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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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1]
'''宮本武蔵'''
(1584년? ~ 1645년 6월 13일)
1. 소개
2. 간류지마(巖流島)
3. 오륜서
4. 예술가로서의 일면
5. 허구성과 과대 평가
5.1. 개요
5.2.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5.3. 평생 감장 한 개도 받지 못했다
5.4. 다른 유명 검호와의 대전을 한 적이 없음
5.5.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기록이 매우 의심스러움
5.6. 사사키 코지로 관련 왜곡 문제
5.7. 무사시 측 사료들의 신뢰성이 전무
5.8. 현대의 무사시 실드 측의 사료 왜곡과 날조
5.9. 유명한 제자가 한 명도 없음
5.10. 소결
6. 미야모토 무사시 허구성의 연혁
7. 그 외
8.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


1. 소개


일본의 유명한 검호로 두 자루 칼을 쓰는 '''이천일류(二天一流)'''의 시조다. 간류섬에서 사사키 코지로와 겨룬 이야기로 유명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각종 대중문화 매체에서 수 없이 등장해 대중에게 친숙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의 실존했던 유명한 검호라고는 하나 그 명성에 비해서는 공적인 지위에 오른 적이 없고, 동시대 관동 지역의 강호들과는 겨룬 적이 없기 때문에 허구나 과장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이미지는 후대의 소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오륜서에서 무사시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60여 회 실전을 치렀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아직 대결에서 호구와 죽도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실전이란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워서 둘 중 하나가 머리가 터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죽어야''' 끝나는 혹독한 승부를 뜻한다. 만약 이런 것을 실제로 60회나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 대단한 실력가였을 것이다. 이 진검승부 기록은 일본 검사 중에 최다이다. 일도류의 개조 이토 잇토사이[2]도 33회뿐. 물론 두 사례 모두 교차검증은 거의 안 되지만...
당시 일본의 한 검술가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에게서 나온 유파로 엔메이류(円明流), 니텐이치류(二天一流)와 분파인 니텐류(二天流)가 존재했으며, 엔메이류는 젊었을 때 자기 검술을 자처하고 다닐 적에 쓰던 이름이고, 니텐이치류는 늙어서 다시 정리해서 세운 유파이다. 엔메이류는 계보가 끊어지고 관류등에 일부 남아있지만 니텐이치류는 아직 계승되고 있다. 니텐류도 계승자가 있으나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왼손잡이라서 후학을 길러내지 못 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무사시 본인도 끝내 이도류를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를 살펴보면 '이천일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이천일류의 도인 것이다'는 내용이 있으며,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라는 식의 항목이 있는 점에 미루어 이천일류는 이도류를 고집하기보다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3]
국내에서는 임진왜란과 별 연관도 없으며[4] 그 외의 조선침략과는 별 연관도 없기에 검호라는 면에서는 검술이나 검도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들한테는 상당한 인기를 누린 인물이기도 하다.

2. 간류지마(巖流島)


미야모토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는 실제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앞바다에 있는 섬인데, 간류지마에서의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무공전(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 '이천기'의 원사료)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해주시고는 간류를 패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고쿠라번(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 성주대리 누마타 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쪽의 병법이 짱먹는가''' 입배틀을 벌이다 '''싸부끼리 현피시켜서 누가 짱인지 대보자'''로 결판나서 무사시와 간류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 결투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이 엄연히 일대일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5]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고 있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 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3. 오륜서


무사시가 검객보다는 전술가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억지로 분명 무사시가 남긴 병법서 오륜서는 현대에도 교본으로 통하는 명저이긴 하다.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문구 등을 보면 현시대에서도 배울 만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병법서라고 해서 무사시를 손자(손무), 오자 같은 병법가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병법은 일본에선 군략(軍略)[6]이라고 한다. 즉, 일본의 병법兵法이란 무구 즉, 병기를 다루는 기술이며 서양의 MARTIAL ARTS 즉, 무예와 정확히 대응한다. 따라서 무사시가 무술가가 아닌 전술가에 가까웠다는 주장은 아예 틀린 것. 애초에 이 문서의 하단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오륜서의 내용부터가 대부분 검술에 대해 설명하는 검술서이며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병법, 즉 전술에 관한 것은 거의 없다.
이러한 오류가 생긴 것은 무사시 시대 즉, 에도 막부 초기의 시대상을 간과한데서 생겨난다. 일본의 병법은 철저히 무사계급에만 한정된 것이며, 개인으로 봐서는 무예가인 사무라이가 전쟁에 임하여서는 중급 내지 상급 지휘자로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개 병기의 운용법인 무예를 넓은 의미를 아울러 병가兵家의 전반을 아울러 생각하여 병법이라 부르게 된 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볼 때 자연스러운 단어 의미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헌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세키가하라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대규모의 항쟁 즉, 무사인 병법가가 군대를 지휘하여 싸우는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고로 전쟁 전반을 아우르던 병법이 이제는 일개 개인의 수신修身의 방도로 전용되는 것이다. 바로 이 고민이 오륜서에 나타난다. 즉,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략인 병법이 어떻게 개인의 단련을 위주로 하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신서로 귀결되느냐를 보여줌으로써 이제는 전쟁터가 아닌 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신분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4. 예술가로서의 일면


검객뿐만 아니라 화가나 예술가로도 유명하여, 무사다운 패기가 넘치는 직선적인 그림체로 일본 미술계에서는 '니텐(이천)'이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다. 수묵화를 잘 그렸으며 그림이 장기였다고 한다. 불상을 조각했다는 말도 있다. 특히 유명한게 본인의 자화상으로, 유명한 검도가들이 칭찬한 일화가 있다.

5. 허구성과 과대 평가



5.1. 개요


무사시의 불분명한 행적과 석연치 않은 주변 상황 때문에 소설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된 검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일본에서는 안티도 꽤 많은 편이다.

