츠 과학적인 접근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점은 불필요한 사법 논쟁이나 해괴한 주장들이 판을 치는데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
대다수 활터 문화는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맞고, 개선되지 못한다면 끝내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활터는 노인정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정간 문제만이 아니라도 활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좌우발시교대인 <좌달이 우달이> 문제이다. 원래 활터에서는 5시를 1순이라고 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차례대로 쏘고 물러나는데, 초순에는 우궁이 먼저 발시하고, 재순에는 좌궁이 먼저 발시하며, 막순에는 다시 우궁이 먼저 발시하여, 순서의 공평성을 추구했다. 이것은 옛날에 편사에서 유래한 풍속이고, 1990년대중반까지 잘 지켜진 풍속이다.
이것이 갑자기 바뀐 것은, 대한궁도협회의 경기운영방식이 각 활터에 적용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즉 대한궁도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에는 심판이 뒤에서 일일이 순서에 관여한다. 여기서는 좌궁이 먼저발시하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활터에 과녁이 두세 개씩 생기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래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발시하는 방식으로 대회를 진행하다보니, 거기에 익숙해진 한량들이 자정으로 돌아가서 똑같은 방식으로 자정대회를 진행했고, 그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아서 좌우 교대발시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도 활터의 주요 풍속이 상위단체의 간삽으로 사라진 사례이다. 아직도 좌우 교대 발시를 하는 활터가 있다는 점에서 이런 전통의 변화는 반드시 짚어야할 활터의 사풍이다.

11.3.1. 궁도라는 용어에 대한 논쟁


한민족의 활쏘기를 요즘은 국궁(國弓) 이라 부르기도 하고 궁도(弓道) 라 부르기도 하지만 두 용어 모두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는 사용되지 않던 용어이다. 1932년 조선궁술연구회가 조선궁도연구회로 바뀌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활쏘기는 오래전부터 우리말로 활쏘기라 불렸고 중국 북송시대 사서 계림유사에는 “고려인들은 궁(弓)을 활(活)이라 부른다” 또는 “쏘기(射)를 활소아(活素)라 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자어로는 궁술(弓術), 사예(射藝), 궁예(弓藝) 등의 용어가 쓰였다. 일본에서 자신들의 궁술을 궁도로 부르게 되면서 강점기의 조선에서도 군국주의 일본의 무사도정신에 부합하기 위해 궁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 그 유래이다. 해방이 된 후에는 다시 우리말 활쏘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각종 대회를 주최한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58년 전국남녀활쏘기대회 궁도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용어의 유래를 생각해보면 사실 국궁(國弓)이라는 용어도 일제시대 때 생겨난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의해 생긴 국민 國民, 국어 國語, 국기 國技 등 [61] 과 같은 맥락으로 생겨난 것으로, 엄격히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활쏘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래 사용되지 않았고 일본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 의미상으론 그 나라의 대표적 활 기법이라 해석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일본의 국궁은 규도(弓道), 중국의 국궁은 궁술(弓術), 영국의 국궁은 Longbow Archery 등으로 볼 수 있다. 國弓이란 한자어는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에서도 자신들의 활을 지칭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일본에서도 당연하지만 자신들의 궁도를 높여 부를 때 국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 양궁 교본을 그대로 번역한 국내 서적에서 일본의 궁도를 국궁이라 기술한 용어를 그대로 번역하여 일본 규도 사진 옆에 우리 국궁 사진이라 설명을 붙여서 논란이 빚어진 적이 있다. 관련기사
우리 활을 대표하는 용어로 어떠한 논쟁에서도 자유로운 명칭은 “활쏘기” 하나이다. 씨름 태껸과 함께 3가지의 끊기지 않고 전승된 무예가 모두 순수 우리말 명칭이 있는데 활쏘기만 유별나게 한자어를 만들어 붙이려고 애쓰고 있는 꼴이다.
