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

 


1. 개요
2. 원인
3. 전쟁
3.1. 전쟁 결과
3.2. 학살
4. 그 이후
4.1. 알제리의 반불 감정
4.2. 아르키와 피에 누아르가 겪은 수난
4.3. 프랑스에 미친 영향
5. 일화
6. 창작물에서
7. 참고 자료


1. 개요


'''알제리 전쟁'''(프랑스어: Le guerre d'Algérie, 아랍어: ثورة جزائرية, 베르베르어: Tagrawla Tazzayrit ⵜⴰⴳⵔⴰⵡⵍⴰⵜⴰⵣⵣⴰⵢⵔⵉⵜ, 영어: Algerian War)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FLN,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 알제리 입장에선 독립 전쟁이고, 프랑스 입장에선 식민지 반란군 진압 작전이었는데 1999년 6월에 프랑스 의회는 전쟁이 끝난 지 37년 만에 이것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으며, 프랑스는 석유가스 등 막대한 국부를 잃고, 전쟁 중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을 무시하고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지 열강의 식민지 재침의 예시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탈식민지화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프랑스 군대의 대테러 작전 등 복잡한 성격을 보인 전쟁이었다.

2. 원인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로 여겨 관심을 가져왔으며,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여겼다. 1830년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의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부채로 뺨을 맞고 쫓겨난 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하였다. 결국 알제리 북부의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이었던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로마 제국 이후 아프리카에서 도시 개개가 아니라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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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알제리가 독립할 때까지 수많은 항쟁과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알제리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본토로 생각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지중해를 아주 조금만 건너면 바로 코앞에서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우며, 프랑스와 같은 본토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13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반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적어도 대도시는 완전한 유럽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다.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항과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고, 이 최정예 부대의 본거지였다.
다만 이러한 시설들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본국과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을 위주로 한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작 식민지인 알제리인들은 프랑스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알제리인들의 90% 가량이 문맹이었으며, 절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시민권조차 받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렸다. 그나마 20세기 초반부터 알제리인들이 이슬람교를 버리면 프랑스 시민권을 주는 제한적인 조건이 붙었으나, 이러한 조건에 응하여 이슬람교를 버리는 알제리인들은 매우 적었다. 이렇게 비참한 현실은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저절로 갖게 해주었다. 물론 프랑스 본국도 이런 알제리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독립과 저항 의지를 없애려면 그들을 프랑스인들과 평등하게 대우해주어야 한다."라고 누누히 주장했으나,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인들의 비참한 사정을 알면서도 우격다짐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비참한 상태로 놓아두었다. 이러한 프랑스 본국의 오만함은 알제리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만들어낸 텃밭이었다.[1]
자연히 현지에 정착해서 사는 피에 누아르(Pied-Noir)[2]라고 불리는 알제리 거주 백인과 그 후손들[3]도 엄청난 숫자였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 전에 샤를 드골은 "모로코와 알제리는 절대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유럽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형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의 차원이 매우 다르다" 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는 다 독립시키더라도 알제리만큼은 지키고자 했다.(...라고 말한거치곤 인도차이나에서도 패배할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패배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본토가 점령되면서 프랑스 당국의 권위는 떨어졌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 당국은 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타협을 거절했다.
그런 가운데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이는 사전에 계획적으로 준비된 시위였는데, 이미 3월부터 알제리인들은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해 독립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이미 시위대가 식민당국과 충돌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사망자 5명이 발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계획에 따라 시위가 벌어진 곳들 중 스티프 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다.
5천 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국가헌병대가 막아섰다. 이때 경찰과 헌병들이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 하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어[4] 대규모 충돌이 벌어져 프랑스 경찰과 국가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으며 사체가 훼손된 사례와 유럽인 여성이 강간당한 사례도 1건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사건을 그동안 진행된 반항을 일거에 제압할 명분을 주는 기회로 여겼다.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프랑스 경찰 병력 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세네갈인 식민지 부대, 프랑스 외인부대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을 지급받고 동원되었다. 덤으로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했다. 여기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시킨답시고 케라타라는 해안 마을에는 순양함 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학살을 벌였다.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5] 5월 16일까지 계속된 이때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뒤에 이 수치는 2만 명으로 늘었고, 알제리인들은 못해도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고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참고로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프랑스 해방 작전에서 나치와 교전했던 알제리계, 세네갈계 등 아프리카계 군인들은 정작 파리 수복에서는 제외되었다. 파리 수복의 공훈을 흑인따위에게 나눠주기 싫다는 심보였는데, 이꼴을 당하고도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이 남을리가 없다)
이들뿐 아니라 이들의 다음 세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6]도 속속 여기 가담했다.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던 FLN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된다.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벤 벨라(1916~2012)도 이렇게 해서 반프랑스 항쟁에 뛰어든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부사관 출신[7]이었고 벤 벨라에 이어 알제리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었던 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도 프랑스 육군 부사관이었다.
여하튼 학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작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백인과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한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힘으로 일어서자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제리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했다. 봉기가 시작된 1954년 11월 1일까지.

