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궁
1. 개요
仁慶宮.
광해군 때 지은 궁궐이'''었'''다.
기록 상 경복궁을 능가하는 조선 최대의 규모였다. 정작 건설을 주도한 광해군은 한 번도 사용하지도 못했고, 인조가 어떻게든 사용해보려다가 인목왕후와 관련된 저주사건과 엮여 철거되었다. 한마디로 광해군 대의 가렴주구와 민생파탄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변동에 따라 궁궐 운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궁궐이다. '''또한 인왕산을 주산으로 만든 궁궐중에서 유일하게 법궁으로의 지위를 가졌던 궁궐이다.'''
위치는 사직단 북쪽, 자하문로와 인왕산 사이 지역으로 추정되며 현재 종로구의 옥인동, 필운동, 누하동, 누상동 일대에 해당한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새 궁궐과 사직단이 담장으로 연결되어서 순라를 도는 길이 막혀서 논의하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9년[1617] 5월 29일 기사#)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대체할 정궁 내지는 정궁에 준하는 양궐 체제의 이궁을 목적으로 건립된 듯 하다. 그 규모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커서 경복궁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다만 인경궁 착공 후 경희궁 건설이 함께 추진되면서 인경궁의 규모는 당초 계획보다는 다소 축소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경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이어서 하나처럼 사용하는 구상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후 자수궁까지 지으면서, { 인경궁↔자수궁↔경희궁 }으로 이어지는 3궐 형식의 궁궐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의 궁궐들 중 가장 컸다. 광해군의 영건 사업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알려주는 증거인데 인경궁은 기와를 '''염초를 사용한 청기와'''로 만들었다. 광해군 1년(1609) 중건한 창덕궁을 시작으로 창경궁, 경덕궁, 인경궁, 자수궁을 세우고 경운궁 확장공사까지 벌였지만 그 중 청기와를 사용한 것은 인경궁이 유일하다.[1]
2. 역사
2.1. 인경궁의 창건
미신을 신봉한 광해군은 궁궐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였다.[2] 임진왜란 떄 불탄 궁궐들인 창덕궁, 창경궁 재건이나 당연해도, 굳이 새로 궁궐 3곳을 짓고 정릉행궁(경운궁)을 보수했음은 집착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새로 지은 궁궐이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인데 경희궁을 제외한 궁궐 두 곳이 완성되기 전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1617) 1월 18일자 기사에 선수도감이 이렇게 아뢰었단 기록이 있다.
이것이 인경궁 공사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당초에는 단지 이궁(離宮)으로만 짓는 것이었는데 공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법궁이던 창덕궁은 물론 예전의 경복궁보다도 크게 지었다.[4] 궁궐의 대부분 건물들에는 청기와를 올릴 정도였다. 청기와를 만드는 데 쓰이는 주 재료는 화약의 원료인 염초이다. 광해군 시기 비정상적인 국방비 지출로 착취가 심해서 그렇잖아도 백성들의 삶이 크게 고달팠는데 그 부족한 염초를 국방 강화와 궁궐 공사라는 '''대공사 두 군데'''에 쏟아부었으니 백성들의 삶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비망기로 '현재 쓰고 있는 법궁(法宮)에 혹 사고가 있을 경우 옮겨갈 곳을 미리 강정해 두는 것이 옳다. 경복궁(景福宮)은 공사가 아주 커서 오늘날의 물력을 가지고는 결단코 쉽사리 조성을 의논하기가 어렵다.[3]
그러니 인왕산(仁王山) 아래에다 잘 요리해서 지나치게 높고 크게 하지 말고 시원하고 깔끔하게 짓는다면 편리할 듯하다. 속히 긴 담장을 쌓고 남아 있는 재목을 가지고 조하(朝賀)를 받을 정전(正殿)을 짓기만 한 다음 다시 형세를 살펴서 다 짓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도감의 제조인 호조판서 이충, 예조판서 심돈, 병조참판 이병이 모두 정고(呈告) 중에 있어서 좌기(坐起)할 수가 없습니다. 제조인 이충·심돈·이병을 명초(命招)하여 출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광해군이 윤허했다.
