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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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道山(りきどうざん)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출생 당시)[1], 일본명은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

'''세상에서 가장 크게 웃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향에서는 참 많이 웃었는데, 일본으로 오니까 웃을 일이 없더라. 웃으면 가난한 조센징이 웃는다며 미쳤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고.'''

1. 소개
2. 생애
2.1. 출생
2.2. 스모 활동
2.3. 프로레슬러 활동
2.4. 사망
3. 일화
3.1. 숨겨진 정체성
3.2. 무자비한 구타전설
3.3.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
4. 가족
5. 대중매체
6. 기타
7. 둘러보기


1. 소개


역도산(力道山, 1924년 11월 14일[2] ~ 1963년 12월 15일)은 재일교포 출신이며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기초를 닦은 인물.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개척한 최초의 스타이며,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2. 생애



2.1. 출생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 출신. 김신락은 씨름 대회에 나갔다 하면 이기고 돌아오는 괴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큰 형과 둘째 형도 씨름 장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김신락이 스모 수련을 받고 잠깐 돌아오기 전에는 김신락도 둘째 형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는 10대였지만 이미 결혼도 해서 아이도 하나 있었다.
신체는 181cm, 몸무게는 110kg(프로레슬러 천규덕 증언)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활약할 때는 공식적으로는 규슈 나가사키시의 모모타 가문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이 설정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2.2. 스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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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그의 씨름 실력을 본 일본인 프로모터가 김신락을 일본으로 데려갔으며, 모모타 가문에 입양되어 모모타 미쓰히로란 이름을 얻고 스모계에 입문한다. 역도산이라는 이름은 그 때에 붙여진 예명. 이 당시에 스모계에서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모 동료들은 호적상의 이름에 관계없이 그를 '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출신임을 밝히고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스모 선수도 있었다. 지이노야마 쇼이치로(智異ノ山正一郞, 통칭 지이노야마)[3]는 1940년에 1월에 데뷔하여 주료 3번째(十両3枚目)까지 승급했지만, 1945년 11월에 자진 폐업.
1949년 5월 세키와케(関脇)[4] 자리까지 올랐지만 폐디스토마 감염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 1950년 9월에 자진폐업. 출신을 알게 된 스모협회 측이 그를 서군에 배치한 것이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역도산의 폐업은 스모 선수의 정규 절차를 무시하고, 부엌에서 스스로 부엌칼로 상투를 잘라버린 것이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평생동안 화려하고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이때부터 이미 그 끼가 보여서 스모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자유분방한 패션을 자랑했다고 한다.[5] 일본 패망 이전에는 상당히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패망 이후에 급격히 자유분방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도산은 이 무렵에 나가사키를 출생지로 하고 있는 일본 호적을 얻게 된다. 역도산의 호적이 어떻게 처리된 것인지는 의문이 많은데, 일본 패망 전에 일본에 살던 조선인이라도 호적은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역도산이 일본인 모모타 가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라고는 해도 '출생지'가 아예 다른 호적이 있는 것은 절차상 불가능하다. 전후 혼란기를 틈타 (아마도 후술할 닛타의 도움을 받아) 편법적인 수단을 써서 호적을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스모를 그만둔 후 친밀한 사이의 사업가였던 닛타 신사쿠(新田新作)[6]의 건설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역도산은 이 때 생활이 무척 어려웠는데, 평생동안 다른 조선인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역도산도 이 때는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갈 정도로 의지했다고 한다.
닛타의 건설회사에서 보디가드 노릇을 하다 술집에서 우연히 일본계 미국인 프로레슬러인 '''해롤드 사카타'''[7]를 만나게 된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싸웠는데(…) 둘다 서로의 힘에 감탄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역도산이 자기 입으로 말한 무용담이고, 실제로는 영화 역도산에서처럼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해롤드 사카타가 그만두라며 숄더 클로와 스탠딩 크로스페이스 락을 걸자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8][9] 해롤드 사카타는 체구는 역도산과 비슷하지만 1948년 역도 헤비급 은메달리스트 출신에 자기보다 덩치가 몇배는 더 큰 프로레슬러들도 메다꽂고 던져버리며, 그런 유럽선수들에게 팔씨름한번 져본적이 없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스모 선수로서는 처음 접해볼 관절기를 걸어버렸으니 답이 없었을 것이다.
해롤드 사카타는 역도산의 투지와 근성에 크게 감탄했고, 역도산도 사카타와의 인연을 토대로 프로레슬링 세계에 뛰어든다. 역도산 먼저 일본에서 몇 차례 경기를 하여 가능성을 본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본격적으로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게 된다. 이전까지 스모 선수 특유의 펑퍼짐한 체격이었던 역도산은 하루에 1000번씩 복근 운동을 하는 맹렬한 훈련을 거쳐서 철저하게 프로레슬러 다운 몸매로 자신의 신체를 바꾸게 된다.
하와이미국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가지면서 인맥을 쌓아 NWA 프로모터 자격을 얻게 된다.