3.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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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54년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NATO에 파견된 정예 사단까지 빼내서는 무력 진압을 시작한다. 한편 같은 시기 똑같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베트남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하자 이 사실이 알제리인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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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제리 전쟁의 한장면.[8]'''
소위 '국방부의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전력에서는 월등하게 앞섰으나[9] 현지인의 압도적 지지속에 게릴라전을 펼치는 FLN을 일소할 수는 없었고, 수 년간 그들의 테러와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프랑스는 계속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지만 알제리인들도 똑같이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맞서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프랑스군의 마구잡이 학살과 진압은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었으며, 소련 및 다른 공산권 나라들이 전쟁에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10]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한다. 알제리와 같이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튀니지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주변 국가들도 프랑스를 비난했다.[11] 특히 튀니지는 자국에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활동을 허용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지지했으며[12] 이에 프랑스는 알제리 임시정부가 있는 주권국가인 튀니지를 반란군 소굴로 규정, 폭격을 감행해 알제리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튀니지인들을 사살했다. 튀니지는 프랑스의 공격과 학살에 분노했지만 힘이 없다보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는 미국의 요구에는 "대통령은 미국의 개인가?"라고 총궐기하여 무시했다.
그나마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사회당[13]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의 쿠데타 위협 속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200만에 이르는 알제리인들과 6천에 이르는 프랑스계 알제리인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났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자 아랍 국가와 소련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프랑스군 장병들 중에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일부 병사들은[14] 탈영을 하거나 심지어 FLN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나치 SS와 다르다!"라며 나름 자부심을 지녔으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먼 훗날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1956년 8월 말, 프랑스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제리인들에 대한 고문에 항의하는 뜻으로 볼라르디에르 장군은 자진해 군복을 벗었다. 1956년 5월 알제리 제8공수 연대에 징집된 하사 노엘 파블리에르(Noël Favrelière)는 약식 처형을 앞둔 알제리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그 길로 탈영해 알제리 민족 해방군에 들어갔고 10개월 후 튀니지로 넘어갔다. 1928년 3월 31일의 법 90조에 따르면, 원대 복귀 불이행은 1개월에서 1년의 구금형에 처할 수 있었다. 탈영으로 두 차례의 궐석 재판을 받은 노엘은 프랑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제가 조국을 배반한 적이 없다는 것, 잘 알고 계시죠. 전 지금, 배반과는 정반대로, 알제리인이 사랑한 프랑스를 그들이 미워하지 않도록 막고 있습니다. 프랑스인이 다 식민주의자는 아니며, 우리 공수부대는 나치 SS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옳았음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알제리 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244쪽

