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의 간류지마
昭和の巌流島
1954년 12월 22일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37세) 대 역도산(30세)의 일본 프로 레슬링 챔피언 결정전. 에도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코지로와 벌였다는 간류지마 결투[1] 에서 이름을 따와 "'쇼와(시대)의 간류지마 결투"' 또는 '''쇼와의 간류지마 전투"'라고도 불린다.
이 무렵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모두 진검 승부라고 믿고 있었다.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 일반 신문과 NHK에서는 '스포츠'로서 보도되었다.
대결은 도중에 역도산이 각본을 깨고 갑자기 기무라를 가라데 찹 연타로 다운 시켰다.[2] 다운된 기무라에게 역도산은 안면에 사커킥을 날리고 손바닥치기를 연타하여 결국 KO시켰다. 기무라는 이빨이 부러지고 눈꺼풀이 찢어졌으며, 쓰러진 매트에는 직경 50cm 정도의 피웅덩이가 생겨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과정에는 관계자들의 상반된 증언이 많아서 많은 논란이 나타나게 된다.
이 경기를 제의한 것은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역도산과 기무라는 그 해 2월 미국에서 '샤프 형제'를 초청, 14연전에서 승리하여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도계의 제1인자였던 기무라는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이른바 '고급 자버(…)'와 같은 역할로서 그다지 강함을 어필하는 역할을 얻지 못했고, 이에 울분이 쌓이게 된다.
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지상에서 "진검 승부라면 내가 더 위다."라고 토로하고, 역도산이 이에 응전하는 형태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직전 각본 조정으로 무승부가 예정되어 있었다.
도중까지는 서로 상대 기술을 주고받는 것을 반복했다. 경기 도중 역도산은 갑자기 프로레슬링 규칙에서는 반칙과 같이 펀치를 기무라의 턱에 날린 후 곧바로 특기인 가라데촙을 연타한다. 이에 역도산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서, 본인이 기무라에게 급소를 맞고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격분해서 실전으로 가버렸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수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무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역도산은 기무라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기무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매트 위에서 혼절, 경기는 기무라의 충격적인 KO패로 마무리 되었다.
지금와서 보면 상당히 잔인한 방식의 공격인데, 언뜻 보면 휙휙 날리는 따귀 같은데 저게 전부 귀를 노리고 있다(...). 기무라가 어안이 벙벙해져서인지 몰라도 따귀처럼 들어오는 고막치기를 막아내질 못했고, 크게 동요된 상태에서 다시 고막을 가격하는 모습이다.
사실 저렇게 공격하는 것은 정말 잔인한 공격이다. 이미 구타가 가속될 때 고막치기는 제대로 여러 번 들어간 상태에다 자세히보면 사커킥까지 맞고 있다. 고막을 손바닥으로 맞은 상태에선 천하의 누구라도 서 있질 못하는 법이다(...) 사실상 격투기를 잘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낭심을 가격해 놓고 행동불가인 상대를 패는 것과 정말로 다를 바가 없다.
기무라가 서 있질 못하고 기어가면서 테이크 다운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미 서 있을 만한 레벨이 아닌 거다. 그마저도 실패하고 짓밟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중간의 살인적인 사커킥은 덤이다. 흑백 화면이라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 말에 의하면 '''링 위에 직경 50cm의 피웅덩이가 펼쳐졌다고 한다.'''
기무라의 스승인 우시지마 타츠쿠마(牛島 辰熊)는 놀라서 기무라를 일으키러 링으로 달려가지만, 기무라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 일어날 수 없었다.
기무라와 선후배 관계로 기무라를 존경하던 최배달은 역도산의 수법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역도산에게 도전하였으나 무시되었다. 최배달은 기무라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역도산을 길거리에서 쫓아다녔다고 한다.
