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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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남자라면 그날의 목표,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내 목표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저기 테드 윌리엄스가 지나간다. 이제까지 존재한 타자들 중 가장 위대한 타자다."'''
A man has to have goals — for a day, for a lifetime — and that was mine, to have people say, "There goes Ted Williams, the greatest hitter who ever lived.".
'''타격의 신''''''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타석에 가서 미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미치고, 투수에게 미쳐라.'''
There's only one way to become a hitter. Go up to the plate and get mad. Get mad at yourself and mad at the pitcher,
경이적인 통산성적[2]
1940~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 중 한 명이자''' 베이브 루스와 겨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타자로, 명실상부 '''레드삭스 프렌차이즈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MLB 역사상 최고의 좌익수이다.''' 포지션은 좌익수. 통산 타율 .344(통산 공동 6위), 2654안타, 521홈런, '''BB/K 2.85개''', 1839타점, 2021볼넷(통산 4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2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한 유일한 타자이며[3] , 7번의 타격왕, 4번의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조 디마지오와의 라이벌리[4][5] 로도 상당히 유명하고 --1941년에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 타율 기록자라는 위치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별명이 있다.
남들은 평생 한번도 못하는 4할 타자와 트리플 크라운을 다 해 본, 140여년의 프로야구 역사상 단 4명[6] 뿐인 위대한 선수이다.
또 12번의 출루율 1위와 9번의 장타율 1위, 10번의 OPS 1위에 올랐으며, 통산 성적에서 '''역대 출루율 1위(.482)''' 장타율 2위(.634) OPS 2위(1.116), wRC+ 2위(188), 순장타율 6위(.289)를 지키고 있다. 타율에서는 역대 7위이지만 앞선 6명은 모두 1920년대 이전 데드볼 시대에 데뷔한 선수들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인 24~26세 시즌과 32~34세 시즌을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군복무로 빠졌다는 것. '''선수 경력의 4분의 1인 약 5년 반을 군대에서 보낸 결과 2,500안타 500홈런 1,800타점 2,000볼넷에 그쳤다.''' 그의 평균 성적보다 낮춰서 30홈런 120타점 130볼넷 '밖에' 기록하지 못한다 가정해도 전쟁으로 인한 5년의 공백이 없었다면 '''최소''' 3,400안타 670홈런 2,400타점 2,600볼넷이라는 기록이 나오니, 전쟁이 없었다면 타점 역대 1위인 행크 아론의 2,297타점, 볼넷 역대 1위인 배리 본즈의 2,558볼넷을 누르고 타자의 기록이란 모든 기록은 거의 다 테드 윌리엄스의 이름으로 도배되었을지도 모른다.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2차 대전기 메이저 리그의 수준을 감안하면 테드 윌리엄스가 메이저 리그에서 계속 뛰었을 경우 지금의 기록보다도 더욱 엄청난 기록이 나왔을 확률이 크다.
그 당시의 메이저리그는 1940년대를 풍미했던 할 뉴하우저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등 실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2차대전 투수라고 까이며 명예의 전당도 베테랑 위원회로 겨우 들어갔을 정도이다. 하지만 뉴하우져가 '''2차대전 선수'''라고 까였던건 스타들이 대거 전쟁터로 빠진 미국 야구에 무혈입성해서 여우가 왕노릇을 하는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미국에서 야구는 국가적인 여가이며 일본군이 미국의 천황을 베이브 루스라고 생각했을 만큼 그 전통이나 위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테드 윌리엄스가 데뷔한 이후 리그 평균 타율은 2할 5~6푼정도로 떨어졌으며 그가 활약한 시기동안 리그 방어율은 3점대 중후반정도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그의 무대는 1920~30년대의 불꽃같던 타격시대 이후로 점점 투고타저현상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던것이다. 그런 리그의 상황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율 성적으로 베이브 루스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며, 두 차례의 참전으로 수년 동안의 공백을 겪었음에도 역대 통산 타격기록에서 열손가락에 들고, 다른 선수들보다 타율이 1할 이상 위에서 춤추던 윌리엄스를 스타들의 공백으로 덕을 본 선수라 하기에는 그 격차가 너무나 엄청나다.
