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존슨

 

'''랜디 존슨의 틀'''
[ 펼치기 · 접기 ]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2001'''

보유 기록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20개
통산 최다 시즌 300탈삼진
6회[59]
최다 연속 사이 영 상 수상
4회[60]
최다 연속 워렌 스판 상 수상
4회
워렌 스판 상 최다 수상
4회[61]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랜디 존슨'''
헌액 연도
2015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7.3% (1회)


'''200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image]
타이거 우즈

'''랜디 존슨''' & 커트 실링







'''199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
데이비드 콘
(캔자스시티 로열스)

'''랜디 존슨
(시애틀 매리너스)'''

팻 헨트겐
(토론토 블루제이스)

'''1999~200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톰 글래빈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에리크 가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9~2002년 메이저 리그 워렌 스판 상'''
초대 수상자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앤디 페티트
(뉴욕 양키스)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

'''랜디 존슨 & 커트 실링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트로이 글로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1년 메이저 리그 베이브 루스 상'''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

'''랜디 존슨 & 커트 실링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트로이 글로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메이저 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
페드로 마르티네스
(보스턴 레드삭스, 1999년)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2년)'''

요한 산타나
(미네소타 트윈스, 2006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51번'''
랜디 세인트 클레어
(1984~1987)

'''랜디 존슨
(1988)'''

랜디 세인트 클레어
(1988)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51번'''
랜디 세인트 클레어
(1988)

'''랜디 존슨
(1989)'''

멜 로하스 시니어
(1990~1996)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51번'''
레이 퀴노네스
(1986~1988)

<colbgcolor=#005c5c> '''랜디 존슨
(1989)'''

레이 퀴노네스
(1989)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51번'''
레이 퀴노네스
(1986~1988)

'''랜디 존슨
(1990~1998)'''

스즈키 이치로
(2001~2012, 2018~2019)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51번'''
호세 카브레라
(1997~1998)

<color=#373a3c> '''랜디 존슨
(1998)'''

호세 카브레라
(1999~2000)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등번호 51번'''
마이크 로버트슨
(1998)

'''랜디 존슨
(1999~2004, 2007~2008)'''

'''영구결번'''
''''''뉴욕 양키스''' 등번호 41번'''
미구엘 카이로
(2004)

'''랜디 존슨
(2005~2006)'''

미구엘 카이로
(200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번호 41번'''
노아 로리
(2004~2007)

<color=#373a3c> '''랜디 존슨
(2009)'''

저스틴 크리스티안
(2011~2012)


<colbgcolor=#a71930>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No.51'''
'''랜들 데이비드 "랜디" 존슨
(Randall David "Randy" Johnson)
'''
'''생년월일'''
1963년 9월 10일 (61세)
'''출신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월넛 크릭
'''국적'''
[image] 미국
'''신체'''
208cm, 102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34번, MON)
'''소속팀'''
몬트리올 엑스포스 (1988~1989)
'''시애틀 매리너스 (1989~1998)'''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999~2004)'''
뉴욕 양키스 (2005~200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7~2008)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9)
'''수상'''
'''10회 올스타 선정 (1990, 1993~1995, 1997, 1999~2002, 2004)
월드시리즈 우승 (2001)
5회 사이 영 상 (1995, 1999~2002)
월드시리즈 MVP (2001)'''
4회 워렌 스판 상 (1999~2002)
베이브 루스 상 (2001)
NL 다승왕 (2002)
4회 방어율왕 (1995, 1999, 2001, 2002)
9회 탈삼진왕 (1992~1995, 1999~2002, 2004)
'''기록'''
'''NL 투수 부문 3관왕 (2002)
퍼펙트 게임 (2004.06.18)
노히트 노런 (1990.06.02)'''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 시애틀 I 시절: 미완의 에이스
2.2. 시애틀 II ~ 휴스턴 시절: 각성 그리고 전설의 시작
2.3. 디백스 시절: 나는 전설이다
2.4. 양키스 시절 ~ 자이언츠 시절 : 유종의 미
3. 기록의 사나이
5. 은퇴 이후
6. 구질 및 평가
7. 그 밖의 이야깃거리
8. 연도별 성적
9. 관련 문서