시합 후 기무라는 역도산이 무승부로 하기로 합의되었던 각본을 무시하고 자신을 기습하는 바람에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상당히 큰 논쟁이 야기되었다. 프로레슬링이니까 각본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논란 거리가 되었다. 반대로 역도산은 기무라가 먼저 합의에 없는 공격을 하는 등 각본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도 실전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역도산의 대답은 일반적으로 고의적인 상황을 변명하려는 말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역도산이 거의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우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성격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그냥 열받아서' 폭발한게 진짜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역도산은 시합 중에 흥분제 등의 약물까지 상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결 영상을 보면 도저히 깔끔한 프로레슬링 승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시합이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워크'''가 무너진 것은 사실인 듯하다.
기무라 역시 역도산의 수법을 용서하지 못해 단도를 품고 찌를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1993년 75세 나이로 암으로 죽기 직전에 "역도산을 죽인 것은 야쿠자가 아니라 나다. 내가 죽음이라는 말을 빌어 그를 죽인 것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발언하였다.
이 경기로 역도산은 국민적 스타의 자리를 굳혔으며, 기무라 마사히코는 독자적으로 프로레슬링 단체를 개양했으나 결국 자신의 프로레슬링 단체조차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을 거듭했다. 결국 완전히 프로레슬링 계에서 잊혀졌으며,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완벽하게 갈리게 된다.
극단적인 일본식 무도지상론의 관점에서 보면 저 '쇼와의 간류지마 대결'은 각본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실전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상단 영상 기준으로 10분 35초 대에 역도산이 기무라의 턱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실전 상황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무라는 후일 일격을 받은 순간 이미 정신을 잃어 대처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시합 영상을 보는 한 첫번째 공격에서 이미 그 정도로 강렬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이 대결에서도 기무라가 일격을 받은 다음 아예 반격을 안한 것은 아니며, 도중에 기무라가 붙잡기를 시도하면서 반격을 시도하거나 심판의 수차례의 스톱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얻어맞다가 결국 다운을 거듭한 끝에 그로기 상태가 돼버린다. 시합이라고 방심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무도가"로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너무 무력하게 무너진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각본에 대한 논쟁은 뭐라 결판은 나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링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기무라는 무도가로서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역도산이 당시 유도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기무라를 박살내서 프로레슬링의 입지를 높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리 합의된 '''각본을 어기고 공격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시합이 역도산이 기무라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파놓은 시멘트 매치였다고 해도,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1대1 경기의 형식을 띠고 있는 만큼 시멘트 매치라 해도 마에다 아키라처럼 실력으로 벗어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논픽션 검증까지 있었다.
이 논란의 흐름은 사실 시대에 따라서 상당히 바뀌었다. 본래 이 시합 직후에 사회적으로는 '''"기무라는 역도산에게 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이종격투기 붐이 일어나면서 그레이시 가문이 주목받게 되고, "그레이시 일족에게 이겼다."는 경력 때문에 기무라는 재조명 받게 된다. 반면 역도산은 일찍 죽으면서 옹호하는 의견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또한 마지막으로 혐한 세력의 성장이 있다. 혐한 세력은 이 사건을 "가짜 일본인 행세"를 하는 "재일 조선인 역도산"이 "순수 일본계 무도가 기무라 마사히코"를 비겁한 수로 쓰러뜨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혐한적인 증오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역도산 개인의 잘못된 행동에 재일조선인, 일본인 등의 국적 나누기로 일반화시켜 혐한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 대결이 '쇼와의 간류지마'라 불린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싸웠다는, 간류지마의 일화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도산은 경기 시작 전부터 각본을 어기고 기무라를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던 반면, 기무라는 어디까지나 '프로레슬링 경기'로서 임했다.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도 술을 마셨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역도산이야 병법과 심리전으로 승리한 '쇼와의 미야모토 무사시', 기무라는 실력은 있었으나 심리전에서 패배하고 만 '쇼와의 코지로'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기무라 본인은 정식으로 실전으로 싸웠다면 역도산을 이길 수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검 승부라면 이길 수 있었다."는 기무라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일단 기무라 역시 '기무라 락'이라는 기술을 남긴 테크니션이었으며, 엘리오 그레이시를 이긴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기무라가 역도산을 그렇게 쉽게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분명 기무라는 유도에서는 뛰어난 테크니션이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가라테와 복싱 경험도 있어서 타격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종합격투기에도 대응할 수 있는 경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의 유도, 가라테, 복싱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입식타격계의 선두를 걸었던 복싱조차도 당시는 타격 방어 기술의 발달이 부족하여, 거의 힘과 맺집만 믿고 서로 두들겨 패는 막싸움에 가까운 선수가 많았다. 복싱의 특징적인 타격 방어가 프로계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기점이 되었다.