5.2.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런 근거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데, 우선 무사시는 이미지에 걸맞는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일설로는, 50대가 되었을때 호소카와 집안의 쿠마모토 번에서 '''석고로 따졌을 경우''' 50석 정도의 부지미(扶持米 / 봉록) 등을 받는 객장(손님)[7]이 된 게 전부라고 한다.[8]
특히나 저건 신빙성이 없는 수준의 사료 (미야모토 무사시 측의 사료)인 '''니텐기'''의 말을 '''완벽하게 신용'''하고 석고로 변환했을 때 50석이라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300석을 받았다고 오역하면서 오노 타다아키는 600석이었으니까 별 차이 안 나네! 하고 묘사하는 일부의 사람도 있으나 이건 번역할때 고쿠로서의 石과 세키로서의 石의 차이를 잘 몰라서 번역 오류를 범한 것. 일단 니텐기의 원문은 '''후치(扶持)18석 + 고료쿠마이(구휼미) 300석'''으로 둘 다 세키인 반면. 야규 무네노리오노 타다아키 등의 1만 2천 500석 등의 석은 고쿠로서의 석이다. 즉 타다아키 등이 받은 600석은 '''일년간 성인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 600명 분을 생산하는 토지 + 토지에 속한 농민 + 토지에 속한 기타 잉여 생산물'''의 봉토 (봉건 시대에 부하에게 내려준 영지) 개념이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건 그냥 쌀만 318석(石:세키) 개념이다. 세키와 고쿠 모두 동일하게 50석이라고 치면, 당연히 고쿠로써의 50석이 훨씬 많은 양이다.
그런데 이걸 구태여 석고로 전환해서 50석 정도라고 원문과 다르게 전환하여 부르는 이유는, 일단 저렇게 318석 받았다니까 석고로 318석이구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또 현대에서 우리가 모든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은 다 석고로서 영지를 따지지 저렇게 석(섬)으로 받은 사람은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해서 변경한 것이다.[9] 즉 다른 사람들은 다들 연봉 몇 천 얘기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급 몇 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안 되는 수준이니, 이해를 돕기 위해 전환해 줘서 50석 정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소결을 내자면 일단 318석 받았다는건 번역 오류고 석고로는 50석 정도이다.
또한 50석 정도라고 해도 사실 엄청나게 좋게 쳐준 거라고 할 수 있는 게, 석고는 땅에서 수확하는 쌀은 물론 그 땅에 살고 있는 농민과 기타 생산물까지 전부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600석 석고라면 일단 600석은 확보가 된거고 그 이상의 수입이 있는 영지도 많다는 것.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이며, 무사시처럼 검호인 야규 토시요시같은 경우 가토 기요마사에게서 받은 영지 500석은 실질적으로 3000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영지와 쌀로 급료를 받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봉건제도의 개념상 당연한 거지만- '''영지는 세습된다.''' 즉 미야모토 무사시가 받은 50석 규모 쌀이야 그냥 팔거나 먹으면 땡이지만 50석의 영지는 계속해서 세습돼서 자손 대대로 늘려나갈 수도 있다.
심지어 석고로 50석쯤 받았다고 좋게 쳐줘도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다. 다른 유명한 검호들의 경우, 야규 무네노리는 1만 2500석을 받았고, 사이토 카츠히데는 천황으로부터 종 5위하 판관직[10]을 받았다. 쇼군에게서 직접 이름 한자를 수여받은 마츠모토 마사노부나 갈아탈 말만 3마리에 수행원 80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행차를 마치 다이묘처럼 하고 다녔다는 츠카하라 보쿠텐,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직접 천하 제일이라는 칭호와 함께 천황에게는 이세노카미(伊勢守)까지 받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등 엄청난 대우를 받은 검객이 결코 드물지 않다.
혹자는 이를 특별한 사례라며 야규 가문이 처음에는 200석[11], 같은 쇼군가의 사범 오노 타다아키는 800석[12]에서 끝이었고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東郷重位)도 400석을 받았다며 반론을 펴기도 한다. 다만 오노 타다아키의 경우 도쿠가와 가문이 좀 짠돌이 기질이 있어 녹봉을 후하게 주지 않은 탓도 있고, 성격이 깐깐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터라 기피 대상으로 악명 높았다. 쇼군이 검술에 관해 입스타를 시전하자 면전에서 '다다미에서 수영하는 꼴'이라고 돌직구를 날린 인물이었고, 한 도장이 요란하게 실전 드립을 치며 선전을 해대자 몸소 쳐들어가서 때려눕힌 일로 징계까지 먹었다. 심지어 군령 위반, 목도로 상대방의 머리통을 찍은 일, 오사카의 진에서 동맹군의 무장을 팔병신으로 만든 일로 폐문 처분만 총 3번을 당했던 걸물이다.[13]. 쇼군가의 사범이 800석 밖에 못 받은 게 정상이 아니라, 밉상인데도 실력이 워낙 출중하니 800석이라도 줘 가면서 붙잡았다는 편이 옳다. 한편 무사시와 동시대 인물인 도요토미의 검술 사범인 스스키타 하야토는 '''3천석'''이었다.
다른걸 다 떠나서 호소카와 가문 안에서만 봐도, 일단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봉록을 줬던 호소카와 타다토시부터의 검술사범부터가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도전해서, 무사시가 쫄아 도망가게 만든''' 니카이도 류의 난폭자 '''마츠야마 몬도'''였고, 호소카와 가문으로부터 '''1,000석의 석고를 받았었다'''[14]. (다만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이후 야규 무네노리의 제자가 되어 야규 신음류에 입문한다.) 무사시를 유일하게 써 준 가문만 봐도, 검술 사범에게 낮은 대우를 해준 것도 아니고, 무사시를 검술사범으로 쓴 것도 아니며, 무사시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이렇듯이 일단 대 다이묘의 검술사범이라면 녹봉 1천석은 기본으로 깔아두던 상황에서, 무사시는 본인의 수많은 변명 등을 감안하더라도 녹봉이 '''단 50석 정도 뿐'''이다. 검술 사범이 아니라 아시가루 대장 정도의 대우라고 쳐도 절대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며, 그것도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몰라줘서 셀프로 구상서(자기 소개장)를 내고 들어가서 나이 50대에나 받은 이 녹봉에 본인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납득했다는 것.
위키러 중에는 위에 든 검객들은 거의, 혹은 하나도 모르지만 무사시만 알고 검색해서 이 글을 보게 된 사람도 많을 텐데, 그 정도로 유명한 검객이었다면 당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모셨을 것이다. 무사시는 현재 명성으로는 양대 검성인 보쿠덴과 노부츠나, 그리고 동시대 가장 유명했던 검객인 야규 무네노리를 찍어 누르는데 막상 받은 봉록은 아시가루 지휘관 수준이며, 심지어 이것도 객장 취급이지 정식 벼슬도 아니었다.[15]
물론 이에 대해 무사시가 예의가 없어서 등용이 안 됐다는 변명 혹은 무사시의 행적이 좀 밝혀지기 이전에는 평민 출신이라 벼슬을 못 살았음 등등 실드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사시는 오륜서등의 저작들만 봐도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갖췄던 인물이고, 글도 잘 썼던 데다가, 상위 신분인 승려들 등과의 교류도 있었고,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이던 이오리를 양자로 들인 걸로 보아 무사 출신이 99% 확실하다. 무엇보다 오노 타다아키는 생전 폐문 처분만 3번을 당했는데 매번 불사조처럼 복귀했고, 교양은 있지만 예의는 없음의 대명사인 가부키모노 마에다 케이지조차 여러 곳에서 사관 제의를 받고 벼슬을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16]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남는 사실은 무사시가 50석짜리 녹봉 수준의 인물이란 것 뿐인데, 이에 대하여 결정적인 증거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님 말고식의 변명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나 벼슬과 녹봉 액수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녹봉을 얼마나 받았냐 하는 정확한 액수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정 녹봉 이상을 받고 무사 대우를 받았느냐 아님 못 받았느냐의 상징적인 문제다.[17] 3천 석의 검호였던 스스키타 하야토가 800석의 오노 타다아키보다 4배를 더 받았으니 4배로 셌다는건 절대 아니지만, 무사 대우조차 못 받은 잡검호들에 비하자면 이 둘은 확실하게 당대의 명성이나 실력면에서 차원이 다른 검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소결을 내자면 녹봉에 일종의 커트라인이 있었다고도 볼 수있고, 적어도 이름을 날린 무사면 500석에서 1000석 정도는 깔고 들어가는걸 알 수 있다.
또한 당대 검호들이 진검 승부를 벌이는 이유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사실 진검 승부라는건 죽거나/혹은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이기거나의 둘 중 하나뿐이다. 전쟁에 비해서 방어 무구도 부실한데다 상대도 어지간히 실력이 있기에 진검승부를 받아들였을 테니, 과거의 콜로세움에서 싸우던 검투사들만큼이나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싸우는 것이다. 당대의 검호들이 이런 진검대결을 하는 이유는 검호들이 목숨이 9개고 사람 베는 것을 즐기는 정신병자라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번 승리할 경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18] 즉 당대 검호들의 대결은 신분 높고 부유한 무사들만이 즐길 수 있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의 목숨이 걸린, 현대의 UFC 이상의 엄청난 엔터테인먼트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진검승부를 5번만 이겨도 해당 고쿠/번의 최고 검호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고, 반대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검호라도 일단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면 진검 승부를 할 일이 생겨도 자신의 수제자를 대신 내보내거나, 자신의 아들을 보내거나, 혹은 승부를 회피하는 일까지 있었다. 예컨대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도장에 쳐들어온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자신의 수제자를 먼저 내보냈다가 수제자가 패배하고, 이어 자신의 아들인 야규 미츠요시, 즉 야규 주베에에게 오노 타다아키와 승부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야규 주베에가 오노 타다아키를 상대로 실력 부족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있는 바람에 현대에도 야규는 정치가 가문이지 사실은 오노 타다아키와 일도류가 당대 최강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19]
그렇기 때문에 평생 '''60번의 진검승부를 해서 모두 이겼다'''면서 대우는 50대에 간신히 봉록 50석이라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전쟁이 일상화된 전국시대를 지나 에도막부의 개조로서 본격적인 검술의 중흥기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부터 오와리 번의 도쿠가와 미쓰모토, 사가의 나베시마 모토시게에서 쓰가루 중흥의 한슈 쓰가루 노부마나까지, 수많은 검호 다이묘(혹은 한슈)들이 판을 치던 '''대 검술 중흥의 시대'''에 상식적으로도 무술로 다른 검호들을 모두 압도하는 이러한 괴물같은 활약을 보였다면 당연히 수많은 대전료와 함께 무사들로부터 '제발 저를 가르쳐주시고, 저희 가문의 검술 사범이 되어주세요.' 하는 러브콜들을 받아야만 하고 이름난 제자만 해도 최소 몇 명은 되어야 한다. `한 가문의 검술 사범으로 종속되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당대의 검술 사범들은 유랑이 기본 일상이다 보니, 붙어서 계속 가르치는 검술 사범도 있지만 그냥 붙어서 딱 한 주 가르치고 그대로 떠나는 경우도 많았기에 역시 해당되지 않는다. 설령 이러한 러브콜들을 모두 거절했다고 쳐도 진검 승부 60회라면 최소한 무사들의 가문 기록에 `오늘 이름난 검호인 무사시의 승부를 보러 갔는데 대단했다.' 같은 행적의 기록들이 직, 간접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후대의 니텐이치류 사범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들을 제외하고 당대의 인물들이 남긴 기록이 아예 없다시피하여 무사시의 대부분의 행적이 그냥 미스테리다.
결국 60회의 진검승부 모두가 양민학살이었거나, 혹은 무사시 본인과 진검승부 상대방 60명들 전부가 부와 명예에는 관심 없는 특이한 애들이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승부를 벌였거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지라 그 진검 승부들이 과연 진짜 벌어지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사시의 진검승부 횟수 60회는 2위인 이토 잇토사이의 2배[20], 다른 일반적인 검호들에 비하면 독보적일 정도로 높은 횟수인데 그에 대한 근거라고는 자신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오륜서밖에 없고, 상대한 유명 검객도 하나도 없으니 더더욱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등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미화물에서는 무사시를 무슨 구도자로 묘사하며 무사시가 출세에 관심이 없어서 이런 제의를 반려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무사시의 심정을 소설가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도 문제이고, 무엇보다 50대에 이르러 자기 소개서를 들고 호소카와 집안에 찾아가 벼슬을 청한 역사적 사실만 봐도 간단히 반박되는 사실이다.[21]