1. 개요


前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 현재는 사진 작가 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대표 & CEO 특별보좌. 대표적인 별명은 큰 키에서 비롯된 '''빅 유닛(Big Unit)'''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다. '''30대 후반에 4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40세에 290K를 잡는 등 롱런의 대표주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주무기는 '''최고 102마일의 강속구와 90마일의 슬라이더로,'''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이자 투피치 유형의 선발투수이다.
'''2001년 K/9 13.41개을 기록하며 단일 시즌 K/9 13개를 넘긴 3명의 선발투수 중 한 명'''이며[1]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함께 '''1990년대 전체 누적으로 K/9 10을 넘긴 2명 뿐인 투수다'''[2] 1990년대에 2538개로 가장 많은 삼진을 잡아냈고, 2000년대에도 2182개로 가장 많은 삼진을 잡아냈다.
랜디 존슨과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과 득점이 발생했던 2000년을 전후한 스테로이드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그 시대의 타자들을 찍어누른 둘뿐인 인물이며 이들이 남긴 탈삼진과 WHIP, ERA+ 등의 기록은 1920년 이전의 기록들마저 제치며 부문 최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투고타저로 접어든 2000년대 후반을 넘어 등장한 투수들이 아직까지도 이들의 기록을 깨지 못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들이 어떤 선수들인지 알 수 있다.
커리어 통산 4135.1이닝, 303승 166패, 평균자책점 3.29, 4875K/1497BB, ERA+ 135, ERA- 75, bWAR 103.5, fWAR 110.4.
타격 성적은 15시즌 .125타율 691타석 625타수 78안타 20득점 1홈런 40타점 19볼넷 296삼진 OPS .305를 기록했는데 bWAR이 -2.5로 타격 능력이 형편없었다. 타자로서 가장 많이 상대한 투수는 톰 글래빈인데 그를 18타석 상대해서 0안타 타율/출루율/장타율 모두 0을 기록하는 끔찍한 성적을 냈다.[3]
레전드 스토리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김형준 기자의 글이 있다. 인사이드MLB, 매거진S, 매거진S 다른 링크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 시애틀 I 시절: 미완의 에이스


[image]
제구가 안 되던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1982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존슨은 4라운드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지명을 받았다. 이때 애틀랜타는 당시 기준으로 4라운드 지명자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계약금인 5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존슨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제안을 거절하고 USC에 진학하게 된다. USC 진학 후에 대단했는지 당시 팀 동료이자 투타 겸업을 하던 '''마크 맥과이어'''가 존슨의 피칭을 보고 '''아, 저런 사람만이 투수를 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타자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이후 1985년, 드래프트에 다시 참가한 존슨은 당시 드래프트 참가자 중 전체 4위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하필 당해에 성적이 부진한 나머지 순위가 많이 밀려 2라운드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지명받았고 몬트리올과의 입단 계약을 맺었다.
208cm라는 NBA 평균 신장보다 큰 키와[4]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프로에 와서는 무슨 소년야구만화의 주인공처럼 제구불안에 시달리는 그렇고 그런 유망주일 뿐이었다. 리키 핸더슨은 존슨과의 첫 대결에서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을 따내며 존슨을 아주 가지고 놀았을 정도. 유망주로서는 비교적 많은 나이와 제구불안 때문에 엑스포스는 1989년 시즌 도중 그를 마크 랭스턴과 트레이드시켜 시애틀 매리너스로 보내버린다.[5]
그러나 시애틀 이적 이후 1990시즌부터 10승 이상과 3점대 방어율을 꾸준히 찍어주는 준수한 투수가 되었다. 1990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고 당대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교타자 웨이드 보그스를 상대로 단일 경기에서 3K를 잡아낸 최초의 좌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해서 1990~1992 3시즌 연속 볼넷왕이라는 영 좋지 않은 타이틀을 가져가는 등 여전히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다.
1992년 7월에 8연패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경기 전 상대팀의 한 투수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게 바로 '''놀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상대팀 선수인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고, 라이언과 전담코치의 노력 끝에 제구력을 안정시키게 된다.
놀란 라이언의 교육이 어느 정도 효과를 봤는지, 랜디 존슨은 이후 두 달 조금 넘는 남은 시즌 동안 3.30 ERA를 찍었고, 9월 27일 놀란 라이언과의 맞대결 경기에서는 '''MLB 최후의 160구''' 경기를 치르며 8이닝 18K 경기를 치렀다.[6]