2.3. 프로레슬러 활동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1953년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日本プロレス協会)를 창설해 여러 차례 프로레슬링 흥행을 성공시켰다[10].

1953년(쇼와 28년) 12월 6일, 루 테즈를 상대하는 역도산.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 거구의 서양인 프로레슬러들을 초청하여 대결했다. 서양인 프로레슬러를 (일단은) 일본인[11] 역도산이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서양인에 대한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역도산의 마케팅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당시 막 꽃피기 시작한 TV방송과 맞물려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프로레슬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역도산은 당대 일본 최고의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역도산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편지나 엽서의 받는 사람 주소 공란에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적어서 우체통에다 넣으면 그대로 역도산 앞으로 배달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일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에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역도산의 집 주소를 몰랐음에도 편지는 무사히 도착했고 석방된 뒤에 역도산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프로레슬링의 거물이 된 역도산의 제자들 역시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현 일본의 2대 메이저 단체인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자이언트 바바,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아버지이자 독립한 두 제자대신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를 물려받은 김일까지. 이런 관계로 현재 한일 프로레슬러들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대부분이 역도산에 도달하게 된다. 무협소설로 치면 대사조(大師祖) 격(…) 북미 프로레슬링에 루 테즈가 있다면 한일 프로레슬링에는 역도산이 있는 것.
엄청난 돈을 동원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리키(力) 스포츠 팰리스'''라는 상설 프로레슬링 경기장 겸 복합 레포츠 빌딩을 건설했다.

2.4. 사망


1963년 12월 8일, 도쿄 소재의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 화장실에서 야쿠자 조직원인 무라타 가쓰시와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물론 일개 폭력배가 격투를 본업으로 하던 역도산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고, 당연히 무라타는 제대로 두들겨 맞다가 작은 주머니로 역도산의 복부를 찌르고 도주한다. 복부에 칼을 찔리는 부상을 입은 역도산은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산노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39세의 나이에 복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역도산을 찌른 사람은 당시 재일교포 야쿠자이자 한국 정치계와의 연줄로도 유명했던 정건영(鄭建永)[12]토우세이카이와 경쟁 관계인 스미요시카이 소속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형욱의 회고록에 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약간 황당한 이야기인데, 칼에 찔린 부상 자체는 얕아서 간단한 수술 후 의사의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지시만 따르면 퇴원할 수 있었으나, 역도산이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자에게 몰래 사이다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마셨다가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긴 한데, 성격과 행보 탓에 평소에도 적이 많았다. 사인도 직접적으로 칼에 찔린 것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수술 후에 마취를 풀다가 마취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한편, 그를 찌른 무라타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여 석방된 후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상당한 거물이 되었다. 2013년 4월 13일에 지병으로 죽을 때까지 당시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꺼렸다.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선 우연히 시비에 휘말려 애송이 무라타의 칼에 찔렸으나 별거 아니라면서 병원에 가자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을 마시고 식사도 거하게 하면서 노래까지 부르던 중,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나온 바 있다.
사망 당시 일본 국장에 가까운 수준의 추모 인파와 함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후 역도산의 팬들은 "역도산 사망 원인 규명하라!"고 다수 의문 제기를 과격하게 하기도 했다.
도일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식이 있었는데, 지금 북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정치쪽으로의 입문을 계속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북한의 김일성과 친분을 만들기도 했다. 역도산이 김일성에게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W111 1대를 선물한 적도 있는데 그 덕분에 김일성에게서 귀여움을 받아(...) 북한 주민들도 알아서 영웅대접을 해주었다. 이 덕분에 의외로 북한에서 전기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야쿠자에게 죽은 이면에는 정치계로 진출하려는 그를 우익쪽에서 안 좋게 봐서 수를 쓴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한편, 평상시에도 성격이 안하무인이던 면이 좀 있던 관계로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역도산 사후에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간단히 무너져 내렸다.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겉으로는 매우 화려한 기업이었고 역도산도 여기저기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지만 자금 사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으며, 사업의 거의 모든 것을 역도산이 혼자서 담당하다시피 하다 보니 역도산이 사망하자 사무행정을 처리할 사람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13]
묘는 도쿄도 오타구 이케가미의 혼몬지에 있다.