상술했듯이 기록 면에서 보면 베이브 루스, 타이 콥과 함께 MLB 최고 타자 중 하나로 꼽힌다. 모두 힘과 정교함이 뛰어났으나, 루스는 장타와 어울리는 풀히팅 타격 기술(통산 장타율 1위, 통산 홈런 3위, 통산 출루율 2위), 콥은 탁월한 스피드를 활용할 다양한 배드볼 히팅 기술 및 주루 능력(통산 타율 1위, 통산 안타 2위, 통산 3루타 2위, 통산 도루 4위), 그리고 테드는 특출난 선구안을 이용한 타격 및 출루능력(통산 출루율 1위, 통산 장타율 2위)을 특징으로 가진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테드 윌리엄스의 진가라고 할 수 있는 출루율 기록은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고 통산 2위를 자랑하는 OPS도 1980년대 중반에나 나왔던 기록측정법이라, 한동안 그 실력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참전 때문에 누적스탯이 타이 콥[7] 이나 베이브 루스[8] 에 비해 부족하기도 하고... 보통 야구 관련 사이트에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를 뽑는다면 5위 안에 이 3명은 꼭 들어가는 편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테디는 누적 스탯이 부족해서 저평가를 당하는 경향이 강한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4~5위에는 꼭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리는 로저스 혼스비, 루 게릭, 윌리 메이스, 호너스 와그너 등이 나눠먹는다.
2. 선수 시절
윌리엄스는 17세 때 마이너리그 퍼시픽코스트리그 소속의 고향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1] 에 입단했다. 보스턴은 1939년 만 19세인 윌리엄스를 샌디에이고에서 사왔다.
데뷔시즌이었던 1939년부터 .327 31홈런 145타점을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4등에 들었을만큼 떡잎부터 달랐었다. 최초의 신인 타점왕 기록이었고, 이로 인해 'The Kid'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듬해에도 .344 23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활약을 한다.
1941년 프로 3년차였던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끝내기 쓰리런을 쳤으며 그 해 '''정규시즌 타율 4할'''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그 이후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생긴 호칭이 '최후의 4할 타자'. 더욱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교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도 장타력도 뛰어나 '''통산 홈런이 521홈런이며, 30홈런을 넘긴 시즌이 8시즌'''이나 된다.[12]
1941년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4할이 인정되는 .39955[13] 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테드를 감독이 빼고 라인업을 구성하자 당장 감독을 찾아가서 '''내가 오늘 안타를 못치면 4할 타자가 아닌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4할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는 경기에 출장했다. 결국 그는 그날 8타수 6안타를 기록, 4할 6리의 타율로[14] 20세기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해에는 동시기에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 조 디마지오도 56경기 연속안타라는 전설적 기록을 세웠던 시즌이었고, 결국 그해 MVP는 디마지오에게 돌아갔다.
전쟁 참전 등의 공백도 우습게 씹어주면서 쾌조를 보였던 그는 1950년 시카고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랄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 펜스에 부딪혀 팔꿈치를 다쳤다. 윌리엄스는 이 부상으로 60경기를 결장했고 타율도 생애 최저인[15] .317로 떨어졌다. 양키스와 우승경쟁을 했던 보스턴은 결국 4경기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부상은 이후 윌리엄스의 고질병으로 남았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사건으로 밀어치는 능력이 약화되어 타격 능력이 떨어 졌다고 한다.[16]
그 뒤 1959년 만 41세의 윌리엄스가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자(.254) 톰 야키 구단주는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고 1960년 .316의 타율을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옷을 벗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날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홈런임을 안 펜웨이파크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으며 답례도 하지 않았다.[17] 그가 오랜 고집을 꺾고 모자를 벗으면서 답례한 것은 한참 뒤인 1991년 4월, 테드 윌리엄스 데이에서였다.
2.1. 타격 스타일
테드 윌리엄스는 극단적인 당겨치기(풀 히팅)를 고수했고, 이 때문에 처음으로 특정 타자를 겨냥한 수비 대형인 '수비 시프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194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 루 부드로[18] 가 좌타자인 테드를 아웃시키기 위해 필드 왼쪽에 좌익수만 남기고 모든 야수들을 필드 우측으로 옮겨버리는 엽기적인 시프트를 시도한 것.[19] 테드가 밀어치기를 한다면 무조건 안타가 되지만 끝내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이 시프트에 대항해 밀어치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데, 테드 본인은 "바깥볼은 반드시 밀어 쳐야 하며 맞출때는 공의 윗부분을 노린다"고 썼던 것처럼 자신의 밀어치기 능력을 공공연히 어필했기 때문에 이 내용만큼은 추종자 등이 날조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당겨치는 타자가 된건 상기의 부상전력으로 바깥공을 밀어서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석할 수 있다.
