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연호)

 


'''貞觀'''
주역의 「天地之道、'''貞觀'''者也」구절에서 유래한 연호중국에서 2번, 일본에서 1번 사용되었다.
1. 중국의 왕조 당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이 사용한 연호
1.1. 주요 사건
1.2. 관련항목
2. 중국의 왕조 서하의 제4대 황제 숭종이 사용한 연호
3. 일본의 제56대 천황 세이와 덴노와 제57대 천황 요제이 덴노가 사용한 연호 조간(じょうがん)
3.1. 주요 사건


1. 중국의 왕조 당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이 사용한 연호


'''당나라 연호'''
고조
무덕(武德)
(618년~626년)

태종
'''정관(貞觀)'''
(627년~649년)

고종
영휘(永徽)
(650년~655년)
중국 당나라 태종 시기에 사용했던 연호. 627년부터 649년까지 사용하였으며, 태종 사후 고종이 즉위하면서 650년부터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조 이연의 아들이었던 이세민626년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즉위한 뒤, 이듬해인 627년부터 정관으로 연호를 고쳤으며 양제의 폭정과 수당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태평성대를 열었다. 정관 연간에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 유능한 인재들이 등용되었으며, 군사적인 성과도 달성하였다. 이러한 태종의 치세를 정관지치라고 불렀으며, 태종의 정치는 정관정요라는 책으로도 간행되어 지도자들이 즐겨읽는 책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태종의 업적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오점이 남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관의 치세는 당나라를 설명할 때 꼭 빠지지 않는다.

1.1. 주요 사건



1.2. 관련항목



2. 중국의 왕조 서하의 제4대 황제 숭종이 사용한 연호


'''서하 연호'''
숭종
영안(永安)
(1098년~1110년)

숭종
'''정관(貞觀)'''
(1101년~1113년)

숭종
옹녕(雍寧)
(1114년~1118년)
서하의 제4대 황제였던 숭종 이건순 재위기에 사용한 연호로 사용 시기는 1101년부터 1113년까지이며 1114년에 옹녕(雍寧)으로 개원하였다.

3. 일본의 제56대 천황 세이와 덴노와 제57대 천황 요제이 덴노가 사용한 연호 조간(じょうがん)


'''(てん(あん
덴 난'''
'''(じょう (がん'''
'''(がん(ぎょう
간 교'''
859. 4. 15.
~ 877. 4. 16.

헤이안 시대연호일본의 제56대 천황 세이와 덴노 고레히토(惟仁)와 그의 아들 제57대 천황 요제이 덴노 사다아키라(貞明)가 사용하였다.

3.1. 주요 사건


  • 덴난 3년(859년) 음력 4월 15일[1], 조간 원년으로 개원
  • 조간 6년(864년), 후지산 대분화. 이른바 조간대분화(貞観大噴火일어위키)
  • 조간 8년(866년) , 음력 윤3월 10일, 오텐몬 방화사건, 이른바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 발생. 음력 8월 19일,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비황족 출신 최초로 섭정에 선임
  • 조간 10년(868년), 음력 7월 8일 하리마노쿠니(播磨国)[2]에 지진 발생 링크(일어위키)
  • 조간 11년(869년), 조간격식 12권의 완성. 조간 산리쿠지진링크(일어위키)과 이로인한 조간 쓰나미의 발생.
  • 조간 12년(870년), 조간에이호(貞観永宝일어위키)의 주조.
  • 조간 13년(871년), 조간격식 20권의 완성. 이로써 조간격식이 완성되었다. 초카이산(鳥海山)의 분화.
  • 조간 16년(874년), 카이몬 산(開聞岳)의 분화. 세이와 덴노, 아들인 사다아키라 친왕(후의 요제이 덴노)에게 양위.
  • 조간 19년(877년) 음력 4월 16일[3], 간교(元慶[4]) 원년으로 개원.
[1] 율리우스력으로 5월 20일[2] 현재의 효고현 남부[3] 율리우스력으로 6월 1일[4] 켄케이로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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