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드
1. 개요
미국의 영화 감독.
20세기에 활약한 미국 영화계의 거장이자, 나아가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큰 족적을 남겼기에 '''서부극의 신'''이라고도 불리지만, 서부극 외 다양한 장르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미국 영화계 만신전에 오른 인물이다.
2. 소개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활약한 고전 할리우드의 거장.[3]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오슨 웰스, 잉마르 베리만 등이 그를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 후대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등 할리우드 상업영화 거장들은 물론, 페드로 코스타, 홍상수, 아오야마 신지, 다르덴 형제 등과 같은 유럽, 아시아권의 작가주의적 성향을 띠는 감독들 역시 그를 존경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그가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끼진 영향이 워낙 지대해서, 존 포드의 서부극 -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활극 - 세르조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이어지는 계보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계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후계자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4]
정성일은 2004년 5월 dvd21에 기고한 '영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 뤽 고다르' 도입부 에서 포드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성일 평론가 특유의 만연체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포드 감독에 대한 다른 영화비평가들의 입장도 수식어구만 다를 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고백하자면 나는 고다르에게서 시작한 사람이다. 이 말은 비유법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고다르보다 존 포드를 먼저 보았다. 〈역마차〉와 〈황야의 결투〉, 혹은 '기병대' 삼부작, 물론 〈수색자〉 그리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 1960년대의 웨스턴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작정 영화를 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으로 고다르 영화를 보았다. 처음 만난 고다르 영화는 〈기관총 부대〉다(사실 그때 나는 고다르라는 이름을 알고만 있었다). 그래서 고다르에서 거꾸로 존 포드에게로 돌아오는 여정 길을 택했다. 물론 고다르보다 영화적으로 존 포드가 훨씬 위대하다. 그건 안토니오니나 베르히만, 펠리니보다 장 르누아르가 훨씬 위대한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단지 존 포드와 장 르느와르가 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존 포드와 장 르누아르는 영화에서 두 개의 이름이다'''(혹시 존 포드의 자리에 앨프리드 히치콕을 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그 누구도 안 된다). 아무도 이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 이들을 넘어설 때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브레송과 오즈, 로셀리니, 그리고 부뉴엘 정도가 그 두 사람(혹은 세 사람)의 이름의 비슷한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안 되겠다. 그들의 영화는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 혹은 샷을 연결하여 신을 만들 때 그 자체로 항상 완전하다. 그건 더 나은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신과 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주름은 더할 나위 없이 깊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5]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다 감독상(4회) 수상자'''이다.[6] 재밌는 것은 그를 지칭하는 '서부극의 대가'라는 닉네임과 달리 수상작 모두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다. 1936년 〈밀고자〉, 1941년 〈분노의 포도〉, 1942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7] 1953년 〈말 없는 사나이〉.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 등 위대한 배우들을 발굴하거나 진가를 조명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존 웨인 같은 경우 포드 영화에 단역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훗날 서부극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8]
서부극의 대표적인 명소인 모뉴먼트 밸리 역시 그가 '발견'했다. 1939년작인 〈역마차〉에 처음 등장한 이후 그가 촬영장소로 재차 활용하며, 관객들이 서부극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라이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리스트에 포함된 영화 감독은 존 포드와 D.W. 그리피스뿐. #
그 업적과 영향력으로 영화 커뮤니티 등지에선 '''영화 감독 끝판왕''' 취급을 받고 있다.#
3. 상남자
생전 그는 괴팍한 상남자로 통했는데, 말년에 진행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도 그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인터뷰와 같이, 그는 단답형의 대가였다. "어떻게 할리우드에 오셨나요?" 라는 질문에 "기차 타고" 라고 답변하는 식이었다.스태프 : 장면 11. 테이크 ONE.
'''포드''' : 테이크 "ONE"? 한 번이면 됐지 뭘 더 찍으려고.
'''피터''' : 포드 씨, 〈3인의 악인〉이란 작품으로 '대규모' 서부극을 개척했습니다. 꽤 규모가 큰데, 어떻게 찍었습니까?
'''포드''' : 카메라로.
'''피터''' : 〈태양은 밝게 빛난다〉라는 작품은 스스로를 위해 만든 건가요?
'''포드''' : 응.
'''피터''' : 포드 씨, 서부에 대한 시선이 뒤로 갈수록 점점 슬퍼집니다. 예를 들어, 〈웨건 마스터〉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비교하면요. 당신도 이 변화를 의식합니까?
'''포드''' : 아니.
'''피터''' :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할 말은 없나요?