5.3. 평생 감장 한 개도 받지 못했다


특히나 '''1932년''' 현재까지도 출판 중인 일본의 문학 잡지인 문예춘추에서 벌어진 '''나오키 산주고[22]와 키쿠치 간(菊池寬)[23]의 무사시에 관한 토론'''에서, 나오키 산주고는 무사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천하제일이었다면 벼슬을 살지 않았다는게 말이 안 되고''', 벼슬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오사카 성 전투를 포함한 전쟁에 6번씩이나 참전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낭인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활약을 보여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오키는 무사시가 50대에 이르러 호소카와 가문에 벼슬을 살 때 제출했던 구상서(자기 소개서)도 비판하고 있는데, 일단 일본 제일의 검객이라더니 정작 호소카와 가문에서 알아주지 않아서 구상서를 내고서 간신히 벼슬을 청하고 있다는 게 첫번째며, 구상서를 낼 때 그냥 자기 입으로 6번의 전장에 나가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고 말만 할 뿐이지 '''감장[24]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두 번째다.''' 즉 일본 최강의 검호라는 자가 6번의 전투에 참가해서 전장에 나가서 4번을 맨 앞에서 달렸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낭인 부대는 어차피 죽든 살든 상관없고, 가문 소속 무장들보다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해야 되기 때문에 앞에 나서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감장을 못 받았다는 것은 그 경쟁에서도 뒤쳐졌다는 것이다. 결국 당대 최고의 검호라는 자가 자기소개서를 내고서 호소카와 가문에서 석고로 따질 경우 50석 정도만을 받는 취급에 그쳤고, 이에 자타가 만족했다는 것이다.

5.4. 다른 유명 검호와의 대전을 한 적이 없음


또한 관서 지방에만 틀어박혀서 당시 검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동의 유명한 검객들과는 검을 겨루지 않았다는 부분도 큰 흠이며,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술을 좋아하고 진흥하여 당대의 무예가들이 몰려들었던 에도에는 방문하지 않은 것도 큰 흠이다. 특히 관동 제일의 검호이자 막부의 검술 사범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구 네임드 검객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대표로 한 야규 신카게류 계열의 검호와도 겨루지 않았고, 야규 신카게류와 함께 당대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막부의 검술 사범이었던 오노 타다아키를 대표로 한 일도류와도 한 번도 겨루지 않았다. 사실 관동 이외 지역의 유명 검객들과도 검을 겨룬 적이 없다. 규슈의 카게류 계열 타이사 류의 마루메 나가요시라던가, 야규 무네아키, 시현류의 토고 시게카타, 중조류의 토다 시게마사, 심지어 호소카와 가문에서 객장으로 살 때는 마츠야마 몬도를 상대로 승부를 피해 도망치기 까지 했다. 1915년 일본검도사를 저술한 야마다 지로키치 역시, '당대 에도에는 최고의 유파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무사시는 이를 피해 방문하지 않았으니 대단히 이상하다며, 대략 수업을 위해 각 지역을 배회하는 자가 그 땅의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것은, 이치상 자신을 안다고 하는 계량이 부족한 것이다. 니텐이치류가 어느 정도까지로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천하의 병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라며 비판하였다.
게다가 관직에 있거나 고명한 검성 및 검호들이 체면과 나이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무사시와 결투에 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오노 타다아키가 있기에 부정이 된다. 타다아키는 에도로 와서 천하제일이라고 주장하던 병법가의 도전에 응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목검 승부를 해서 격파한 후, 제압 당한 상대를 목검으로 때려 죽일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호전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무사시가 에도로 와서 승부를 요청했으면 기쁘게 응하였을 것이다.

5.5.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기록이 매우 의심스러움


그나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긴 유명한 검호래봐야 요시오카 일문뿐이며, 오륜서에서도 이를 간접적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문제는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에서 무사시가 승리했다는 근거들도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다.
일단 미야모토 측 기록, 즉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가 남긴 코쿠라비문에는 '''무사시가 당주인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죽이고, 제자들을 모두 죽여서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라고 되어있고, 후대의 소설 및 영화, 베가본드같은 창작물에서는 이 설을 취하고 있으나 스루가공방전, 혼초부게이쇼덴[25]이라는 신빙성이 높은 사료들에 의하면 요시오카 가문과 병법소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도 영업 중이었으며, 무려 1614년까지도 영업하다가 1614년 궁중에서 일반에 개방된 사루가쿠를 보다가 경호원들과 언쟁이 붙어서[26]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요시오카 가문은 무술 도장을 닫을 것! 이라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요시오카 세이주로와 그 동생이 도요토미 편을 들어서 개인적으로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 후에는 '''제자 중 염색에 뛰어난 자가 있어 일문이 염색업으로 전직''',직종을 전환하여 염색업으로 교토에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요시오카의 후손들이 염색 장인으로서 일본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27]
즉 일단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되었다는 말은 아예 미야모토 이오리의 '''날조'''라는 것이다.
탄지 미네히라 등의 기록, 즉 미야모토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니텐이치류 사범들의 기록들, 즉 무사시 전기 및 무공전 등에 의하면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죽였다, 혹은 중상을 입혀 승리하였다고 하는데 요시오카 세이주로도, 그 동생도 죽지도 않았다. 오사카 성 공방전에 참전했다는 말도 있고, 이후에는 염색업으로 전직하여 요시오카 세이주로의 별칭인 켄보(憲法)조메(染:염료)라는 흑갈색의 염료를 발명한다.[28] 즉 요시오카 당주들이 죽고 가문이 망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이와 반대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도망쳐서 결투에 나오지도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중립 서술인 고로다화와 혼초부게이쇼덴의 기록에 따르면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승부는 '''무승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아마 대등한 시합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에서 손님으로 머물 때 "대체 누가 이겼냐?"는 질문에 무사시가 자기가 이겼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당대에도 해당 승부에 대해 "무사시가 이긴 건지, 아니면 진 건지"에 대해 확실하게 공표된 게 없어서 승패에 논란이 있었다는 의미다. 지금이야 관련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어쩔 수 없다지만, 상식적으로 당대에는 승부가 명백히 났다면 당연히 널리 알려졌을 테고, 그럼 그걸 무사시에게 다시 물어 확인하려 할 이유가 없었을 게 당연하다. 그리고 사실 '''무사시의 오륜서에도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이 없다!''' 그저 오륜서에 의하면 21살에 교토로 올라와 '''천하의 헤이호카 (兵法家:병법가)'''와 싸워 이겼다는 말만 있고, 교토에 천하의 헤이호카라는 걸 보니까 요시오카 일문을 뜻하는 거구나. 하고 대충 끼워맞춘 게 현재의 해석이다.
즉 당대에도 이미 승패에 관한 논란이 많아서 사람들이 무사시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고, 심지어 '''무사시 본인'''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조차도 교토의 요시오카 가문을 상대로 이겼다는 말을 당당하게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 정도로 당당하지 못한 걸 보면 무사시가 승리자라기보다는 패배자가 정신승리를 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어쨌든 현재에도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건 분명하나, 어찌되었든 각종 창작물에서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미야모토 무사시 혼자서 요시오카의 당주들을 죽이고, 수제자 몇 명을 쓰러트린 후, 복수하러 온 제자들까지 혼자서 학살한 후 요시오카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또한 설령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상대로 완승을 했고, 그 덕분에 요시오카 세이주로가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을 입었으며, 그래서 염색업으로 전직한 것이라고 무사시에게 최대한 우호적인 해석을 한다고 쳐도, 과연 그 요시오카 가문이 소설이나 창작물에서 이야기 하듯이 전국구급의 잘나가던 가문이냐는 것이 두 번째 문제다. 일단 교토 요시오카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요시오카 세이주로의 증조 할아버지, 요시오카의 1대 당주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로 당시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섬겨서 벼슬을 살고 그 덕분에 교토를 근거지로 삼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 말기의 쇼군인 만큼 상당히 안습한 권력을 가진 쇼군이긴 하였고, 또한 당대에는 츠카하라 보쿠텐, 아이스 히사타다, 마츠모토 마사노부 등의 초일류 검호들의 이름이 왜구를 통해 명나라까지 퍼지던 시대긴 하였으나 어쨌든 검호로서 일단 '''정식으로 쇼군 밑에서 봉록을 받고 벼슬을 살았으며''', 그 덕택에 가문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요시오카 나오모토는 앞서 말했듯이 검증된 일류에 가까운 전국구급 검호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2대 당주 요시오카 나오미츠는 벼슬을 살지 못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교토에 검술 도장을 차려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고, 나오모토의 손자인 3대 당주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요시오카 세이주로 역시 마찬가지. 만약 이들이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겸하고 있었다면 증조부인 요시오카 나오모토나 진짜 당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었던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텐, 야규 무네노리, 오노 타다아키처럼 벼슬을 살았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만봐도 그냥 끽해야 조상이 벼슬까지 살 정도로 좀 잘나갔었고, 교토에서 도장을 하고 있었으니 강하지 않았겠냐 정도의 평범한 수준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쇼군가의 공식 검술 사범 급인 것처럼 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던 미야모토 이오리의 무사시 사후 9년 후에 건축된 송덕비인 코쿠라비문 때문. 이 비문에서 미야모토 이오리가 쓰기를, 미야모토 무사시의 아버지는 신멘 무니[29]인데 요시오카는 대대로 쇼군가의 검술 사범을 맡은 가문으로 일본 제일의 무술가[30]라고 불렸는데, 누가 일본 최고인지 알고 싶었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무려 신멘 무니를 몸소 초빙하여 당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공식 검술 사범이던[31] 요시오카 나오츠나와 승부를 시켜 3번의 시합에서 신멘 무니가 2승을 거두어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신멘 무니에게 천하 무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32] 부친들의 이러한 일도 있어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요시오카 세이주로는 싸울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요시오카 일문이 멸문된 것이라며, 요약하자면 요시오카는 천하 제일이었는데 내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그 천하제일을 대를 이어 멸문시켰으니까 진짜 천하제일임 이라는 무협지 뺨치는 내용을 날조했기에 요시오카 가문이 각종 창작물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공식 검술 사범이자 전국구급인 듯이 그려지는 것. 그나마 일본제일이라던 코쿠라비문에 비하면, 이후 창작물에서는 사실성을 위해 오히려 좀 과장을 줄인 셈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요시오카 일문은 그리 대단한 검호들이 아니었고, 멸문되었다는 무사시 측의 기록은 완전히 거짓으로 요시오카 가문은 무사시와의 승부 이후에 오히려 업종을 바꿔 융성하였으며, 승부 역시 누가 이겼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1932년의 나오키 산주고도 무사시에 관하여 요시오카 측과의 승부에 관하여 확실한 기록이 없고, 유명한 검호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 무사시의 언동에는 검의 강함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비판하고 있다.