대한궁도협회, 전국생활체육궁도연합회 등 국궁을 배우는 활터에 영향을 미치는 단체들이 공통적으로 궁도라는 용어를 채택하였고 우리 활에 대한 명칭으로 궁도가 옳다는 인식을 광범위하게 주입시켰다. 그러나 궁도라는 용어가 갖는 모순점에 대해 지적하는 소수의 의견도 존재하여 왔고, 이 배경에는 일본의 국궁인 규도와 같은 한자어를 쓴다는 데 대한 문제제기가 가장 크다. 1983년도에 당시 양궁과 전승 활쏘기를 모두 주관하고 있었던 대한궁도협회는 양궁 분야를 대한양궁협회로 분리시켰고 이때 잠시지만 대한국궁협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에서 활을 쏘던 한량들이 궁도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던 관계로 1987년에 다시 궁도라는 용어로 회귀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련자료
오늘날에 있어 궁도라는 용어는 도를 닦는 어떤 수양이나 철학체계라기 보다는 역도나 유도와 같이 일종의 스포츠 경기 종목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보는 게 타당하다.
궁도라는 용어는 1970년대 전국체전에 활쏘기 종목이 포함되고 대한궁도협회가 스포츠화 된 경기 종목으로 새로운 형식을 갖춘 활쏘기 시합을 보급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고상하게 들리는 궁도를 널리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활 가지고 하는 운동을 한자어로 점잖게 부르는 일반명사로 궁도라는 용어가 매우 좋다고 여기게 된 듯하며 심지어 전승 활과 서양 활도 딱히 구분하지 않았다. 예로써 양궁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양궁 선수들을 궁도 선수라고 불렀고 각 초중고 학교에 생긴 양궁 동아리를 궁도 부라고 불렀었다. 국궁과 양궁이라는 용어가 서로를 구분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80년대 대한양궁협회가 대한궁도협회에서 분리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국궁이나 양궁이나 둘 다 널리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었다.
현대의 한국 궁도는 대한궁도협회의 경기방식을 떼어놓고는 존립 자체가 불가한 개념이며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나 전승된 활쏘기를 완전히 대체하는 용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온깍지 궁사회의 정진명씨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이나 사정에서 성행하였던 유엽전 활쏘기는 현대의 대한궁도경기와 매우 달랐다. 예로써 활 쏘는 거리부터가 무과시험의 유엽전 과목은 당시 도량형 기준으로 120보로써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50미터였는데 대한궁도협회는 145미터로 정하였으며, 과녁의 크기도 조선시대의 무과 과녁은 가로 4자6치 세로 6자6치인데 비해 대한궁도협회의 경기 과녁은 가로 6자6치 세로 8자8치로 가로 세로가 각 두 자 가량 커졌다. 조선시대의 과녁은 활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사슴, 멧돼지, 곰, 호랑이 등의 그림이 그려진 형태였으나 대한궁도협회의 과녁은 백색테두리에 검은 사각형을 내부에 그리고 한가운데에 붉은 동그라미를 넣은 규정된 과녁 그림을 사용한다. 현대의 대한궁도협회 경기에서 사용되는 과녁은 두터운 고무판을 덧대어 화살을 튕겨내게 되어 있으며 화살도 이에 적합하게 촉을 제거하고 끝을 둥그렇게 만든 화살대를 사용한다. 반면 조선시대에 고무판이 붙은 과녁은 있을 리가 없으므로 당시의 화살은 그냥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과녁을 뚫고 박히는 형태였으며 박힌 촉을 이후에 뽑아내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활쏘기는 무과 시험의 다양한 과목에서 보듯 살상을 전제로 한 다양한 화살 또는 발사체를 다양한 거리에서 정지한 상태 또는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이용해 쏘아 보내는 여러 형태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인데 반해, 대한궁도협회의 궁도는 오직 145미터 거리에 있는 규정된 크기의 고무판 과녁을 향해 끝이 뭉뚝하고 깃이 달린 작대기 다섯 개를 차고 나가 쏘는 한가지 종목 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활쏘기와 궁도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두 가지 용어가 아닌 것이며, 이 둘은 서로 다른 별개의 용어들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전국의 국궁장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궁도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으며, 이는 대한궁도협회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한편으로 대한궁도협회와 미묘한 경쟁관계에 있던 생활체육궁도연합회 등도 궁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70년대 ~80년대에 이들 단체가 성립될 당시에는 궁도라는 용어가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오랫동안 활을 쏘아온 한량들 사이에서 궁도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한편 소수의 몇몇 단체들은 궁도라는 용어에 대해 부정적이며 국궁이나 궁술이 옳다고 주장한다.