거기다 중간에 계획을 수정해 경덕궁[5] 까지 함께 짓느라 공사기간이 지연되었다. 이 두 궁은 후일 인조 시기에 구궐(舊闕), 즉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창덕궁 및 창경궁과 대비되어 신궐(新闕)이라 불렸다.
그러나 두 궁의 규모는 무척 달랐다. 인경궁은 경복궁을 능가하는 거대한 규모로 지어진 반면, 경덕궁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는 정문의 규모를 봐도 알 수 있다. 인경궁의 정문인 명화문이 경복궁 광화문이나 창덕궁 돈화문과 같이 복층으로 지어진 반면, 경덕궁의 정문 흥화문은 왕이 잠시 지나가다 사용할 이궁이므로 단층으로 지어진 것이다.
두 궁은 비슷한 시기에 착공되었고 경덕궁이 조금 먼저 완공되긴 했지만 인경궁도 거의 다 지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두 궁궐을 써보지도 못한 채 쫒겨났다.
2.2. 인조 즉위 직후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는 머물 곳이 없었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경궁이나 경덕궁, 인경궁 이 셋 중 하나를 사용해야 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빈터만 남아있었고, 창덕궁은 인조반정 때 인정전 주변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다. 광해군 부자를 수색하다 일어난 화재였다.
인조는 궁궐을 장악한 후 인정전에서 신료들을 소집하였지만 그곳에서 바로 즉위하지는 않았다. 대비(인목왕후)가 창덕궁으로 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직접 대비가 있던 경운궁으로 갔으며, 광해군도 함께 압송되었다. 인조는 경운궁에서 광해군에 의해 위호(位號)가 박탈된 인목왕후를 대비로 복위시킨 후 그의 명령을 받아 즉위하였다.[6]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임인 7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대궐이 불에 타다
대궐이 불에 탔다. 【왕이 이미 숨은 뒤에 군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는데 궁중이 텅 비어 사람이 없고 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 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전을 잇달아 태웠는데 상이 도감의 군사들로 하여금 끄게 하였으나 인정전만 남고 모두 탔다. 그 후 잿더미 속에서 은 4만여 냥을 캐냈는데 이것은 왕이 가죽주머니에 은을 넣어 침전 안에 두었던 것이다. 】
그리고 3월 21일 인목왕후와 함께 경운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임어했다. 하지만 대비까지 모시고 침전과 편전이 모두 소실된 창덕궁으로 향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날 이 후 《승정원일기》의 기사가 부실하여 인조가 어느 전각에 머물렀는지 직접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창덕궁과 붙어있는 창경궁에서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실록에선 명정전(明政殿)과 명광전(明光殿), 문정전(文政殿) 등 창경궁의 전각에서 신하들을 인견하고 경연을 열거나 사신을 만난 기록이 확인된다.[7] 반정 후 경운궁에 갔다가 창덕궁으로 돌아왔으나, 실제로는 창경궁에서 정사를 보며 지낸 것이다. 《승정원일기》에선 이후 4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경덕궁에 머문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록에선 10일 창경궁 문정전에서 논어를 진강했으며, 12일에는 창경궁 명광전에서 도원수 장만을 만나고 문정전에서 주강(晝講)을 했다고 적혀 있다. 경덕궁은 창경궁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괄의 난때 인조가 창경궁을 나와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환도[8] 후 경덕궁으로 이어한 사실이 실록으로 확인된다.[9] 이를 미루어 보아 아마 다른 사건이 없었다면 창경궁이 쭉 법궁으로 쓰이고 창덕궁은 복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또한 전소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10]
환도한 인조는 지낼 궁궐을 경덕궁과 경운궁, 인경궁 셋 중에서 골라야 했다. 광해군이 무리하게 증축했던 경운궁은 당시 궁궐로서 위상을 잃은 상태였다. 경운궁은 인목왕후가 입궁하고, 선조가 승하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선조의 계비로서 인목왕후의 위상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재위 후반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대비 위호를 박탈하면서 서궁으로 격하되었고 설치되어 있던 분사(分司)는 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별궁으로 위상이 떨어졌다.[11] 그리고 '''광해군의 패륜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1623년(인조 원년) 7월 2개의 전각만 남긴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명을 내렸다. 실록에선 경운궁의 훼철을 서궁의 사적과 연관지어 설명하며 경운궁 훼철의 사유가 인목왕후 유폐에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12] 인조는 이를 훼철함으로써 폐정을 척결한다는 당시의 정책 기조를 표상할 수 있었다. 다만 경운궁은 할아버지 선조의 사적이기도 했던 만큼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었다. 이에 선조의 침전을 남김으로써 최소한의 의미만 보존한 것이다. 아무튼 이리하여 인조 즉위 석 달 만에 경운궁도 두 채의 건물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렇게 되니 남은 건 신궐(新闕), 인경궁과 경덕궁 뿐 이었다.