5.6. 사사키 코지로 관련 왜곡 문제


무사시 필생의 라이벌로 각인된 '''사사키 코지로 역시 정작 무사시의 저서 오륜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의 코쿠라비문에서 '간류'로 등장하는 것이 처음이며, '사사키 코지로'라는 성명이 등장하는 것은 '''무사시 사후 130년 후에 쓰여진 이천기가 처음이다.''' 또한 실제의 사사키 코지로는 토다 세이겐이나 카네마키 지사이 등 스승들의 나이로 대략 추정하였을 때 무사시와 대결 당시 나이가 적지 않은 검호로 보이나, 이렇게 된다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벼슬을 살지 못한 잡검호가 되기에 무공전과 이천기 등 에서는 사사키 코지로가 무사시와의 대결 당시 18살이었던 천재 소년 검객으로 그려지며, 요시카와 에이지 작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에서는 심지어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각 가문들의 스카웃의 표적이 되어 이미 벼슬을 살기 직전이었고, 무사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 호소카와 가문에서 벼슬을 살게되는 것이었는데 무사시가 코지로에게 승리해서 그를 바탕으로 나중에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인정해줘서 봉록을 받음'이라고 사실을 마음껏 왜곡하여 등장시킨다.
후대에 무사시를 띄워줄 요량으로 등장시킨게 아닐까 하는 의심어린 주장도 있으나, 일단 '간류'에 대해서는 본 문서 상단에도 언급되어 있듯 관련 사료가 남아 있어 실존 인물로 생각된다. 문제는 그게 현대 대중 매체에 알려진 사사키 코지로와 동일한지, 그만큼 굉장한 검호가 맞았는지의 여부이다. 무사시 스스로도 자신의 저서인 오륜서에 누락시킨 상대라는 점도 이런 부분에서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5.7. 무사시 측 사료들의 신뢰성이 전무


본래 이름은 후지와라 하루노부(藤原玄信) 또는 히라타 무사시(新免武蔵)라는 얘기가 있으며, 바뀐 이름에서 성은 미야모토 혹은 신멘(新免)으로 아명은 벤노스케(辨助), 이름은 武藏-'무사시'와 '타케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름을 읽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의 영향력으로 무사시로 굳어진 듯하다. 또한 이름이 마사나(政名)라는 주장도 있다. 호는 이천(二天) 또는 이천도락(二天道樂).
양자 이오리가 세운 비문, 즉 코쿠라 비문에 따르면 신멘 무니가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오리가 도마라 신사에 봉납한 표찰의 기록에 따라 덴쇼년간 사망한 신멘을 무니라고 보지만 실은 이 사람, 멀쩡히 살아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가계도에서는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무니를 양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도리류(当理流)의 무예가인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라는 설도 있다. 같은 작품에서 출생장소가 모순되는 등, 간단한 신상명세조차 이 모양이니, 실제 행적을 추적하려면 카오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오륜서 역시 원본이 소실된 상태로 다수의 사본만이 존재하는 실정이며, 이마저도 내용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오륜서에는 버젓이 하리마(播磨 현재의 효고현) 출생이라 적었는데, 에도막부 후기의 지리서인 토사쿠시(東作誌)에서는 비젠(備前 현재의 오카야마현)국 미미사카(美作)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그린 미야모토 마을은 바로 후자를 채택한 것이다.[33]
이렇게 무사시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는 이미지는 후대에 특히 요시카와 에이지의 명작 소설인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재창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무사시는 일본의 정식 역사서에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무사시의 행적에 관해 기록된 것은 전부 무사시의 제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창조된 것이다.''' 즉 요시오카를 멸문시켰다는 기록은 무사시의 '''양자'''였던 미야모토 이오리가 1654년에 남긴 코쿠라비문에 기록되어 있고, 무사시가 동군에 참전했으며 요시오카 일파에 승리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은 '''니텐이치류, 즉 무사시를 개조로 하는 유파의 사범인''' 탄지 미네히라가 1727년에 쓴 무사시 전기에 쓰여 있으며, 무사시에 관한 사료인 무공전은 '''니텐이치류 사범인 토요타 마사나가가 1755년'''에 썼고, 니텐기=이천기(二天記)는 심지어 '''1776년에 무공전을 사료로서 토요타 마사나가의 아들 혹은 손자인 토요타 카게히데'''가 만든 기록이다. 무공전까지는 그나마 사료로서의 가치가 조금은 인정되나. 심지어 이천기는 날조의 정도가 워낙 심하며, 무공전에 등장하지도 않는 무소 곤노스케와의 일화 등 '''소설책'''을 원출처로 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심지어 변형하여 집어넣는 등 무사시 미화를 위해 거짓된 자료가 넘치는 터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전부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 그래도 간접적으로 참고하는 정도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있다. 라는 설이 양립할 정도.출처
즉 무사시에 관한 근거 자료라고는 자신이 쓴 책+최대 사후 130년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 각종 민간 전승과 신격화가 결합된 사료들 뿐이다. 덕분에 동 시대의 다른 사료와 비교 검증할 경우 다른 사료와 불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34] 아예 의도적으로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많다.

5.8. 현대의 무사시 실드 측의 사료 왜곡과 날조


또한 나오키는 무사시에 대해 옹호하는 측에서 무사시에 대한 불리한 기록들은 숨긴다며 63회의 진검승부를 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호소카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자 성격이 더러운 걸로 유명하던 니카이도 류의 마쓰야마 몬도를 두려워해 그 지역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있고, 오와리 번의 한 검술 사범에게는 병법 35개조[35]따위를 쓰고 후회하지 않겠나? 라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기록에는 전쟁에 참가했다가 성에서 던진 짱돌을 맞고 부상당해서 누워있다는 인간적인 면모의 기록도 존재하는데, 미야모토 무사시를 검성으로 부르며 귀신의 검술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기록들은 절대 인용하지 않는다.[36]
심지어 코쿠라 비문과 탄지 미네히라의 전기, 무공전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내용을 날조하는 경우도 잦다. 예컨대 미야모토 무사시가 당대 천하 제일이었던 야규 무네노리에게 승부를 신청해 야규 무네노리가 승부를 회피했다던가, 혹은 '''원래는 무사시가 쇼군가의 검술 사범이 되기로 했었는데 무네노리가 방해했다던가'''[37], 보장원류 창술은 이미 호조인 인에이때부터 이미 승려들의 싸움을 금지하고 주지에게는 수신 명목으로만 창술을 계승시켰으며 '''인가장을 받은 제자들은 정작 일본의 중심이던 에도에서 도장을 차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장원 주지였던 호조인 인슌에게 승리했다던가, 비판이 커지자 이제는 사실 그건 아니고 인슌의 스승에게 이겼으며 그 스승은 호조인 인에이의 수제자였다고 한다던가[38], 최초 출처가 가이쇼모노가타리라는 소설책을 근거로 하여 무소 곤노스케에게 이겼다던가[39], 닌자인 시시도 아무개[40]와 싸웠느니, 도적인 츠키카제 고헤이랑 싸웠느니라는 뜬금없고 정말 비상식적인 이야기들[41] 유랑하던 야규 토시요시 효고노스케를 만나 판정승을 거두었다던가, 이토 잇토사이에게 비겼다던가, 심지어 생몰 연대조차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츠카하라 보쿠덴을 만나 싸워 무승부를 거뒀다 등등... 막말로 지금 당장 구글에서 무사시를 검색해봐도 무사시에 관한 '''고사'''혹은 '''일대기'''라면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애초에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해서 남겨진 역사 기록들조차도 그 저자들이 무사시 관련자고, 일기 등 다른 사료와 교차 검증시 동일한 부분들이 적으며 이천기는 아예 전부 날조 기록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매우 불투명한데, 이러한 역사 기록조차 아예 전무한 일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이러한 창작된 기록들이 일본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큰 문제다.

