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브-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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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왼쪽), 장 마리 스트로브(오른쪽)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로 구성된 프랑스의 영화 감독 듀오. 특유의 급진적인 영화 형식으로 유명하다.
장 마리 스트로브는 독일과 프랑스 접경 지대인 알자스-로렌의 메스서 태어났으며, 이른 시절부터 시네필 생활을 시작했다. 동네 극장의 주류 영화 위주의 프로그래밍에 저항하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 시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장 그레미용 등의 영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다니엘 위예는 파리 출신이었지만, 열정적인 시네필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프랑스의 국립 영화학교인 IDHEC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 면접관들이 이브 알레그레의 영화를 분석하라고 하자 "형편없는 영화"라는 한 마디만 남겨놓고 시험장을 나왔을 정도.
이들은 파리로 올라와서 처음 만났다. 그들은 이후 부부 감독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스트로브가 아직 여러 감독들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이주하게 된다. 독일에서 스트로브와 위예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대표작이 될 작품들을 만들게 되고, 뉴 저먼 시네마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로 유명해졌다.[1]
훗날 스트로브의 병역 기피에 대한 공소 시효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은 채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2006년 다니엘 위예가 사망하기 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위예의 사망 이후로 스트로브는 혼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들의 영화의 특징으로서 거의 움직임이 없는 화면[2] , 담백한 미장센, 비전문 배우 기용, 문학 텍스트의 직접적 인용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로 인해 국내외의 시네필들조차 한없이 심심한 수준을 넘어 수면제 영화감독으로 악명이 높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장르영화 감독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
대다수의 작품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 코르네이유, 프란츠 카프카, 프리드리히 실러 등 유명 문학가들의 작품이나 오페라, 희곡을 각색한 것이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영화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한 편 뿐이다. [3] 다만 일반적인 각색이라 보기에도 미묘한데, 이들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배우가 '''지문을 포함한 텍스트'''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영향을 받아 배우 연기가 대체로 국어책 읽기에 가깝고, 연기도 한없이 정적이다. 문학의 극화가 아닌 문학 그 자체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때문에 독일어 화자가 아니면 화면을 보기는 커녕 열심히 자막만 읽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여러모로 시네필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감독으로 꼽힌다.
때문에 입문작을 추천하면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나 모세와 아론, 단편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감독들 가운데서는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포드가 한창 무시받던 시절인 70년대에 미국에 방문해서 포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는 탓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평단에서는 기교의 배제를 통한 영화의 기초적인 언어를 탐구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포드와 미조구치 영화에 매혹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기술적으로는 상당히 고전적이라, 꽤 오랫동안 16mm 필름과 35mm 필름과 모노 녹음을 고수했을 정도다. 위예 타계 후 스트로브가 디지털 카메라를 쓰기 시작하자 팬덤에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유명했으며, 그들의 영화에서도 유물론적 색채가 많이 배어난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고전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뒤, 현대 정치 이념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재해석하도록 관객들을 유도하는 타입의 영화가 많다. 뉴 저먼 시네마는 나치 청산 문제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스트로브-위예는 그 끝판왕으로 불린다.
위에서 설명했던 여러 이유로 인해 영화광들 사이에서조차 지명도는 낮은 편이지만 상당히 충성스러운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반다의 방>으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4] 나 영화 평론가 태그 갤러거, 하룬 파로키, 정성일이 대표적이다. 현대 미술과 학계에서 특히 각광받는 감독.
장 마리 스트로브의 경우, 성인 'Straub'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 것인지 논란이 있는 편인데, 일단 본인은 '스트로브'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부부였지만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수평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연인 보다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에 가까웠다고. 사망할때까지 해로했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장편 영화만 기재한다.
다니엘 위예(왼쪽), 장 마리 스트로브(오른쪽)
우리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폭탄을 만들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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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마리 스트로브'''
1. 소개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로 구성된 프랑스의 영화 감독 듀오. 특유의 급진적인 영화 형식으로 유명하다.
2. 경력
장 마리 스트로브는 독일과 프랑스 접경 지대인 알자스-로렌의 메스서 태어났으며, 이른 시절부터 시네필 생활을 시작했다. 동네 극장의 주류 영화 위주의 프로그래밍에 저항하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 시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장 그레미용 등의 영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다니엘 위예는 파리 출신이었지만, 열정적인 시네필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프랑스의 국립 영화학교인 IDHEC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 면접관들이 이브 알레그레의 영화를 분석하라고 하자 "형편없는 영화"라는 한 마디만 남겨놓고 시험장을 나왔을 정도.