11.3.2. 대한궁도협회의 입승단제도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궁도대회에는 입승단 대회가 있고 이 대회를 통해 궁도 수련자들에게 초단부터 구단을 부여한다. 많은 궁사들이 우리 활터에 스며든 왜색을 경계하면서도 이 단급제도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별로 하지 않는데, 사실로 얘기하면 운동에 초단, 2단, 3단 순으로 경지를 매기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일본의 풍습이다. 일본에서는 심지어 탁구에도 1단부터 9단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한량들이 오늘도 입승단을 위해 열심히 습사를 하고 있고 또 이미 취득한 단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것을 없애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태권도 합기도 그밖에 많은 한국 무술들이 승단제도를 운용하고 있고 저들 무도 단체의 승단제도에 비하면 대한궁도협회의 승단제도가 오히려 공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승단제도야 말로 대한궁도협회가 전국 각지의 국궁장에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다른 국내의 무도에 비해 대한궁도의 단수는 꽤 인정을 받는 편이다. 145미터 거리에 떨어진 폭 2미터, 높이 2미터 66센티미터의 거대한 과녁을 맞추는 능력에 있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 대한궁도 8, 9단 되는 분들이다. 심지어 5단 이상 승단하고 입단한 지 5년 이상 경과된 사람에 대해서는 대한궁도협회에서 명궁이라는 칭호도 내려 준다. 첫 몰기를 하고 난 뒤 열심히 145미터 활을 쏘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부여가 이 입승단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규정은, 궁도협회에서 주최하는 승단대회에 참가하여 9순 45발을 쏘아서 각 단수 별로 요구되는 수량 만큼 맞추면 합격하여 단을 취득하는 제도이다. 다른 무도처럼 일정 기간 해당 운동을 배우면 거의 무리없이 초단을 주고 또 시간 지나면 단이 올라가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즉, 무슨 수를 쓰건 145미터 과녁을 반복적으로 잘 쏘아 맞히는 능력을 승단 대회에서 증명하여야 승단할 수 있다.[62]
대한궁도협회 소속 활터에서 1급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승단 대회에 응시할 수 있으며, 1급 자격 부여 기준은 각 활터 자유재량에 맡겼다. 어떤 활터는 접장만 되도 1급 자격을 부여하는 반면, 어떤 활터는 1급 시험(22중)을 따로 응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1단부터 4단까지는 공인된 개량궁과 각궁 모두 사용가능하고, 1년에 두 번 승단이 가능하다. 1년차에 1단과 2단 승단, 그리고 2년차에 3단과 4단 승단으로, 아무리 빨라도 4단까지 최소 2년이 걸린다. 4단 승단 시험부터는 전국승단시험에 의해서만 승단이 가능하고 1단부터 3단까지는 지역승단시험으로도 가능하다. 5단부터는 개량궁은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각궁만 사용해야 한다. 5단 승단시험부터는 1년에 한 번 승단이 가능하며, 1년에 최대 6번까지 승단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4단에서 9단까지 연속으로 승단한다 가정했을 때, 5년이 걸린다. 따라서, 아무리 활을 잘 쏴도 초단부터 9단까지는 최소 7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활 잡자마자 과녁 맞추는 천재가 아닌 이상, 집궁 과정과 각궁 수련 과정을 더 하면, 7년보다 더 한 시간이 걸린다. 9단을 목표로 한다면, 느긋하게 10년은 바라봐야 한다.
145미터 과녁 맞추기라는 것에 관한 한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규정만큼 철두철미하고 공정한 제도가 없다. 궁도협회에서 무슨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공짜로 단을 올려 주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명예 단의 수여가 가능은 하나 실제 적용은 매우 드물다. 지역의 무슨 시 무슨 도 궁도협회장이란 분들도 단이 불과 1단, 2단이거나 아예 단 자체가 없는 분도 허다하다. 실제적으로 승단만을 위한 대회가 연례 행사로 개최되며 매 대회마다 편차는 있지만 100명이 응시하여 20명 미만이 승단에 성공하여 합격률이 낮은 편이다. 비바람 부는 날도 강행하기 때문에 100명 응시해서 다섯 명 미만이 합격하고 나머지는 모두 고배를 마시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렇게 승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번 응시하여 한 단씩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승단에 성공하게 되면 매우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는다.기사참조
이렇게 궁도 승단제도에는 긍정적 모습이 있어 많은 한량들이 좋아하는 데 비해 몇 가지 문제점도 있다.