2.2. 시애틀 II ~ 휴스턴 시절: 각성 그리고 전설의 시작


[image]
1992년까지 5~7개 수준의 BB/9을 기록하던 존슨은 1993년부터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B/9이 4개 이상인 시즌이 없다. '''제구가 잡힌 파워피쳐가 얼마나 무시무시해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
라이언을 만나고나서 존슨은 제구가 안정되었지만 그해 12월 개인 훈련을 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자책감에 빠진 존슨은 야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랜디는 그 유언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리그를 지배하는 괴수로 성장하게 된다.
29살이 된 1993년에 255⅓이닝을 던지며 308K, 99BB,[7] '''19승 8패, 3.24 ERA'''을 찍더니, 1994년에는 파업에도 불구하고 172이닝 동안 204K를 잡아 13승, 6패, 3.19 ERA로 사이영 투표 3위에 올랐다.[8][9] 이 시즌 4월 25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거뒀다.[10]
여담으로 1993년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존슨은 당시 최강팀이였던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당시 토론토의 GM 팻 길릭은 데드라인때 토론토의 전력을 어떻게든 상승시키기 위해 안전빵으로 두개의 별도 대형 트레이드 시나리오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그 대상 중 하나는 시애틀의 존슨이였고, 다른 하나는 오클랜드의 리키 헨더슨 이였다. 길릭은 오클랜드의 GM과 먼저 대화를 하여 트레이드에 구두합의를 하였지만, 당시 헨더슨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어서 일단 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였다. 헨더슨이 거부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봤던 길릭은 안전빵으로 시애틀과도 존슨을 대상으로 네고를 하였고, 결국 시애틀과도 '''사실상 트레이드에 합의한 상태였다'''. 근데 데드라인이 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헨더슨이 의외로 트레이드에 동의하자, 길릭은 사실 원했다면 여전히 존슨을 대신 선택할수 있었지만 먼저 네고를 한 오클랜드 GM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결국 핸더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헨더슨이 토론토에서 그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이 결국엔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것을 보면, 만약 존슨이 이 때 토론토로 갔다면 그의 커리어 첫 우승은 2001년보다 훨씬 전인 1993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1]