이 당시 유도는 당시 드물게 있었던 유권 흥행에서 복싱과의 대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유도가들은 복싱의 안면 펀치에 쩔쩔 맬 정도로 타격 방어 기술이 부족했다. 이 무렵의 유도는 이후의 주짓수 등과는 달리, 타격에 상당히 취약했던 것이다.
기무라 역시 이 점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기에서 기무라는 역도산의 타격을 거의 방어하지 못했다. 영상에서는 '가라데 촙'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양을 보면 스모의 손바닥치기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사실, 역도산이 썻던 스모의 손바닥치기는 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방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충분히 효과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3]
또한 역도산도 힘이 센 장사로 이름이 높았으며 스모에서 세키와케 계급까지 올라갔고, 미국에서 레슬링을 배웠으므로 결코 호구는 아니었다. 프로레슬링은 분명 쇼 비즈니스지만 당시 프로레슬러는 실제 폭력 상황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싸움에 약했다면 프로레슬링 계의 톱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도는 상대방이 두껍고 긴 도복 같은 상의를 입었을때 진면목이 나오기 좋다. 상의 탈의를 한 상대로는 현대 종합격투기에서도 그렇듯이 거의 레슬링 같은 방식으로 하게된다.
우선 현대적인 체급으로 따지면 역도산 쪽이 15킬로그램 이상 무거워서 2체급 이상 위인 데다가 기무라의 키도 170으로 역도산보다 꽤 작았다. 게다가 당시 기무라는 훈련량이 많지 않아서 이전보다 오히려 벌크가 줄어든 상태였다. 당장 기무라 마사히코 항목으로 들어가서 최상단의 사진[4] 을 보고 영상을 다시 보면 "저 사람이 정말로 그 기무라인가?" 싶을 정도일 것이다. 그 결과, 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 영상을 보면, 역도산의 덩치가 월등히 커서 기무라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다. 엘리오는 반대로 기무라보다 체격이 작다.
게다가 나이도 역도산이 7세 아래로 훨씬 젊었다. 애석하게도 자신이 가장 몸이 좋던 시절 나이 먹고 자신보다 한참 왜소했던 엘리오 그레이시와 싸웠던 것처럼 점차 쇠락하던 시절 가장 물이 올라있던, 그것도 자기보다 몇 체급이 높은 역도산과 싸웠다는 것을 보면 매우 데자뷰. 다만 역도산의 실제 나이는 1~5 정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연령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회고에 따르면 기무라 마사히코는 프로레슬링을 말 그대로 '쇼'라고 생각하여 그다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고, 캬바레 클럽 운영을 하는 등 외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기무라의 신체는 벌크가 그리 크지 않다.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역도산은 사실 기무라를 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유도 기술에 대응하는 훈련 까지 했다고 하며, 당연히 전날까지 컨디션을 철저히 갖추었을 것이다. 게다가 역도산은 경기에서 흥분제와 진통제 등의 약물까지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 이 시합에서도 도핑을 하고 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기무라가 잘 해야 평소 수준 혹은 그 이하의 나쁜 컨디션에서 경기에 임했던 것과는 반대로 역도산은 도핑의 위력으로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1. 개요
1954년 12월 22일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37세) 대 역도산(30세)의 일본 프로 레슬링 챔피언 결정전. 에도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코지로와 벌였다는 간류지마 결투[1] 에서 이름을 따와 "'쇼와(시대)의 간류지마 결투"' 또는 '''쇼와의 간류지마 전투"'라고도 불린다.
