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녕옹주
1. 조선 태종의 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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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과 신빈 신씨의 딸. 파성군 윤우에게 하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2. 조선 효종의 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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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조선 효종의 서1녀. 어머니는 후궁 안빈 이씨로 효종이 후궁에게서 본 유일한 자녀다.
2.2. 생애
효종이 등극하는 1649년(인조 27) 태어났다.
효종은 자녀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고, 왕비 인선왕후도 적서의 구별을 하지 않고 숙녕옹주에게 너그럽게 대했다. 다만, 이미 정비 소생의 세자와 여러 공주[2] 가 있었기에 비교적 떨어지는 대우를 받은 듯. 그만큼 다른 공주들이 시가(媤家)는 물론이고, 효종과 현종, 숙종의 비호 아래서 누리는 권세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비교되는 탓이다.
무엇보다 옹주의 어머니 안빈 이씨는 사대부 집안에서 간택한 후궁이 아니었고, 종4품 숙원의 품계에 오르기까지 7년이 걸린 사람이었다. 만약 옹주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안빈 이씨가 받는 대우도 달랐을 수는 있다.[3] 이를 반영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효종은 어느 날 세자와 공주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었는데, 숙녕옹주도 자신의 딸이므로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인선왕후의 눈치가 보여서 선뜻 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를 알아차린 인선왕후가 따로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왕실의 예법에 의하면,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 서녀라고 해도 적모인 왕비의 자녀들로 취급되었다. 고로 자기 자식이라도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안빈 이씨는 자신의 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반말을 한 것. 효종이 죄를 주려고 하기에 인선왕후가 여러 번 간청해서 진정시켰다.[4]
1668년(현종 9) 옹주는 당시 궁중에 유행 중이던 천연두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5]
2.3. 자녀
숙녕옹주는 반남 박씨 가문의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과 결혼했다. 박필성은 숙녕옹주보다 3살 연하인 1652년생으로, 아내 숙녕옹주가 17세(또는 19세)에 요절한 후로도 오래도록 살다가 영조 23년인 1747년에 사망했다(향년 95세). 박필성과 숙녕옹주는 1녀를 낳았고, 이 딸은 이수철(李秀喆)이라는 남자에게 시집갔다.
여담으로 이 이수철이라는 자는 과거 시험장에서 남의 과거 답안을 도둑질하여 원래 주인의 이름을 지우고 제 이름을 써넣는 죄를 범하는 바람에,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수철의 아내(숙녕옹주의 딸)이 "남편을 노비에서 면천시켜 달라"고 청원하자,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청원을 들어주었다.#
[1] 본관은 반남,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2]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3] 만일 효종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세자 책봉은 기정사실이고, 실제로 효종의 후계자는 고명아들인 현종 뿐이어서 가능성이 높다. 단, 이 경우는 남자 왕족이 얼마나 역모에 휘말리기 쉬운지 고려하지 않는 가정이다. [4] 출처: 공사견문록. [5]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5월 20일 정사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