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종

 


'''묘호'''
'''숭종(崇宗)'''
'''시호'''
성문황제(聖文皇帝)
'''연호'''
천의치평(天儀治平, 1086년 7월 ~ 1089년)
천우민안(天祐民安, 1090년 ~ 1097년)
영안(永安, 1098년 ~ 1100년)
정관(貞觀, 1101년 ~ 1113년)
옹녕(雍寧, 1114년 ~ 1118년)
원덕(元德, 1119년 ~ 1127년 3월)
정덕(正德, 1127년 4월 ~ 1134년)
대덕(大德, 1135년 ~ 1139년)
'''능호'''
현릉(顯陵)
''''''
이(李)
''''''
건순(乾順)
'''생몰기간'''
1083년 ~ 1139년 7월 1일 (56세)
'''재위기간'''
1086년 8월 ~ 1139년 7월 1일 (53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린 나이에 즉위하다
2.2. 서하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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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하의 제4대 황제. 휘는 이건순(李乾順). 묘호는 숭종(崇宗). 시호는 성문황제(聖文皇帝)이다. 아들을 네명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이 태자 이인애(李仁愛)이고, 차남이 인종 이인효이며, 삼남이 양종의 아버지인 월왕(越王) 이인우(李仁友)이다.

2. 생애



2.1. 어린 나이에 즉위하다


부친인 혜종(惠宗) 이병상이 복위 후 26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는 바람에 어린 태자였던 이건순이 4살의 나이에 황제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1086년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황제 본인이 직접 정무를 보는건 불가능했으므로, 할머니인 황태후 양씨(皇太后 梁氏)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황태후 양씨는 그 전부터 실권을 차지한 후 공공연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특히 그 친가인 양씨 일족도 덩달아 전횡을 부리는 탓에 황궁에 온갖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게 되어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져버렸다. 이 마이너스 효과는 국방에도 미쳐 군사력마저 약화를 불러일으켜[1] 북송군이 침입할 때 서하가 피해를 입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어쨌든, 1099년에 숭종이 나이 17세가 되고 나선 직접 친정을 하게 된다.

2.2. 서하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


1099년에 숭종은 친정을 하여 실권을 가졌고, 반역죄나 진배없는 짓을 저지른 양씨 일가를 예외없이 숙청시켰다.
이후, 관료 제도를 정비하여 과도한 부역을 경감시키는 한편 이 인력들을 농업에 노동력으로 이용, 황무지를 개척함으로써 식량 증산에 성공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북송요나라가 쇠퇴하고 있었다. 요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며, 숭종은 요나라와 동맹을 맺은 후에 송나라를 침공하여 어렸을 적에 조국을 짓밟은 복수를 단단히 하였다. 그리고 1125년, 금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하자 당시 요나라의 국왕이었던 천조제가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를 숭종은 쿨하게 무시해버린다. 아무튼 이 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켜 만리장성 서쪽 지역의 땅, 즉 비단길을 확보하는데 성공, 외교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게 된다.
1139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2] 그의 치세때가 서하의 전성기였고 최고로 흥했음을 업적이 말해주고 있다. 즉위 초기에 왕권을 위협한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척박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황무지로 식량을 생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좋은 판단으로 기회를 잘 노려 영토를 확장시켜 외정에 온 힘을 다하여 아들인 인종이 내정에 힘을 쓸 수 있게 기반을 다져놓은 치세는 후한 평가를 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이 함께 번갈아 말아먹어서 이 전성기도 그렇게 길게 가진 않았다.

3. 기타


숭종 본인은 징기스칸 4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건순이라는 이름이 중국 문화권의 가상 장수 이름에 널리 쓰이고 있다. 더불어 왕건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
[1] 양씨 일가의 사병으로 전환시킨 까닭도 존재한다.[2] 전전임 황제전임 황제가 각각 21세,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을 비교하면 그나마 오랫동안 생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