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메이 덴노

 


[image]
'''한풍 시호[1]'''
긴메이 덴노(欽明天皇, 흠명 천황)
'''화풍 시호'''[2]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
(天国押波流岐広庭天皇, 天国排開広庭尊)[3]
아메쿠니오시하루키히로니와노천황
(天国押波流岐広庭天皇)[4]
아메쿠니오시하루키히로니와노미코토[5]
(阿米久爾意斯波留支比里爾波乃弥己等)
(天國案春岐廣庭天皇)[6]
'''별호'''
시키시마노시메라미코토(志帰嶋天皇,斯帰斯麻天皇)
'''능호'''
히노쿠마노사카이능(檜隈坂合陵)
'''황거'''
시키시마노카나사시노미야(磯城島金刺宮)
'''생몰'''
509년 ~ 571년 5월 24일
'''재위'''
539년 12월 5일 ~ 571년 4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한국과의 관계
5. 백제 성왕 동일인물설
5.1. 동일인물설 비판
6. 신라군과의 싸움
7. 일본서기 흠명조


1. 개요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는 오호도노스메라미코토(男大迹天皇)의 적자(嫡子)이다.

(중략)

겨울 12년 경진삭 갑신에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는 천황이 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황후를 높여서 황태후라 불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와 모노노베노 오오무라지 오코시(物部大連尾輿)를 대련으로 삼고, 속아도목숙녜 대신을 대신으로 삼은 것은 모두 예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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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일본서기》 권15 흠명조 즉위년.

일본의 제29대 천황. 26대 케이타이 덴노타시라카 황녀의 아들이자 일본 왕조의 두 번째 시조. 태종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한국식 음독으로는 '흠명(欽明)'이다.
'아메노 시로시메스 오오키미(治天下大王)'라고 불렸으며, '야마토 대왕(ヤマト大王/大君)'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그는 아스카 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었다. 시호인 '아메쿠니오시하라키(天国押波)'는 '천지개벽(天地押波)'을 이르는 원시적 단어로, 최근 고언어학 연구에 따르면 화풍시호가 일본서기가 쓰여진 7세기~8세기 무렵에 생긴 것과 달리 언어학적으로 유일하게 그 시대부터 사용된 발음이자 음차 한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붙은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대한 영웅이자 대왕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긴메이 덴노는 히노쿠마노사카아이노미사사기(檜隈阪合陵 ひのくまのさかあいのみささぎ)에 묻혔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가시하라시(橿原市)의 미세마루야마 고분(見瀨丸山古墳)에 묻혔다고 추정된다. 이 고분은 상당히 거대한 전방후원분으로 고고학 연대추정을 볼 때 한 번 이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권세가 소가노 우마코의 아버지인 소가노 이나메의 무덤도 근처에 있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된다.

2. 생애


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를 설명하는 여러 연대기의 차이 때문에 어떤 이는 그가 실제로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의 라이벌이었다고 믿는다.
왜국의 대왕인 케이타이 덴노와 황후 타시라카 황녀의 아들로 적자였지만 3남이었다. 적서구별이 덜했던 시절인지라 케이타이 덴노 사후 후계계승을 두고 형제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서장자 안칸 덴노가 즉위하지만 자식 없이 사망하자 안칸 덴노의 자리를 안칸의 친동생이자 긴메이의 이복형인 센카 덴노가 잇는다. 그로 인해 긴메이 덴노는 형 센카 덴노가 죽은 후에 황좌에 올랐다.
하지만 자식이 없던 안칸 덴노와 달리 센카 덴노는 적자와 서자 모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황위를 노리고 정변을 일으켜 센카 덴노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소가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는 것도 자신이 센카계를 몰아내고 즉위할 때 소가씨의 도움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39년 12월 5일 긴메이 덴노가 등극하고, 540년을 원년(元年)으로 삼아 1월에 정비(正妃)를 정하게 된다.
소가 씨(蘇我 氏)의 강력한 지지에 의해 즉위한 긴메이 천황은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와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등을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조정은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物部 氏)의 총지휘하에 놓였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불교 숭배'를 둘러싸고 30년이 넘도록 대립투쟁을 펼쳤다.
긴메이 천황은 그의 궁전인 시키시마 노 카나자시 궁(磯城嶋金刺宮)을 야마토에 세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긴메이 덴노는 571년까지 다스렸고 히노쿠마노사카 합릉(桧隈坂合陵)에 묻혔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가시하라 시(橿原市)의 미세마루야마 고분(見瀬丸山古墳)에 묻혔다.