2.3. 어떻게든 인경궁을 사용하려 했던 인조
신궐 중에 인경궁은 바로 사용하기엔 정치적 부담이 컸다. '''광해군의 신궐 영건은 인경궁에서 시작되었고,''' 반정 당시에도 마무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반면 경덕궁은 인경궁 영건에 부수적으로 시작되었고 먼저 완료되었다. 그 결과 궁궐 영건을 폐정으로 비판할 때 그 초점은 인경궁에 있었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궁궐 영건의 비판하는 측에서 항상 먼저 거론하는 폐정의 상징이 되었다.
인경궁은 당대에 훼철 논의가 분분했다. 적어도 인경궁이 광해군 대 폐단의 상징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1625년(인조 3년)의 이 기사는 사용이 없는 인경궁의 피폐한 상황 및 인경궁 자체가 광해군 폐정의 표상으로 지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경궁보다 작은 공역으로 인경궁의 별궁으로 지어진 경덕궁보다는 인경궁을 매개로 궁궐 영건의 폐정을 인식했다. 그래서 인경궁도 경운궁처럼 훼철하고 그 터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인목왕후 유폐와 관련되었던 경운궁을 훼철할 때와 달리 인경궁은 그대로 남겼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인경궁에 머물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경덕궁에 거처했다. 그렇게 1632년(인조 10년)까지는 경덕궁 중심의 궁궐 경영이 이어졌다.신들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경궁(仁慶宮)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10년을 경영해 왔으니, 반정(反正)한 뒤에 즉각 훼철(毁撤)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두어 한갓 수직(守直)하는 폐단만 끼치고 있습니다.''' 창롱(窓櫳) 등 철물(鐵物)을 태반이 도둑 맞았는가 하면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도 날마다 썩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지금 전각(殿閣)을 훼철하여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를 합쳐 화매(和賣)하고 집터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준다면,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열복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영접하는 비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유사에게 회부하여 따로 상명(詳明)하고 근실하고 염근(廉謹)한 사람을 가려 화매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소서.
인조실록 인조 3년(1625) 2월 26일 기사
인조가 인경궁에 처음으로 임어(臨御)[13] 한 것은 1630년(인조 8년) 3월 17일의 일이다. 인경궁에 머물던 대비에게 문안을 갔다가 비가 쏟아져 환궁이 곤란해지자 그대로 인경궁에서 묵고 이튿날 경덕궁으로 돌아왔다. 인목왕후(소성대비)는 3월 11일부터 풍정례(豊呈禮 웃어른에게 올리는 큰 연회)를 위해 인경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1624년(인조 2년)에 창경궁에서 풍정례를 지내고 6년 뒤에 다시 지내기로 하면서 인경궁이 장소로 선정된 것이다. 이 때 행사 진행을 위해 방치되어 있던 인경궁 전각들이 보수되었다.
신하들은 후금 때문에 불안한 정국에 비용이 많이 드는 풍정례를, 그것도 굳이 인경궁을 보수하면서까지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정 치를거면 경덕궁에서 치르라고 권했다.[14] 하지만 인조는 인경궁을 고집해 결국 관철시켰다. 3월 17일 하루 인경궁에 머문 인조는 3월 20일 다시 인경궁을 방문해 22일 풍정례를 치르고 경덕궁으로 돌아왔다.
