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

 

1. 개요
2. 조선의 사용례

崇禎

1. 개요


'''명나라 연호'''
'''청나라 연호'''
희종
천계(天啓)
(1621년~1627년)

'''의종'''
'''숭정(崇禎)'''
'''(1628년~1644년)'''


세조
순치(順治)
(1644년~1661년)
중국 명나라 숭정제1628년을 원년으로 삼아 반포한 연호. 1628년부터 1644년까지 17년간 사용했지만, 숭정제1644년자살하여 공식적인 사용이 중지되었다. 이후 중국 대륙청나라가 장악하여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지만, 남명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나 인물들은 청나라 연호를 거부했다.
조선청나라에게 신속을 당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청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반청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 문서나 비석 등에 여전히 숭정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명나라를 받들겠다는 표현. 물론 청나라가 이를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몰래 했는데, 병자호란 이후에 100여 년이 지난 18세기까지 숭정 연호를 사용한 비석이나 문집이 발견된다.
단,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다 숭정연호를 쓰진 않았으므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한 문서나 금석문도 적잖이 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박지원열하일기를 쓸 적에 청나라 연호를 썼다고 욕을 먹었음을 보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조선선비라면 청나라 연호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유학자들이 없잖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의 사용례


공식적으로는 숭정 연호를 쓸 수 없게 된 이후, 조선의 반청인사들이 알음알음 숭정 연호를 오랫동안 써왔다. 그런데 이러는 와중에 다른 연호와 달리 표현하는 방법이 더 다양해졌다. 사도세자가 죽은 1762년(영조 38년, 임오년)을 예로 들어보자.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 숭정기원후 135년
  • 숭정기원후 3임오
  • 숭정갑신후 119년
  • 숭정갑신후 2임오
첫 번째는 숭정 원년(1628)으로부터 숫자를 매겼다.
두 번째는 숭정 원년으로부터 세 번째 임오년이라는 것으로, 숭정 연호와 간지를 겹쳐 표현했다.
세 번째는 숭정 17년(1644)을 원년으로 삼아 단순하게 숫자를 매겼다.
네 번째는 숭정 17년으로부터 두 번째 임오년이란 뜻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방법은 '숭정'이란 단어를 포함하면서도 숭정 원년이 기준이 아니다. 숭정 17년(1644)에 숭정제가 자살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했는데, '''이해가 바로 갑신년이었다.'''[1] 이후 명나라의 잔당들이 자칭 명나라라고 하며 탈환을 꿈꾸었지만 워낙 지리멸렬하여 '명나라 조정의 후신'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사람들은 숭정 17년(1644)을 명나라가 멸망한 해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반청인사들은 이때를 원년으로 삼아 연도를 헤아리기도 하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숭정연호가 아니라 '명나라가 무너진 해'를 원년으로 삼는 새로운 기년법이다.

간지(干支)를 붙여 표기하는 두 번째와 네 번째 방식은 간지의 60년 주기 중에서 무진년부터 계미년까지 16년간은 간지 앞에 붙는 숫자가 하나 차이가 났다. 그래서 위에서 예로 든 1762년이 숭정기원후 3임오 / 숭정갑신후 2임오로 숫자가 다르다.
'숭정기원후'를 줄여서 '숭정후' 또는 '숭정'이라고 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간지를 붙여 표현할 때엔 '두 번째'란 뜻으로 재(再)라고 하는 경우도 흔했다. 가령 2임오(二壬午)를 재임오(再壬午)라고 하는 식. 그 외에 몇 번째 간지인지 설명해야 하는데 간지만 쓰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숭정기원후 3임오'라고 해야 하는데도 그냥 '숭정기원후 임오년' 또는 '숭정후 임오년'이라고만 쓰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 몇 번째 간지인지 세기가 꽤 귀찮았던 모양. 지금처럼 대조할 서력기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청의 연호를 역산해서 계산해야 했으니 숭정 이래 몇 번째 간지인지 세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덜 쓰이긴 했지만, 숭정 원년(1628)을 황명기원(皇明紀元), 또는 황명기원후무진후(皇明紀元後戊辰後)라고 칭하며 연도를 헤아린 사례도 있다. 숭정 원년이 무진년이었기 때문에 '무진후'라고 한 것이다.
지금도 유서 깊은 종갓집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축문에서 숭정 연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현대에 반청사상 때문에 그럴 리는 없고, 단지 집안의 관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숭정 연호 대신 남명의 마지막 황제 주유랑의 연호 영력(永曆)[2]을 사용하는 반청인사들도 있었다. 사용방법도 숭정 연호와 비슷하지만, 조선에서도 명나라는 숭정제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지 영력 연호보다는 숭정 연호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1] 따라서 조선에서는 이를 갑신의 변(變) 또는 숭정갑신(崇貞甲申)이라 불렀다. [2] 1647년을 원년으로 하여 1662년까지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