또한 좌파 성향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아예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은 신문을 발행하거나[15], FLN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알제리인들을 무료로 변호해주는 변호사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나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 프랑스군의 암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국내 좌-우익간 여론이 분열되며 지속적으로 피해가 누적되면서 프랑스의 알제리 유지는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5월 위기로 결국 알제리에 유화적인 드골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제5공화국이 들어선다(1958).
그러나 쿠데타로 드골을 옹립한 군부 세력의 기대와는 달리, 드골에 의해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군 내부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ée secrète(OAS) 소속 극우파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에 주둔하였던 제14, 18 공수연대외 제1외인공수연대 를 동원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 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4월 21일 일어난 이 반란이 번져나가자 샤를 드골이 군복 차림으로 방송에 나와서 반란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반란에 참가한 3개 공수연대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전력의 0.6%에 불과했기 때문에 26일 결국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반란에 참가하였던 공수연대들은 해체되었고, 지금도 그 번호가 결번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OAS에 가입한 일부 반란군은 탈영하여 드골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하고, 알제리 내에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였다. 결국, 프랑스군과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서로 손잡고 이들을 진압하게 된다.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매스컴의 발달이었다. 징집병 중 다수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본토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은 이들은 쿠데타에 동참한 장군과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여 쿠데타를 무산시켰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

3.1. 전쟁 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병력: 34만여 명
피해 : 14만 1천 전사 : 15만 3천여 명 부상 : 16만여명
알제리계 민간인 200만여 명 이상 사망(알제리 측 주장, 프랑스에선 20만 정도로 축소하고 그동안 학살이 아니라고 반론해왔다가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
병력: 프랑스 군 67만여 명, 아르키(Harki, 알제리계 프랑스 군인) 20만 명 이상
피해: 프랑스 군 2만 9천여 명 전사, 6만 5천여 명 부상. 아르키 3만-9만 명 사망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3천-6천여 명 사망[16]
결국 알제리의 독립으로 종료되었다.

3.2. 학살


초기에 나름 정석적인(?)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의 게릴라전에 빡친 나머지 방향을 전환하여 FLN과 똑같이 암살, 테러, (전보다 더한) 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한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군이 똑같은 전법으로 나서자 FLN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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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독립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학살을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는 1961년 파리 학살[17](Le massacre du 17 octobre 1961, 2001년 10월에 프랑스 정부가 인정)을 기점으로 알제리 내에서 민간인들 거주지를 폭격하고 각종 전쟁 범죄를 일으키는 등 막장 행보를 일삼았다.
학살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1958년경에는 확실히 반란이 진압되어갔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으로는 이런 무자비한 군사 작전을 지속하면서 들어가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고, 잔혹 행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대가 된 데다가 전쟁에 지친 프랑스군이 내부 붕괴를 일으키면서 허사로 돌아가게 된다.
알제리 측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저지른 1962년 오랑 학살(1962 مذبحة وهران عام Le massacre d'Oran ou massacre du 5 juillet 1962)[18]에 대해서는 알제리는 지금도 사과는 커녕 인정도 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도 피해자 타령하지만 학살된 사망자 수에서 일단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가해자로 더 많이 죽였고 어떤 배상도 안하는 주제에 프랑스 측의 학살 피해자 운운에 대하여 유럽에서도 냉소를 비치고 있다.[19] 물론, 그래도 오랑 학살도 무고한 피해자들이 많다고 하는 의견도 많으나 알제리에선 "피에 누아르들이 무고해? 이것들 사병들을 조직해 알제리에서 등쳐먹던 것들이?" 라면서 "오랑 폭동은 그저 일부 프랑스계 폭동에 불과하다. 알제리인들의 피에 누아르 추방에 대하여 폭동일으킨 것을 진압한 것이라는 프랑스가 자주 하던 소리와 같다. 왜 프랑스인이 당하면 학살이고 알제리인이 당하면 폭동 진압이냐?" 라면서 맞서고 있다.
사실 프랑스도 대내외적으로 오랑 학살을 크게 외치지 못하는 게 당시 이런 학살이 이뤄질때, 알제리에 남은 프랑스군 1만 8천여명은 구경만 했다. 오랑에서 남은 4만여명 피에 누아르들을 알제리 해방전선이 공격할때, 몇몇 피에 누아르들은 오랑에서 달아나 당시에도 알제리 주둔 중인 프랑스군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빌었으나, 프랑스군들은 외면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피에 누아르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다. 드골 정부는 프랑스군에 어떤 전투적 행동도 하지 말고 그냥 대기하며 알제리 측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학살이 파리 학살에 대한 알제리의 보복이라는 이들도 많다. 게다가, 1962년 8월, 샤를 드 골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1963년에 총살된 프랑스군 중령 장 바스티앙 티리는 오랑 학살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학살 피해자로서 알제리를 공격해야 한다고 법정에서 외쳤다. 그 때문에 티리 중령을 불명예퇴역시키고 총살형에 처한 드 골 정부는 오랑 학살을 방치한 프랑스군과 그 책임 등을 따지자면 프랑스 내부에서도 좋을 게 없기 때문에 티리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 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프랑스 극우를 중심으로 오랑 학살을 따져들고 있긴 하지만, 알제리 독립진영보다 더 떳떳할 게 없는 프랑스는 여전히 깊이 따지지 못하고 있다.
구글에 algeria france war를 쳐보면 프랑스군에 의해 벌어진 각종 전쟁범죄의 충격적인 사진들이 널려있다. 예를 들면 알제리 여성을 성폭행하고 웃는 프랑스 군인들의 충격적인 모습이나 프랑스 군인이 알제리 사람을 참수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웃고 있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진들 등.
한편 FLN은 전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프랑스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프랑스와 알제리의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 아랍인이나 아랍인 공무원, 알제리에 우호적인 온건파 유럽인에 대한 공격을 우선했다. 그래야만 중도파가 사라지고 양극단 세력만 남아 대결 국면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FLN은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들과 심각한 내분을 벌였다. 심지어 FLN가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를 습격하여 구성원들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사건도 있었다. 알제리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가는 자칫 알제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할까봐 일단 숨겼기에 당시에는 사건의 정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제리가 독립한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4. 그 이후