'''포드''' : 뭔 얘길 하는지 모르겠소.
'''피터''' : 당신이 처음부터 서부극의 어떤 특별한 요소에 이끌렸나요?
'''포드''' : 모르겠소.
'''피터''' : 〈아파치 요새〉에서 나온 것처럼 개인보다 군이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까?
'''포드''' : 컷.
“영화를 만드는 건 좋아하지만, 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건 질색이다”라고 말한 그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기대하는 인터뷰어들을 골려주는 데 특출한 재능을 자랑했다. 특히 그의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대답은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9] 평생 어록이나 명언 같은 걸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크한 성격에서 나온 짧고도 강력한 발언들은 일종의 필살기 같은 임팩트를 자랑하는지라 의도치 않게 명언이 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괴팍하고 마초적인 성격은 촬영장에서도 유명했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지나가던 어린애한테 연기 시켜도 너보단 잘하겠다" 라는 식으로 욕을 했고, 연기를 너무 못하면 화를 내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배우 헨리 폰다는 그에게 '웃음의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했다가 주먹으로 맞았다고 한다.
3.1. 츤데레?
그렇다고 그가 항상 차가운 것은 아니고, 어느 누구보다도 따뜻한 성품을 보일 때도 있었다. 여기에 한 일화가 있다.
존 포드 연구자인 태그 갤러거는 이런 변덕스러운 면모에 “아마도 존 포드에 관한 만족할 만한 전기는 불가능하며, 정확한 인물 묘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어느 날, 궁색한 차림의 노인이 포드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포드가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배우였다. 딱한 노인이었다. 중태의 아내가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선 200달러의 선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노인에겐 동전 한 닢 없었다. 노인이 사정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은 점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포드는 겁먹은 듯이 뒤로 물러나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노인을 때려눕혔다. 그는 소리쳤다. “당신이 누군데 감히 이렇게 와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해?” 그리곤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노인은 벌벌 떨면서 기어나갔고, 사무실 사람들은 포드의 돌발 행위에 충격을 받고 들끓었다. 배우 프랭크 베이커도 분노해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밖에서 서성이던 베이커는, 포드의 비서 프레드 토트먼이 그 노인에게 1,000달러 수표를 주고, 포드의 운전사가 노인을 태워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거기엔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술을 하러 온 의사도 곧 도착했다. '''얼마 뒤, 포드는 노인 부부를 위해 집을 사주었고, 평생 생활비를 보냈다'''. #
3.2. 매카시즘
툴툴거리는 말씨와 변덕스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포드는 정치적으론 보수였지만, 상식을 벗어난 사상인 매카시즘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당시 레드 컴플렉스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담이 큰 인물인 셈.매카시즘이 불어닥칠 때, 할리우드 또한 그 광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미국감독협회는 조셉 맨케비츠[10]
가 회장이었는데, 그는 일부로부터 친공산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세실 B. 드밀[11] 이었다.[12]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감독협회에서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들의 기나긴 연설이 끝나고, 협회엔 침묵이 감돌았다. 이때 존 포드가 단상에 올라 말했다." 나는 존 포드요. 서부극 찍는 사람이올시다.[13]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밀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당신이 지지하는 것도 싫소. 오늘 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 포드의 용기는 팽팽한 긴장의 얼음판을 깨 버렸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이다. 출처
4. 오해
4.1. 서부극 전문 감독?
많은 영화팬들은 존 포드를 기억할 때 '서부극의 거장'으로 기억한다.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큰 영향과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존 포드가 곧 서부극이다"라는 선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존 포드의 지지자들과 팬들은 "'''존 포드는 서부극 전문 감독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난 개인적으로는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영화를 만들기 어렵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이따금씩 서부영화를 만드는 그런 처지에 놓였다. 물론 나는 존 포드가 만든 서부극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를 서부영화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태그 갤러거[14]
실제로 존 포드는 서부극만큼 비서부극도 많이 만들었으며, 생전엔 서부극보다 비서부극으로 높이 평가받은 인물이었다. 기술했듯, 그의 아카데미 감독상의 4작품 역시 전부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억지가 아닌가. 나도 다소 억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명제를 꺼내 든 것은, 우선 그가 서부극만 만든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물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강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존 포드 세계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비서부극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허문영[15]
4.2. 인종차별주의자?