3. 가족관계


센카계를 포섭하기 위해서 센카 덴노의 딸들과 혼인했으며, 공신 소가노 이나메의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의 딸들과 혼인했다. 소가노 이나메의 딸인 기타시히메(堅塩媛)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무려 10명이 넘어가는 것을 볼 때 개인적으로 총애를 많이 한 모양. 그와 별개로 고려왕건처럼 태어난 자녀들은 이복형제들끼리 혼인시키고, 이후에도 왕실과의 족혼을 시키게 해서 귀족들의 혈통이 왕실에 일정 이상 가까이하지 않도록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기 고려처럼 야마토 왕실에서 형제상속이 흔했다지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오오키미로 즉위한다는 동아시아 역사적으로도 보기 힘든 기록을 세운다. 그 다음으로 많은 건 고려 태조의 아들 셋이 즉위한 것과 고려 현종의 아들 셋이 즉위한 것.
28대 센카 덴노의 딸들
  • 황후: 이시히메 황녀石姫 皇女
    • 야타노타마카츠노오에 황자箭田珠勝大兄 皇子
    • 30대 비다츠 덴노
    • 카사누이 황녀笠縫 皇女
  • 비: 쿠라노와카야히메 황녀倉稚綾姫 皇女
    • 이소노카미 황자石上 皇子
  • 비: 오이시히메 황녀小石姫 皇女
  • 비: 히카게 황녀日影 皇女 - 고사기에는 안 나온다.
    • 쿠라 황자倉 皇子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의 딸들
  • 비: 기타시히메堅塩媛
    • 31대 요메이 덴노
    • 이와쿠마 황녀磐隈 皇女
    • 아토리 황자臘嘴鳥 皇子
    • 33대 스이코 덴노
    • 마로코 황자椀子 皇子
    • 오야케 황녀大宅 皇女
    • 이소노카미베 황자石上部 皇子
    • 야마시로 황자山背 皇子
    • 오토모 황녀大伴 皇女
    • 사쿠라이 황자桜井 皇子
    • 가타노 황녀肩野 皇女
    • 타치바나노모토노와카 황자橘本稚 皇子
    • 도네리 황녀舎人 皇女
  • 비: 오아네노키미小姉君
    • 우마라키 황자茨城 皇子
    • 가즈라키 황자葛城 皇子
    • 아나호베노하시히토 황녀穴穂部間人 皇女
    • 아나호베 황자穴穂部 皇子
    • 야카베 황자宅部 皇子
    • 32대 스슌 덴노
春日日抓의 딸
  • 비: 카스가노누카코春日糠子
    • 카스가노야마다 황녀春日山田 皇女
    • 타치바나노마로 황자橘麻呂 皇子

4. 한국과의 관계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는 유달리 6세기 당시 한반도 관련 기사가 많은 편이다. 그것도 신라 계통의 기록이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 측의 삼국사기 등과 달리 백제본기 등 백제계 사서를 인용한 것이라 한국사 연구자에게 특히 주목받고 있다.
6세기 당시, 한성 함락으로 인한 국력 약화를 극복한 백제와 대대적으로 성장한 신라 사이에 낀 가야 제국(諸國)의 세력은 점점 약해져 갔고, 신라는 그런 가야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가야 제국은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에게 대항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하나 둘씩 멸망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경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도 어느 정도 기록이 있으나, 백제와 가야 제국 간의 교섭은 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고, 일본서기의 긴메이기에 기록된 내용에 의거하는 바가 크다.[8]
물론 일본서기는 일본 입장에서 대외관계를 기술한 사료기 때문에 기록 중 백제와 가야 제국 등을 일본의 속국 취급하는 부분이야 적절한 사료비판을 거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나 지배라는 임나일본부설적 관점을 제거하고 볼 경우, 백제계 사료를 대대적으로 참조하여 당시의 가야 제국의 동향에 대해 서술한 것은, 그만큼 가야 제국과의 교류 관계(지배-피지배가 아니다!!!)가 야마토 왕권에게 있어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보더라도, 일본 열도 내의 한반도계 유물/유구 중 백제계가 주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6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금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등의 가야 제국과 신라(!)의 문물이 대부분이다.[9] 이러한 가야 제국과 왜의 관계가 "임나 지배"라는 임나일본부의 남선경영론 사관이 탄생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5. 백제 성왕 동일인물설


