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빈 이씨

 



'''조선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 | 安嬪 李氏
'''
'''빈호'''
안빈(安嬪)
'''출생'''
1622년(광해군 14년) 9월
'''사망'''
1693년(숙종 19년) 10월
(향년 72세)
'''본관'''
경주(慶州)
'''부모'''
부친 이응헌(李應憲)
모친 알 수 없음
'''부군'''
조선 효종
'''자녀'''
1녀
(1녀) 숙녕옹주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66
1. 개요
2. 상세
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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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의 후궁이자, 효종의 후궁들 중 유일하게 자녀를 낳은 후궁.[1]

2. 상세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부터 모셨는데, 효종이 청나라로 끌려갈 때도 따라갔다. 정확히 언제 효종을 만났고 승은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 때, 예조판서 민중현의 말에 의하면 정축년(1637, 인조15)에 안빈이 효종을 모시고 심양까지 갔으며, 남자 옷을 입고 10년 동안 섬겼다고 한다.[2]
1649년(인조 27)에 숙녕옹주를 낳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효종이 즉위하고 7년동안 후궁 봉작을 받지 못했다.[3] 사실 효종이 숙녕옹주를 아꼈고, 청나라까지 따라가서 고생한 정을 생각하면 빨리 봉작하지 않은 점이 의아하긴 하다.

“옛적에 효종조(孝宗朝)에 안빈(安貧) 이씨(李氏)가 옹주(翁主)를 낳은 지 7년만에야 비로소 숙원(淑媛)으로 봉작했었습니다.[4]

[5] 성의(聖意)에 지체하시며 기다렸던 것이 무슨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항간(巷間)에 전파되는 말로는, 그의 성자(姓字)를 혐의하여 그랬다고 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3년 2월 6일 계해 1번째기사

이는 영조 때, 부제학 이병태가 한 말이다. 성자(姓字)를 혐의했다는 말은 같은 이씨였기 때문에 꺼렸다는 뜻이다. 원래 본관이 달라도 이씨는 왕비, 왕세자빈 등을 뽑는 간택에도 나올 수 없으므로 그럴 듯한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경주 이씨라서 효종과 동성동본은 아니다.
아무튼 7년 만에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이 되었으나 좋은 대접은 못 받았던 모양. 연려실기술의 효종조고사본말을 보면, 옹주를 낳았으나 효종의 살아생전에는 숙원에 머물렀고 생활비는 호조에서 나오는 것 외에는 없어서 늘 부족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친아들도 아닌데 당시 세자였던 현종이 그녀한테 궁중의 남은 물자를 주자고 여러 번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효종은 현종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면서 "네가 다른 날에 은혜를 베풀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씨의 형편이 좋아진 건 현종 즉위 이후다. 앞서 연려실기술에 실린 일화처럼 현종이 은혜를 베풀게 된 셈이다. 승정원일기를 참고하면 1661년(현종 2) 윤7월에 종3품 숙용[6], 같은 해 10월에 종2품 숙의가 된다.[7][8] 1686년(숙종 12)에는 청나라까지 따라가서 보필한 공을 높이 사서 정1품 안빈으로 책봉된다. 그야말로 수직상승.
소생은 외동딸 숙녕옹주만 있으며, 숙녕옹주는 효종의 막내딸이자 유일한 서녀였다고 한다. 숙녕옹주가 1668(현종 9)에 19살의 젊은 나이에 일찍 죽는 바람에 이씨는 25년을 홀로 살다가 1693년(숙종 19)에 사망했다.

3. 일화


후궁은 자녀를 낳아도 어머니를 자칭할 수 없었다.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고귀한 왕의 핏줄을 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생모인 후궁보다 높고, 또한 왕의 정실인 중전을 어머니로 모시는 것이 궁중 예법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서자(서녀)는 무품 하계[9]이며, 후궁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더라도 정1품이다.
그런데 그녀가 문안 인사를 온 자신의 외동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10] 효종이 죽이네 살리네 하는 걸 인선왕후가 중재해서 넘어간 일이 있다고 한다.[11] 이러한 사실을 보면 효종이 얼마나 엄격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안빈에 대한 제사와 관련해서, 숙녕옹주의 남편인 금평위 박필성이 가문의 대종(大宗)인지라, 사위 집안에서 안빈의 제사를 지내기가 여의치 않자 대신 외손녀(숙녕옹주의 딸)의 남편인 이수철 가문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 무렵에 이씨 집안이 제사를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해져 나라에서 안빈의 제사 비용을 대주도록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1] 효종에게는 후궁이 모두 3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씨를 제외하면 특별한 기록도 없고 자녀도 없다. [2]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8월 9일 신사 6번째기사. # [3] 이때문에 후궁의 봉작이 너무 후하거나 빠르면 효종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비교 대상으로 거론된다.[4]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이 쓴 공사견문록에도 효종의 살아생전에는 숙원(淑媛)이었다고 썼다.[5]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공사견문록 등 기록을 대조해보면 그녀가 효종 시절에 후궁이 되지 못하고 승은상궁이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6] 승정원일기 9책 (탈초본 169책) 현종 2년 윤 7월 8일. 先祖의 後宮 淑媛李氏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라는 비망기. # [7] 승정원일기 9책 (탈초본 170책) 현종 2년 10월 20일. 先王의 後宮 淑容李氏를 淑儀로 임명한다는 등의 비망기. # [8] 숙녕옹주가 옹주로 책봉된 걸 기념한 걸로 추정된다.[9] 원래는 정 1품이었으나 격상되어 무품이 되었다.[10] 사극에서 흔히 범하는 고증 오류이다. 이를 지킨 몇 안되는 작품이 붉은 달. 영빈 이씨가 아들(사도세자), 딸(화완옹주), 며느리(혜경궁 홍씨)에게 존대하는 장면이 나온다.[11] 그래서 안빈 이씨는 조선시대 후궁들은 자기 자식이라도 반말을 할 수 없다는 예시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