이들은 파리로 올라와서 처음 만났다. 그들은 이후 부부 감독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스트로브가 아직 여러 감독들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이주하게 된다. 독일에서 스트로브와 위예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대표작이 될 작품들을 만들게 되고, 뉴 저먼 시네마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로 유명해졌다.[1]
훗날 스트로브의 병역 기피에 대한 공소 시효가 끝난 뒤에도 그들은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은 채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2006년 다니엘 위예가 사망하기 전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위예의 사망 이후로 스트로브는 혼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3. 기타
이들의 영화의 특징으로서 거의 움직임이 없는 화면[2] , 담백한 미장센, 비전문 배우 기용, 문학 텍스트의 직접적 인용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로 인해 국내외의 시네필들조차 한없이 심심한 수준을 넘어 수면제 영화감독으로 악명이 높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장르영화 감독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
대다수의 작품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 코르네이유, 프란츠 카프카, 프리드리히 실러 등 유명 문학가들의 작품이나 오페라, 희곡을 각색한 것이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영화는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한 편 뿐이다. [3] 다만 일반적인 각색이라 보기에도 미묘한데, 이들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배우가 '''지문을 포함한 텍스트'''를 낭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영향을 받아 배우 연기가 대체로 국어책 읽기에 가깝고, 연기도 한없이 정적이다. 문학의 극화가 아닌 문학 그 자체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때문에 독일어 화자가 아니면 화면을 보기는 커녕 열심히 자막만 읽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여러모로 시네필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감독으로 꼽힌다.
때문에 입문작을 추천하면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나 모세와 아론, 단편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감독들 가운데서는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포드가 한창 무시받던 시절인 70년대에 미국에 방문해서 포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는 탓에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평단에서는 기교의 배제를 통한 영화의 기초적인 언어를 탐구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포드와 미조구치 영화에 매혹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기술적으로는 상당히 고전적이라, 꽤 오랫동안 16mm 필름과 35mm 필름과 모노 녹음을 고수했을 정도다. 위예 타계 후 스트로브가 디지털 카메라를 쓰기 시작하자 팬덤에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유명했으며, 그들의 영화에서도 유물론적 색채가 많이 배어난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고전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뒤, 현대 정치 이념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재해석하도록 관객들을 유도하는 타입의 영화가 많다. 뉴 저먼 시네마는 나치 청산 문제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스트로브-위예는 그 끝판왕으로 불린다.
위에서 설명했던 여러 이유로 인해 영화광들 사이에서조차 지명도는 낮은 편이지만 상당히 충성스러운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반다의 방>으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4] 나 영화 평론가 태그 갤러거, 하룬 파로키, 정성일이 대표적이다. 현대 미술과 학계에서 특히 각광받는 감독.
장 마리 스트로브의 경우, 성인 'Straub'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 것인지 논란이 있는 편인데, 일단 본인은 '스트로브'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부부였지만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수평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연인 보다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에 가까웠다고. 사망할때까지 해로했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4. 작품 목록
장편 영화만 기재한다.
- <화해 불가> (1965)
-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 (1968)[5]
- <오톤> (1970)
- <역사 수업> (1972)
- <모세와 아론> (1975)
- <포르티니/카니> (1976)
- <구름에서 저항까지> (1979)
- <너무 이른/너무 늦은> (1982)
- <계급 관계> (1984)
-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1987)
- <안티고네> (1992)
- <프롬 투데이 언틸 투모로우> (1997)
- <시칠리아> (1999)
- <노동자, 농민> (2001)
- <그들의 이런 만남들> (2004)
- <코뮤니스텐> (2014)[S]
[1] 이 시기 이들은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적 영화감독이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친분을 갖기도 했다. 파스빈더는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 <신부, 여배우, 그리고 포주>에 출연하기도 했다.[2] 한두번 등장하는 패닝이나 줌아웃, 핸드헬드 등을 제외하면 화면의 변화가 거의 없다.[3]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편이다. 길이도 짧고 바흐라는 유명 음악가라는 소재, 클래식 연주가 출연 때문에 클래식 음악 팬들이 낚이는 경우가 많다고.[4] 코스타는 스트로브와 위예의 작업 과정을 기록한 <당신의 숨은 미소는 어디에>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5]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직접 배우로 출연한다. 각각 바흐와 쾨텐 왕자 역.[S] 스트로브 단독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