백제 성왕이 사실은 긴메이 덴노로, 일본의 대왕을 겸임했다는 설이다. 긴메이 덴노의 기록이 굉장히 소략하기 그지없는 반면에 성왕 기록만 잔뜩 나와서(...) 생긴 오해(?).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다'''. 일단 결정적인 근거는 없고, 단편적인 의문점들이 종합되어 구성된다.
  • 재위기간의 동일
우선 성왕의 재위기간을 보자. 523 ~ 554년이니까 32년간이다. 그럼 긴메이 덴노는? 539 ~ 571년이니까 33년간이다. 심지어 539년에는 12월에 즉위해서 얼마 해먹지도 못했기에 540년을 원년으로 치는 상황이다. 그럼 32년... 사실상 동시대에 살았던 양국 지배자의 재위기간이 동일하다. 시기는 다르지만, 알다시피 일본서기의 시간대가 굉장히 모순적이라는 것은 비교적 알려진 사실. 고지키(고사기)에는 긴메이가 528년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고, 이 경우에는 재위기간이 같았던 긴밀한 관계의 두 왕이 불과 5년 차이로 양국에 있었던 것이 된다. 하여간 성왕과 상당히 유사한 기간동안 통치했었고, 재위기간이 같다는 점이 뭔가 의심된다는 식의 주장이다.
  • 밀접한 관계와 압도적인 차이의 기록량
31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두 왕에 대한 기록량은 일본서기 안에서도 대단히 많이 차이난다. 사실상 긴메이 덴노는 자식 낳은 것과 소소한 내치, 그리고 신라 정벌로 대판 깨진 것과 고구려 정벌로 성공한 것만 나오는데, 고구려 정벌 역시 백제측의 기록을 끌어온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이라 독자적으로 한 일이 거의 없다.(...) 사실상 긴메이의 기록은 백제 성왕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한 기록만 나오고, 실제로는 거의 모든 과정을 성왕이 직접 다 해치운다. 이게 뭔가 많이 석연찮다는 식의 주장이다.
  • 유일한 대외업적이 성왕의 것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긴메이의 유일한 대외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정벌은 실제로는 백제 성왕의 업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 또한 의심스럽다는 주장.
  • 백제궁?
긴메이의 아들인 30대 비다츠 덴노가 즉위하고 나서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기록[10]과 긴메이의 증손자인 조메이 덴노 또한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는 기록[11]이 일본서기와 부상략기에 모두 실려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제는 일본의 옛 지명이다. 쿠다라(백제)천 등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는 백제에 관련된 지명이 일본에는 많이 남아있다. 어쨌든 백제에 대한 지명이 등장하는 게 의심스럽다는 식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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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현 고료초에 존재하는 쿠다라(백제). 마을의 이름이 백제이며 과거 지명은 쿠다라노(百済野)즉 백제들판. 마을에 흐르는 강의 이름은 백제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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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의 모습. 화제로 소실된 후 재건을 거쳤고,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한 3층 탑이다. 창건 당시엔 9층탑이었다. 원래 명칭은 백제대사이며 비다츠 덴노가 백제강을 중심으로 서쪽엔 백제대사, 동쪽엔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 기거하며 백제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비다츠 덴노가 만든 백제궁은 백제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현에 있는 것이다.
  • 황위 계승의 문제
26대 케이타이 덴노의 뒤를 이은 27대 안칸 덴노와28대 센카 덴노의 통치기는 합쳐도 10년이 안 된다. 기록을 보자면 센카 덴노가 사망한 시점에서 긴메이 외엔 케이타이 덴노의 자식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긴메이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내려오던 천황의 승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긴메이 덴노는 일단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의 배다른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적으며 그가 즉위한 시기 즈음에 백제 사람이 건너왔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고사기에는 케이타이의 사망이 527년이고, 긴메이의 재위가 528년부터 시작되는데.. 아래 항목을 보면 528년 긴메이 재위 시작설도 있다. 그렇다면 안칸과 센카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천황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긴메이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식의 주장.