서부극을 많이 찍은 감독이다보니 "서부극은 인종차별적이다"라는 진실 혹은 거짓 관념과 함께 그 역시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냐는 의혹이 지금도 남아있다. 전통 서부극에선 항상 백인이 주인공이고, 인디언이 악당으로 나오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인종주의를 퍼뜨린다는 것. 전통 서부극 중에서 인디언을 대놓고 차별하는 작품이 많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관념은 상당히 넓게 퍼져있다. (서부극 문서에도 이에 대한 변론이 있다) 개중에서도 존 포드가 만든 〈역마차〉는 대놓고 인디언이 악당으로 나오는 영화라, 몇몇 사람들은 "'''존 포드는 인종주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존 포드를 인종주의자로 생각하여, 〈장고: 분노의 추적자〉 홍보 인터뷰에서 존 포드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적이 있다.#[16]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도 존 포드만큼 인종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인디언 역에 인디언을 직접 캐스팅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당시엔 인디언 역에 백인을 캐스팅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몇몇 인디언 배우들은 존 포드 사단 아래서 몇십년 동안 같이 일했다. 특히 존 포드는 나바호 족과 절친하게 지내며, 평생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역마차〉가 지닌 인종주의적 설정에 대해선 한때 그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한 바, 포드는 어렸을 적 골목대장 시절부터 유대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고, 동네 백인들이 인종차별을 할 때마다 도리어 친구들을 보호했다고 하니, 지금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은 포드에게 꽤 억울한 수식어라 할 수 있겠다."관객들은 인디언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인디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디언들이 자신들만의 위대한 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존 포드[17]
5. 그에 대한 평가들
거장 중의 거장이라 평가 받는 만큼,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말을 남겼다.
'''"세계 최고의 영화 감독"'''
'''"감독들의 왕"'''
ㅡ 프랭크 카프라[18]
출처
'''"그의 작품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에, 존 포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미국 고전 영화의 정수이며,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존 포드의 영향을 받았다."'''
'''"존 포드에게 빚지지 않고서 미국 감독'''(''American director'')'''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처
"(영상 감각을) 어떻게 배우셨나요? 일본 화가를 연구하셨나요, 유럽 화가를 연구하셨나요?"
'''"존 포드를 연구했습니다."'''
(존경하는 감독 3명을 묻는 질문에)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
'''"그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관객은 이 땅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매번 그를 모방했다. 그건 작가가 헤밍웨이와 포크너와 존 도스 파소스와 윌라 캐더와 그런 많은 이들의 작품을 읽는 그런 것이다."'''
'''"만약 요정이 ‘마술지팡이로 네가 원하는 미국영화의 감독이 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겠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답하겠다.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이라고."'''
'''"그의 능력은 겸손함(''Unobtrusiveness'')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눈에 띄지 않고, 화면 구성은 완벽하며, 한 장면이 다른 장면보다 두드러지는 것을 막아 영화의 표면적 평온함을 유지한다. 그와 같은 경지는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 봐야만 도달할 수 있다."'''
'''"그는 오늘날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대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포드가 남긴 흔적이란, 그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20]
'''"존 포드의 영화엔 자신감과 용기, 구원, 그리고 괴로움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극적인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가장 브레히트적인 영화감독"'''
'''"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 어떤 감독도 포드가 한 것처럼 롱숏을 통해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존 포드와 견줄 만한 이는 중년의 베토벤 뿐이다."'''
ㅡ 사트야지트 레이[22]
출처
'''"존 포드의 영화는 시각적 희열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존 포드는 위대하다. 그는 서부극에 고결함을 불어넣었다."'''
'''"누군가 날더러 대하 서부극의 위대한 시인이라 불렀다지. 난 시인도 아니고, 대하 서부극이 뭔지도 모르네. 다 똥 같은 소리야. 난 그냥 냉정하고, 열심히 일하고, 지극히 평범한 감독일 뿐이었네."'''
ㅡ '''존 포드''', 스스로에 대해 출처
6. 일생
이 글을 참고·요약하여 서술한다.