4.1. 알제리의 반불 감정


알제리가 독립을 이루면서 알제리 내의 프랑스의 흔적은 깡그리 사라졌다. 1962년에 알제리 군중들은 알제에 있던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 동상을 끌어내려 참수했다. # 자신들에게 악랄한 식민 지배와 탄압을 하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알제리 군중들에게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잔 다르크의 동상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한데, 그나마 식민 지배와 전혀 무관한 동상이라 파괴하지는 않았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잔 다르크 광장으로 부르던 알제에 있던 중앙 광장도 독립하자마자 독립 전쟁 시초가 된 사르 알 부지드(위에 서술한 대로 당시 사살된 12살 사내아이)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알제리 전역의 프랑스 관련 건물은 죄다 용도가 달라졌다. 알제에 있던 노트르담[20] 성당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뀐 지 오래이며, 많은 성당들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어버렸다.
독립 이후 알제리는 당연히 좌경 노선을 걷게 되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였고 초대 대통령이자 수상이었던 아흐메드 벤 벨라는 제3세계의 해방 및 좌익 혁명을 위해 적극적 지원을 하다 너무 지나치다는 좌익 세력 내부의 불만으로 인해 쿠데타로 망명을 떠나는 등[21] 알제리는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전까지는 국제 사회에서 좌경 노선을 따르는 제3세계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는 좋지 않으며, 1980년대 초까지는 알제리의 경제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1980년대 중반의 유가하락으로 알제리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20~30대 알제리 청년들이 프랑스에 밀입국해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4.2. 아르키와 피에 누아르가 겪은 수난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알제리계 보조병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는데, 당시 프랑스군에는 1962년 기준으로 총 26만 명이나 되는 아랍인 병사가 있었다.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프랑스와 알제리는 아르키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독립이 되자, 그 약속은 휴지가 되었고 이제 매국노가 된 그들에게는 알제리 전역에서 끔살이 기다릴 뿐이었다.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들까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지뢰밭에 맨몸으로 떠밀리기도 하고 광장으로 끌려나와 사람들 욕설과 같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산 채로 몰매를 맞아 죽거나, 총살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거세당하거나, 광장에서 목 매달린 시체로 며칠이고 방치되었는데 그 수는 최저 3만에서 최대 15만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처형당하기 전에 프랑스군에서 받은 훈장을 직접 삼켜야 하기도 했다고. 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알제리를 탈출한 91,000명의 아르키와 그 가족들은 프랑스로 도망가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온갖 잡일과 차별 뿐이었다.
프랑스는 자기들에게 충성하던 알제리인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이들의 안위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군을 동원해서 아르키들의 무장을 해제하고[22] 이들을 알제리 독립 세력에게 넘겨주었다. 이 상황을 보면 가서 천대를 받을지언정 프랑스로 갈 수 있었던 아르키들은 행운아라고 해야 할 정도. 이때 도망친 아르키 중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이다.
알제리에 살던 유럽인, 즉 피에 누아르들의 처지도 아르키나 마찬가지였다. 백인이지만 알제리에서 100년이 넘게 살다보니 모국이 낯설고, 알제리에 모아둔 재산은 죄다 가루가 되었으며. 급히 챙길 돈이나 귀중품만 가지고 프랑스로 가보니 프랑스에선 이들을 아니꼽게 보았다. 결국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민가거나 아니면, 다시 튀니지같이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지만 프랑스에 대하여 증오가 덜한 이웃 나라로 이민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는 이들만 속출했다고 한다. 알제리가 아르키 후손들을 용서해주면서 이들 일부가 프랑스로 가서 살기도 하는 와중에 피에 누아르들도 알제리로 돌아갈려는 뜻을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피에 누아르들은 거의 50년 전, 알제리 독립 당시 몰수당한 농장이라든지 여러 재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알제리 측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고[23], 프랑스 측도 알아서 하라는 투로 물러서 있기에 실현, 반영될 일은 없어 보인다.