  • 백제 관료들의 왜 파견
성왕이 전사하기 전까지 성왕 치세에 백제 관료들이 꾸준하게 왜에 파견되었다.
  • 백제 위덕왕의 아들은 왜국에 남았다
백제 성왕의 아들인 부여창은 백제 왕이 되었지만,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는 위덕왕이 죽은 이후에도 그대로 일본에 남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좌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쇼토쿠 태자의 실존이 의문시 되는 상황에서 아좌태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외에도 위덕왕이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은 호류지 몽전에 안치되어 있는 등 이상한 점이 있다는 주장이다.
  • 고구려 정벌과 연도 문제
일본서기에는 551년(긴메이 12년)에 성왕이 신라와 임나(가야)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되찾았고, 554년(긴메이 15년)에 왕자 여창(餘昌:삼국사기의 부여창, 후의 위덕왕)이 임나와 함께 신라로 처들어갔는데, 성왕이 그를 방문하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죽고, 562년(긴메이 23년)에 임나가 신라에 의해 망했으며, 7월 왜군이 신라에 갔다가 패한 다음 갑자기 난데없이 8월에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 왕궁을 점령했다고 쓰여 있다.(...)
삼국사기에는 551년에 백제와 신라가 각자 공동으로 북상해 고구려 남부 한강 유역을 빼앗았고, 554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전사했으며, 56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대가야를 공격하여 신라에 합병시켰다고 쓰여 있다. 대체로 시기에 대한 언급이 모순적인 것이 종종 있는 일본서기지만, 그래도 이 시기는 그럭저럭 삼국사기의 기록과 교차검증이 된다. 그런데 대체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 왕궁(평양성?)까지 점령했다는 이 황당무계한 기록은 왜가 갑자기 고구려를 친 이유는 고사하고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기록인지 근거가 뭔지 궁금해진다. 560년 즈음에는 왜는 커녕 백제가 고구려를 친 기록마저 다른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7월의 전투는 매우 상세해서 사실로 보이는데,[12] 거기서 대패해놓고는 8월에 또 고구려와 전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7월의 전투와 달리 기록이 매우 간략하며,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고지키(고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실려있다. 긴메이의 즉위년이 528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에 긴메이의 재위기간을 맞춰보면 긴메이 23년은 550년이 되는데, 550년에는 백제 성왕이 양원왕 시기(양원왕 6년)의 고구려를 쳐서 도살성을 함락시킨 일이 있다. 한마디로 왜가 성왕의 고구려 정벌을 엄청나게 뻥튀기를 해서 자신들의 기록으로 삼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에 맞추게 되면 성왕이 한강을 수복했다는 긴메이 12년은 539년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538년과 불과 1년 차이로 좁혀지게 된다.
시기가 개판으로 흩어지긴 했지만, 어느정도 사실에 근거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뒤죽박죽이고 일본 천황에게 유리한 일본 중심주의적으로 가득 차 있는 일본서기임에도 묘하게 특정 사건과 그 관계에 있어서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고대 일본과 일본 천황들을 드높이기 위한 사관으로 인해 일본 중심주의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말의 진실을 남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긴메이가 사실은 성왕이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다만 동일인물설에도 몇 가지 차이점들이 있다.