이 무렵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모두 진검 승부라고 믿고 있었다.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 일반 신문과 NHK에서는 '스포츠'로서 보도되었다.
대결은 도중에 역도산이 각본을 깨고 갑자기 기무라를 가라데 찹 연타로 다운 시켰다.[2] 다운된 기무라에게 역도산은 안면에 사커킥을 날리고 손바닥치기를 연타하여 결국 KO시켰다. 기무라는 이빨이 부러지고 눈꺼풀이 찢어졌으며, 쓰러진 매트에는 직경 50cm 정도의 피웅덩이가 생겨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과정에는 관계자들의 상반된 증언이 많아서 많은 논란이 나타나게 된다.
2. 배경
이 경기를 제의한 것은 기무라 마사히코였다. 역도산과 기무라는 그 해 2월 미국에서 '샤프 형제'를 초청, 14연전에서 승리하여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도계의 제1인자였던 기무라는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이른바 '고급 자버(…)'와 같은 역할로서 그다지 강함을 어필하는 역할을 얻지 못했고, 이에 울분이 쌓이게 된다.
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지상에서 "진검 승부라면 내가 더 위다."라고 토로하고, 역도산이 이에 응전하는 형태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직전 각본 조정으로 무승부가 예정되어 있었다.
3. 경기 과정
도중까지는 서로 상대 기술을 주고받는 것을 반복했다. 경기 도중 역도산은 갑자기 프로레슬링 규칙에서는 반칙과 같이 펀치를 기무라의 턱에 날린 후 곧바로 특기인 가라데촙을 연타한다. 이에 역도산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서, 본인이 기무라에게 급소를 맞고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격분해서 실전으로 가버렸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수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무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역도산은 기무라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기무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매트 위에서 혼절, 경기는 기무라의 충격적인 KO패로 마무리 되었다.
지금와서 보면 상당히 잔인한 방식의 공격인데, 언뜻 보면 휙휙 날리는 따귀 같은데 저게 전부 귀를 노리고 있다(...). 기무라가 어안이 벙벙해져서인지 몰라도 따귀처럼 들어오는 고막치기를 막아내질 못했고, 크게 동요된 상태에서 다시 고막을 가격하는 모습이다.
사실 저렇게 공격하는 것은 정말 잔인한 공격이다. 이미 구타가 가속될 때 고막치기는 제대로 여러 번 들어간 상태에다 자세히보면 사커킥까지 맞고 있다. 고막을 손바닥으로 맞은 상태에선 천하의 누구라도 서 있질 못하는 법이다(...) 사실상 격투기를 잘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낭심을 가격해 놓고 행동불가인 상대를 패는 것과 정말로 다를 바가 없다.
기무라가 서 있질 못하고 기어가면서 테이크 다운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미 서 있을 만한 레벨이 아닌 거다. 그마저도 실패하고 짓밟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중간의 살인적인 사커킥은 덤이다. 흑백 화면이라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 말에 의하면 '''링 위에 직경 50cm의 피웅덩이가 펼쳐졌다고 한다.'''
4. 논란
기무라의 스승인 우시지마 타츠쿠마(牛島 辰熊)는 놀라서 기무라를 일으키러 링으로 달려가지만, 기무라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 일어날 수 없었다.
기무라와 선후배 관계로 기무라를 존경하던 최배달은 역도산의 수법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역도산에게 도전하였으나 무시되었다. 최배달은 기무라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역도산을 길거리에서 쫓아다녔다고 한다.