5.9. 유명한 제자가 한 명도 없음


정녕 하다못해 다른 증거들은 하나도 없더라도 설령 제자라도 훌륭한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나왔다면, 검술 자체가 강하다는 말이니까 강한 검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둔 이토 잇토사이도 대부분의 행적은 미스테리지만 그 오노 타다아키를 제자로 둘 정도면 얼마나 셌겠어? 하는 생각으로 현대에도 가장 강한 검호들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심지어 유명한 제자조차 단 한 명도 없다.''' 나오키 산주고 역시 유명한 제자가 없었다며 이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무사시 실더들의 반박으로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라 사람이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무사시의 제자들의 공적이라면 탄지 미네히라의 무사시 전기, 무공전, 이천기 등 자기 유파의 개조인 무사시에 관한 신격화가 담긴 기록들을 엄청나게 써내어 후대의 요시오카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소설 저술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것 정도. 특히나 요시오카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천기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 없이 인용하여 현대의 검성, 아니 '''검신'''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을 불러왔고, 이는 역사적인 사실 측면에서는 큰 문제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다만 본인의 실력과 가르치는 능력은 다른 문제란 것도 생각해볼 일. 스스로 오륜서에 적은 의문처럼 기술이 뛰어났다기보다는 '타고난' 인자강이었을 수도 있다. 현대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지도자로서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본인은 숨쉬듯 자연히 되던 것이 제자들은 안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실패하는 쪽이 다수다. 애초 타고난 반사신경, 신체적 특징(완력이나 체구, 왼손잡이 등) 등으로 강했던 선수라면 이를 갖추지 못한 제자들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나쁜 버릇을 물려주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 팔이 짧은 선수에게 토마스 헌즈의 복싱을 가르쳐봐야 소용이 없으며, 타고난 발목 힘과 유연성이 탁월하지 않으면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나 프리킥은 따라할 수 없고, 아무리 기술이 좋은 선수라도 마이클 조던 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그처럼 공중경합에서 안정적인 자세로 슛을 던질 수 없다.

5.10. 소결


요컨대 '최강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미지는 '''모두 가짜'''라는 쪽으로 굳어진 상태다.
결론적으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진짜 천하제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짜 천하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검호들인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야규 무네노리와 천하제일에 가까웠던 검호들인 오노 타다아키, 이토 잇토사이, 야규 무네요시, 야규 토시요시, 아이스 히사타다, 이이자사 이에나오 등은 '''벼슬을 삶 + 당대 천하 제일로 불림 + 당대의 역사서에 활약들이 기록되어 있음 + 당대의 신분 높은 유명 인사를 제자로 둠 + 검술 실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한 제자들을 둠'''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 중 하나도 해당이 안 된다.''' 반대로 위의 검호들을 비판할 경우 어거지로 비판하더라도 끽해야 한두 개 정도가 나올 뿐이지만, 무사시는 비판점으로만 논문이 튀어나오며 실제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진실과 거짓에 관하여 40여개가 넘는 항목으로 분석한 책도 존재할 정도다.
1932년의 나오키 산주고도 미야모토 무사시를 극찬하는 사람들은 정작 다른 검호들의 활약 등으로 비교 검증하지 않고, 단순히 미야모토 무사시 관련 자료만 보고서 미야모토 무사시를 극찬하고 있으며, 자신의 결론으로 실제로 비판할 수 없는 역대 최고의 천하 제일의 검호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현대 전 일본검도연맹의 평가로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고금 제일의 달인'''으로 놓고 일본 역사상 천하 제일의 검호로 평가하고 있고 그 아래에 츠카하라 보쿠덴을 500년래 무쌍의 남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야규 무네노리와 미야모토 무사시는 동격으로 근세 이대 병법사상서로 꼽히는 오륜서와 병법가전서를 저술하여 검도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것을 높게 평가하여 전일본 검도연맹의 검도전당 별관에 특별히 현창하여 전일본검도연맹의 검도전당 별관에도 나란히 상을 배열하고 있다. 이 둘 이외에 검호로서 현창된 유일한 인물은 북진일도류의 검성 치바 슈사쿠. 이 셋을 제외한 현창된 인물은 모두 19C~20C의 교수나 정치가 등의 근, 현대인이다. 출처
즉, 그의 화려한 행적들이 전혀 사료로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검술가'가 아닌 '검술 철학가' 라고 재인식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6. 미야모토 무사시 허구성의 연혁