3. 일화



3.1. 숨겨진 정체성


역도산은 일본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으며,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지도할 때나 사석에서나 한국어를 한번도 쓰지 않는 독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유일한 예외로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잡담하던 중 역도산이 "에 키쿄(桔梗, 도라지)를 넣고 비벼먹고 싶다."라고 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몰라 머뭇거리자 역도산이 "긴타로(김일의 일본 이름), 기쿄가 뭔지 몰라? '''도라지'''란 뜻이야" 라며 도라지를 한국어로 했다고 한다. 그 '도라지' 라는 말이 김일이 역도산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말이었다고...
그러나 그도 먹을거리에 대해선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평소 불고기마늘을 듬뿍 얹어서 먹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친구[14]가 운영하는 불고깃집에 남들 모르게 새벽 또는 밤 늦게 찾아가 불고기에 마늘과 소주를 양껏 먹고 마신 후 돌아갈 때엔 입냄새를 지우려고 껌을 한 움큼 씹으며 갔다고 한다.
집 안에는 한국 노래 레코드를 쌓아둔 방이 있었고, 남몰래 한국 노래를 들으면서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2. 무자비한 구타전설


역도산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거칠어서 자신의 체육관에서는 제자들을 일상적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구타는 딱히 이유가 있건 없건 그냥 막 벌어진 듯하다. 게다가 수련 과정에서도 거의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했는데, 예를 들어 김일의 경우 역도산이 박치기를 하려면 머리가 단단해야 된다면서 갑자기 신고 있던 게다(나무나 쇠로 만들어진 일본 나막신)를 벗어다가 김일 선수의 머리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거나, 자이언트 바바가 기술에 대해서 물어보자, 갑자기 앞뒤 안 가리고 막 두들겨 패더니만 한참 뒤에 설명을 하기 시작한 에피소드(자이언트 바바 항목의 노텐(腦天)챱 참조)가 있다. 그나마 바바는 역도산이 특별관리한 케이스라서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취급을 받았는데도 저 정도다.
특히 역도산에게 가장 많이 맞은 게 1위가 김일, 2위가 이노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너무 구타가 심해서 그냥 학대 수준으로 밖에 안 보였다고 한다. 이노키의 경우는 너무나 심한 푸대접에 레슬링을 포기하려던 차에 '바바같은 거인은 알아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김일이나 이노키 같은 케이스는 오로지 근성으로만 스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제자보다 더 혹독하게 대한 것이다' 라는 역도산의 위로로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역도산은 사망한 지 오래이니만큼 이노키 혼자만의 증언이긴 하지만, 비슷한 증언으로 김일 선생이 말년에 투병생활 하던 때 찾아온 동년대의 일본인 레슬러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넌 스승님에게 엄청나게 미움받았거나 엄청나게 사랑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영화 "역도산"에서도 묘사되는데, 높으신 분들이 가족을 데려와서 역도산과 그 제자들의 연습을 구경하는데 제자들이 시원찮아서 아이들이 시큰둥해하자 직접 링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기술을 건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좋아했으나 역도산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자 겁에 질려서 울어버린다.
일본에선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이 역도산의 밑에서 연습을 했었던 탓에, 이것이 대물림되어 '''일본 프로레슬링 전반에 걸쳐서 구타문화가 심각한 편.''' 지금도 가끔 일본 프로레슬러들의 무자비한 구타영상이 돌아다니곤 한다. 사실 이것은 역도산만의 문제는 아니며,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일본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사실 세계적으로 스포츠계의 가혹행위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마에다 아키라는 심지어 TV생방송 중에 선수들을 두들겨 패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그런가 하면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가 자기 체육관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폭력을 가하는 게 촬영되어서 인터넷에 돈 적이 있는데 군기 잡기나 체벌 레벨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 레벨. 게다가 트레이닝 지도 중에 그냥 아무나 보이는 대로 마구 때린다.
