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횔덜린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시인.'''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왜 시가 시원으로 향하는 언어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으로서 시인 중의 시인.'''
---
생전에는 괴테와 실러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받지 못했으며 반평생을 가난과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그의 시들이 발굴되며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발터 벤야민, 모리스 블랑쇼를 위시한 후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에는 독일 시문학의 정점이자 현대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770년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 라우펜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2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뉘르팅겐 시의 시장[1] 과 재혼하며 뉘르팅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779년, 새아버지와 의붓동생 둘이 사망하며 어머니와 남은 동생들과 함께 형편이 어려워진 집안을 이끌게 된다.
1788년,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한다. 그가 성직자가 되길 원하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헤겔, 셸링 등과 교류하며 칸트의 비판철학과 고대 그리스 고전에 심취한다. 이 무렵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을 지켜보며 혁명의 이상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는 반대했다. 석사학위를 따낸 후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독일 각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에 매진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아 실러는 횔덜린에게 가정교사직을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간행물에 그의 작품들을 실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준다.[2] 이외에도 괴테, 피히테, 노발리스와 같은 대문호들과 만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을 쓰기 시작한다.
1795년, 횔덜린은 프랑크프루트의 부유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진다. 주제테는 온화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인물이었으며 그녀 역시 횔덜린의 심성에 끌려 그와 교제를 나눈다. 횔덜린은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는 등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허나 그들의 밀회는 발각되었고 횔덜린은 가정교사직에서 쫒겨나게 된다. 가난과 이별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그의 창작욕은 불타올라 수많은 작품을 써나가지만 한편으로 정신착란의 징후를 드러내기도 했다.
1802년, 주제테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는 심각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상태가 호전되며 다시금 송시들을 쓰고 그리스 비극들을 완역하고 출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이 무렵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에게 도서관 사서직을 마련해주며 생계를 이어간다. 1905년, 싱클레어가 반체제활동을 했다는 무고를 당하며 구속되었고 횔덜린 역시 공모자로 조사받았으나 정신착란 증세로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된다. 이때 그의 소설 휘페리온을 감명깊게 읽은 의료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가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치머 집안의 친절한 보살핌 덕에 횔덜린은 의사로부터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과 달리 36년이라는 세월을 더 보낸다.[3]
3. 주요 작품
- 휘페리온 - 그리스의 은자 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
-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4]
- 빵과 포도주 Brod und W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