시합 후 기무라는 역도산이 무승부로 하기로 합의되었던 각본을 무시하고 자신을 기습하는 바람에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상당히 큰 논쟁이 야기되었다. 프로레슬링이니까 각본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논란 거리가 되었다. 반대로 역도산은 기무라가 먼저 합의에 없는 공격을 하는 등 각본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도 실전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역도산의 대답은 일반적으로 고의적인 상황을 변명하려는 말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역도산이 거의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우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성격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그냥 열받아서' 폭발한게 진짜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역도산은 시합 중에 흥분제 등의 약물까지 상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결 영상을 보면 도저히 깔끔한 프로레슬링 승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시합이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워크'''가 무너진 것은 사실인 듯하다.
기무라 역시 역도산의 수법을 용서하지 못해 단도를 품고 찌를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1993년 75세 나이로 암으로 죽기 직전에 "역도산을 죽인 것은 야쿠자가 아니라 나다. 내가 죽음이라는 말을 빌어 그를 죽인 것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발언하였다.
이 경기로 역도산은 국민적 스타의 자리를 굳혔으며, 기무라 마사히코는 독자적으로 프로레슬링 단체를 개양했으나 결국 자신의 프로레슬링 단체조차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을 거듭했다. 결국 완전히 프로레슬링 계에서 잊혀졌으며,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완벽하게 갈리게 된다.
극단적인 일본식 무도지상론의 관점에서 보면 저 '쇼와의 간류지마 대결'은 각본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실전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상단 영상 기준으로 10분 35초 대에 역도산이 기무라의 턱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실전 상황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무라는 후일 일격을 받은 순간 이미 정신을 잃어 대처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시합 영상을 보는 한 첫번째 공격에서 이미 그 정도로 강렬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이 대결에서도 기무라가 일격을 받은 다음 아예 반격을 안한 것은 아니며, 도중에 기무라가 붙잡기를 시도하면서 반격을 시도하거나 심판의 수차례의 스톱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얻어맞다가 결국 다운을 거듭한 끝에 그로기 상태가 돼버린다. 시합이라고 방심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무도가"로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너무 무력하게 무너진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각본에 대한 논쟁은 뭐라 결판은 나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링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기무라는 무도가로서 크게 망신을 당하게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역도산이 당시 유도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기무라를 박살내서 프로레슬링의 입지를 높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리 합의된 '''각본을 어기고 공격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시합이 역도산이 기무라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파놓은 시멘트 매치였다고 해도,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1대1 경기의 형식을 띠고 있는 만큼 시멘트 매치라 해도 마에다 아키라처럼 실력으로 벗어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논픽션 검증까지 있었다.
이 논란의 흐름은 사실 시대에 따라서 상당히 바뀌었다. 본래 이 시합 직후에 사회적으로는 '''"기무라는 역도산에게 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이종격투기 붐이 일어나면서 그레이시 가문이 주목받게 되고, "그레이시 일족에게 이겼다."는 경력 때문에 기무라는 재조명 받게 된다. 반면 역도산은 일찍 죽으면서 옹호하는 의견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또한 마지막으로 혐한 세력의 성장이 있다. 혐한 세력은 이 사건을 "가짜 일본인 행세"를 하는 "재일 조선인 역도산"이 "순수 일본계 무도가 기무라 마사히코"를 비겁한 수로 쓰러뜨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혐한적인 증오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역도산 개인의 잘못된 행동에 재일조선인, 일본인 등의 국적 나누기로 일반화시켜 혐한을 조장하는 것이다.
5. 무사시 역도산, 코지로 기무라
이 대결이 '쇼와의 간류지마'라 불린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싸웠다는, 간류지마의 일화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도산은 경기 시작 전부터 각본을 어기고 기무라를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던 반면, 기무라는 어디까지나 '프로레슬링 경기'로서 임했다.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도 술을 마셨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역도산이야 병법과 심리전으로 승리한 '쇼와의 미야모토 무사시', 기무라는 실력은 있었으나 심리전에서 패배하고 만 '쇼와의 코지로'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6. 진검승부라면 이길 수 있었는가?
