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1. 사건 개요
2. 사건 경위
3. 발견과 그 이후
4. 유사 사건
5. 관련 문서


1. 사건 개요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
1988년 도쿄도 도시마구(豊島区)의 모 아파트에서 어린이 4명만 두고 어머니가 집을 나갔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 사건 경위


  • 1979년경, 첫째의 아버지가 증발한다. 그 후 장남의 초등학교 취학 통지가 오지 않았고, 관공서를 찾아간 어머니는 첫째의 아버지가 혼인신고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 1981년경, 둘째(딸) 탄생. 집에서 출산하였다.
  • 1984년경, 셋째(아들) 탄생. 이 아이는 출생 직후 사망했다.
  • 1986년경, 다섯째(딸) 탄생.
  • 1987년 가을 무렵, 어머니 A는 첫 아이에게 동생들을 떠맡기고 집을 나간다. 이후 어머니 A는 생활비로 7~8만 엔을 등기로 보냈으며 가끔 모습을 비추었다.
  • 1988년 4월 막내(당시 2세)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맏이의 친구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를 옷장 위에서 몇 번이나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아이는 두부손상으로 사망하였다.[1]
  • 1988년 7월 17일 불량학생의 집합소가 되어 있다는 집주인의 신고를 받고, 스가모 경찰이 맨션을 조사하면서 아이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첫째는 14~15살, 둘째는 7살, 셋째는 3살이었으며 백골화 한 유아(차남)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당시 부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이후 세간에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동생 자매는 쇠약상태[2]였기 때문에 다음날 18일 복지사무소에 맡겨졌다.

    첫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애매한 점이 많았으며, 경찰은 둘째의 진술에서 맏이가 동생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편의점 도시락 등의 정크푸드를 먹으며 살고있었기 때문에 영양실조 상태였다.
  • 1988년 7월 20일 첫째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다. 첫째는 학교에 갈 나이인데도 낮에도 놀고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한 어른들이 "어느 소학교니?" 라고 묻자, 항상 "릿쿄소학교"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대답하도록 지도[3]하고 있었던 것이다.
  • 1988년 7월 23일, TV 뉴스에서 사건을 접한 어머니가 출두하였다. 본인의 증언으로 어머니가 9개월 전에 집을 나왔다는 사실과, 막내(2세)가 실종 상태라는 것이 파악되었다.
  • 1988년 7월 25일, 첫째는 막내가 친구들의 폭행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도시의 덤불에 묻었다고 증언하였다.
  • 1988년 8월 어머니가 보호 책임자 유기 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유죄 판결을 받는다. 첫째는 막내동생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하여 상해 치사 및 사체 유기로 도쿄가정법원에 송치되지만, 상황을 고려하여 고아원에 보내진다. 당시 일본 검사들은 기소가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 사건만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처리하였다.

3. 발견과 그 이후


1988년 7월 18일 도쿄 토시마에 있는 아파트의 주인이 "어머니가 집에 아이 3명을 내버려 둔 채 귀가하지 않는다."라고 신고하였다. 복지 사무소 상담원이 방을 방문하자, 세 아이가 있었는데 집주인의 말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담원은 방 안에 옷가지들이 산만하게 펼쳐져 있었고, 커튼도 닳아버린지 오래인 상태였으며, 음식물 쓰레기가 부패한 듯한 냄새가 가득했다고 말했다.[4]
동생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고, 특히 차녀는 병원에 즉시 입원해야 할 정도였다. 장남에 따르면, 3명은 각각 아버지가 다르고 아파트에서 계속 생활하였으며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는 1987년 10월에 집을 나간 후 가끔 모습을 보러 돌아왔지만, 1988년 1월부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가끔 2~3만 엔의 생활비를 송금할 뿐이었고 '''어머니로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장남은 어머니가 주고 간 생활비로 슈퍼에서 주먹밥 등등의 정크푸드를 사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가스나 전화는 이미 끊겼으며, 전기도 마찬가지였다. 집세도 2월부터 미납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주변 주민들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주변의 무관심 때문이거나, 혹은 어머니의 철두철미한 교육 탓일 수도 있다.
어머니 A는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주로 집에서 출산하였고, 아이들의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았다.[5] 가지고 있던 수첩에 따르면, 5명의 출생년도는 다음과 같다.
  • 장남 1973년 10월
  • 장녀 1982년 11월
  • 차남 1983년 11월
  • 차녀 1984년 9월
  • 삼녀 1985년 9월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취학 통지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행정기관이나 관계기관에 어떠한 문의나 상담을 하지 않았다. 교재를 사주고 공부를 시키는 등의 교육을 하긴 하였지만, 그 수준은 매우 낮아 장남은 당시 14세였는데도 성만 한자로 쓸 수 있었고 이름은 히라가나로만 쓸 수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차남이 사망한 이후의 행적이 밝혀졌다. 사건 발생 2년 전인 1985년 2월, 차남이 우유병을 입에 문 채 죽어 있었다. 어머니 A는 처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않고 그대로 비닐 봉투에 숨겨 두었으며 스기모로 이사할 때도 가방에 휴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벽장을 불단으로 꾸며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하였고, 제물(祭物)도 올렸다고 한다. 경찰이 발견한 백골 시신은 차남이었다.
현재 이들 중 딸 자매는 이름을 바꾸고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첫째는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6]

4. 유사 사건



5. 관련 문서



[1] 이 혐의에 대해서 장남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이후 고아원 송치가 결정되었다.[2] 영양실조상태. 셋째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았다.[3] 장남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처럼 보여야 했었기 때문에 대학교 부속으로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확률이 다소 높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4] SBS의 긴급출동 SOS24를 생각하면 된다.[5] 2남 3녀''' 모두가'''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둘째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6] 그도 그럴 것이 여동생을 친구들과 함께 죽이고 유기한 과거가 있는 이상 입양은 당연히 무리이며 범죄 기록은 당시에는 말소됐겠지만 알려지면 살아가는게 힘들어지니 사실상 과거를 숨기며 혼자서 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