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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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5녀.
2. 생애
1646년(인조 22) 당시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봉림대군이 다음 동궁으로 결정되었으나, 책봉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공주는 봉림대군의 사저인 어의동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산실까지 쫓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시 이조 판서였던 이식이 한탄했다.[4]
1652년(효종 3) 8세가 되자 숙정(淑靜)의 작호를 받고, 1656년(효종 7) 12세에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정치화의 양자가 된 정재륜과 가례를 올렸다.[5] 정재륜은 고조부가 정유길인데, 정유길은 인선왕후의 외조부인 김상용의 외조부이다. 즉, 정재륜과 인선왕후는 8촌간이 된다.
언니 숙안공주와 마찬가지로 안하무인격에 남의 토지와 세금 등을 빼앗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참고 1 참고 2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고, 사대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으나, 그녀는 아버지 효종과 오빠 현종의 보호를 믿고 계속 비리를 저질렀다.
1668년(현종 9)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현종은 여동생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군포시에 있다.
3남 2녀를 낳았으나 1남[6] 1녀[7] 만이 살아남았다.
3. 여담
- 부마 동평위 정재륜은 열성지장통기를 증보, 간행하였고, 《공사견문록》 , 《한거만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공사견문록 덕분에 조선 왕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졌다.
- 동평위는 물에 밥 말아먹다가 남겼는데, 이를 본 효종이 "다 먹을 수 있는 양만큼만 말아야 한다"고 혼낸 적이 있다. 그리고 이걸 본인이 《공사견문록》 에 썼다.
- 정재륜은 아내인 숙정공주와 외아들 정효선이 일찍 죽자 숙종에게 재혼 요청[8] 을 했지만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법이 더 강화되었다. 결국 종손(從孫)[9] 인 정석오(鄭錫五)를 양자로 들여 죽은 아들의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정석오는 이후 영조 때 좌의정에 올랐다.
[1]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일대. [2] 옛 인경궁 터에 지어졌다. [3] 본관은 동래,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 사후에 받은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4]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9월 9일 정사 1번째기사. # [5] 부마간택시에 정재륜, 원몽린(초명 원몽치), 변광보가 경합했는데 정재륜이 최종 간택되었다. 이후 원몽린은 숙정공주의 동생인 숙경공주의 남편이 되었고, 변광보는 소현세자의 3녀 경순군주의 남편이 되었다 [6] 정효선(鄭孝先, 1663년 - 1680년)[7] 김석주의 아들 김도연(金道淵, 1664년 - 1689년)과 혼인. 김석주의 아버지는 김좌명으로 대동법을 주창한 김육의 장남이다. 김육의 차남이자 김좌명의 동생이 김우명으로 그의 딸이 현종 왕비 명성왕후 김씨이다. 김석주와 명성왕후 김씨와는 사촌이며 김도연은 5촌 조카이다. 숙정옹주와 명성왕후는 왕실로는 시누가 되며 시가로는 사돈이 되는 셈이다.[8] 정재륜은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들어갔는데, 정작 자신마저도 후사가 끊어졌으니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 [9] 핏줄로는 친형이자 법적으로는 사촌형인 정재대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