인조가 조정의 비판적인 기저에도 불구하고 인경궁에서 풍정례를 강행한 것은 이를 계기를 인경궁을 활용하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궁궐은 왕의 거처이며 왕실의 공간'''이기도 한데 창덕궁과 창경궁이 차례로 소실된 상황에서 좁은 경덕궁에만 10년 가까이 머물다보니 공간적 제약을 심하게 느껴 가까운 인경궁을 활용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폐정의 상징이라는 데 부담을 가졌겠지만, 어차피 광해군이 지은 경덕궁에 10년 가까이 지낸데다, 불타 없어진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에 나서기 어려운 사정이었던 만큼, 인접한 인경궁을 활용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인조가 국왕 내지 왕실 차원에서 인경궁을 활용해 보려던 정황은 이보다 이른 1626년(인조 4년)부터 있었다. 그 해 인조의 친어머니 연주부부인 구씨의 장례 때 인경궁에 혼궁[15] 을 설치했다.
계운궁의 혼궁은 법도대로라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신주가 있는 이현궁[16] 에 설치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현궁은 좁아서 전각 더 세울 공간도 없다는 핑계로 인경궁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계운궁은 이괄의 난때 인조와 함께 피난했다 돌아와 경덕궁에서 얼마간 지내다 사망해서 경덕궁에 빈궁(殯宮)[17] 을 두었다. 인경궁에 혼전을 두라는 지시는 이의 연장선이었다.
이때 신하들은 반대의견이 우세했는데 그 논리가 묘하다.
신하들의 주장은 인경궁이 폐정의 상징으로 헐어버려야 할 궁이긴 하나 대궐은 대궐이니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때는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승되기 전, 아직 정원대원군이던 시절이다. 선조가 자기 친아버지 제사때 절 한번 못했던 것과 동일한 논리인데 아버지가 왕이 아니니 상주도 아우가 맡고, 어머니도 방계 종친을 대하는 예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같은 기사에 보이는 인조의 주장은 정반대다.'''인경궁은 헐어버려야 할 궁이지만 명칭은 대궐입니다.''' 능원군(인조의 아우)이 상주로서 3년 동안 조석의 궤전을 주관하면서 여기에서 거처하는 것은 바단 사체에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궐내로 반혼한다면 사묘(私廟 조선시대 왕실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생부와 생모 또는 폐위된 왕실 구성원을 제사지내는 사당)라고 할 수 없으니, 근일 조정에서 쟁론하는 일과 매우 어긋나는 조처입니다. 계운궁이 협착하다면 편의에 따라 더 축조하여 혼궁(魂宮)으로 삼는 것이 예법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의견도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인조실록 인조 4년(1626) 2월 7일 기사
'''신료들은 인경궁에 대해 광해군 폐정의 상징으로 보고 궁극적으로 훼철해야 한다는 입장이 주류였지만, 일단 그곳이 대궐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국왕이 이곳을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국왕이 계속 활용한다면 그대로 궁궐로 굳어지므로 훼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인경궁은 명색이 궁궐이기는 하지만 조종(祖宗)의 법궁(法宮)이 아니다.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 이후로는 각사(各司)의 전복(典僕 노비)들도 간혹 거처하였으니 하나의 버려진 빈 곳이 되어버렸다. 이곳에다가 임시로 혼궁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능원군은 바깥 행랑(行廊)에 들어가 거처하는 것 또한 방해될 것이 없다.
반면 '''인조는 조종의 법궁도 아닌 곳, 별도 공간으로 좀 활용한다고 예법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신료들이 인경궁에 대해 헐어버릴 곳이라고 하면서도 대궐이라고 명분을 내세운 것이나 인조가 법궁은 아니라며 왕실 차원에서 활용하고자 한 것은 당시 조정에서 인경궁을 대했던 복잡한 시선을 잘 보여준다. 인조가 광해군을 질시해서 없애버렸느니, 인경궁 훼철이 인조의 삽질이라느니 맹목적으로 부르짖기 바쁜 광해군 옹호론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인조는 엄연히 동전찍는 주전청(鑄錢廳)까지 설치했던 인경궁[*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1626) 3월 6일 기사]을 폐정의 상징이라며 내버려 두는걸 낭비라고 생각하고 왕실의 공간으로 이리저리 활용해 보려 했다.