테드는 자신의 타격이론서에서 상당한 선구안과 엄청난 훈련에 의한 타격 메커니즘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순간순간의 팀배팅보다는 타자 스스로가 더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한 타격을 설명한 것으로써 "좋은 타자란 자기의 스트라이크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쁜 공에는 배트가 나가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로 설명 가능하듯이 그는 배드볼히팅이나 정황상 밀어치기하는 팀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상적인 타격을 연습하고 연구하는 구도자적 신념을 가진 선수였기에 나온 이야기다.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2루수 조 모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프레이 히팅과 레벨 스윙보다는 풀 히팅과 미세한 어퍼컷 스윙이 훨씬 더 고차원적인 스윙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과 일맥상통한다. 수십년 후 현재 스탯캐스트의 시대가 열리고, 투수들의 강속구에 맞선 타자들의 뜬공혁명으로 재조명되었다.
그의 크고 아름다운 '''통산''' 스트라이크 존 9분할 타율. 그나마 약점인 인하이와 아웃로우마저도 2할 8-9푼 정도다.“옮길테면 옮겨봐라. 어차피 빈 자리는 많다. 아니면 넘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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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존 77분할 타율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 중)
2.2. 까다로운 성격
윌리엄스는 아무도 못말리는 괴팍한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방망이를 관중석에 집어던지는 사고를 치는 등 19년 내내 팬, 매스컴과 충돌했다. 특히 '''언론과의 사이가 매우 험악했는데,''' 기자들에게는 '키보드의 기사(knight of keyboard)'라는 별명도 지어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이 암환자를 돕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걸 보면 그저 기자들과의 관계만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20]
사실 기자들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윌리엄스는 펜웨이파크 홈경기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후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스턴 신문에서 윌리엄스는 '건방진 신인'으로 묘사됐다. 이후 윌리엄스는 팬의 환호에 두 번 다시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불거진 기자들과의 갈등은 1942년 보스턴 신문에 윌리엄스에 대한 '비운의 가족사'(부모의 이혼과 형의 투옥이 그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기사화)가 소개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테드는 기자에게 침을 뱉은 적도 있다.)
얼마나 기자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나면, 1947년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와 MVP 경쟁을 했을 때 보스턴 기자들은 테드가 아닌 디마지오에게 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특히 결정적인 것이 스프링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었던 어떤 보스턴 지역 기자였는데, 그는 10위표 한 장조차 테드에게 주지 않아 조 디마지오의 MVP에 결정적인 수훈갑을 달성했다. 성적은 .343 32홈런 114타점(테드)과 .315 20홈런 97타점(디마지오)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테드 윌리엄스는 MVP를 3회 놓쳤는데, 윌리엄스는 통산 MVP만 2회이며 하나만 더 추가해 3회 수상했을 시 본즈(7회)에 이은 역대 공동 2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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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가 얼마나 기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훈의 만화.
2.3. MVP와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커리어 전체가 가히 매 시즌 MVP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21] 의외로 MVP의 수상 회수는 고작(?) 2회 (1946, 1949)가 전부다. 흥미롭게도 그가 MVP 급 시즌을 보낼 때마다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이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 이유는 간단하다. 기자들이 언론을 기피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테드 대신 비교적 온화하고 사교적인, 그리고 테드가 뛰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숙명적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을 MVP 투표 때마다 몰표를 주었던 것. 특히 스프링 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은 보스턴 지역의 기자들은 테드의 미친 듯한 시즌 성적에도 불과하고 10위표 한 장 테드에게 주지 않아 테드를 여럿 물 먹인 전력이 있다. 이후 알버트 벨 역시 기자단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MVP를 모 본에게 뺏긴 전력이 한 번 있지만 테드는 적게 잡아도 자그마치 세 번이나 뺏겼다. 아래는 그렇게 MVP에서 물을 먹었던 사례.[22]
1. 1941시즌
테드 윌리엄스 : .406/.553/.735/1.287 홈런 37 타점 120 조정OPS 235[23]
조 디마지오 : .357/.440/.643/1.083 홈런 30 타점 125 조정OPS 184
마지막 4할 테드 윌리엄스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디마지오. 당장 겉으로 보면 압도적인 스탯의 테드 윌리엄스였으나 MVP는 여지없이 온화하고 사교적인 뉴욕의 신사 조 디마지오가 가져갔다. 뭐 당시에는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가 빅 이슈였고 윌리엄스 역시 인정한다는 인터뷰를 했으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2. 1942시즌
테드 윌리엄스 : .356/.499/.648/1.147 홈런 36 타점 137 조정OPS 216
조 고든 : .322/.409/.491/.900 홈런 13 타점 103 조정OPS 154
이듬해도 조정OPS가 200이 넘는 가히 신급의 성적을 올린 테드였지만 MVP는 역시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이었다. 심지어 테드는 이 해 커리어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 시즌이었지만 여지없었다.
