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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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차녀. 현종의 누나이자 숙종의 고모가 되며,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등 당대의 굵직한 사건에서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탄생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언니 숙신공주가 있었으므로 효종의 차녀였으나 숙신공주는 이듬해 병으로 사망했기에 그녀가 실질적인 장녀로 성장했다.[2] 그러나 이 당시에는 소현세자가 살아있어서 효종은 왕세자가 아니라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왕자의 딸로서 작위가 없었다. 또한 이미 소현세자의 자식들이 있었으니 왕자의 딸이 특별한 대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3]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효경, 내훈[4] , 소학에 능통하였다.
2.2. 혼인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사하는 정치적 혼동으로 그녀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해 윤6월에 봉림대군이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의 적통 소생에게 내려지는 작위인 군주(郡主)로 책봉, 이때부터 숙안군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만약 이때 인조가 봉림대군이 아닌 원손 경선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했다면, 후일 그녀가 숙종 대에 갖게 되는 정치적 입지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1649년(인조 27) 부마 간택령이 내려지고, 홍명구[5] 의 손자이자, 현감 홍중보의 아들인 홍득기(洪得箕)가 익평부위(副尉)가 된다.[6][7] 그러나 다음달인 5월 8일, 인조가 사망하면서 가례가 미뤄졌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하고 1650년(효종 1) 청나라의 섭정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원했다. 이는 화의 과정에서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 이라는 조목과 관련이 있었고, 이미 인조 대에 조선의 여자들을 시녀로 차출해 간 바가 있었다. 그리고 도르곤이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효종은 자신의 딸들은 물론이고, 소현세자의 딸들도 보내고 싶지 않아서 이미 혼인했거나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라는 식으로 둘러댔고, 금림군 이개윤의 딸이 의순공주가 되어 청나라로 떠났다. 효종은 그해 8월 4일 숙안공주와 홍득기의 가례를 간략하게 치르게 한다.[8] 당연히 인조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판을 받지만, 효종은 공주의 가례를 밀어 붙였고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조를 하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9]
2.3. 논란
효종의 딸, 현종의 누나, 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의 영향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횡포를 일삼고, 백성의 땅과 세금을 함부로 갈취하여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10][11] 또한 내전에 문안 차 들어와서 자의대비의 사촌동생 조사석이 정승이 되자, "조사석이 좋은 명정감[12] 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서 숙종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공주의 시가는 대표적인 서인 가문에 속해서, 그녀도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이후 기사환국이 터졌는데,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이 어머니를 믿고 악행을 거듭하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홍치상은 같은 동서이자 이종사촌인 숙명공주의 장남 심정보에게 누명을 씌워 유배가게 만든다.[13]
기사환국으로 하나 뿐인 아들 홍치상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과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체포된 한중혁, 이시도 등의 자백으로 발각되어 극형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갑자기 숙종이 태도가 바뀌어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뒤집어지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는 복위되지만, 홍치상의 명예회복은 숙종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금지된다.
2.4. 사후
1697년(숙종 23) 12월 22일 지병인 숙환으로 사망하였다.[14] 한때는 정치적으로 부딪혔던 사이지만,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숙휘공주[15] 의 장례에 의거하여 상제를 치르게 하고, 통곡하였다. 공주는 앞서 세상을 떠난 남편 익평위 홍득기와 합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산 24에 있다.
3. 매체에서
[1] 본관은 남양,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사후에 효간(孝簡)의 시호를 받았다. [2] 숙신공주는 1637년(인조 15) 3세로 사망했는데, 효종 부부가 청나라에 볼모로 갈 때 북쪽 지방 찬 바람에 병이 들었다고 한다. [3] 일찍 요절했지만 민회빈 강씨가 1629년, 1631년에 두 군주를 낳았고, 1636년 원손 경선군을 낳은 상황이었다. [4]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쓴 책으로, 당대 여성들을 위한 유교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5]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동생인 홍명하는 효종대의 명신이다. [6] 부위는 군주의 남편에게 내리는 작위로 종1품에 해당한다. [7] 홍득기는 이전에 인조의 딸 효명옹주의 부마간택에 후보 3명(김세룡, 홍득기, 정재악(정태화의 아들로 숙정공주의 남편인 정재륜의 형)에 들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이 부마가 된다. [8] 먼저 숙안공주의 가례를 치르고, 8월 9일 소현세자의 장녀 경숙군주도 가례를 치른다. [9] 효종실록 5권, 효종 1년 11월 5일 을묘 2번째기사. # [10] 당시 조선왕조실록. # # [11] 효종의 5녀인 숙정공주 등도 함께 비난받았다. [12] 때에 죽은 사람의 품계 등을 기록하여 관 앞에 세우는 깃발. [13] 홍치상과 심정보의 아내들은 이정영의 딸이자 서로 자매 사이로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들이다.[14]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2월 22일 무진 4번째기사. # [15] 숙안의 동생. 숙안보다 1년 먼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