이런 인식은 1630년(인조 8년) 풍정례를 치르러 경덕궁에서 인경궁으로 행차할 때도 드러난다. 인조는 큰 길을 이용하는 대신 경덕궁의 북문 무덕문을 통해 들어갔다. 경덕궁이 원래 인경궁의 별궁으로 지어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 길을 놔두고 북문으로 드나는 것은 결국 인경궁과 경덕궁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신하들은 또 반대하며 환궁 시엔 큰 길을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인조는 돌아올 때도 무덕문으로 들어왔다.
인조는 인경궁 활용에 인목왕후를 이용했다. 인조 자신이 행차하면 말이 많아지지만 대비는 한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일단 대비를 인경궁에 데려다 놓고 문안을 명분으로 자신이 행차한다면, 인경궁은 점차 국왕이 사용하는 궁궐로 굳어질 수 있었다. 인목왕후는 1629년(인조 7년) 인경궁의 초정[椒井.] 에 목욕하러 가서 여러 날 묵은 일이 있었다.[18] 인경궁 건립 당시 초수별당(椒水別堂)과 별전(別殿)들을 건립한 기사가 확인되는데[19] 아마 그 시설을 이용했을 것이다.
2.4. 인경궁의 마지막
그런데 1632(인조 10년))에 이 같은 궁궐 경영에 파란이 일어난다. 그해 6월 인목왕후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인조는 인목왕후를 인경궁으로 옮기고 자신도 건너가 병의 경과를 살폈다. 인목왕후는 인경궁에서 20여 일간 투병하다 6월 28일 사망했다. 그런데 대비가 죽은 후 인조의 조치가 좀 이상했다. 왕비의 관을 모신 빈전은 사망한 장소로 정함이 법도였는데도 굳이 경덕궁으로 시신을 옮겨 그곳에 빈전을 설치했다.
그리고 인목왕후가 연루된 역모 사건이 터졌다.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德仁)[20] 이 고변한 역모는 다음과 같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게 제거된 임해군을 복권시키는 조치가 따랐다. 이 때 후사가 없던 임해군의 양자로 선조의 서9남이자 정원군의 이복동생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陽寧君)을 입적시켰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열린 경창군의 혼례를 정원군이 맡아 주관했고 인조반정 후 치루어진 소현세자(당시 원자)의 관례는 경창군이 주관했을 정도로 두 집안이 가까워서 신경써준다고 한 조치였는데 임해군이 선조의 맏이라서 졸지에 왕위 계승서열까지 높아지는 바람에 역모에 연루된 것 이었다.회은군 이덕인이 고변하여 국청이 열리다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인조반정)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인목왕후)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인조실록 인조 10년(1632) 10월 16일 기사
이 사건의 심각한 점은 '''폐모살제라는 인조 즉위 명분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조의 조카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만약 이 사건이 커져서 친척아우 양녕군이나 숙부 경창군이 화를 입는다면 인조는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과 다를 바 없어진다. 폐모살제에 찬동한 죄로 인조반정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1628년(인조 6년) 북인의 역모에 연루된 숙부 인성군을 어떻게든 살려주려 노력하다 실패한 인조에게 스스로 이 사건을 키운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두번째는 인목왕후가 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수립된 인조 정권에서 대비의 위치는 인조의 왕통을 보증하는 캐스팅 보트였다. 만약 인목왕후가 인조를 제거하려는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인조의 왕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인목왕후의 사위, 그러니까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삼촌''' 홍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임해군과 홍집은 본래 옆집 이웃이었다.) 대비가 살아있어서 열심히 부인해줬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하필 또 죽고 나서 터지는 바람에''' 부정도 못하니 더 골치아팠다.
