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슌 덴노

 


[image]
'''한풍 시호[1]'''
스슌 덴노(崇峻 天皇, 숭준 천황)
'''화풍 시호'''[2]
하츠세베노와카사사기노스메라미코토
(長谷部若雀天皇)
''''''
하츠세베(泊瀬部)
'''능호'''
구라하시노오카능(倉梯岡陵)
'''생몰'''
520년?, 521년? 552년[유력] ~ 592년 12월 12일
'''재위'''
587년 ~ 592년 12월 12일
'''황거'''
쿠라하시노시바카키노미야(倉梯柴垣宮)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


일본의 제32대 천황. 긴메이 덴노의 아들.

2. 생애


긴메이 덴노의 12남으로 소가노 이나메의 딸인 오아네노키미(小姉君)의 아들이었다.
소가 가문과 모노노베 가문 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정국이 뒤숭숭한 가운데 요메이 덴노가 585년에 취임한 이후 2년 만에 승하하였다. 요메이 덴노가 후사를 정하지 않고 죽으면서 덴노의 자리에 일시적으로 공백이 생겼는데, 권력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모노노베 집안은 아나호베 황자를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아나호베를 덴노로 추대하기 위해 황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고, 소가노 우마코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소가노 우마코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바로 아나호베 황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587년 7월,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가 '누카타베 태후의 명령이다'라는 명목하에 아나호베 황자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주살하였으며, 그와 친밀했던 야카베 황자까지도 죽였다. 이 때 조정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소가는 조정의 군대를 이끌고, 모노노베 가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결정하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공격하였으며, 이 때 발생한 내전을 '''정미의 난''''이라 부른다. 이 때 소가 가문이 모노노베 가문을 완전히 제압하면서 중앙정계는 소가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소가 가문은 누카타베 태후와 모의하여 긴메이 덴노의 12남이자 요메이 덴노와 마찬가지로 소가노 우마코의 외조카인 스슌 덴노를 옹립하였다.
모노노베 가문의 몰락으로 불교가 받아들여졌고, 588년 백제로부터 혜총을 비롯하여 사공, 노반박사[3], 와박사[4], 화공 등이 파견되어 왔다. 또한 그해에 호코지(법흥사)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592년, 소가노 우마코의 권력에 반감을 느낀 스슌 덴노와 소가 가문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고[5] 스슌 덴노는 소가 가문이 보낸 자객 야마토노아야노 아타이[6] 코마(東漢直駒)에게 암살당하였다. 암살설이나 타살설이 있는 천황은 몇몇 있지만, 사료에 명확하게 암살된 사실이 기록된 건 스슌 덴노가 유일하다. 당시 야마토 왕실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 때 그의 나이 72세였다.

3. 가족관계


  • 비: 고테코(小手子) - 오오토모노무라지누카테(大伴連糠手)의 딸.
    • 장남: 하치코 황자(蜂子皇子)
    • 딸: 니시키테 황녀(錦代皇女)
  • 빈: 가와카미노이라츠메(河上娘) - 소가노 우마코의 딸.
  • 부인: 후츠히메(布都姫) -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의 여동생.
  • 불명
    • 차남: 사다요 친왕(定世親王)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유력] 552년생이라는게 유력이다.[3] 불탑의 상륜부를 주조하던 기술자[4] 기와 전문 기술자[5] 일본서기에는 사냥에서 잡은 산돼지의 목을 자르는 것을 본 스슌 덴노가 "'''그 새끼도 조만간 저렇게 모가지를 쳐야 할 텐데...'''"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고 전한다.[6] 야마도노아야노 아타이(東漢直)도 소가 씨와 마찬가지로 도래 씨족으로 시조는 아지사주(아지길사)라는 인물이라고 전하는데, 백제 때에 왜로 건너간 아직기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아타이(直)'는 주로 도래계 씨족들에게 주어졌던 가바네로 나중에 '무라지(連)'를 거쳐서 '이미키'로 합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