5.1. 동일인물설 비판


그럴듯 해보이는 동일인물 주장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소리. 아마추어 역사가들이나 주장하지, 학계에서는 일설로조차 성립하지 못하는 뻘소리다.
  • 재위기간
재위기간이 엇비슷한 것만으로는 동일인물의 증거로서 불충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때문에 고사기를 인용하여 두 군주의 즉위년이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려 한 듯 하지만, (고사기가 일본서기보다도 정식 사서가 아닌 사서인 점은 제쳐두고라도[13])고사기에서 긴메이의 즉위년은 528년이 아니다. 긴메이의 아버지인 케이타이의 사망 연도가 527년으로 나온 점에서 착안한 것 같지만, 고사기에서는 엄연히 긴메이 이전에 안칸/센카 덴노가 즉위한 것을 기록한 데다[14], 안칸의 사망이 535년으로 일본서기와 같으므로 '고사기에 충실히 따를 경우' 528년 즉위는 있을 수가 없다. 긴메이가 케이타이 바로 다음에 즉위했다는 기술이 <상궁성덕법왕제설>에 있으나, 여기서는 531년을 케이타이 사망/긴메이 즉위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527년이 케이타이의 사망 연도라고 보는 설에서도, 안칸-센카가 531년까지 즉위하였던 것으로 보아 백제본기와의 정합성을 맞춘다(이 경우, 안칸의 사망이 535년이라는 부분은 무시하게 되지만...). 요는, 이런저런 설에서 입맛에 맞는 부분만 골라내야만 528년이라는 즉위년이 성립한다는 것. 그러나 긴메이의 즉위가 528년일 경우, 531년의 백제본기 인용 천황 사망 기사가 붕 뜬다.
  • 고구려 정벌과 연도 문제
간단히 말하면, 538년에 성왕이 한강 유역을 탈환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거칠부전을 근거로 551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551년 이전에 한수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백제가 실지를 회복한 것이 보다 이르다는 주장도 적지 않지만, 이러한 지명은 538년 이전에도 나오므로 538년의 한성 회복은 근거가 없다. 사실 그냥 백과사전만 찾아봐도 아는 거지만, 성왕이 538년에 한 일은 사비 천도다.
백제의 한성 수복에 관하여 긴메이기의 연대를 앞당길 필요가 없다면, 562년의 고구려 공격을 굳이 550년에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다. 기사 전체가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삼국사기에서는 누락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를 그냥 아전인수적으로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고구려 왕이 도망가고 왕궁을 약탈했다는 것이 구라인 거야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
  • 백제 관련 지명
일본에 백제 관련 지명이 여기 저기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백제 사람들이 가서 살아서 그렇다(...). 백제 외에도 신라, 고려(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예를 들면 시가현 오츠시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사이타마현의 코마가 등. 야후재팬 맵이나 구글 지도에서 高麗, 新羅 등으로 검색하면 전국 곳곳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지명으로 남아있는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긴메이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비다츠 덴노를 꺼낸 듯 하나, 백제대사를 세운 건 7세기 인물인 34대 조메이 덴노다. 일본서기 조메이기 11년(639) 7월조에 백제천(百濟川) 옆에 궁궐과 절을 세우도록 지시하여, 서쪽 백성은 궁궐을, 동쪽 백성은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백제천 옆에 백제궁을 짓고 또 자신이 죽을 때는 백제대빈에 안치되는 건 무슨 시츄에이션???). 쿠다라노오오이(百濟大井 くだらノおほゐ)에 비다츠가 궁궐을 만든 것과 백제대사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듯 논거의 중요한 부분들이 가장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아무도 동일인물설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이면 성왕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6. 신라군과의 싸움