귀국한 피에 누아르들은 대부분 프로방스지방에 정착했는데, 오늘날 이곳은 극우파 국민전선의 주요 정치적 기반이 되고 있다.

4.3. 프랑스에 미친 영향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군의 전력을 '''퇴보'''시켰다. 아무리 정예 기계화 부대라도 알제리에 일단 투입되면 그저 대게릴라전에 종사하는 보병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공군에서 병력 1만 명을 덜어내서 보병으로 편입시켜 알제리에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병력이 부족해서 예비역을 소집하고 현역병 복무기간을 27개월로 연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기득권 기성 세대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이 들고일어나 68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2차대전의 6주 신화에 이어 베트남에서 지고 알제리에서까지 지는 3연타를 기록, 프랑스군의 '자존심과 실력이 반비례하는 엘랑스'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독일에게 지고 식민지한테도 지는주제에 뭔 열강이냐는 것. 물론 프랑스는 강국이고 프랑스군도 강군이지만 어쩌겠는가. 졌는데. 싸워서 지는것도 문제지만 지는 싸움을 거는 것도 문제요, 나치에게 진 것은 피해자 이미지라도 있지 베트남-알제리 전쟁에서는 '패배한 가해자' 가 되어버렸다. 식민지들을 독립시켜 우호적인 영연방 형성에 성공한 영국과 대비되는 면.
프랑스 내에서 좌우익의 견해가 가장 다른 것이 이 알제리 전쟁인데, 좌익들은 이 전쟁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독립을 억누른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익들은 이 전쟁을 "소련이집트를 위시한 아랍제국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자국내의 중대한 반란"으로 취급하여 알제리의 독립운동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아직도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거부해왔던 공식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요구하는 학살 보상 및 핵실험 관련 문제와 같은 일은 보류하고 있기에 알제리 반응은 반 쪽도 안 되는 사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다.
반대로 프랑스 백인우월주의자이며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총재인 장마리 르펜이 젊은 시절, 육군 공수부대 장교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바 있는데 당연히 학살을 부정하고 알제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지금도 프랑스계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2009년 선거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는 그림으로 대문 장식했다가 알제리 여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사르코지 정부는 알제리에서 반프랑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결국 2011년 정계에서 완전 은퇴하면서도 알제리를 내버린 프랑스를 따져가며 지 잘못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르 펜의 딸인 마린 르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알제리는 프랑스의 영토라고 주장해왔는데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노리면서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나라들의 교류를 위하여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알제리와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 물론 알제리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그동안 알제리의 폭동, 프랑스 영토 알제리라고 하던 여자가 잘도 이제와서 일부 학살 인정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며 진정으로 사죄한다면 200만 학살 인정 및 보상을 하라고 맞서고 있다. 결국 알제리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알제리에서 축하하며 반가워했다.