기무라 본인은 정식으로 실전으로 싸웠다면 역도산을 이길 수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검 승부라면 이길 수 있었다."는 기무라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일단 기무라 역시 '기무라 락'이라는 기술을 남긴 테크니션이었으며, 엘리오 그레이시를 이긴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기무라가 역도산을 그렇게 쉽게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6.1. 테크닉
분명 기무라는 유도에서는 뛰어난 테크니션이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가라테와 복싱 경험도 있어서 타격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종합격투기에도 대응할 수 있는 경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의 유도, 가라테, 복싱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입식타격계의 선두를 걸었던 복싱조차도 당시는 타격 방어 기술의 발달이 부족하여, 거의 힘과 맺집만 믿고 서로 두들겨 패는 막싸움에 가까운 선수가 많았다. 복싱의 특징적인 타격 방어가 프로계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기점이 되었다.
이 당시 유도는 당시 드물게 있었던 유권 흥행에서 복싱과의 대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유도가들은 복싱의 안면 펀치에 쩔쩔 맬 정도로 타격 방어 기술이 부족했다. 이 무렵의 유도는 이후의 주짓수 등과는 달리, 타격에 상당히 취약했던 것이다.
기무라 역시 이 점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기에서 기무라는 역도산의 타격을 거의 방어하지 못했다. 영상에서는 '가라데 촙'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양을 보면 스모의 손바닥치기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사실, 역도산이 썻던 스모의 손바닥치기는 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방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충분히 효과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3]
또한 역도산도 힘이 센 장사로 이름이 높았으며 스모에서 세키와케 계급까지 올라갔고, 미국에서 레슬링을 배웠으므로 결코 호구는 아니었다. 프로레슬링은 분명 쇼 비즈니스지만 당시 프로레슬러는 실제 폭력 상황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싸움에 약했다면 프로레슬링 계의 톱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도는 상대방이 두껍고 긴 도복 같은 상의를 입었을때 진면목이 나오기 좋다. 상의 탈의를 한 상대로는 현대 종합격투기에서도 그렇듯이 거의 레슬링 같은 방식으로 하게된다.
6.2. 체력
우선 현대적인 체급으로 따지면 역도산 쪽이 15킬로그램 이상 무거워서 2체급 이상 위인 데다가 기무라의 키도 170으로 역도산보다 꽤 작았다. 게다가 당시 기무라는 훈련량이 많지 않아서 이전보다 오히려 벌크가 줄어든 상태였다. 당장 기무라 마사히코 항목으로 들어가서 최상단의 사진[4] 을 보고 영상을 다시 보면 "저 사람이 정말로 그 기무라인가?" 싶을 정도일 것이다. 그 결과, 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 영상을 보면, 역도산의 덩치가 월등히 커서 기무라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다. 엘리오는 반대로 기무라보다 체격이 작다.
게다가 나이도 역도산이 7세 아래로 훨씬 젊었다. 애석하게도 자신이 가장 몸이 좋던 시절 나이 먹고 자신보다 한참 왜소했던 엘리오 그레이시와 싸웠던 것처럼 점차 쇠락하던 시절 가장 물이 올라있던, 그것도 자기보다 몇 체급이 높은 역도산과 싸웠다는 것을 보면 매우 데자뷰. 다만 역도산의 실제 나이는 1~5 정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연령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6.3. 컨디션
회고에 따르면 기무라 마사히코는 프로레슬링을 말 그대로 '쇼'라고 생각하여 그다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고, 캬바레 클럽 운영을 하는 등 외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기무라의 신체는 벌크가 그리 크지 않다.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역도산은 사실 기무라를 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유도 기술에 대응하는 훈련 까지 했다고 하며, 당연히 전날까지 컨디션을 철저히 갖추었을 것이다. 게다가 역도산은 경기에서 흥분제와 진통제 등의 약물까지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 이 시합에서도 도핑을 하고 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기무라가 잘 해야 평소 수준 혹은 그 이하의 나쁜 컨디션에서 경기에 임했던 것과는 반대로 역도산은 도핑의 위력으로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