이 급하고 난폭한 성격은 다른 곳에서도 바뀌지 않았는데, "역도산이 사람을 팼다"는 식의 기사는 거의 스포츠 신문의 단골로 등장할 정도였다. 역도산 본인의 해명으로는 자신이 유명하다 보니까 워낙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 난폭함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울분과 억압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역도산은 말기에 경기력을 위해서 흥분제 등의 약물을 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더욱 성격이 난폭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어릴 때 이미 한번은 둘째 형과 다투다가 솥뚜껑을 집어던져서 둘째 형의 목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그냥 본성이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해방 전에 일본에서 스모 선수 활동을 하다가 오랜만에 잠시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역도산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딸 영숙이 자꾸 울어대자 '이런 애는 내 딸이 아냐!'라고 화를 내며 마당에 집어던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냥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3.3.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


위에서 언급했듯이 평생 적을 여럿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게 유도가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15]와의 '''쇼와의 간류지마 혈투'''가 있다. 사건 자체만 요약하자면, 유도의 신이나 마찬가지이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생활고 탓에[16] 프로레슬링 무대에 뛰어들었다가, 한동안 역도산과 한 팀으로 활동했으나 이후 자기 프로 레슬링 단체를 창설하고 독립하여 역도산과의 대결구도로 시합을 하게 된다. 원래 정해진 워크는 처음 시합을 무승부, 이후로는 둘이 합의하에 그때 그때 이기고 지기를 번복하는 것이었는데... 실제 시합중에 역도산은 기무라에게 로블로를 맞은 뒤 격분하여 '''프로 레슬링 기술을 그만두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통해 그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기무라는 영문을 알 수 없이 맞다가 쓰러지고 만다. 이것을 쇼와의 간류지마(昭和の巌流島) 사건이라고 한다.[17]
자세한 것은 쇼와의 간류지마 문서 참고.

4. 가족


역도산의 가족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 자신의 복잡한 인생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편력(…)이 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아버지 김석태(金錫泰) : 직업은 지관이었다고 한다.
  • 어머니 전기(田器)
    • 장녀 인녀(因女) : 호적을 담당하는 동사무소의 일본인 직원이 잘못 알아들어서 호적에는 '기인녀'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 장남 항락(恒洛) : 역도산 보다 16살 연상. 역도산과 마찬가지로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았다고 한다. 형제가 같은 씨름 대회에 나가서 항락은 1위, 신락은 3위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차녀 구임(久任)
    • 차남 공락(公洛) : 서울로 고용살이를 하러 갔었다고 한다.
    • 삼녀 을복(乙福)
    • 삼남 신락(信洛)
      • 처 박신봉
      • 딸 영숙(英淑) : 역도산이 15세에 낳은 딸이다. 이 딸의 딸, 즉 외손녀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역도 감독으로 나왔다.
  • 양부 모모타 미노스케(百田已之助)
  • 양모 다쓰[19]
    • 양자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 : 1924년 11월 14일 나가사키 출생으로 되어 있다.
      • 오자와 후미코 : 두 번째 아내. 게이샤 출신이다. 역도산의 아들 두 명을 낳았고 이혼 전까지 친자식을 포함해서 역도산에게 학대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이혼하고 나서 평생 역도산을 증오했다.
        •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
        • 차남 모모타 미쓰오(百田光雄)
      • 다나카 게이코 : 세번째 아내. 스튜어디스 출신이다. 1963년 6월 5일 결혼.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역도산이 사망하여 미망인이 되었다. 남편이 빨리 죽어서 다행이지 멀쩡했으면 그녀 역시 두번째 아내처럼 학대당해 이혼했을 것이 안 봐도 비디오.[18]