5. 일화


  • 독립 전쟁 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합하려고 시도하던 당시 알제리 초등학교에서는 프랑스 본토와 같은 교과서를 사용했다. 그 역사교과서에서는 첫 문장을 "우리의 조상인 갈리아인들은...(후략)"으로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제리인들은 갈리아인의 후손이 아니다.[24] 심지어 베트남에서 쓰던 교과서도 이 갈리아인 드립을 똑같이 쳤다고 한다.
  • 이방인으로 유명한 문인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출신자였지만 정작 알제리의 독립에는 반대하였는데, 아랍인이 아닌 프랑스-스페인계 백인 혈통인 피에 누아르였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보다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때문에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왕따 취급당했다. 정작 카뮈는 그에 개의치 않긴 했다. 알제리인들에게 카뮈는 이름조차 견딜 수 없는 침략자를 상징하기에 지금은 알제리에 가면 그가 살던 집들은 부숴지거나, 재공사로 사람들이 살면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더불어 알제리에서 그의 이름은 아예 모르는 이름이다. 카뮈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세워진 그의 문학 기념비도 남아있지만, 카뮈 이름을 누군가가 부숴놓아서 누굴 위하여 만든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당연히 관리도 되지 않아서 금이 가 있고, 한동안 누군가가 신나게 두들겨패서인지 낡아 있다.
  •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는 이브 생로랑 역시 프랑스령 알제리 내 제2의 도시인 오랑에서 출생한 후 살아온 피에 누아르이다. 그는 1960년 알제리 전쟁 당시 징집되어 전쟁에 투입되었으나, 평소 소극적이고 여성스러운 성격이었던 그는 군대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잔혹한 전쟁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20일만에 정신병이 발병했고, 다행히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6. 창작물에서