그렇다면 과연 어느 시대부터 '''최강''' 심지어 '''검성'''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이 시작된 것인가!도 살펴볼만한 문제인데 대체적으로 이 시발점으로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꼽고 있지만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단 에도시대.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추종자들은 '''에도시대에는 전쟁이 사라져서 무술이 필요가 없어져서 검술이 대우를 못받았다'''라는 굉장히 일차원 적인 사고로 나온 주장을 하는데 일견 그럴싸하게 들린다. 전쟁에서 검객이 명성을 떨치고 관직에 오르는 일이 막혔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전쟁이 사라지면서 검객으로서,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검술 뿐이었다.''' 즉 전국시대는 워낙 전쟁이 많이 벌어진 시대다 보니 꼭 무예에 능통하지 않더라도, 머리가 비상하거나, 교양이 넘치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타거나, 운이 미칠듯이 좋으면 무사로서 대출세도 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나 다나카 요시마사 같은 평민도, 사이토 도산, 고니시 유키나가같은 상인 출신도 무사로 대다이묘가 될 수 있는 시대였으나, 에도 시대에는 전쟁이 아예 사라지면서 전공을 세울 길이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과거제를 시행하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무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검술이었다. 실제로도 나카니시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마사(中西子政)의 제자였던 마타시치로는 조개를 파는 미천한 상인이었었는데 나카니시 츠구마사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련한 끝에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가 되고''' 성을 아사리(바지락)라고 지어 아사리 마타시치로가 된다. 이게 무려 에도 말기의 일이다.
이렇듯이 에도 시대에 무술의 위상이 높다보니 수많은 유파가 융성하고 난립하였는데, 에도시대 초기에는 일본 전체에 200개 미만의 유파가 존재했다는 조사 기록이 있고 에도시대 말기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검술 유파의 숫자만 718개, 다른 분야에도 유술 179개, 창술 148개, 궁술 52개 유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유파가 난립하면서 각각의 유파들이 자기 PR과 유파의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에도 시대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인물들을 각각 자신의 유파의 개조나 시조라며 소개하거나 또는 날조하기 시작하였다. 예를들어 텐도류같은 경우 '우리 텐도류는 사이토 카츠히데라는 전설적인 검호가 만들었는데, 그의 스승은 그 유명한 검성츠카하라 보쿠덴이다', 혹은 '우리 유파는 그 유명한 야규 주베에가 방랑 중에 우리 유파의 창시자의 재능을 보고 감격하여 신카게류를 전수해주어 수제자로 삼아서 만들어진 검술이다, 그러므로 위로 가자면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아이스 히사타다가 우리 유파의 시조다' 등등. 물론 사실인 경우도 일부 있을테고, 거짓도 많았겠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이렇게 자기 유파의 시조로 많이 쓰이던 인물들이 이이자사 이에나오, 양대 검성인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이토 잇토사이, 행적 자체가 불분명한 장점을 가진 야규 주베에, 심지어 스스로 제자를 자칭한 인물들의 기록까지 확실히 존재하는 진짜 천하제일이었던 야규 무네노리 등이었다.
즉 이들이 진짜로 당대의 레전드라고 불린 인물들이며,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경우 애당초 행적도 상당히 불명확한 만큼 유파의 스승으로 뻥치기 좋은 조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무사시가 당시에도 레전드 검객이었다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는 검술 유파가 부지기수로 있었어야 정상일 텐데, 실제로는 쿠마모토 번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약소 유파인 진짜 니텐이치와 엔메이류 정도의 한둘뿐만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고 있다는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에도 시대에 일류 검호로 여겨지진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에도 시대 후기 만들어진 츠카하라 보쿠덴과 상대했다는 일화에 의하면 츠카하라 보쿠덴이 무사시의 일격을 밥 먹다가 젓가락으로 막는 식으로 차원이 다른 검호로 묘사되기도 하고.. 또 사실 일도류와 야규 신카게류의 시대에 진짜 레전드도, 일도류나 신카게류도 아니면 조명을 받기 힘들기도 하고..
반면에 혼초부게이쇼덴에 무사시의 일화, 즉 간류지마의 결투가 기록되어 있으며 간류지마의 결투가 가부키로도 공연됐던 것, 카이쇼노모노가타리라는 소설책에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존재하는걸 보면 완전히 삼류 검호로 취급된 건 또 아닌 것 같고, 시골에서 어느 정도 실력은 있었고 간류지마의 결투로 나름 유명한 이류 검호 정도로의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에도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술사에 큰 변혁이 시작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폐도령을 내려버린것. 여기서 검술이 끝나는가 했는데 폐도령및 징병제 기타 정책에 빡친 사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이게 바로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반란이다. 이 세이난 전쟁에서 사츠마 측의 시현류를 보고서 메이지 정부 측에서도 검술의 가치를 느끼고서 경시청에서 검술 과목을 만들고 경시청류를 만들게 된다. 이후에 검술은 격검 흥행으로 어찌저찌 명맥이 이어지다가 1895년 대일본 무덕회가 생기게 되고, 여기에 유도, 검도, 궁도들이 들어가게 된다. 이에 참가한 것이 직심영류, 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등 몇몇 유파였고, 당시에는 다카노 사사부로와 나이토 타카하루등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일도류 계열의 선생들이 검도계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현대의 검도의 형, 기술, 수련법은 일도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이렇게 검도가 만들어진다. 검도는 후에 중등교육 과목에 들어가게 되는 등 국가적 지원을 받게된 반면에 기존 고류 검술들은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으로 쇠락하고 만다. 이렇게 검술의 대세가 고류검술에서 검도로 바뀌면서 시대의 변화로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도장에서 구전 + 대면하여 소수의 인원을 교육시키는 도장검술에서, 다수 대중에게 전파하는 검도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42] 이렇게 많은 수를 가르치다 보니 소수를 구전+대면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잘 정립된 교본 중심의 대중 지도자가 가르치는 식으로 검도 교육의 체계가 옮겨가면서, 예전에는 소수의 제자를 눈 앞에서 보고 틀린 점이 있으면 짚어주고, 훈련이 부족한 거 같으면 훈련을 더 시키고, 심법이 이상한 거 같으면 마음가짐을 가르칠 수 있었고, 또한 비전서에 너무 자세히 오의를 서술했다가 다른 유파가 우리 유파의 오의나 훈련법 등을 훔쳐가는 것도 큰일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도장 검술에서의 비전이나 교육은 대체로 구전 중심이고 비전서 같은 건 대체로 우리 유파의 검술에 능한 사람만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은밀하고 잘 알 수 없는 형식으로 묘사했지만, 현대의 검도는 다수의 제자를 가르쳐야 하고, 심법같은 것도 다수 대중을 가정하여 설득력이 있게 써야 하며, 훈련 방식도 교본만 보고도 따라 할 수 있도록 상세한 방식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설득력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권위자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시기 검도인들로부터 자주 인용되던 검술에 관련된 작품들이 크게 3개 '''타쿠앙 소호의 부동지신묘록''',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 그리고 '''무사시의 오륜서'''이다.[43] 그러니 이들이 현대 검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이 3작품들 중 당대의 검도가들이 인용하기 쉬운 작품과 어려운 작품들이 당연히 존재했는데, 우선 부동지신묘록은 애초에 승려인 타쿠앙 소호가 만든 작품이다 보니 대체로 불교적이고, 검도 이야기보다는 심법이 중심이 되고 그걸 병법=검술로서 설명하는 형식이라 인용이 쉽지가 않은 편이고,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는 사실 권력의 최상위권에 올라간 배부른 검호가 이제 정신적으로도 한번 고민해볼까! 하는 느낌이다. 내용도 불교를 이용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훈화나, 도교를 이용하여 유교를 비판[44]하면서 자신의 활인검+살인검+무도토리 등의 개념을 최종적으로 서술하는 형식이라 역시 인용의 어려움이 좀 있는 편이다. 또한 아무래도 북진일도류 중심의 현대 검도에서 대립각을 세운 신카게류의 인물이라는 것 + 에도 야규류 종가는 에도시대 말에 이미 망해서, 이제는 라이벌인 오와리 야규에서 야규류를 계승하여 동경야규회로 계승된 것도 큰 단점이었다.
반면에 오륜서는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제발 저 좀 취직시켜주세요, 저 취직 시켜주시면 이렇게 꼼꼼하게 가르쳐드립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PR을 위해 만들어낸 서적이고, 그러다보니 한 25%만이 심법이고 나머지 75% 이상은 검도의 형이나 기술, 수련에 관한 묘사들이다. 구문 몇 개를 예를 들면 칼을 들었을 때는 눈을 크고 넓게 뜨며 상대의 칼에 시선을 두지 마라, 손가락은 처지지 말게 쥐고서 사람을 벨 때도 두려움으로 움츠려들지 마라. 등등 직접적으로 검술에 관해 묘사한 부분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인용하기에 정말 가장 편하고 훌륭한 검술 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위에서 서술했지만 대개 이름 높은 검호의 도장은 도장에서 구전 + 대면하여 가르치는 방식이고, 그런 검호중에서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 드물어서 오륜서처럼 말이 아닌 글자로 출판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나, 무사시는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걸 체계적이고 편하게 요약해서 책으로 남길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력없는 입만 산 하수였다면 그 정도의 책을 써내기 힘들었을테니 무사시는 다른 검호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정도 실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기 활동하던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5인방, 즉 '''타카노 사사부로(10단), 사이무라 고로(10단), 모치다 모리치(10단), 나카야마 하쿠도, 나이토 다카하루''' 같은 현대 검도의 창시자 격인 인물들의 경우에도 전부 다 수많은 대회들의 우승 경험도 우승 경험이지만, 교본 등의 텍스트로서 자신의 검도론을 설파했던 사람들이고, 현대에도 이 인물들이 쓴 경시청 관련 기록이나 검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보면 대체로 오륜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습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쭉 적은 다음에 "무사시가 오륜서에서 말하길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부단하게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 것이다." - 나이토 다카하루. 이런식으로 오륜서를 계속해서 인용한 것이다.
검성으로 불리는 당대 최강의 5인방, 심지어 현대 검도를 창시한 공로로 현대 전 일본검도 연맹에 현창까지 된 이 인물들이 모두 다 무사시를 인용하고 있으니, 당연히 "무사시가 대체 누구야!", "진짜 레전드인가보다!" 하는 현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무사시 열풍이 몰아쳤고, 심지어 니텐기와 오륜서를 보니까 60번을 이겼느니, 요시오카를 멸망시켰느니 라고 하니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 검도사에 관한 책들은 이제서야 막 나오기 시작하는 정도의 태동기에 사료 교차 검증은 하기가 쉽지도 않았다. 또 대체로 무부에 가까운 검도인들이기도 하니 결국 검도계에서는 대체로 반박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검성' 무사시 열풍이 몰아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역시 전 일본 검도연맹 현창자인 지키신카게류의 야마다 지로키치(山田次朗吉)같은 경우 자신의 저서에서 "무사시가 최강이라면 에도에서 싸웠을텐데 그런 적이 없으니 최강이라기에는 의심스럽다." 라고 조심스럽게, 나오키 산주고 같은 경우는 "무사시가 최강은 무슨!" 하고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자만 검도계에서는 현대 최강의 인물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계속 인용하고 있고, 니텐기 보니까 최강이라고 나오니 최강의 검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무사시 열풍의 시발은 이 시기부터인 것이다.'''
그렇게 검도계에서 무사시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쪽 vs 무사시는 별 것 아니라는 사람들의 의견 대립이 계속되다 1932년, 계속 인용하고 있는 무사시에 관한 나오키 산주고 등의 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서 미야모토 무사시를 옹호하는 쪽이 키쿠치 간과 '''요시카와 에이지'''였으며, 무사시를 신랄하게 까는 쪽이 나오키 산주고였는데, 그 요시카와 에이지는 여기서 나오키 산주고의 맹공에 단 한마디도 못하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첫 번째 모노가타리 이하 문단 참고 그리고 나오키 산주고는 병으로 이 좌담회가 일어난 지 2년 후 급사하였다.
이 토론에서 발린 요시카와 에이지가 1935년, 좌담회 후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아사히 신문에서 한 소설을 연재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였다. 덕분에 일각에서는 '''이것이 나오키 산주고의 논파에 대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답변이다'''라던가, 혹은 "이 좌담회가 없었다면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며, 소설 구상과 자료 체크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했을때 단 3년 후에 소설이 쓰여졌다는건 시기적으로만 봐도 분명 엄청난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요시카와 에이지의 검성 무사시가 소설로 구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검성 무사시'''가 대중적으로도 널리 퍼지며 각종 대하 드라마 등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각계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료의 교차 검증 등이 이어지며 무사시 신격화의 유일한 근거였던 니텐기의 사료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부정된다. 이러한 토양 속에서 1965년에는 시바 료타로가 진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발간하여 무사시가 최강의 검성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입신 출세를 원하던 검호'''였다"로 정리되며 검성 무사시에서 검호 무사시로 격하, 최근에는 대중매체+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NHK등의 TV 방송국에서 무사시 검증을 위해서 현대 교토에서 염색집을 하고 있는 요시오카 가문에 찾아가서 요시오카 가문이 멸족된 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걸 대중들에게 알린다던가, 무공전과 니텐기를 비교하여 니텐기에서 날조된 자료들을 찾아내고, 앉은 자리에서 사료들을 비교하고, 나오키 산주고가 말했듯이 다른 검호들과의 활약 역시도 충분히 비교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대체적으로 '''과장된 검호''', '''미화가 심한 검호''' 정도로 평가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도 최근의 일본의 각종 창작물에서는 대체로 끽해야 도전자의 입장이던가, 천하 무쌍을 노리는 검호1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장의 야망 같은 게임 내에서의 무력 수치도 양대 검성, 이토 잇토사이, 야규 무네요시, 아이스 히사타다 등에는 확실히 밀리는 정도로 등장하며 검신 드립까지 나오던 이전에 비하면 뽕이 많이 줄었다. 배가본드 같이 재능만 있고 제대로 배워먹지 못해서 당대의 수많은 강자들에게 도전하며 검을 배워나가는 학생 같은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