5. 대중매체


바키 본편에서는 역강산이란 이름으로 마운트 도바의 회상에 잠깐 등장하는데, 본편에서는 그렇게 안습한 모습은 안보이고 오히려 지하투기장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다만 지하격투 대회는 대중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다보니 죽은 후에는 깡패따위에게 당하다니 역시 레슬러는 아무리 강해도 결국 광대일 뿐이라는 식의 비이냥은 피할 수 없었고, 이것이 마운트 도바가 레슬러는 실전에서도 강해야한다고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오로치 돗포가 주인공인 바키 외전 권인에서는 한마 유지로의 부친인 유도가 한마 유이치로를 상대로 승부 조작 경기를 벌였다가[20]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오로치 돗포에게 지하투기장으로 호출돼서 코까지 잘려가며 탈탈 털리고 언론에 반칙 경기를 시인한 것으로 나온다. 역시 안습.
이타가키 케이스케의 또 다른 만화인 아랑전에서는 취급이 더욱 나쁘다. 극중 역왕산(力王山)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제자인 그레이트 타츠미(안토니오 이노키가 모델)를 온갖 구타와 기합으로 괴롭히다 타츠미의 원한을 사게된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틈을 타 타츠미에게 기습을 당하고 고환이 쥐어 터지며 실신을 당하게 된다. 깨어난 역왕산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할복하여 자결을 한다.[21] 여러모로 역도산에 대한 이타가키의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듯.
  • 고교철권전 터프에서는 아이언 키바라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오마쥬한 인물의 아버지로 나온다. 그 뭣같은 성깔에도 불구하고 그 강함에 매료되어 인생을 바쳤던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의 모습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 영화 역도산에서는 설경구가 연기했으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묘사한 입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설경구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어 대사 때문에 더빙을 제안받았으나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지 않는 배우는 연기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거절 후 스스로 5개월간 독학하며 극중 일본어 대사를 모두 완벽히 소화해 냈다고 한다. 영화를 위해 체중을 무려 30kg나 불리고 레슬링 기술까지 수련했다고. 역도산의 아내 역에는 나카타니 미키가 연기했다.

  • 백병무자에선 중장갑의 갑옷을 입은 대신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술 백병술의 창시자로 리키도잔 대선사로 등장한다. 작중 시점에선 한참 과거의 인물이라 등장은 많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회상씬에서 등장할 때마다 자애로운 고승의 이미지로 나오는 압박이 있다(...). 작가 쵸노 마사히로부터 프로레슬러 출신이라 어쩔 수 없던 듯.
  • 익사이팅 아워에서는 역도산을 모델로 한 듯한 가라테 파이터가 2탄 보스로 등장한다. 잡히면 주인공의 뒤통수에 춉을 연속으로 빠르게 3번 날린다.