존 포드는 1894년 아일랜드 이민자 부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존 마틴 피니(''John Martin Feeney'')이지만, 그는 견진성사 때 선택한 숀 알로이셔스 오피니(''Sean Aloysius O’Feeney'')를 본명으로 쓰길 좋아했다. 형을 따라 영화일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잭 포드라는 예명으로 배우로 영화에 나오기도 했었다. 1923년부터 존 포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술집과 농장 일을 했던 포드의 집안은 중산층과 중하층을 오르내렸으며, 포드는 학창 시절에도 배달부, 농장일 보조,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광이며 미술과 어학에 재능이 있었지만[23] 수학은 낙제했던 포드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다. 메인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몇 주 만에 그만두고,[24]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1914년 7월 17일 무일푼으로 그의 형 프랭크 포드가 활동 중인 할리우드에 도착한다. 존 포드보다 13살이 많은 프랭크는 16세에 결혼하고 곧 이혼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했다 종적을 감췄다가, 10여 년 만에 멜리에스의 영화에 배우로 등장해 극장에 갔던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존 포드가 할리우드에 도착할 무렵 프랭크는 프랜시스 포드라는 이름의 감독-배우-작가로 유니버설에 제작사를 갖고 있는 스타 영화인이었다. 존 포드는 형의 도움으로 유니버설의 소품 담당 자리를 얻고 이후 스턴트맨, 단역, 조감독으로 일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1917년 첫 장편 〈스트레이트 슈팅〉을 연출한다. 1921년 폭스사로 이전했고, 1924년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철마〉 이후 존 포드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며 성공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형 프랜시스의 이력은 존 포드의 이력과 반대로 20년대부터 몰락해가지만, 동생에게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 같다. 프랜시스의 영화 동료이자 인류학자였으며 존 포드의 배우이기도 했던 프랭크 베이커는 존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음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평생 군인을 동경했고 해군 장교를 꿈꿨다. 그러나 낙제와 근시로 인해 번번히 군입대에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친구들 도움으로 1934년에 예비역 해군 소령 계급을 얻게 되고, 정보 제공 활동을 자처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드는 동료 영화인들을 모아 야전 촬영단을 조직한다. 성원들이 나이가 많고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촬영단은 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지만, 곧 OSS 소속 부대가 되고 존 포드는 촬영단의 지휘관이 되어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에 투입된다.“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 깨달은 건 존 포드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짜 존 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무례하고 냉소적인 존 포드와는 너무 다르다. 진짜 존 포드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존 포드는, 다정하고 감상적이고 부드러운 또 다른 존 포드를 보호하기 위해 포드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다. 존 포드는 엄청난 열등감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았고 그 열등감의 밑바닥에 그의 형이 있다.”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부대는 여러 편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명예 해군 준장으로 제대한 포드는 죽기 5개월 전인 1973년 3월 31일, 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에 참여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과 명예 제독 진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1973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1917년 무성영화 시절부터 연출을 시작해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14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7. 여담
1950년대에 6.25 전쟁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한국에 내한한 적이 있다. 링크.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이것이 한국이다! (''This is Korea!'')〉로, 유튜브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링크
젊었을 적에 와이어트 어프를 만나, 몇 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이후 영화 한 편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황야의 결투〉이다. 단, 영화적 과장 때문에 실제 사건과는 차이가 있는 편.
히치콕은 전기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 활발하게 영상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에 비해, 존 포드의 경우 그의 삶을 다룬 극영화나 다큐가 무척이나 드문데, 그 드문 경우 중 하나로, 롤랜드 에머리히의 〈미드웨이〉에서 카메라로 전투 장면을 찍는 존 포드가 등장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25] 의 1972년작 소설《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의 후반부에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한다.
8. 평론
포드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영화학자들사이에서 여전히 진행중이다. 대표적인 포드 연구자로는 미국의 저명한 영화학자 태그 갤러거, 일본의 영화 평론가이자 문학 비평가인 하스미 시게히코가 있다. 태그 갤러거는 2014년 내한하여 서울 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존 포드 탄생 120주년 특별전에서 강연 및 토론에 참가한바 있다. 태그 갤러거의 《''John Ford: Himself and His Movies''》는 국내에서도 《존 포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발매되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읽어도 존 포드에 대해 꽤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허문영 평론가가 2014년부터 KMDB에서 존 포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허문영 평론가는 서부극 감독이라는 존 포드의 닉네임이 주는 오해들을 면밀히 접근한다. 이를 통해 포드의 서부극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허문영 평론가는 이전에도 씨네21에서 존 포드 감독론을 펼친적 있다.
9. 연출작 일람
총 작품수는 '''140편'''이며,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전체 리스트를 보고 싶다면 imdb의 감독작 목록을 확인해볼것. 엄청나게 많다.
''' '대표적인 작품들만' '''리스트로 정리한 것이다. 무성영화의 전성기부터 시작해서 컬러영화가 일반화될때까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그의 커리어가 곧 영화사다. IMDB닷컴에 정리된 필모그래피에 의하면 단편을 포함해 약 140여편에 이르는 작품을 연출했다.
10. 대한민국에서의 상영
고전기 감독인지라 극장에서 작품을 보기는 일반적인 극장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래도 꽤 자주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소개되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상영된 존 포드 영화에 대해서는 존 포드/대한민국 항목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