1995년에는 파업 여파가 이어지며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214⅓이닝 동안 294K[12]를 잡는 활약으로 '''18승, 2패''',[13] 2.48 ERA를 찍고 커리어 첫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더 뜻깊은 것은 이 해 시애틀은 창단 첫 지구우승을 달성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 과정이 정말 극적인 것이, 이 때 시애틀은 8월 말까지 당시 지구 선두였던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10게임이나 뒤져있었다. 그러나 팀의 막판 스퍼트로 동률을 달성했고, 지구우승을 놓고 벌인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3일 휴식 후 등판한 존슨은 완투승을 거두었다.
다만 이 때문에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애틀은 뉴욕 양키스에게 1,2차전을 모두 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리 3일 휴식만을 취한 존슨은 3차전에서 선발승을 따내며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단 하루 쉬고 5차전 9회 동점 무사 1,2루 위기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결국 3이닝, 1실점, 6K 구원승을 거두는 '''괴물같은 활약'''으로 팀을 챔피언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다음 상대는 당대 최고의 핵타선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는데 존슨은 인디언스를 상대로 3차전에서 비록 8회에 나온 수비에러로 인한 비자책점으로 선발승을 따내진 못하지만 8이닝, 2실점(자책1점)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2승 3패로 탈락위기에 몰린 팀을 위해 6차전 또다시 3일 휴식 후 등판하지만 타선의 침묵과 수비진의 지원을 받지 못해 7회까지 비자책 1실점만을 허용했음에도 팀은 0:1로 끌려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8회에도 등판한 존슨은 결국 시즌 말미 계속된 피로가 쌓였던 탓인지 3점을 내주게 되고 매리너스는 그대로 완봉패하며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양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매리너스가 명승부를 펼치면서 당시 인기 저조로 연고지 이전 논란까지 있던 시애틀에 야구 열기를 불지폈고 이는 오히려 새구장 건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995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뉴욕 양키스 vs 시애틀 매리너스 참조.
1996년에는 허리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아웃이 됐지만 1년 만에 회복하고 이듬해에 복귀, 1997년에 '''213이닝, 291K로 20승, 4패, 2.28 ERA'''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다승, 방어율, 탈삼진에서 '''전부 2위'''라는 트리플 ''''''라운을 기록. 다승과 탈삼진에서 하나 차이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영상을 내준다.
[image]
이듬해에는 재계약과 트레이드[14]가 무산된 시애틀에서 9승 10패 4.33 ERA라는 영 좋지 않은 태업성 플레이를 펼치다가 시즌 중반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 후 10승, 1패, 방어율 '''1.28''', 시즌 탈삼진 '''329'''개[15]로 진정한 괴수로 거듭나게 된다.[16][17] 아직까지도 2004년의 카를로스 벨트란과 함께 반년 렌탈의 레전설로 꼽힌다.

2.3. 디백스 시절: 나는 전설이다


[image]
1998 시즌이 끝나고 그해 겨울 자유계약선수가 되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치열한 영입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디백스의 4년 5340만 달러 제안을 택하게 된다.[18]
활약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4년 연속 사이 영 상워렌 스판 상을 석권'''. 야구선수의 나이가 만으로 35세면 기량이 떨어져서 신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거나 벤치신세가 될 수 있는데, 이 양반은 그 나이에 약물을 했건 안 했건 당대 최고 에이스들과 슬러거들이 즐비했음에도 상대 팀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다. 게다가 애리조나의 홈구장 뱅크원 볼파크(현 체이스 필드)는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 친화 구장'''이다. 그런데 그런 구장에서 이런 사람같지 않은 성적을 올린 원투펀치 덕분에 당시의 라이트팬들에겐 타자친화 구장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4년 연속 사이 영 상을 쓸어담은 1999~2002년의 성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1999년, 17승, 9패, 271.2이닝, 2.48 ERA, 364 탈삼진, 12완투, 2완봉승'''
'''2000년, 19승, 7패, 248.2이닝, 2.64 ERA, 347 탈삼진, 8완투, 3완봉승'''
'''2001년, 21승, 6패, 249.2이닝, 2.49 ERA, 372 탈삼진,[19] 3완투, 2완봉승 + 월드 시리즈 공동 MVP'''
'''2002년, 24승, 5패, 260.0이닝, 2.32 ERA, 334 탈삼진, 8완투, 4완봉승 + 트리플 크라운[20]'''
4년간 '''81승, 27패, 1030이닝, ERA 2.48, 1417 탈삼진'''
연평균 '''20승''', 7패, '''258이닝''', ERA 2.48, '''354 탈삼진'''
참고로 클레이튼 커쇼가 2008년 데뷔 후 2014년까지 잡아낸 삼진 갯수가 1445개로, 존슨은 커쇼가 7년 동안 잡아낸 삼진과 비슷한 갯수의 삼진을 4시즌만에 잡아버린 셈이다. 동시기 옆동네에서 리그를 초토화시키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함께 인간계를 아득히 초월한 성적을 찍었다. 이 4년간 케빈 브라운, 톰 글래빈과 정말 많이 붙었다.
2003년에 부상으로 잠깐 고생했지만[21] 2004 시즌에 부활, 안습의 팀 타선과 수비 때문에 승수는 16승밖에(?) 못 찍었지만 만40세 역대 최고령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는 등 여전히 리그 최고의 투수임을 증명하는 성적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1997년에 이어 또다시 휴스턴 애스트로스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영상을 내주고 만다. 하지만 약켓이 트리플크라운으로 랜디 존슨을 확실히 제압한 1997년과 달리 이번엔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22][23]