6. 기타


  • 일본뿐만 아닌 대한민국북한 모두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몇 안되는 조선인이다.[22] 상술되었지만 역도산은 북한 땅인 함경도 출신에 김일성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면서도 남한과의 교섭에도 적극적이어서 1963년 1월에 서울을 방문하여 한일간의 스포츠 교류를 의논하기도 했다.[23] 그의 사망 당시에는 북한뿐만이 아닌 남한에서도 대한뉴스에서 주요 소식으로 방송하여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애도를 표할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남북한의 정치적인 의도였고, '일본에서 활약하여 전세계에 위엄을 떨첬고, 그러면서 언제나 조국을 생각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북한에서는 조선인) 역도산' 이라는 프로파간다성 홍보로 잘 써먹기 위한 목적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역도산이 북한정권 찬양자였다는 주장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일본인 유족(일본인 아내와 아들)들도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자유사회의 이상을 사랑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 CIA 암살설은 거짓이다.' 라고 북한의 역도산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기도 했다. 다만 1950~60년대에는 공산주의의 한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남북한의 국력과 경제력 역시 서로 엇비슷했으며 한국도 말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일 뿐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하게 이승만, 박정희가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인 시대적 환경으로 볼 때, 역도산은 실향민 1세대로써 고향을 그리워했고 체육인으로써 자신을 민족영웅으로 띄워주는 북한을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와 좋게 지내는 노선을 걸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애당초에 역도산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굳이 대한민국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반공이 국시였던 대한민국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을리도 없다.
  • 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은 WWA 세계 챔피언 등극으로 단 한 번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 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프로 레슬링계에서는 역도산의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타이틀이 사실상 '세계 챔피언과 동등'했기 때문에 '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이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주장은 애매하다. 그 외에도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의 초대 주인이다.
  • 그의 레슬링 스타일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팬들이 보기에는 심심한 스타일이다. 50년 전 프로레슬링은 바디슬램같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기본 기술들이 경기를 끝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기에는 경기 초반에 나올 법한 기술이 경기 내내 나오다가 경기가 끝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도산의 전매특허이자 루 테즈의 936연승을 끊은 가라데 챱만큼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하다.
  •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난폭하고 오만한 성격이었지만 자민당의 거물정치가였던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만은 매우 존경하여 오노가 술상을 차려와라(...)하면 군말없이 술상을 내왔다고 한다.
  • 이삿짐 배달에도 레슬러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고급술(당연히 선물받은 술)이 많은데, 사후 제자 레슬러들이 그 술들을 진탕 마시고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의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역도산이 김일에게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수련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역도산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 역도산의 둘째 아들인 모모타 미쓰오가 6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레슬링을 하고 있다. 흠좀무.. 아들 모모타 미쓰오는 아버지랑 달리 여태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이 조용히 살고 있다.