3. 1947시즌
테드 윌리엄스 : .343/.499/.634/1.133 홈런 32 타점 114 조정OPS 205
조 디마지오 : .315/.391/.522/.913 홈런 20 타점 97 조정OPS 154
사실상 상대가 되지 않는 성적이었으나 기자들은 여전히 언론과의 전쟁 상태이던 테드 대신 조 디마지오를 선택했다. 이전 1941시즌은 4할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대결이라도 있었기에 디마지오의 수상이 납득이 되었지만, 이 시즌은 그런 상징적 대결조차 없어 역사상 가장 아쉬운 MVP 선정으로 꼽히는 시즌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시즌 테드는 커리어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는데 역시 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이었지만 MVP 그런 거 없다. 당시에 출루율이나 장타율을 중시하는 개념은 없었어도, 타율이나 홈런, 타점은 계속 중시하던 시기인데 그것만 따져도 압도하는 테드가 못 받은 건 야구 기자들의 꼬장이라 할 밖에.
2.4. 참전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던 테드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5.22일 야구선수와 병행이 가능한 미 해군 예비역[24] 병으로 입대했다. "이 정도면 이혼하신 어머니를 부양하기 충분하다." 테드가 참전을 선언하며 외친 말이었다. 그는 해군 예비역 병으로 복무 중 해군 예비역 항공 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하여 조종훈련을 받았다. 테드는 1944.5.2일 조종 훈련 이수 후 미 해병대 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여, 해군 비행교육대에서 F4U 콜세어 전투기 비행훈련 교관으로 해군과 해병대의 전투조종사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25] 2차대전 막바지에는 동원소집되어 진주만에서 실전 배치를 기다리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도 동원이 해제되지 않아 1946년까지 복무했고, 동원 해제 후에도 계속 해병대 예비역으로 군에 남았다.[26] 그는 선수 생활의 절정이었던 만 24세에서 26세 사이에 군생활과 선수생활을 겸했고, 그 중 1년은 동원소집되어 현역처럼 복무했던 것이다. 그러다 해병대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고 14개월 뒤인 1952.5.1일에는 다시 동원령이 떨어져서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사실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한군두를 일부러 감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뜬금없이 해군에서 신체검사를 실시하더니 덜컥 동원소집 영장이 나와버렸다고(...) 테드는 지난 8년간 비행기 몰아본적이 전혀 없고, 교관 노릇만 실컷 했을 뿐 실전 경험도 없는 예비역을 뭣하러 끌어가려드냐며 투덜댔으나 예비역으로 계속 복무하는 것보다는 동원소집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8주간의 재교육을 받고, 한국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서 팔자에도 없는 F9F 팬서 제트 전투기를 조종하게 되었다. 당시 대대에는 나중에 해병대 소장까지 진급한 랄프 스팬저와 우주비행사와 상원의원이 된 존 글렌이 있었는데, 존 글렌이 테드 윌리엄스의 윙맨이었다. 1952년 4월 30일 보스턴은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테드 윌리엄스를 위해 'Ted Williams Day'를 정했고, 이날 그는 디지 트라웃으로부터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통산 324호 홈런을 뽑아냈다. 모두가 이를 테드의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홈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알게 되지만 그것은 모두의 오판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테드 윌리엄스 대위는 해병 항공대의 F9F 팬서 조종사로 복무하며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한번은 평양에 폭격을 퍼붓고 오는길에 적군의 대공포에 맞아서 망했어요가 될뻔 하다가 수원 공군기지에서 위험천만한 동체 착륙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화에 따르면 동체착륙 직후 테드는 걸레가 된 자신의 비행기를 뒤로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밥먹으러 가버렸다나(...) 그렇게 테드는 전투조종사 자격이 정지될 정도로 빡세게 복무했고[27]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1년간의 동원소집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비행 자격을 상실할 정도로 빡세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테드였기에 야구에 대한 훈련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테드처럼 달팽이관이나 전정기관 근처에서 귓병이 발병하면 야구에 있어서도 크나큰 장애가 될 수 있었던 터. 그러나 그렇게 걸레짝이 된 몸을 이끌고 복귀한 테드는 37경기에서 .407의 타율에 13홈런 34타점이라는 신들린 타격을 선보였다. 그의 나이 만 34세였다.