인조 입장에서 이 역모는 설사 사실이라도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비가 자신의 왕위계승을 부정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인조는 고변 접수 일주일만에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결론짓고 종결시켰다. 하지만 '''상례 중인 궁중에서 인목왕후의 저주문'''이 발견되어 사건이 더 심각해졌다.[21] 국왕 교체를 희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저주문이었는데 앞서 역모에 연루된 홍집을 문초했을 때 인목왕후가 저주로 국왕 교체를 논의했다는 진술이 있어서 더 심각했다. 인목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어 있을때 쓴 글이라는 말도 나왔으나 어차피 죽은 마당이라 진위 여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인조는 국청을 설치하여 그 내용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땅에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주물을 찾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목왕후를 모시던 궁녀 여럿이 추국을 받고 고문사하거나 처형되었고, 인목왕후의 딸 정명공주는 인조 시절은 물론 효종과 현종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받으며 불안 속에 살아야했다.
그런데 이 때 하필 또 '''이때 인조의 몸이 안 좋았다.''' 인조는 그게 어떻게 저주 때문이겠냐고 했지만 신하들의 강권도 있고, 저주문이 발견된 경덕궁에 계속 있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서[22] 궁궐을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은 없고, 별궁으로 눈을 돌리니 남별궁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목왕후의 혼전이 있었다. 그래서 과거 스스로 좁다고 마뜩찮아 했던 이현궁으로 옮겨갔다.
병세한 위중한 인목왕후를 그 무더운 여름에 굳이 모시고 인경궁으로 건너갔다가, 인목왕후가 죽자마자 다시 경덕궁으로 옮겨와 그것에 빈전을 차린 기묘한 행동은 6월에 이미 사건의 낌새가 있어 잠시 옮겨갔다 의혹을 이를 희석시키고자 이뤄진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끝내 사건이 커지면서 수습이 불가능해져 인경궁도 경덕궁을 놔두고 뜨게 된 것이다.
인조가 이미지가 안좋아서 저 사건을 인조의 자작극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전술한 내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인경궁을 어떻게든 활용하려 애쓰고, 사건이 터진 다음에도 인경궁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조카와 대비를 끌어들여 자신의 즉위 명분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옥사를 조작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인조에게 인목왕후는 '''아무리 싫어도 그런 역모에 끌어들여서는 절대 안되는 사람'''이었고 고변도 일주일 만에 묻어버리려 했다.
인조는 경덕궁을 나와 이현궁에 머물다가 10여 일만에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정식 궁궐이 아닌 이현궁의 성격상 장기 체류는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반시설도 문제지만 왕이 이런 곳에 장기간 머물면 민폐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담이 없는 창덕궁으로 옮겨갔는데 당시 창덕궁은 인조반정 때 무사했던 인정전에, 1628년(인조 6년)에 그거 하나만 수리해놓은 돈화문, 이현궁에 머문 10여 일간 긴급 수리한 전각 몇 개가 전부였다. 인조는 민가와 거리가 있는 창경궁 터로 궁궐 인력을 보내 창덕궁의 부족한 수용 능력을 보완하고 민폐를 줄이려 했다.
이때부터 인조는 '''인경궁에 관심이 줄고 창덕궁과 창경궁에 신경을 썼다.''' 광해군의 난정을 명분삼아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임금인데 재위 10년차에 갑자기 명분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역모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승계를 인정한 왕실 어른 인목왕후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자연히 세월이 지나며 덜해진 광해군 시절 폐정에 대한 부담이 확 커졌으므로, 확실하게 광해군 시절과 결별한다는 제스처를 강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인조는 경덕궁과 인경궁으로 옮겨가는 대신 임시 수리한 창덕궁에 머물며 창덕궁보다 손상이 덜했던 창경궁을 다시 세우려 했다. 창경궁은 반정 직후 이괄의 난 이전까지 인조가 정사를 돌본 궁으로 광해군의 궁궐 영건을 폐정으로 규정하였던 반정의 명분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적합했다. 그리고 완전히 허허벌판이 된 창덕궁과 달리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환취정 등 상당수 전각이 남아있었다. 신하들은 공역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렇다고 저주사건 터진 경덕궁이나 자신들이 내내 폐정의 상징이라며 깠던 인경궁으로 가자는 말도 선뜻 할 수 없었다.