첫째로 145미터 거리에서 폭 2미터, 높이 2미터 66센티미터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만 경지를 측정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활 잘 쏘는 사람과 대한궁도를 잘 하는 사람은 일치하지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대한궁도 8단, 9단 명궁들이라 해도 오직 장거리 대형 과녁 맞추기에만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어떤 활쏘기도 할 줄 모른다. 20미터 앞에 있는 축구공을 맞추지 못한다. 현재의 궁도장에서 소위 궁도라는 것을 열심히 연마하신 궁사들은 그 상태로 다른 나라 궁사들과 실용적인 거리에서 사냥이나 전투를 가상한 목표를 향해 발시하면 화살이 전부 과녁 위로 넘어가 버리고 하나도 못 맞춘다. 표 내리면 된다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는데 실제로 근거리로 쏘아 보라고 하면 목표물 근처에도 못 보낸다. 힘쓰는 방법, 미는 방법이 화살을 높이 띄우는 데 길들어져 있어서 줌손을 바닥에 처박고 쏴야 화살이 지면과 수평하게 날아갈까 말까다. 이렇게 쏘니 명중은 기대하기 어렵다. 근거리 활쏘기는 그 자체를 따로 연습을 해야지 145미터 열심히 쏘면 저절로 잘 쏘게 되는 게 아니다.
둘째, 문제점은 어쨌거나 145미터 과녁은 잘 맞춘다 치더라도 궁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활에 관련된 문화, 역사적 지식이나 우리 활에 담긴 철학에 대한 어떠한 탐구도 승단에 있어서는 고려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인터넷 상에 떠 있는 오만 글들, 역사적 사실 하나도 모르고 안중에 없더라도 단수는 올라간다. 비교하자면 여타 무도단체에서는 실기적 측면에서는 좀 불투명한 승단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4단, 5단 등 고단자가 되려면 해당 무도에 대한 지식이나 소양에 대해 논문을 쓰라고 한다던지 선배 고단자와의 면접과 추천장 등을 통해 그 무예에 대한 이론적 소양도 검증을 하는 게 보통인데 대한궁도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간단히 말해 무식해도 145미터 육육팔팔 과녁 잘맞추면 명궁이다.
셋째, 문제점은 145미터를 잘 맞추면 되다보니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잘 맞추면 되어서 전승된 어떤 사법을 잘 배워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족보도 유래도 없는 기상 천외한 자세로 화살을 날리는 명궁들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사법의 문제가 이것이다. 명궁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남다른 노력도 있지만 남다른 신체 조건도 갖춘 특별한 사람이다. 즉 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보다 그 사람자체가 타고난 특별한 우월한 특성도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신만의 사법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시수를 내는 것이다. 최근 공통적으로 대한궁도 명궁들에게서 나타나는 경향이 강한 활을 가지고 가벼운 화살을 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수를 내고 명궁이 된 분들의 사법은 그분들처럼 특별한 신체조건을 안 갖춘 사람들은 따라 할 수가 없다. 노인들이나 여성, 어린이들에게 60파운드 활로 두자 일곱 치 화살을 당겨서 촉보기를 하라고 하면 따라할 수가 없다. 어느샌가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활쏘기 방법이 활터의 유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활쏘기가 은퇴한 노인들이나 여성들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고들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강궁 경시 위주의 사법이 판을 치는 활터에서는 근력 떨어지는 노인과 여성들은 시수가 잘 나지 않아 신사들에게 무시당하기 쉽고 유소년들의 조기교육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무관 집안 자제분들도 그랬을까?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대한 궁도 고단자들은 본인들은 145미터 활쏘기에 통달한 특별한 사람들이지만 일반인들을 상대로 활쏘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로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평범한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사법을 배우지도, 연습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가르칠 수도 없다. 그런데 몇 단이니 하는 경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후배들에게 그 경지로 올라오게 가르칠 수 없다면.
<< 대한궁도 입승단제도의 셋째 문제점에 대한 반론 >>
상기 문단에서 명궁들이 60파운드 활을 쓴다고 하지만 요즘 60파운드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시수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파운드는 50파운드 언저리이다.