테드 윌리엄스는 전성기 나이였던 1943~45년, 1952~53년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가 만약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5시즌을 온전히 뛰었을 경우 그의 통산 성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로 테드 윌리엄스의 참전 전후의 5시즌을 평균 내면 연 183안타 34홈런 124타점이 나온다. 3500안타, 700홈런, 2400타점의 기록이 꿈만은 아니었을 것.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기록은 훗날 1991년 대통령 자유 훈장(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이란 명예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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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존 글렌과 테드 윌리엄스. 글렌이 우주왕복선 임무에 참여했던 1998년의 사진이다.
한편, 테드 윌리엄스는 한국전쟁 시기에 존 글렌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고, 복무 후반기에는 글렌과 함께 비행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글렌은 훗날 테드 윌리엄스를 최고 수준의 파일럿이었다고 회고했다.
2.5. 이루지 못한 우승
MLB 역대급 커리어에 비해 정말 불운하게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못했다. 1946년에 그나마 한번 진출했지만 세인트루이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당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가 브루클린 다저스와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동안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여기서 윌리엄스는 팔꿈치에 공을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이 2할에 불과했고 보스턴은 패했다. 그리고 1946년 포스트 시즌이 그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 시즌이었다.(...)
3. 연도별 성적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Left Field (2nd)
5. 은퇴 후
은퇴 후 어부 생활을 하던 윌리엄스는 1966년 첫 투표에서 93.38%의 높은 지지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35] .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이 니그로 리그 선수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36][37] 정작 그의 친정팀인 보스턴은 흑인선수를 가장 늦게 받았으며, 밤비노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1969년 윌리엄스는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아 리그 꼴찌였던 팀을 지구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1972시즌 후 해임됐으며 이후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
1999년 펜웨이파크에서 올스타전이 열렸을 때 시구를 했다. 이날 페드로는 그야말로 외계인이었다. 자세한 것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항목 참조.
2002년 7월 5일에 끝내 그의 저주를 깨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사망 이후 시신은 알코어 생명 연장 재단에 냉동 보관되었다.
6. 기타
- 지상에서 7m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립 서웰(피츠버그)의 마구인 '이퓨스(eephus)'를 공략하여 펜웨이파크의 담장을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사실 배트 박스을 벗어나 타격을 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38]
- 펜웨이 파크의 우측 펜스 뒤에서는 윌리엄스 버그라는 불펜 피칭 장소가 있다.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좋아했던 테드의 홈런 개수의 증가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후에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거포 중에서는 좌타자가 꽤 있다(칼 야스트렘스키, 데이빗 오티즈 등). 하지만 우중간이 짧아 보이는 건 착시에 가깝고, 실제로 펜웨이 파크는 좌타자가 홈런 치기 가장 힘든 구장 중 하나이다. 베이브 루스를 위해 우중간을 당긴 양키 스타디움과의 비교는 솔직히 공정치 못하다.
- 영구결번 되기 까다로운 팀 중 하나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영구결번된 케이스. 하기야 어느 팀에 가더라도 이 정도 성적을 내고서 영구결번을 안준다면 더 이상한 것이겠지만.