7. 그 외


일본에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츠카하라 보쿠덴이 싸운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고 그 일화를 다룬 그림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이 2명은 아예 태어난 시대가 다른 인물이다.[45]
시구루이의 저자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무사시의 성공 비결은 오륜서 등의 저술 활동으로 자기 PR에 힘쓴 점이라고 애둘러 꼬집은 바 있다.[46]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카시 테루즈미의 휘하에서 참전했다고 하는 말이 있었으나, 탄지 미네히라의 기록에 근거한 현재의 연구로는 동군측이었다고 한다. 오사카 성 전투 당시에도 동군측에서 참전했다.
무사시의 실력을 현대 검도 기준으로 분석해 보니, '''강삼약사-3단을 주자니 강하고 4단을 주자니 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거구'''였기 때문에 검술보다 체격으로 이긴 점이 많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사진 한 장 없는 인물의 체격과 실력을 논한다는 점에서 영 신뢰성이 없다. 게다가 이 분석은 무사시가 실전에서 이도류를 사용했다는 가정 하의 분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사시가 실전에서 정말로 이도류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이런 이유로 이건 그냥 흥밋거리로 생각하면 된다. 다만 무사시 명성에 비해서 3단이면 짜게 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현대 검도는 룰이 까다롭기 때문에 검술 실력과 별개로 검도에 대한 적응을 해야 된다. 그래서 막말에 죽도를 사용하지 않은 유파의 검사들이 죽도대련을 죽을 쓴 경우가 많다. 그런걸 감안하면 3단이라고 하면 정말 잘 쳐준 것이다. 그리고 검도 스포츠의 대결이 아닌 진검승부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도로 하는 '시합'에 강하다는 게 목숨을 건 진검승부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평생 아내는 없었으나 동정은 아니었고, 모 개그 만화로 유명한 요시와라 유곽의 단골 손님이었다는 말이 있다. 요시와라 유곽의 개조인 쇼지 진에몬이 기록한 세이로렌키코나 도보코엔 등의 기록에 의하면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유곽에서 쿠모이라는 유녀와 친하게 지내며 출진 전에 자신의 깃발, 사시모노를 만들게 하고, 유곽의 주인들인 나미키 산노조 등을 제자로 들였다고 한다. 이 기록들에 따른다면 간류지마 이후 정작 에도 외곽까지 가서는, 에도의 강력한 유파들을 상대로 검술 대결은 안하고 유곽에서 세월을 탕진한 것이다.
한국의 온라인 상에서는 한 때 미야모토 무사시가 아랍상인에게 칼맞아 죽었다는 황당한 내용의 루머가 돈 적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에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없는 헛소리다. 당시 근거 자료라고 돌던 이미지를 보면 붉은 칸안에 '1645년, 일본에 무역하러 온 아랍상인과의 대결에서 패해서 죽음'이란 내용의 문장이 적혀 있으나, 해당 문장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2008년 10월 27일에 한국인 역갤러가 저지른 문서 훼손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이 무사시의 자손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이것도 헛소리다. 무사시는 양자만 있었을 뿐 친자식은 없었다.
고바우 영감김성환화백은 무사시가 대접 못받고 평생을 보낸 원인이 무사시 본인이 자초한 것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진 않았지만 실제보다 명성이 더 높아 무사시를 죽이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의 어중이떠중이 검객들이 무사시의 목을 노리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탓에 무사시는 평생을 떠돌아 다녀야했다. 임관은 커녕 목숨 보전하기도 바빠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해 늘상 피폐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는게 무사시 신화의 본모습이였다고 설명했다.

8.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


미야모토 무사시를 모티브로 만든 안드로이드다.
냥코 대전쟁에 등장하는 레전드 드롭 캐릭터인 무사시가 이 캐릭터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풀네임은 미야키 무사시. 그러나 먼 훗날 동명의 레전드 레어가 등장하고 말았다.
대전격투게임의 캐릭터 모티브로 많이 차용되었다. 하오마루아카츠키 무사시등이 대표적이다.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은 간류섬 대결에서 끝을 맺지만, 사사자와 사호의 소설은 정치에 뛰어들거나 아마쿠사성 토벌에 참가하는 등 무사시 말년의 일도 그렸다. 국내엔 요시카와 에이지 작품과 사사자와 사호 작품을 한데 묶어서 출판한 개념상실작도 있으니 구입 시 반드시 작가명을 확인하자. 사사자와 사호 작품을 보다보면 -본격!미야모토 무사시 플래그 메이커!라는 느낌이다.유부녀쿠노이치기녀유녀에 열녀에 원수애인, 심지어는 비구니까지 세워진다. 다르게 정리하면 유부녀는 도도함이요, 쿠노이치는 보이쉬며, 기녀는 병약하고, 유녀는 섹시하고 열녀, 원수의 애인은 얀데레에, 비구니는 보케다.
시바 료타로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가 가장 그의 성격과 모습을 잘 묘사했다는 평이 있다. 제일 가까운 캐릭터라고 하면 전국 바사라 2의 모습 정도다.
오시이 마모루가 원작, 각본을 맡아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 다룬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미야모토 무사시 - 쌍검으로 달리는 꿈'이 2009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미야모토의 본질에 탐구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도류에 대해서 마상에서 장군으로서 싸우고 싶었던 결과 만들어진 검법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닌자 슬레이어에서는 미야모토 '''마'''사시라는 이름의 검호이자 철학자로 등장한다. "광인의 흉내를 내면 실제 광인", "새옹 호스", "도둑질을 하려면 그 전에 집에 불을 질러라" 등 현대 일본에서도 사용되는 격언의 대부분은 미야모토 '''마'''사시가 남긴 것이라고. 덤으로 이 인물의 활동 시기는 헤이안 시대라서, 아무리 봐도 실제 인물과는 심한 괴리가 있다.

8.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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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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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통솔 27 무력 102 지력 53 정치 11로 검호들이 그렇듯이 무력만 높고 고유 전법 난전을 가지고 있다. 예외 아닌 예외가, 무력과 통솔이 합쳐졌던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 때 능력치 뿐으로, 이 때는 검호나 닌자 출신 무장들도 통솔치가 매우 높았다(대신, 정치가 바닥을 기던 경우가 대부분).
일러스트는 배가본드의 무사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8.2. 태합입지전 5


KOEI사의 게임 태합입지전5에선 마지막 시나리오인 1598년 태평의 장에서만 15세로 등장. 태합에서 사범들 능력치가 그렇듯이 무력을 제외하면 초라한 능력치. 그래도 무력95는 시나리오내에서 3위이며(1위 이토 잇토사이 98, 2위 야규 세키슈사이 96) 94를 찍은 사사키 코지로에 한끝차 우위인데 실제 코지로는 전용검 모노호시자오(무력+2)를 가지고 있어서 코지로가 우위다. 단 칭호를 가지게 될 경우엔 칭호에 붙는 부가 무력이 보통 검들 따위는 찍어누르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다만 무사시로 직접 플레이할 경우 전용 루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꽤나 재미있을 뿐더러 스킬들을 여러개 가르쳐줘서 스토리만 잘 진행하면 누구든 압도할 수 있다. 요시오카 가문의 첫째, 둘째를 베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설의 백인베기(세이브 없이 적들이 5번 연속으로 등장한다. 지혈을 배워두지 않았다면 매우 어렵다.)를 해내고 중간에 시시도 바이켄도 베고(요시오카 세이주로, 덴시치로, 시시도 바이켄의 주인공 카드를 얻는 건 오직 무사시로 이벤트를 보는 것으로만 가능하니 카드 수집을 한다면 놓치지 말 것.) 마지막으로 간류섬에서 코지로와 대결하는 것[47]까지인데 여기까지 끝내면 무사시 전용 엔딩을 볼 수 있고, 아니면 계속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8.3. MUSASHI -GUN道-


괴작 MUSASHI -GUN道-의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 성우는 나미카와 다이스케로, 전국 바사라 2에서도 미야모토 무사시 역을 맡았다.
리볼버를 쌍권총으로 '나류(おいら流)'의 GUN道(건도 - 총으로 근접전 및 사격전을 펼치는 총기 무술이다.)를 사용하는 건도사로 나이는 16세이지만 건도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1인칭은 오이라(おいら). 좋아하는 음식은 히츠마부시(장어덮밥)이다.
직업은 시로토리(城盗り, 성털이)로, 30채 이상의 성을 털었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여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전기검이나 수면탄으로 상대한다. 이전에 사사키 코지로와의 결투에서 패한 적이 있어 사사키 코지로를 엄청 싫어하며 무사시 앞에서 이름만 언급해도 분노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답게 작붕 피해자의 한 축을 구성한다. 사실 어떤 얼굴이 원래 얼굴인지를 모른다.

8.4. 기타


MBC 사극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왕년의 액션 스타 황정리씨가 무사시 역을 맡아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과 만화에서 가끔 얼굴이 나온다. 검귀 라마블에서 한번 나오고 마계전생에서는 악역으로 나온다. 평생동안 검만 인생을 바친 것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이어지지 못한 것 때문에 후회를 하여 마인으로 전생을 하게 된다.
지상 최강의 남자 류에서는 예수가 부활시킨 인류 최강의 두 명 중 하나로 등장한다. 다른 한 명은 브루스 리.
가면라이더 고스트에 15명의 위인중 15위인의 대표군주로 나온다. 그리고 한국판에서는 이도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15위인들중 유일하게 행적이 많고 개별문서가 존재한다.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로사의 일본식 이름인 무사시도 여기서 따 왔다.
전생검신의 등장인물로 절대지경에 이른 인세 최고의 고수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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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당천에서는 미소녀로 TS되었으며 신멘 다케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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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소년에서 경호의 31번째 사용 영혼으로 등장한다. 수식어로 '''이도류 달인.'''