  • 한일합작으로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어 개봉하기도 했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했으며 주인공 역도산을 설경구[24]가 연기했으며, 링 시리즈, 전차남,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나카타니 미키, 감각의 제국에서 명연을 보여준 후지 타츠야, 배용준이 출연한 모든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용준의 더빙을 담당한 성우[25]이자 배우[26] 하기와라 마사토, 그리고 박철민이 출연했다. 하지만 아깝게도 흥행에는 실패했다.[27] 한겨레21에 의하면, 영화가 그를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그리지 않아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가 '나 역도산,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난 세계인이다' 였으니 그럴만도..[28] 일본 프로 레슬러들도 엄청 나와서 일본 프로 레슬러 팬들은 볼만 할 것이다. 무토 케이지, 하시모토 신야, 아키야마 준 등등.
내용은 음모론이 절정을 이루고 황당하다. 참고로 이 만화는 한국에서도 나왔는데 감수를 맡은 전직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곳곳에 왜곡이 많다고 당시 실화 이야기를 썼다.(이 만화 마지막을 보면 역도산이 병원에서 죽는데 당당하게 나오며, 죽을 때도 아주 거룩한 분위기로 죽기까지 한다...(주변 사람들이 조용하게 슬퍼하고 무슨 성자가 죽는 분위기로 그렸다.)감수를 맡던 이가 "세상에 이런 왜곡을. 그가 죽을 당시에는 기자들에 지인들, 팬, 내연녀나 자기가 생모라고 주장하는 여성, VIP나 야쿠자들이 몰려와서 주변은 엉망이었다"는 글귀를 써 붙일 정도...)
북한 찬양부분은 삭제되었는데, 특히 한국 번역판에서 유언은 나는 위대한 조선사람이라지만 원본(과 그걸 직역한 일본판)에 의하면 김일성 찬양유언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프로파간다식 내용도 그렇지만, 북한 찬양이 문제가 될까 봐 그런 부분은 삭제한 것도 좀...(억지스러운 내용 전개와 아스트랄한 프로파간다는 이 만화의 컬트성과 병맛을 더해준다. 그게 역으로 코미디로 작용하지만)
줄거리는 역도산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 레슬러들을 이기고, 특히 미국의 강한 레슬러들을 거꾸러뜨린다. 그리고 걸핏하면 미국인들이나 미군들과 시비가 붙어서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다는 것이다.(진짜 많이도 나온다. 북한에서 그린 거니...) 북한 찬양과 김일성 찬양이 곳곳에서 나온다.(김일성에게 고급 승용차 준 건 미화가 철철 넘친다. 역도산이 실향민, 특히 함경도 출신이니) 내용은 수묵화(참신하다!)인데, 그린 이는 김태권(남한의 만화가와 동명이인)이다. 이 만화는 "영웅 역도산"이라는 한국 서적에도 수록되어 있다.
  • 외국 프로 레슬링 선수들을 불러오면 개런티를 주어야 했는데, 이들은 개런티를 미국 달러로 지불받기를 바랐다. 당시 못 살던 일본에서는 달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엔은 너무 가치가 없어서 외국 선수들은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역도산은 달러를 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사용했다. 미국 치하에 놓여 있던 오키나와에 가서 프로 레슬링 미군 위문 공연을 열고 달러를 얻어오거나, 심지어 재일교포 인맥을 통해 한국에서 달러를 끌어오기도 했다.
  • 성우 겸 배우인 코야마 리키야의 이름의 어원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코야마 리키야의 아버지가 그의 팬으로, 역도산이 사망한 달에 코야마가 태어났는데[29] 역도산의 '역도'만 따서 지으려고 했다가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힘 력(力)만 따와서 지었다고.
  • 한 잡지의 내용에 따르면 최배달의 제자를 묵사발로 만들어 그와 대결구도까지 갈 뻔했으나 주변의 만류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사실은 역도산이 그를 먼저 피했다고 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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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WWE 명예의 전당 레거시 어워드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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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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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어째서인지 김광호로 잘못 기재된 문헌도 있다. 1984년에 첫 출간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김광호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최영의”가 한국에서 “최배달”로 알려진 것과 같은 것처럼 한국 성이 “김(金)”씨인 것과 일본 내의 공식 본명이 “광호(光浩)”였던 것에서 유래한 듯.[2] 역도산은 출생연도나 나이를 속인 의혹이 있어서 생년월일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고향 친구인 진명근은 1923년 생이었는데, 역도산의 나이를 '''자신보다 한살 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1922년 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3]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智異(ノ)山는 바로 지리산의 한자이다.[4] 천하장사 격인 요코즈나(横綱)와 오제키(大関) 다음 등급[5] 현대 스모에서는 스모선수들의 운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며, 운전이 발각되면 은퇴권고를 받는다. 말이 권고이지 실제로는 해고에 가까운 처분인데 운전 자체가 불법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해고를 선고하기가 곤란하여 은퇴권고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 뿐이다. 다만 해고와는 달리 퇴직금은 그대로 나온다.