그렇지만 소위 5단 이상 명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개량궁이 아닌 각궁과 죽시만 사용이 가능하며 각궁은 워낙 다루기가 까다로워 자연스럽게 활과 관련된 지식은 늘어나게 된다. 명궁들 중에는 스스로 각궁을 자가수리 할 수 있는 분들도 많으며 궁시이론에 대해서는 본인만의 뚜렷한 이론체계가 잡혀있다. 애초에 이것이 안되어있으면, 아무리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도 각궁과 죽시로 45발 중 30발 이상 명중시키기가 힘들다.
그리고 요즘 활터에서 다시금 연궁중시(연한 활과 무거운 화살)가 유행 중이다. 실제로 60 파운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고 보통 강궁을 쓴다 하면 50-55파운드대를 많이 쓰며 가장 많이 보이는 파운드대는 45-50파운드 사이이다. (중고 매물 거래도 이 파운드 대에서 가장 흔하게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궁도 9단은 인천시 미추홀구 수봉산에 있는 무덕정에서 활동한 심재관 명궁이다.https://blog.naver.com/shd1959/222094926714

12. 국궁을 이용하는 대회


국궁만을 사용하는 대회로는 전국체육대회의 궁도 종목, 육사배 국궁대회, 전국대회 등이 있다.
국민생활체육궁도연합회의 주도로[63] 세계민족궁협회(World Traditional Archery Federation·WTAF)이란 단체가 설립됐는데, WTAF는 2005년부터 세계민족궁대축전(World Traditional Archery Festival)이라는 행사를 2015년까지 개최하였다. 1회 축전에서는 국궁을 포함해 각국의 전통 활을 시연하는 정도였지만 2회 이후로는 각국 선수들이 자국의 전통 활과 전통 복장을 가지고 대결을 펼치는 대회가 되었다고 한다. 외국 선수가 한국 국궁을 가지고 와서 경기를 치른다든가, 경기가 끝난 뒤 한국 국궁을 사서 귀국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1회 세계민족궁 대축전은 충남 천안 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그 일부 행사로 독립기념관 주변에 있는 궁도장 시설 천안정에서 각 나라의 민속궁을 동시에 시범하는 행사도 개최되었으나 이후 대회에서는 대한궁도협회의 영향을 받는 기존 활터 사두들이 시설 사용을 불허하여 종합운동장 등에서만 대회를 주최하여 오고 있으며 민족궁 대축전에 참여하는 궁사들도 기존 사정이 아닌 학교 운동장 등에서 습사를 하여 참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한궁도협회는 민족궁대축전에 대해 초기부터 부정적 입장이었으나 2016년 대한궁도협회와 생활체육궁도연합회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체육단체 합리화 지시에 의해 통합됨으로서 형식상 민족궁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로 입장이 바뀌었다. 이후 명확한 입장 표명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없는 상태. 세계민족궁대축전 행사는 2015년 청주에서 마지막으로 개최된 이후 중단되었다.
활쏘기대회에서 전통 장비를 보존하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시도되는 중이다. 각궁의 경우는 사용법을 배우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각궁대회를 치르고자 해도 지원자가 많지 않아서 상금을 크게 올린다든지 하는 여건의 변화가 없으면 치르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루는 기술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각궁의 경우는 자유롭게 하되,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죽시를 대회의 조건으로 거는 대회도 있다. 온깍지동문회에서 주관하는 <온깍지 활쏘기 한마당>에서는 이런 조건을 감안하서 대회를 치른다.
