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달코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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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티븐 루이스 달코스키(Steven Louis Dalkowski )
'''출생'''
1939년 6월 3일
'''출신지'''
뉴 브리튼, 코네티컷
'''사망'''
2020년 4월 19일
'''사망지'''
뉴 브리튼, 센트럴 코네티컷 병원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57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자유입단
'''소속팀'''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1957~1969)
1. 소개
2. 생애
3. 초고속광속구 투수
3.1. 달코의 전설

(공이 너무 빨라)[1]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I never want to face him again

테드 윌리엄스[2]

아무도 그처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Nobody could bring it like he could.

ㅡ 더그 하비. 당시 마이너리그 주심

아마 115마일은 될 걸? 내가 패드를 3개를 끼지 않으면 받지 못하니까 말이야.

ㅡ 칼 립켄 시니어[3]

놀란 라이언? 샌디 코팩스? 속도에 있어서는 달코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되지.

ㅡ 얼 위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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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이자 가장 유명한 마이너리거중 1명. 신이 내린 어깨, 그러나 저주받은 제구력. 별명은 달코 혹은 하얀번개.
가끔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VS놀이중에 흔히 있는 "제구가 하나도 안 되는 170km이상을 던질 수 있는 야구 선수와 제구가 완벽한 130km를 던지는 야구선수중 누가 더 가치가 높음?" 같은 질문을 했을때 '''실제로 존재했던 170km이상을 언제나 던지는 야구선수.'''사람들은 200km를 던졌다고도 한다...

2. 생애


1938년에 태어난 그는 야구를 시작하고 나서 뉴 브리튼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야구를 병행했다. 야구투수, 미식축구쿼터백을 했었다고 하는데, 야구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18삼진 18볼넷으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2경기에서 총 40k를 기록하는등 엄청난 탈삼진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5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4천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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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후 불완전한 제구력으로 마이너리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63년 3월 2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스프링캠프에 초대, 3월 23일 뉴욕 양키스와의 시범경기에서 필 린츠를 상대로 구원 등판했다. 그러나 왼쪽 팔 인대가 끊어지면서 이후 구속은 145km/h까지 떨어졌고 결국 196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후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와 레몬 따는 일꾼으로 30년을 보내는데 원래부터 알콜중독자였기에 인생까지 완전히 망가져서 오래 못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2020년까지 살아있었다. 2009년 7월 19일 Shrine of the Eternals에 헌정된다. 사후 기사에 따르면 1994년에 아내와 사별하고 죽을때까지 양로원에서 여생을 보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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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9시즌 동안 거둔 성적은 995이닝 46승 80패, 1394개의 탈삼진과 1354개의 볼넷. 그리고 5.57의 방어율이었다.
2020년 4월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사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있었고, 여러가지 기저질환 및 알코올성 치매도 앓고 있었다고.

3. 초고속광속구 투수


그의 공을 본 누구나 160km는 기본으로 넘길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호프먼 제러드(Hoffman Jerrod) 같은 기자는 "아니, 125, 120마일은 되는 것 같다(각각201,190km)"는 말을 했다. 측정기술이 없던 시대라고는 해도 그를 타석에서 상대해본 수많은 타자들과, 그의 투구를 받은 포수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그러하다. 자기가 상대해본 최고의 파이어볼러라고.
그런데 왜 기네스 기록은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시에 속도를 잴 수 있는 레이더 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공을 보고 궁금해진 사람들은 속도를 재기 위해 군대에서 개발한 비행물체의 속도를 재기 위한 곳으로 가서 측정을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속도는 겨우 93.5마일(대략 150.5km). 뭐야 위의 말들은 다 옛날 일들이 미화된 것인가 싶겠지만 다 이유가 있다.
  • 전날 선발등판해서 150구 이상을 던지고 왔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투수는 제구가 하나도 안 되기 때문에 던지는 공의 숫자가 언제나 많았다.
  • 평평한 땅에서 운동화를 신고 던졌다. 야구장에서 투수는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 위에서 낮은 방향으로 공을 던진다. 거기다 스파이크가 없는 운동화는 투수가 전력투구하기 위해 뻗는 긴 스트라이드를 지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백이면 99가 미끄러질 수 밖에 없다.
  • 위에서 말했다시피 제구력이 헬이라서 홈 플레이트 만한 기계에 통과시키는 것에 계속 실패했다. 40분 동안 시도하다 결국 속도를 늦춰서라도 집어넣기라도 하자고 해서 겨우 저 속도가 나왔던 것이다.
  • 공이 홈플레이트에 맞는 시점을 기준으로 했기때문에 보통 쓰는 초속이 아니라 종속이 93.5마일이다. 따라서 150구 이상 던진 다음날 던진 공이 160후반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3.1. 달코의 전설