[6] 일본군 출신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온정적으로 대했고 그 때문에 나중에 미군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 인맥으로 GHQ에서 발주받고 GHQ의 뒷빽으로 자금을 빌려 건설회사를 경영해서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역도산의 스폰서였으며 일본 프로레스링의 대주주였고, 역도산의 두번째 결혼에 중매를 서기도 했다. 사후에 자신의 지분을 모두 역도산에 넘긴다.[7] '''일본계 미국인'''으로 007영화 골드핑거에서 중절모를 던져 사람을 잡는(...) 오드잡 이라는 프로레슬러로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참고로 1948년 런던 올림픽 82kg급 역도 은메달 출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었다.[8] 이 증언은 역도산이 행패를 부린 바의 지배인이 증언한것으로 역도산은 술에 취해 손님 한명과 이를 저지하러온 바운서 둘을 무자비하게 때렸는데, 이가 부러질정도로 때리자 지배인이 해롤드 사카다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9] 참고로 영화 "역도산"에서는 해롤드 사카타의 역할을 무토 케이지가 맡았고, 여기서는 헤드락으로 제압당한다. 덕분에 이 장면은 영화 내 프로레슬링 장면 중 최고로 박진감이 넘친다.[10] 1920년대에 이미 '대일본 프로레슬링 보급회'라는 단체가 있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것은 역도산이 처음.[11] 모모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일본 호적으로 옮겼으니 조선인 출신이기는 해도 국적은 일본인이 맞다.[12] 일본명 町井久之 마치이 히사유키[13] 사실 역도산이 사망했어도 바바나 이노키같은 걸출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충분히 승계하여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각각 TV방송국과 짜고 전일본과 신일본을 창설해 분가해버렸고 남은 사람은 김일과 몇몇 소수 사람들뿐이었는데 이들조차도 협회를 이끌만한 역량은 역도산에 비하면 전무했다.[14] 설경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역도산'''에서 역도산의 친구인 불고깃집 주인 역을 박철민이 맡은 바 있다.[15] 이 사람도 유도계에서 전설적인 인물. 또한, MMA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종합격투기에서 대표적인 서브미션 기술로 불리는 기무라 락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브라질에서 국민적 인기를 끌던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MMA 역사에선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뽑힌다.[16] 부인의 약값을 대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17] 미야모토 무사시사사키 코지로가 간류지마에서 벌인 결투를 연상시킨다고 붙여진 이름.[18] 원래는 일본기자의 연인이었으나 역도산이 NTR해서 결혼했는데 역도산이 전처(오자와 후미코)하고 불륜(말이 불륜이지 강간하고 비슷하다)을 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역도산 관련서적 참고.[19] 친자식처럼 길렀다.[20] 기타 문단에 후술될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의 오마쥬. 역도산이 기무라 마사히코에게 프로레슬링 경기를 제의하고서 미리 짜놓은 각본과 다르게 시멘트 매치로 때려눕혀버렸던 사건이다.[21] 실제로 안토니오 이노키는 역도산의 문하에 있을 당시 역도산의 구타가 너무 심해 스승이지만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밝힌바가 있었다.[22]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애매할 수도 있는데, 역도산이 선수에서 은퇴하면 북한으로 돌아가 여러가지 사회활동들(스포츠든 정치든)을 하고 싶어했다는 증언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증언이 사실이고 실제로도 북한으로 갔다면, 그의 살아있었을 적 행보로 볼 때 북한 정치인으로 변신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고, 역도산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천하의 개쌍놈(..)이 되었을 수도 있다.[23] 당시 입국한 역도산은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 라고 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일본어로 하였다. 그래도 판문점을 방문하면서 북녘을 향해 '형님' 이라고 크게 한국어를 외쳤다는 후문이 전해진다.[24] 당시 체중을 21kg 정도를 늘리고 레슬링 경기 장면을 직접 소화했으며, 개인교습을 통해 일본어 공부를 하며 엄청난 양의 일본어 대사 (이 영화에서 한국어 대사는 일본어 대사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다) 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열연을 펼쳤다. 4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역도산과 공공의 적2 두 영화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당시 수상자는 말아톤조승우.[25] 애니메이션에서 유명한 역할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장편 데뷔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의 시라카와 타쿠야, 도박묵시록 카이지이토 카이지.[26] 나카타니 미키와는 역도산 이전에 카오스란 영화에 같이 출연했다.[27] 사실 송해성 감독은 역도산, 무적자같이 스케일이 크고 돈 많이 든 영화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28] 게다가 극중에서 역도산이 좋은 모습만 보여주지도 않는다.[29] 역도산이 사망한 날과 코야마 리키야가 태어난 날이 겨우 3일밖에 차이가 안 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