[1] 공중에서 목검을 내려치고 있는 사람이 '''미야모토 무사시''', 밑에 있는 사람이 '''사사키 코지로'''다. 다만 각종 매체에서 무사시가 두 자루를 쓰는 건 보기 힘들다. 대부분 커다란 목도 한 자루만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2] 이토 잇토사이는 생년도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적은 검객이다.[3] 오륜서의 땅의 서에 보면 각 무기가 쓸모있는 상황과 장소를 써 놓는다. 예로 창과 나기가타는 넓은 곳에서 강하지만 좁은 곳에서 불리하다든가, 단도는 좁은 곳에서 유리하다든가.[4] 1584년생이 정확하다면 임진왜란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에 불과하다.[5] 차라리 승자의 이름을 딴 무사시지마가 되었다면 더 납득이 갔을 수도...[6] '군략'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식 한자어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에서도 쓰인 한자어다.[7] 검술 사범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지만, 검술 사범 역시 아니었다. 호소카와 집안의 검술 사범은 야규 무네노리였고, 야규 무네노리가 없을 때 배울 검술 사범 역이었던 게 검술 사범으로 호소카와 가문에서 1천석을 받았으며, 성격이 더러워서 가신들과 불화를 일삼고, 무사시에게 진검 승부 신청해서 무사시를 도망치게 만든 니카이도 류의 마츠야마 몬도다. 무사시 측 사료인 이천기의 묘사 자체부터가 객장이다.[8]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봉록이어서 일본인들도 싸움질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일본인들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아이다 유지, <일본인의 의식구조>)[9] 즉 사무라이들은 신장의 야망 게임에 이름이 나올 정도만 되어도 죄다 석고로 받았다.[10]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받았던 벼슬[11] 야규 무네노리참조. 하타모토로 등용되어 200석이며, 야규 무네요시에게 따로 수여된 영지 500석도 있다. 또한 1601년 오노 타다아키가 사고를 쳐서 폐문당한 후 히데타다의 병법 사범으로 임명되는데 그 때는 1천석을 추가로 가증 받았다.[12] 이에야스 때 600석 +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 1000석 이하 배신들 200석 일괄 가증으로 타다아키 당시에도 800석까지 승진[13] 자세한 타다아키의 기행들은 오노 타다아키 참조[14] https://ja.wikipedia.org/wiki/%E6%9D%BE%E5%B1%B1%E4%B8%BB%E6%B0%B4[15] 한 드라마에서는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출신이었던 이력 탓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니텐이치류의 사범인 탄지 미네히라의 기록으로는 동군 출신으로 쿠로다 칸베 밑에서 오토모 가문과 싸웠다는게 거의 확정적이다. 특히 아버지인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에 쿠로다 가문에 사관했다는 기록과 본인도 오토모가와의 싸움에서 분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16] 그것도 저쪽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을 비롯하여 당대 일본을 이끌어가던 다이묘들 다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상한 짓거리를 해댔다.[17] 쉽게 말하면 대충 어느 정도 이상을 받았느냐 못 받았냐가 곧 '''당대에 무사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여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준이다. 적어도 현대인이 사료만 보고 판단하기에 무사시는 그런 기준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무사란 소리.[18] 보상의 구체적인 예 하나를 들자면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수제자였던 사이토 카츠히데는 천황 앞에서 진검승부를 펼쳐서 승리한 후 판관직을 수여받았는데 이 판관직은 '''최소 종 5위'''의 관직으로 그 우에스기 겐신이 많은 뇌물을 바쳐서 받았던 종 5위 탄정소필이라는 관직과 동격 혹은 상위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교토 입성 전까지 관직을 못 받아서 카즈사노스케와 오와리노카미를 '''자칭'''했었다. 검술 시합 한 번으로 이 정도 수준의 관직도 받을 수 있었던 것에서 당시 유명한 검호들의 대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 시합에서 받을 대전료에다 혹시 유명인의 검술 사범이 된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도 다른 댓가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정확히 얼마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어쨌든 검술 실력 하나만 있으면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입신양명을 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이야기다.[19] 다만 이 사건은 야규 가의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으며 일도류 측의 기록에만 전해져서 신빙성이 떨어진다.[20] 사실 33회의 이토 잇토사이 역시도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미스테리한 인물 + 오노 타다아키와 일도류가 에도시대의 양강 유파가 되면서 제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의 허구성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는 인물이다. 한편 진짜 기록이 검증됐으며 다수의 진검 승부를 벌였다고 전해지는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진검 승부는 기록된 걸로 19회.[21]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에서는 무사시의 관직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마타하치의 어머니 오스기가 독기를 품고 무사시 악담을 하고다녀 그 이유로 채용을 반려했다는 내용으로 설명이 되어있다.[22] 일본의 소설가, 대중 문학가, 영화감독. 대중 문학에 관한 책들을 쓰는 등 일본 대중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권위자로, 병으로 요절 후에는 그를 기려 나오키 상이라는 상이 제정되어 현재도 아쿠타가와상과 함께 권위있는 상으로 이름높다.[23] 역시 일본 문단의 권위자, 문예춘추의 설립자[24] 感状. 전공증명서. 이름있는 자의 목을 베거나, 제일 앞서서 돌격하거나, 퇴각시 후미를 맡을 때 주어진다. 오늘날 직장생활에 비유하면 경력증명서이며, 군대에 비유하면 훈장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25] 본조무예소전(本朝武芸小伝). 에도시대 정리된 각 무예, 무술가들에 대해서 정리된 책이다.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신빙성도 높아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은 편.[26] 요시오카 세이주로 본인이 참살당했다 or 문제를 일으킨 건 요시오카의 일족 중 한 사람이다 등의 이설 있음[27] 본가는 심지어 아직도 교토에서 영업 중이다[28] 현재 태합입지전이나 신장의 야망게임에서 등장하는 창작물에 등장하는 공가들의 흑갈색의 옷이 켄보조메로 염색한 것이며, 당대 공가들에게 유행하여 다들 이 켄보조메를 사용한 흑갈색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29] 존재하는 인물인지, 진짜 무사시의 친 아버지인지 양 아버지인지도 정확히 알수 없다.[30] 벼슬을 산 것도 요시오카 나오모토 한 명뿐이며, 불린 적도 없다.[31] 검술시합 한번으로 종 5위하를 받던 시대에, 요시오카 나오츠나에게는 벼슬이 없는 걸로 봐서 역시 사실이 아니다[32] 다른 역사 기록이 전무하다. 양자가 어전 시합을 벌였다는 사실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천하 무쌍이라는 칭호를 내린 적도 없다. 반면에 진짜로 천하제일의 칭호를 받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천하제일의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들이 현존한다.[33]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인기를 끌게 되면서 오카야마현은 자기네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라며 관광 홍보를 하게 되었다.[34] 예컨대 위의 간류지마의 결투라던가, 요시오카와의 승부에도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는것만 봐도[35] 오륜서의 전작[36] 물론 아무리 대단한 검호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전쟁통에서 성에서 던진 짱돌에 맞지 말라는 법은 없고 맞으면 당연히 부상을 당해서 드러눕게 된다. 전쟁터를 돌파해서 적장의 목을 따고 돌아온 관우도 화살에 맞아서 수술까지 했다.[37] 이건 사실 이천기의 기록이긴 하다.[38] 오조인 도에이에게 이겼다는 건 이천기, 인슌은 요시카와 에이지[39] 역시 이천기[40] 니텐기, 실제로 니텐기에는 시시도 바이켄이 아니라 아무개라고 써져있다. 아무래도 닌자니까 신원 미상으로 만들어야 닌자같지 않을까. 라는 토요타 카게히데의 고민이 보인다.[41] 역시 둘 다 이천기가 최초 출처[42] 이런 이유는 대일본무덕회의 성립 자체가 국민에게 무도 보급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검도의본은 중등학교의 교육용으로 만들어졌다.[43] 이 세 작품은 모두 '''현대 일본인들을 만들어낸 교양+사상서 100선'''에 당연히 모두 뽑혀 있으며 심지어 병법 가전서와 오륜서로 현대 검도에 막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친 공로로 야규 무네노리와 미야모토 무사시는 각각 전 일본 검도연맹에서 특별 현창까지 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이전의 검호는 북진일도류의 치바 슈사쿠를 포함하여 무네노리+무사시 3명 뿐이다.[44] 복잡한 비판은 아니고 단순하게 개념 한두 개를 비판하는 형식. 병법가전서가 사상적으로 대단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일본 기준으로 당대 일본의 작품치고 대단한 작품이라는 거니.[45] 보쿠덴은 1489년에 태어나 1571년에 죽었고 무시시는 오륜서 내용 기준으로 1584년에 태어나 1645년에 지바성 저택에서 죽었다. 참고로 그냥 늙어 죽었다.[46]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여타 검객들에 비해 그 점에서 유독 뛰어났다는 이야기다.[47] 이 코지로는 플레이용 코지로와 달리 각종 보정을 떡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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