인조는 전면 중수 대신 다른 궁궐에서 일부 전각을 옮겨와 공역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다른 궁궐을 헐어야 한다면 경덕궁과 인경궁 중에선 당연히 인경궁이었다. 이쪽이 원래 광해군대 지독했던 영건 사업의 상징이었으니까.
조정 여론은 이에 동조하는 의견과 그냥 인경궁 쓰자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다만 그냥 '''인경궁 쓰자는 의견도 인경궁을 계속 쓰자는 의견이 아니었다.''' 법궁(창덕궁, 창경궁)은 전각을 옮겨서 짓는게 아니라 새로 증건하는게 맞는데 나라 안팎으로 시급한 사안이 많으니 인경궁을 임시로 쓰자는 의견이었다.[23]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인조는 일견 수긍하면서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인경궁 이어와 창덕궁 중건의 방안을 두고 전개된 논의는 인조의 뜻에 따라 창경궁 중수로 귀착되었다. 다만 인조도 인경궁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생각은 없어서 대내 전각을 덜어내자는 의견을 각하하고 인경궁 전각 철거와 이전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재가를 받도록 했다.
1633년(인조 11년))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창경궁 공사는 같은 해 6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 7월 26일 인조는 창경궁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이전까지 창경궁에 머물렀다.
요약하면 인조 시절의 궁궐 경영은 반정 초기 창경궁이었고 이괄의 난을 계기로 경덕궁이 되었다가 재위 4년차부터 조금씩 인경궁에 관심을 두어 경희궁-인경궁 두 궐을 하나처럼 쓰는 체제가 굳어지나 싶었지만, 1632년(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연루된 역모 고변이 터지면서 급변한 정계 사정으로 무너지고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인경궁은 사라졌다. 인경궁의 건물은 대부분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이 되었다. 그리고 1648년(인조 26년)에 청나라의 요구로 홍제원에 역참을 지을 때 일부가 자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때 창덕궁, 창경궁으로 이건(移建)된 건물들은 순조 시절의 창덕궁 대화재 등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러나 딱 하나 현재까지 그 때 모습대로 남아있는 전각이 있다. 바로 창덕궁 선정전이 된 편전 광정전이다. 현재 선정전이 궁궐 건물들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인 이유이다.
3. 주요 전각
- 명화문(明化門) : 인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중층으로 되어있었다. 창덕궁 돈화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 홍정전(弘政殿) : 인경궁의 정전. 청기와 건물이다. 인조 이후 골격에 심한 변형이 가해진 상태로 창덕궁으로 옮겨져 내전의 경훈각(2층은 징광루) 건물이 되었다가[24]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로 소실되었다.
- 청와전(靑瓦殿) : 인경궁에 36칸으로 지어져 있었던 건물. 이름으로 보아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창경궁 통명전으로 이건되어 사라졌다.
- 광정전(光政殿) : 인경궁의 편전. 현재는 창덕궁 선정전으로 사용하고있다. 그래서 유일하게 궁궐 전각 중 청기와를 하고있다. 현재 하나 밖에 안 남은 인경궁 전각이기도 하다.
- 경수전(慶壽殿) : 왕의 침전이다. 1647년 창덕궁 중건 때 헐려가 대조전 건물이 되었으며 1833년(순조 33년)에 불타 인경궁 시절의 건물은 없어졌다. 다음 해에 대조전은 옛 경수전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지만 1917년 창덕궁 침전 화재 이후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대조전을 지으면서 경수전의 모습은 완전히 볼 수 없게 되었다.
- 함인당(函仁堂) : 내전 건물 중 하나로 확실한 용도는 모르지만 아마 경복궁의 경성전, 연생전 같이 침전의 부속건물이었던 듯 하다.
- 승화전(承華殿) : 동궁이었다. 이후 창경궁으로 옮겨져 동궁인 저승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