562년 7월 임나(반파국 등)가 신라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자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가 신라에 대패한 기록이 있다. 가야멸망전 문서 참조. 뭔가 전개가 기승전병(...)스러운데다, 어째서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전투 내용을 요약하자면 왜국은 신라가 임나를 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紀臣 男麻呂宿禰)를 대장군으로 삼아 신라로 출정을 가는데, 임나에 가서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登弭 こもつめべノおびと とみ)라는 장수가 처갓집에서 자다가 군사계획이 든 서류를 길에서 잃어버린다(...).[15] 그걸 얻은 신라가 거병했으나 패배하고(??), 승리(??)한 왜군은 임나에 입성하지 않고(??) 백제로 돌아온다. 그 후에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가 부하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승리한 장군이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는 패배했거나, 간신히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제군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장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瓊缶 かはべノおみ にへ)는 홀로 나아가서 연승하고, 이미 항복한 신라군이 백기를 들고 또 항복한다(...) 그런데 군사에 밝지 않은(??) 카와베노 니에가 자기도 백기를 들고 혼자 앞으로 나왔다가(...) 신라군의 반격에 도망쳤으나 결국 잡혔다(...) 이 패배로 지휘관급 인물 중에는 야마토노쿠니노 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手彦)만이 빠른 말을 타고 있어서 간신히 달아났고, 나머지는 모두 잡히거나 죽었다고 한다.
이에 카와베노 니에와 그 가족들을 사로잡은 신라 장군은 카와베노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 うましひめ)를 보고 카와베노 니에에게 "네 목숨이 더 소중하냐? 네 아내가 더 소중하냐?"고 물었고, 이에 카와베노 니에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카와베노 니에의 대답을 들은 신라 장군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마시히메를 강간한다.''' 뒤에는 둘 다 풀어준 모양이지만 이후 우마시히메는 카와베노 니에를 엄청나게 비난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 신라 장군은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伊企儺 つきノきし いきな)라는 왜군 장수를 보더니 이키나의 바지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이키나에게 "왜국(일본) 대장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외치라고 시킨다.(...) (아무래도 일본 섬을 바라보고 하라고 했으니 천황을 조롱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 대장이라고 바꾼 것 같다.)[16] 하지만 이키나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신라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아들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충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기 입장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런 내용이 기재된 이유는, 아마도 위와 같이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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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의 일화를 표현한 그림

7. 일본서기 흠명조


긴메이 덴노 번역본을 보려면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링크 참조.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고사기.[4] 일본서기.[5] 천수국수장(天寿国繍帳).[6] 원흥사가람연기(元興寺伽藍縁起).[7] 고대 원시체제의 왕실에서 적장자가 아닌 형제나 삼촌이 적장자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경우는 흔했다.[8] '한국 관련 기록을 빼고 나면 긴메이 덴노가 누군지 묘사조차 안 되는 수준' 이라는 서술이 본 항목에 있었는데, 원래 일본서기 내용의 큰 축은 (중립적으로 말하면) 대외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9] 박천수「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2007, 사회평론) 참조.[10] 皇太子卽天皇位是月, 宮于百濟大井 : 황태자(민달, 즉 비다츠)가 천황에 즉위하였다. 이 달 백제의 대정에 궁을 지었다.[11]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12]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 가을 7월, 백제가 공격해오자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9월 가야의 모반에 이사부를 보냈다고 나와 있으며, 백제본기 위덕왕 8년 가을 7월, 신라 변경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1,000여 명이었다라고 나온다. 7월의 전투 내용도 왜의 야마토정권과는 관계 없거나, 백제의 지원군 성격이였을 가능성이 높다.[13] 일본서기는 일단 정식으로 편찬된 사서지만 고사기는 정사 취급이 아닌 야사이다.[14] 케이타이의 자녀 중 즉위한 사람에 관한 부분에서는 긴메이를 안칸/센카 두 명보다 앞에 기록하고 있으니 528년이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이 순서가 정말 맞다면, 안칸/센카는 긴메이 사후에 즉위한 게 된다. 왕조 병립설을 가져다 쓸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병립설의 전제 중 하나는 케이타이의 사망이 531년이라는 점이다(...)[15] 그런데 남북전쟁 때 앤티텀 전투에서도 남군의 장교가 군사기밀을 길에다 떨어뜨린 것을 북군이 주운 덕분에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이 일도 실제로 있었던 일인 듯.[16] 사실 엉덩이라는 표현도 실제로는 스카톨로지을 순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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