물론 디백스 시절하면 가장 유명한 건 역시 2001시즌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커트 실링과 함께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킨 것. 양키스를 상대했던 월드시리즈에서는 6차전 선발 등판하고 바로 다음날 끝장 승부에서 7차전 구원등판하는 장명부스러운 출전을 하기도. 하긴 마무리 김병현이 두 게임이나 무너져버려서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긴 했다. 2001년의 활약으로 플레이오프에 약하다는 이미지는 깨끗이 날아갔다. 커트 실링과 함께 2001 월드 시리즈 공동 MVP 선정. 자세한 사항은 2001 월드 시리즈 항목 참조.

2.4. 양키스 시절 ~ 자이언츠 시절 : 유종의 미


[image]
2004시즌 종료 후, 연봉부담 때문에 디백스는 랜디 존슨의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2000년 이후 번번히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던 뉴욕 양키스가 슈퍼에이스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를 데려온다. 등번호는 41번[24] 그렇지만 뉴욕 언론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간섭과 감시도 함께 했는데 이는 조용한 성격의 랜디에게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실제로 자꾸 귀찮게 구는 카메라를 거칠게 밀쳐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아무리 최강의 에이스라고 해도 어느덧 만 41세 노장이 되었는데 전성기가 지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결국 그 우려는 어느정도 맞아떨어지며 2005시즌에는 17승 8패에 3.79의 ERA로 평균이상의 성적을 냈지만 기대했던 압도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여기에 2006시즌에는 타선의 도움으로 2년 연속 17승을 기록했지만 처음으로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1경기 5.2이닝 5실점으로 부진, 체면을 심히 구기며 팀의 광탈에도 일조하고 만다.[25]
2005년 지하철 시리즈 당시, 뉴욕 메츠에서 뛰던 구대성에게 '충격적인' 2루타를 허용하고, 뒤이은 구대성의 폭발적인 홈 대쉬[26]로 점수까지 헌납한 사건은 한국 팬들에게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image]
결국 2007시즌을 앞두고 형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며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에게 디백스로의 트레이드를 요청, 다시 피닉스로 돌아와서 2007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몇 경기 못 나오지만 2008년 44세라는 야구선수로는 환갑 수준의 나이에도 11승10패 184.0이닝 평균자책점 3.91를 기록하며 선전했고, 시즌 최종전에서는 통산 100번째이자 마지막 완투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또 2008~2009시즌, 리그에서 두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image]
2008시즌 종료 후 디백스는 고령의 그를 더 안고갈 뜻이 없었고[27], 300승과 5000탈삼진, 조금 무리하자면 놀란 라이언 추월까지 목표로 하던 랜디 존슨은 다른 팀을 찾아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그의 새로운 팀이 되었다. 그리고 2009년 6월 5일, 워싱턴 내셔널스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메이저리그 역대 24번째 300승에 성공한다. 300승 이후 처음으로 체이스 필드 원정경기에 등판하던 날에는 디백스 팬들도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그리고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강등된 끝에 2010년 1월 결국 은퇴를 선언, 역사적인 커리어를 마감했다.
MLB 네트워크에서 선정한 그의 커리어 명장면 9개 The best of the Big Unit