대회주최측에서는 고민이 그것이다. 각궁죽시 조건을 걸면 참가자가 적고, 개량궁카본살을 허용하면 전통성이 상실된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화살부터 죽시로 바꾸고 차차 각궁대회로 나아가도록 중간단계의 유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시를 대회 조건으로 내세운 온깍지동문회의 대회는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기사(騎射, 말 타고 활 쏘기)를 전문으로 하는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64]라는 단체에서는 세계기사연맹(World Horseback Archery Federation, WHAF)라는 국제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WHAF는 2004년부터 세계기사선수권대회(World Horseback Archery Championship)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각국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련자들이 대거 참가한다고. 이 대회 역시 선수들이 한국 국궁(단 크기가 작은 동개활 사용) 등 자국의 전통 활을 가져 와서 쓴다.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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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반부에는 국궁 제작과정이 나오다가 2:54부터는 한 남성이 왜구와 맞서 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연출한 영상이 나온다.[2] 단 국궁이나 궁술이 아닌 '활쏘기'란 명칭으로 지정[3] 시위를 거는 끝부분[4] 사실 고증은 둘째 치고 군용 활이 따로 있음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국궁이라고 하면 그냥 다 똑같은 줄 안다. [5]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중인 고종황제의 호미명 각궁[6] 주몽은 이름부터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건국 때 비류국 송양과 활쏘기 시합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7] 정사에서 공성전 70연속 편전 헤드샷 기록을 달성한 공인 괴물이다. 물론 이 부분이 기록된 태조실록 총서 부분은 같은 조선왕조실록이라도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즉 사관이 실시간으로 옆에 붙어서 기록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활 실력이 뛰어남 자체는 사실이더라도 그 정도가 적당히 과장되어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8] 정조가 활을 쏜 기록에서 보면 50발 중 41발, 45발, 46발, 47발 등 기록이 계속 늘어나다가 이후 49발이 10번 정도 나오는데, '''일부러 50발을 다 맞추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신하들 기 죽을까봐''' 그랬다는 말도 있고, 자만심을 막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부친에 대한 예로 50시 중 한 발을 일부러 안 맞췄다는 이야기도 있다.[9] 六藝, 예(禮 : 예의), 악(樂 : 음악), 사(射 : 활쏘기), 어(御 : 말타기), 서(書 : 글쓰기), 수(數 : 수학(學問 修養의 修가 아니라 셈하기의 數이다. Mathematics가 맞다))[10] 정확히는 1614년 광해군 시절에 편찬된 지봉유설에 일본인들이 ' 중국은 창술, 조선은 편전, 우리는 조총이 천하제일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와전되어 올라온 내용이다. 실제로 조선 편전의 위력에 대한 기록은 동북아를 통틀어 발견된다.[11] 합성궁과 복합궁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복합궁은 다른 종류의 나무들을 합쳐서 만든 활, 합성궁은 목재 외의 다른 재료를 추가로 사용한 활을 의미한다.[12] 동북아역사재단 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참고.[13] 예(禮: 예의),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14] 물론 위력은 비할 바가 못된다.[15] 이해가 안 된다면 나무위키 각궁의 2번 한국의 각궁으로 가보자. 조상님들이 별별수를 써서라도 대체용품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린 것이 느껴진다.[16] 영국 롱보우도 재료인 주목이 딸려서 총으로 전환했을 수준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궁의 숫자는 충분히 많았지만 도리어 그런 만큼 국가의 재정에 악영향을 끼쳤다.[17] Albert Wilhelm Heinrich, 1862 - 1929. 독일 빌헬름 2세의 동생이다.