이 직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이 워낙 시끄러웠고 정작 프랑스에서는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인 탓인지 그 규모와 피해에 비하자면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그리 많지 않다.
1964년에 나온 자크 드미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남주인공이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다리를 다치고 애인과도 헤어진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리고 은근슬쩍 전쟁으로 인해 힘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두고 있다. 그러나 태생적인 한계(멜로 영화) 때문에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쟁 기간이 누벨바그 감독들이 왕성하던 시절이라 검열로 표현은 못해도 은근슬쩍 언급되는 영화들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아녜스 바르다5시에서 7시까지 클레오, 장 뤽 고다르작은 병정이 있다. 그 중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인 아름다운 5월는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차별주의적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후 미국의 콜롬비아 영화사에서 제작한 1966년작 로스트 커맨드(라스페기[25])가 이 전쟁을 직접 다룬 최초 영화이며, 안소니 퀸과 알랭 들롱이 주연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함께한 프랑스군 공수부대의 라스피기 대령과 그 부하들이 포로 생활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전공을 세우고싶은 라스피기 대령을 따라 부하들이 뭉쳐 다시 한번 알제리에 파병을 가고, 거기서 디엔비엔푸 시절 동료였던 알제리 출신 장교인 마흐디 중위가 이끄는 독립군과 싸운다는 내용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로서, 특히 도입부의 디엔비엔푸 전투 부분의 처절함이 상당히 묘사 잘 되어있다.[26]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 초반부의 의기롭던 라스피기 대령과 그 부하들이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점점더 무자비해지며, 포로시절 동료들과 동고동락 하던 마흐디 중위 역시 기껏 돌아온 고향이 피폐해지고 가정이 초토화되자 독립군이 되는등 선악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지기도 한다. 결국 마흐디 중위의 독립군을 소탕한 라스피기와 그 부하들은 진급하며 훈장도 받지만, 그의 부하중 하나였던 에스클레비어 대위는 환멸을 느껴 군복을 벗는다.
종전 직후 이탈리아 좌파 영화인들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쪽 시각에서 제작된 세미 다큐멘터리《알제리 전투(La batalla de Argel. 1965)》가 가장 유명하다. 베니스 영화제 출품,상영 당시 프랑수와 트뤼포만 마지막까지 남아 시상될때 손뼉까지 치며 축하해주었다. 그밖에 장 뤽 고다르[27], 루이 마르와 같은 프랑스 유명 영화인들은 앞서 언급한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보이콧한 일화는 [28] 꽤 유명하다. 그 뒤에 트뤼포를 프랑스 극우들이 엄청 씹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2009년 10월 한국에서도 아트하우스 극장 재개봉 형식으로 개봉되었다.
한편 알제리에서는 1975년 모하메드 라크다르 하미 감독이 식민지 시절부터 알제리 전쟁 발발까지 다룬 불타는 해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수상 당시 프랑스 극우파들이 모하메드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프랑스 내무장관이 급하게 영화제에 참석한 모하메드 감독 가족들에게 호위 부대를 붙여줘야 했다. 모하메드는 이후 마그레브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과작 감독으로 남았다. 그리고 2014년 오래간만에 신작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부터 반세기 가까이 흘러서야 비로소 프랑스의 시각으로 다루어진 창작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오스트리아 출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프랑스에서 만든 2005년작 '히든'이라는 영화가 유명하다. 이 쪽은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망각을 스릴러로 비판한 영화.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2005년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DVD 출시.
하지만 프랑스 영화로서 알제리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첫 작품은 2007년에 등장한 《친밀한 적(L'ennemi intime)》이 사실상 최초이다.
이외에도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인 라쉬드 부샤렙 감독은 《영광의 날들》(2006)과 《무법자》(2010)라는 연작을 만들었다.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알제리 출신 식민지군 병사들의 이야기고, 《무법자》는 파리 학살에 대한 이야기다.
《Simon: An English Legionnaire(국내 개봉명-톰 하디의 도망자)》(2002)는 이 당시 외인부대에 입대한 영국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톰 하디가 국적을 조작하고 입대한 프랑스인 전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출세작 《자칼의 날》은 알제리 전쟁 직후 우익 테러의 표적이 된 드골에 대한 암살 음모를 배경으로 한다.

