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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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정실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 인조와 인열왕후의 둘째며느리이다.
1631년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선양에서 9년간의 볼모생활을 했으며 돌아온 후에 남편 봉림대군이 다음 후계자인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조선의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타국 생활을 해본 왕비이다. 물론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회빈이 있었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조 소용에 의해 역모로 몰려 사사 되었기 때문에 왕비로서 외국을 경험한 왕비는 '''인선왕후''' 뿐이다.
2. 생애
2.1. 봉림대군과의 혼인
아버지는 장유이며, 어머니는 영가부부인 김씨[2] 이다. 1618년(광해군 10년) 12월 시흥 장곡동(당시 안산군) 안골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3] 1631년 14세에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과 가례(혼인)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9년 동안이나 심양에서 기거하였을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많이 뒷바라지를 하였고 그곳에서 현종(顯宗)이었던 이연을 낳았다.
2.2. 왕비가 되다
이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나 9년만에 귀국하였으나 말라리아 급사 한 후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1645년 9월 책봉되었고 장씨는 1646년 3월 소현세자의 아내 민회빈 강씨가 사사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649년, 시아버지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인 봉림대군의 즉위로 왕비에 진봉되었으며 2년 후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2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
2.3. 현종 즉위 후
이후 1659년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만에 의원 심가귀의 의료사고으로 인한 과다출혈[4] 로 '북벌론 시행' 하루를 앞두고 허망하게 사망하고 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으며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일찍 죽은 두 아들(대군), 현종, 그리고 '숙신(淑愼)[5] , '숙안(淑安)ㆍ숙명(淑明)ㆍ숙휘(淑徽)ㆍ숙정(淑靜)ㆍ숙경(淑敬)'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는 6명의 공주를 두었다. 효종이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는 안빈 이씨 소생의 숙녕옹주(淑寧翁主)가 유일한데, 인선왕후는 숙녕옹주에게도 선물을 주는 등 잘 대해 주었다.
인선왕후는 살이 매우 많이 찌고 볼살이 많고 귀여운 체형이었다고 전해지며 남편 효종의 북벌 계획의 수행을 못 보고 1674년(현종 15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선왕후는 죽기 2년 전부터 병으로 투병하였는데, 이 병의 원인은 시아버지 인조, 남편 효종이 승하했을 때 너무 심하게 곡(哭)을 하는 바람에 얻은 병이라고 전해진다. 거기에다가 뇌졸증이 겹쳐서 왼손을 아예 사용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는 안 그래도 살이 상당하던 왕대비가 오랜 투병 생활을 거치며 몸이 심하게 붓기까지 하자 관을 그에 맞춰서 넉넉한 크기로 만들었는데, 정작 죽고 나자 시신의 붓기가 가라앉으며 크게 만든 관이 맞지 않게 되었고, 남은 공간을 비단과 솜으로 채워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4. 제2차 예송논쟁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는 인조의 계비로써 자신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었던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여전히 생존해 있던 상황이라 남편인 효종의 사망 이후 문제되었던 예론이 또다시 불거졌고, 결국 인선왕후의 사망은 제2차 예송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6]
효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영릉(寧陵)'''에 쌍릉으로 같이 안장되어 있다.
3. 여담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지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 왕의 자녀는 후궁보다 품계가 높아서[7] 생모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반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을 두고 효종이 안빈 이씨에게 큰 벌을 내리려 하자, 인선왕후가 한사코 말려서 겨우 넘어간 일이 있었다.
효종과 인선왕후 내외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자리가 있었는데 효종이 '''중전의 눈치를 보아''' 적출들에게만 선물을 주고 서녀 숙녕옹주는 그냥 넘어갔는데, 인선왕후가 따로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4. 중세 한국어 연구에의 기여
주격조사 '가'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인선왕후의 어필이다. 그 이전의 문헌들은 주격조사를 모두 이, ㅣ, ∅ 로 썼다.
5. 드라마에서의 인선왕후
인조 대를 배경으로 한 JTBC 사극 꽃들의 전쟁<2013>에서는 극중 배경이 삼전도의 치욕 ~ 효종 즉위 직후까지이기 때문에 비중이 매우 작은 봉림대군부부인, 세자빈으로 나온다. 특별한 역할이나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세자빈이 되었을 때 조 귀인과 대립하지 않고 유순히 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며 극 막판에 모두가 조 귀인을 죽이자고 할 때 "숭선군의 생모인데 죽이자는 것은 불쌍하다"는 대사를 했다. 동정심이 많은 캐릭터로 설정한 듯 하다. 배우는 이문정.
현종 대를 배경으로 한 MBC 사극 마의에서는 김혜선이 연기하며 현종의 어머니인 왕대비로 나오며, 중신들의 무서움을 알기에 전반적으로 중신들을 터치 안 하고 그들의 뜻을 따르자는 입장이라 아들과 충돌이 잦다. 그리고 사사건건 백광현에게 딴죽을 걸고 그저 천하다는 이유로 왕의 말도 다 씹어대며 왕실 사람들을 구한 건 무시하고 무조건 탓하기만 해서 시청자들에게 어그로를 끌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병을 고친 백광현에게 호의를 베푼다.
드물게 병자호란 ~ 효종 대를 배경으로 한 KBS 대하드라마 대명(1981)[8] 에서는 세자빈 시절부터 그려지는데 원미경 씨가 열연하였다. 세자빈 시절부터 병자호란의 강화도 피난, 심양의 볼모 시절, 귀국 후 왕비 시절 모두를 연기하였다.
6. 참고 자료
[1] 훗날 경희궁으로 바뀐다.[2] 병자호란 당시 순절(殉切)한 김상용의 딸.[3] 장곡동은 개발직전까지 장씨들이 많이 살았다.[4] 효종의 얼굴, 즉 왼쪽 눈썹 위 이마쪽에 종기가 났는데 의원 심가귀가 수전증을 하듯이 손을 떨었고, 그때문에 침을 잘못 꽂아 종기 안에 있는 혈맥을 잘못 건드려 피가 솟구치듯 출혈하게 되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효종은 숨을 거뒀다고 한다.[5] 1637년에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던 도중 병사했다.[6]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집권하지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1년상을 주장했던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집권은 즉위 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왕권이 안정되었던 현종이 서인과 송시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남인의 세력을 키워 조정을 균형 상태로 맞추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는 해석이 많다. 기록을 보면 남인보다 현종 자체가 서인의 주장과 대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예송 논쟁항목 참고[7] 대군이나 군, 공주나 옹주여도 당시 권력있는 신하나 후궁보다 더 높은 0품(무품)의 존재기 때문에 지칭할때에는 '자가'등을 끝에 붙여 존칭해주어야 하는 것이 의무이자 관례였다.[8] 1981년 사극치고는 야외 촬영이 많았고, 전투 장면이 많았던 사극이었다. 효종으로 김흥기 씨가 열연하였다. 소현세자로 백윤식, 민회빈 강씨 역에 김영철 씨의 부인인 이문희, 인조 역에 김동훈, 임경업 역에 백일섭, 김자점 역에 김순철 씨가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