그의 제구와 관련된 일화들도 엄청나다.
  •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고교시절 18삼진, 18볼넷으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 1957년 8월31일 킹스포트에서 열린 경기에서 달코는 블루필드를 상대로 24개의 삼진을 하나 4-8로 패. 볼넷 18개와 몸에 맞은 공 4개, 그리고 6개의 폭투가 있었다.
  • 1957년 그는 62이닝 잡은 삼진은 121개. 9이닝 당 18개의 탈삼진이니 전성기 랜디 존슨보다 좋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 시즌 승은 1승. 볼넷이 129개라 K/BB는 1보다 낮고 39개의 폭투가 있었기 때문. 만난 타자의 3/4가 볼넷이나 삼진 그냥 타자로서 건드릴 수 없는 공을 던졌다.
  • 녹스빌에서 경기를 하던 때에는 상대방 타자 머리위로 공이 날라가자 타자가 겁에 질려 오줌을 지른 나머지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바지를 갈아입고 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 1960년 위에서 말했던 얼 위버가 어차피 이 녀석 공은 못 치니 그냥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 좀 더 느리게 던지라고 해서 그게 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제구는 결국 개선이 되지 않았다.
  • 캘리포니아 스탁턴에서는 위에서 말한 더그 하비가 주심을 보고 있었는데 달코가 던진 공이 하비 주심의 마스크를 맞추자 그 마스크는 세 조각이 나 흩어지고 주심은 5m 뒤로 날랐갔으며 뇌진탕 때문에 삼 일 동안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5]
  • 5달러 내기 때문에 5m앞에서 공을 던져 나무재질 외야펜스에 구멍을 뚫었다.
  • 10달러 내기에서는 정 가운데 외야펜스에서 공을 던져 포수 뒤쪽의 12m 관객 보호석을 넘겼다.
  • 한 경기에서는 하루에 포수 뒤쪽의 철조망을 세개의 투구가 뚫었다. 관객들은 혼비백산했다.
  • 마이애미 마두로 스타디움에서는 관중석 뒤쪽에서 핫도그를 살려고 줄 서 있던 사람의 등을 투구해서 맞췄다.
  • 또 다시 스탁턴에서는 던진 공이 관중석 위쪽 중계석의 캐스터의 머리를 강타한 적도 있다.
  • 이스턴 리그 시절에는 27삼진 16볼넷을 기록하며 투구수 286개 달성했다.
  • 2회 강판 경기에서는 이미 투구수가 120개였다.
[1] Fastest ever.[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프링캠프때 딱 한타석 상대해본적이 있다.[3] 칼 립켄 주니어의 아버지로 마이너리스 시절에 달코스키와 배터리를 이뤘다.[4]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감독으로 감독이지만 원 클럽에서만 활동했다. 1968~1982년, 1985년~1986년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1970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이후 1996년에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1962년에 댈코스키가 뛴 Elmira Pioneers의 감독이었고 이해 댈코스키가 생애 최고의 성적(160이닝 114볼넷 192탈삼진. 댈코스키는 이전까지 '''이닝당 1.5개 이하의 볼넷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을 올리는 데에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5] 1950년도 당시의 마스크이다. 지금의 그 철제 마스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