[18] 거의 모든 시대에서 국궁들은 장마기간을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많다. 위화도 회군 당시에도 이성계가 장마철에는 아교가 풀어서 활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4불가론 중 하나로 들었다. 이것은 비단 각궁뿐만 아니라, 목제 복합궁도 아교로 고정했기에 습기에는 취약했음을 드러낸다.[19] 겉에 옻칠을 여러 번 하여 내수성을 부여한 활.[20] 만주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민족[21] 이런 식으로 섬유를 대어 강화한 강화궁은 이누이트족 활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의외로 흔하게 있다.[22] 목궁임에도 복원 결과 100파운드가 넘는 궁력이 나왔다. 동개활이란 동개에 화살과 같이 꽂는, 기병들이 쓰는 작은 활이다.[23] 고서에선 이를 '용약전진'이라고 한다.[24] 이름 그대로 무게가 6량이나 되는 매우 거대하고 두꺼운 화살이다. 현대 복원품을 보면 거의 몽둥이 수준이다. [25] 에도시대에 등장한, 일본의 활 중에서는 가장 발달된 형태다.[26] 전국시대의 상급 무사들이 자주 사용했던 활이다.[27] 다만 유의할 것은, 댓글에서 인용된 색스턴 호프 교수의 책(HUNTING with the BOW & ARROW)에서 비교되는 활들은 제대로 된 국가보단 아프리카나 알래스카, 아메리카 등지의 원주민들의 전통 활을 다루고 있다.[28] 본문 하단[29] 사실 동북아 내에서 단일 재료로 만든 활이 더 보기 힘들다. [30] 널리 퍼진 오해지만, 오해를 풀기 위해서 존속시켜둔 항목. 실제 국궁 전문가들에 의하면, 실전용 활은 조금만 당겨도 충분한 위력을 낼 수 있도록 강력하게 조정해놓는 게 기본이었다. 국궁 역시 실전에서는 조금만 당겨도 살상력을 발휘하도록 궁력을 강화했으므로, 기마 상태에서 즉발 사격이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31] 특히, 국궁을 단련한 사람은 Target을 정조준하는 속도를 단축하기가 매우 쉽다. 활을 쥐고 끝까지 당기기만 하면, 전방 타깃이 바로 정조준되기에 겨냥이 매우 쉬운 디자인이다. 또한, 동북아시아식 깍지 덕분에 재조준과 연사도 빠르다.[32] 각각 브로드헤드, 보드킨에 해당됨 [33] 애초에 판금갑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그 정도 되면 사실 화살은 둘째치고 총알도 부분적으로 방호가 가능한 수준이다. 아래의 판금갑 관통 실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어지간한 갑옷을 갖춘 상대로 화살은 교란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34] 예로 동래성 해자에서 발견된 조선군 찰갑은 0.6 mm 두께 순철 재질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갑옷들이 화살과 냉병기에 쉽게 제압당할 수준의 갑옷들은 아니다. 애당초에 금속제 갑옷을 투사체로 제압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다.[35] 사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어도 어지간한 철제 갑주는 동서양을 통틀어서 활로 제압하기가 매우 어렵다.[36] 프리드리히 3세의 차남이자 빌헬름 2세의 동생. 칭다오 조계지 키아우초우에 주둔하던 독일 제국 해군 아시아함대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후에 제국 해군 원수 지위에 오른다.[37] 근데 사실 양궁 문서에 나오듯이 양궁의 대접도 좋지만은 않다. 그나마 성공하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38] 대표적으로 민족사관고등학교. 이곳 외에도 클럽활동으로 하는 곳이 극소수 존재한다.[39]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즐기는 이미지의 스포츠의 대표격인 골프는 상당한 비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동호인의 유입이 꾸준하고 도심 곳곳에도 골프연습장 또는 스크린골프장이 성업중이다.[40] 숙련된 사람들은 40파운드대, 심지어는 38파운드 활로 원사를 할 때도 있다. 이쯤되면 건장한 사람은 깍지 없이 당길수도 있지만 이걸로 원사를 해서 맞추는 건 그야말로 테크닉의 정수라 할 수 있다.[41] 新射. 지역 국궁장에 입회한 신입회원을 의미한다.[42] 4자성어로 이루어진 9가지 원칙이다. 습사시엔 입을 열지 말것,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 등 예절 위주의 내용이다.[43] 유명한 문구이며 최종병기 활에도 등장한 전추태산 발여호미라는 말이 여기 들어있다. 활을 잡았다면 어떻게 해야 바른 자세로 과녁을 맞출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다.[44] 보통 5단 명궁으로 구성되는 국궁장에서 유일하게 신사를 가르칠 수 있는 지위를 가지는 직책. 사두(射頭) 라고 부르는 국궁장도 있다.[45] 국궁에서의 1세트는 순(巡)으로, 5발을 1순으로 한다..[46] 이쪽 용어로 "활병"이 난다고 한다. 