- 1984년에 제작된 미국의 야구영화 <내추럴>의 주인공 로이 홉스(로버트 레드포드 분)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등번호가 같은 9번이고, 극중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본 항목의 맨 위에 인용된 "저기 최고의 선수가 지나간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라고 말한 점 등이 근거.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유대인 병사 도니 도노위츠, 일명 ‘곰 유대인’이 야구방망이로 나치 장교의 머리를 후려치며 이 사람을 언급한다[39] . 그 때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대사.
- 엄청난 기부천사다. 그리고 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했다. 소아암 치료 후원을 열성적으로 했고, 은퇴 이후에도 여전했다. 박동희 칼럼,기사삭제로 MLB 파크사이트로 대체함[40]
- 윌리엄스 사후, 그의 도움으로 암을 극복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윌리엄스 씨의 미소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미소를 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완성된 미소를 보여주고자 여러분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사내입니다.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얼굴을 봐주십시오. 그가 곧 우리입니다.'''
- 그의 별명으로는 'Splendid splinter'가 있다. 우리 말로 바꾸면 '화려한 파편' 정도로 윌리엄스가 치는 타구들을 묘사한 별명이다.
7. 어록
'''꿈에서 난 랜디 존슨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지.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외쳤어. '상대는 랜디 존슨이야. 밀어치라고, 밀어쳐'. 동료들에게 대답했지. '난 한번도 밀어쳐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초구가 날아왔고 난생 처음으로 밀어쳤지. 깨끗한 좌전안타였어. 허허허"'''
ㅡ 죽기 전 기자들을 상대로 옛 이야기를 풀어가듯 말했다고 한다.
'''이보게, 만약 스트라이크였다면 윌리엄스씨가 자네에게 알려줬을 걸세.'''
ㅡ 스트라이크가 아니냐고 따지는 포수에게 주심이 한 말. 이는 로저스 혼스비의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반개를 허용한다면 스트라이크 존은 무려 33%의 넓이가 늘어난다.'''
ㅡ 선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는 매일 밤마다 알코올로 배트를 닦곤 했다. 배트를 우체국으로 들고 가서 그 무게를 달아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레드삭스 클럽하우스에 저울을 들여놓기도 했다. 배트는 아주 짧은 시간에 30그램 정도 무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지금 삼진을 당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 나무 방망이로 야구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러 가는 거다.'''
'''나는 거의 8,000번 가까이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8,000번은 나에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설레는 모험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300홈런을 칠 때까지 상대 투수가 누구였고 볼 카운트는 어떠했는지 구종과 코스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타격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력의 문제고 경험과 실수로부터 얼마나 배우느냐의 문제다.'''
'''어떤 타자도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한다. 완벽한 타자란 없다.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는 삼진을 훨씬 더 많이 당했다.'''[41]
'''위대한 타자가 되어 꽉 찬 공을 안타로 만들기보다, 좋은 타자가 되어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는 공을 안타로 만드는 것이 세 배는 수월하다. (I have said that a good hitter can hit a pitch over the plate three times better than a great hitter with a questionable ball in a tough spot.)'''
'''자, .250짜리 타자는 40번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열 번 친다. 만약 이 타자가 나쁜 공은 버리기로 했다면 5번 정도 볼 넷을 얻을 수 있겠지. 이러면 타수는 5개 줄어들고, 35타수 10안타가 되며, 그는 .286짜리 타자가 된다. (Now, if a .250 hitter up forty times gets 10 hits, may be if he had laid off bad pitches he would have gotten five walks. That's five fewer at-bats, or 10 hits for 35, or .286.)'''
'''심판에게 따지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첫째는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길게 놓고 보면 심판들의 판정이 계속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괜히 판정에 신경 쓰느니 다음 공이나 다음 타석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
'''야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초구를 치는 타자의 타율이 어떤지 살펴보라. 아마도 1할도 안 되거나 기껏해야 2할쯤 될 것이다.'''[42]
'''배트를 크게 휘두르는 타자는 큼지막한 안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는 선수일 뿐이다.'''
'''만약 이제까지 타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다.'''
'''누군가 빨리 4할을 쳤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4할을 친 사람에 대한 질문을 그 선수에게 쏟아낼 것이며 그를 괴롭힐 것이다.'''
ㅡ 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에서.
'''마지막으로 저는 너무나 행복하였으며 제가 미국에서 태어난 것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인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게된 것이 태어난 이래 얼마나 크나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ㅡ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연설의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