7. 참고 자료


2017년 9월 29일 문학동네에서 알제리 전쟁을 다룬 책인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이 출간되었다. 672쪽의 방대한 분량에 상세한 자료들을 첨부하여, 알제리 전쟁에 대한 자료나 인식이 희박한 국내의 세계사 지식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저서다. 국내에서 알제리 전쟁을 자세하게 다룬 도서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링크
그 외에 모던 타임즈(폴 존슨), 세계유격전사(육군본부), 1945년 이후의 전쟁(마이클 카버) 등도 구할 수 있다면 참고하면 좋다.
[1] 출처: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2] 영어로는 Black Foot.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인을 가리키는 용어. 알베르 카뮈이브 생로랑도 피에 누아르였다. 용어 유래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알제리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검은색 부츠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알제리 개간을 하던 프랑스인들이 신던 검은 작업용 신발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3] 프랑스계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스페인계, 이탈리아계도 모두 피에 누아르로 불렸다.[4] 프랑스에서 먼저 사격했다는 주장과 시위대에서 먼저 사격했다는 주장이 있다.[5]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3명은 중년여성 1명, 20대 청년 1명, 꼬마아이 1명이었는데 이 꼬마아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를 죄다 잃은 이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하여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알베르 카뮈 연구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로 가서 이 소설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당시 4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에서 그 날이 자주 떠오른다고 이야기했다. 부모 형제와 친구,이웃들을 싸그리 다 눈 앞에서 잃었으니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게 뻔하지만...[6]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중 북아프리카인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122,920명이다.[7] 자유 프랑스에서 최고 등급 무공훈장까지 받았다![8] 중심의 인물은 알제리의 배우 브라힘 해기아그다.[9] 프랑스가 워낙 1차대전 초반의 삽질과 2차대전에서의 광탈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사 강국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군사 강국인데도 결론은 졌다...[10] 냉전 시절 소련은 전세계적인 반제국주의연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반미/반서방 세력에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굳이 좌익 성향이 아니더라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도와주곤 했다.[11] 튀니지와 모로코는 알제리보다 먼저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했다.[12] 이 때문인지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13] 이 시절에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14] 심지어 이들 중에는 피에 누아르 출신들도 많았다.[15] 물론 프랑스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발행인과 기자들의 이름을 모두 익명으로 처리했다.[16] 여기에는 알제리 편에 든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은 포함하지 않는다.[17] 1961년 10월 17일 파리에서 이 전쟁에 대하여 비난 시위를 하던 알제리계 1만여명을 프랑스군경이 무차별로 사살하고 학살한 사건. 심지어 시위대에 있던 알제리 아이들을 프랑스군경이 센강에 내던져 빠뜨려 죽였다.[18] 196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오랑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 사망자 대다수가 피에 누아르. 즉 알제리에서 태어난 백인들이다. 사망자는 400~1,500명 정도로 각 주장이 다르다.[19]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출신 중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알제리를 조국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경우에는 배신자, 반역자, 매국노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저질렀다.[20] 노트르담의 꼽추로 유명한 그 성당은 '''노트르담 드 파리'''(파리의 노트르담)이다. 도시마다 노트르담이 있다. 노트르담은 "우리 귀한 성모님"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가 아니다. 정확히는 놀르-드-데임.[21] 1990년대에 알제리로 돌아와 알제에서 2012년 만 95세로 숨을 거둔다.[22] 무장 해제에 투입된 프랑스군은 아르키들에게 낡은 무기를 신품으로 바꿔 주기 위해서 무기를 회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23] 청년실업 문제 해결이 급한 상태인데다가 알제리 정부 입장에서 농장을 다시 되돌려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에 다시 줄 이유도 없다.[24] 물론 프랑스와 모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으며, 그에 따라 프랑스인들과 알제리인들은 고대 로마인의 생물학적 후손이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다만 프랑스는 기독교화됨과 동시에 부분적으로 게르만화되기도 하고(프랑스 왕국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이 게르만계 국가였음) 알제리는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화, 아랍화가 진행되면서 서로 별개의 문화권이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관계인 프랑스 남부 주민들과 알제리 북부 주민들도 언어·문화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별개의 민족이 된 상태다. 애초에 로마 제국 자체도 이탈리아 반도의 라틴족이 별개의 문화권들을 정복하면서 형성된 것이지만...[25] 국내 상영 제목. 장년층들의 경우 대부분 이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케이블의 클래식 영화 채널등에서 다시 방영할때는 원래 제목 로스트 커맨드로 방송하고 있다.[26] 베트민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로 전투가 벌어져서 전투 초반에 대부분의 프랑스군 방어진지가 그대로 휩쓸려 나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죽을때만 기다리며 절망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고, 그 뒤 증원으로 투입되는 공수부대는 대부분 전부 적진으로 떨어져 투입즉시 전멸했다.[27] 고다르가 감독한 영화 《작은 병정》은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3년 동안 상영금지를 당해서 1963년에서야 개봉한 경험이 있었다.[28] 사실 질로 폰테코르보는 평소 카예 뒤 시네마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크 리베트가 폰테코르보의 영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글은 아직도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