보통 자의식 과잉이나 자세 불량 등으로 인한 한계점이 생기는 경우가 잦다.[47] 동학당의 포접제에서 온 말로, 첫 몰기를 한 궁사에게 주는 명예 호칭. 처음 뵙는 국궁인들끼리 예의상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48] 무과 시험에서 1순을 모두 명중시킨 것에서 온 말로, 1순 5발을 모두 과녁에 명중시킨 것을 의미[49] 양궁에서 보는 예의 그 자세.[50] 주몽에서는 수깍지가 등장한다. 11화에서 해모수가 주몽에게 활, 화살, 깍지를 주는 모습이 나오며 그 이후에도 맨손으로 당기거나 깍지를 껴서 당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51] 활을 싸서 보관하는 용도로도 쓰이고,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어 깍지 등 필요물품을 보관할 수도 있다. 활을 쏠 땐 허리에 매어 화살 1순을 고정시키는 역할도 한다.[52] 손가락은 인체 말단 부위기 때문에 아침의 굵기와 저녁의 굵기가 약간 다르다.(심하면 플라스틱 깍지 1호 정도.) 또 뿔 깍지는 날씨에 따라 사이즈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면 크기를 약간 달리해서 여러 개 갖춰두는 것이 좋다.[53] 손가락에 맞춰봐야 되는데 대회 때가 아니면 살 수도 없고, 대회는 맨날 하는 것도 아니므로.[54] 다만 2011년 충주무술축제에 전시된 송무궁의 각궁은 120만원이었고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공인 궁방의 각궁으로 비공인 궁방은 궁도협회의 가격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 대회에 들고 나갈 수 있는 공인 궁방의 각궁은 여전히 55만원으로 동결되어 있다. 그러니 대회따위 관심없다면 비공인 궁방에서 본인에게 맞는 제작을 웃돈을 주고서라도 제작하는 것이고 대회에 관심이 있다면 공인궁방으로 가서 맞춰야 할 것이다.[55] 내용은 대략 선비들이 활을 쏴 무인의 전투활쏘기가 실전되고 있다는 데 개탄하는 내용[56] 步射, 걸음을 나아가면서 쏨.[57] 背射, 등진 채 허릴 틀어 쏨.[58] 사실 뒷손을 크게 떼는것만이 전통 사법이라고 할수 없기에 조심해야 한다. 문서 초반부에 상기한대로 사법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59] 일본 궁도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여덟가지 단계로서 일본궁도 수련의 기본이고 원칙이다. 다음의 여덟가지 단계를 격식에 맞도록 수련한다. 첫째로 아시부미Ashibumi, 발디딤 둘째로 도즈꾸리Dozukuri, 몸바로세우기 셋째로 유가메Yugamae, 활준비하기로 세부적으로 다음3단계를 수행한다.토리가케 Torikake, 우수로 현을 잡기. 테노우치Tenouchi, 좌수로 줌통을 잡기 모노미Monomi, 궁수의 머리를 목표로 돌려 바라본다.넷째로 우치오코시Uchiokoshi, 거궁 다섯째 히키와케 Hikiwake, 활당기기 여섯째 카이Kai, 만족히 당기기 일곱째 하나레 Hanare, 발시 여덟째 잔신 Zanshin, 발시 후 기의 흐름 유지. 이상 여덟 가지 과정을 종교 예식을 실시하듯 경건히 수행하는 것이 일본 궁도 수련의 모습이다. 일본 궁도 서적을 한국에서 번역해서 사법의 여덟마디 라고 변형해 대한궁도 지도에 응용하는 지도자가 간혹 있다.[60] 소위 한국의 궁도장이라고 하는 곳을 가게 되면 넓은 벌판에 활 과녁이 있고 과녁 반대편에 건물을 지어 놓았는데 이 건물을 들어가 과녁을 반대로 등지고 건물의 중간을 바라보면 나무판에 바를 정자 사이 간 正間을 새겨놓은 것이 벽에 매달려 있다. 많은 한국 궁도장에서 활터에 등정하는 궁사들이 오자마자 먼저 이 목판 앞에 가서 고개 숙여 절을 하도록 교육받는다.[61]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로 현재도 일본국민, 일본어, 스모를 지칭하는 용어로 일본에서 사용된다.[62] 승단에 필요한 관중 수나 자격은 개정을 거듭하여 왔으며, 2019년 현재 개정된 규정상으로는 초단에 응시한 사람은 24중을 하여야 하고, 다시 다음 번 승단대회에 응시해서 26발을 맞히면 2단, 계속 승단대회에 응시해서 3단 28발, 4단 30발, 5단부터는 오직 각궁과 죽시로만 쏘아서 32발, 6단 34발, 7단 36발, 8단 38발 9단 40발을 맞히면 해당 단을 취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63] 이전 서술에서 세계민족궁대축전을 주최하는데 대한궁도협회가 주도하였다 기술하였는데 당시 민족궁 대회는 대한궁도협회가 아니라 국민생활체육궁도연합회에서 추진하여 성사되었으며 대한궁도협회는 이 대회에 대해 매우 적대적 입장을 표명하였고 대한궁도협회 회원의 대회참석을 금지하는 공문을 각 사정에 내려 보냈으며 이를 무시하고 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파악된 한량들의 대한궁도협회 회원 자격을 박탈하고 대궁 주최 대회에 참석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였다.[64] 이 단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무예도보통지 문서 내 '현대의 무예도보통지' 단락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