3. 기록의 사나이


  • 사이영상을 4년 연속[28] 포함 5회 수상으로 역대 2위[29], 그리고 양대리그에서 수상[30]
  • 통산 4875개의 탈삼진으로 역대 2위,[31] 9번의 탈삼진왕, 통산 6회 300K 시즌.[32] 특히 2001년에 달성한 372K는 라이브볼 시대 한정 단일시즌 3위의 기록이다.[33] 또한 2002년에 달성한 334K는 2015년 클레이튼 커쇼가 301K를 달성하기 전까지 마지막 300K 기록이었다. 무려 12년간 300K 투수가 없었던 셈.
  • 통산 K/9 10.6으로 2위.[34] 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중 통산 K/9이 10이 넘는 선수는 랜디 존슨을 포함해 케리 우드, 페드로 마르티네즈, 크리스 세일, 맥스 슈어저,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다르빗슈 유 단 7명뿐이며 이 중 3000이닝을 넘긴 선수는 랜디 존슨 단 한 명이다. 참고로 존슨의 통산 이닝은 4135.1이닝이다.
  • 한 경기 무사사구 20K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위엄 한경기 20K는 1962년 톰 체니(16이닝 21K), 1986년 로저 클레멘스(9이닝 20K), 1996년 로저 클레멘스(9이닝 20K), 1998년 케리 우드(9이닝 20K), 2001년 랜디 존슨(9이닝 20K), 2016년 맥스 슈어저(9이닝 20K)가 기록했다. 하지만 무사사구 20K는 랜디 존슨이 유일. 다만 이 기록의 달성 과정에서 경기가 연장전에 돌입하는 바람에 정규이닝 20K 기록으로 카운트되지는 않았으나 사무국에서 뒤집어 정식기록으로 인정되었다. 해당 경기 게임 로그:10회초부턴 김병현이 등판한다.[35]
  • 그가 29세 이후부터 기록한 254승은 명예의 전당 투수필 니크로에 이은 역대 2위기록이다. 또한 300승 달성은 통산 24번째이자 현존 마지막 기록인데 달성시점의 나이(45세 265일)가 필 니크로(46세 188일) 다음으로 많다.
[image]
'''역대 양대리그 노히트 달성자'''
  • 양대리그 노히트, 그 중에서 퍼펙트게임은 역대 최고령이며 이날 잡아냈던 13개의 탈삼진은 역대 2위다.[36]
  • 통산 좌타자 피안타율이 0.199에 달한다. 가히 역대 최고의 좌타자 킬러.
  • 유일하게 투구로 비둘기를 맞힌 경험이 있다.[37] 이런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대략 190억 분의 1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리그 MVP를 제외한 투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는 다 누렸다.[38] 올스타전 10회 출전은 덤.

4. 명예의 전당 통계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랜디 존슨
99
280
331
65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9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랜디 존슨
102.1
62.0
82.0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5. 은퇴 이후


[image]
2010년 시애틀 매리너스 홈개막전에서 시구했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시구하기도 했다.
201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10주년 기념으로 함께 역대 최고의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커트 실링과 함께 시구를 했다. 아쉽게도 김병현은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 2001년 월드시리즈 멤버 중 아직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미겔 바티스타와 함께 몇 안된다. 그나마 라일 오버베이가 나오긴 했지만 얘는 당시에 대타로 몇번 뛰었던 정도고 게다가 마침 애리조나 선수라서 부르기 쉬웠던 것.
2012년 1월에는 시애틀 매리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무래도 매리너스 모자를 씌워서 명예의 전당에 보내려는 계획이 암암리에 진행 중인듯 하다. 물론 이 다음에 디백스가 영구결번을 단행한다면 또 모른다만.
트위터를 하면서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또한 rj51photos.com을 운영하며 전공(포토저널리즘)을 살려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올리고 있다. (엠엘비파크 글) 2013년 1월 오랜만에 공을 던져봤는데 '''89.4마일(=143.8km)''' 이 나왔다는 글을 올려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image]
2014년 5월 18일 디백스와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퍼펙트게임 10주년 기념 시구를 하였다. 영상 포수는 당시 배터리를 이루었던 로비 해먹인데 10년 전처럼 시구를 받고 기뻐서 뛰는 모습을 재연하였다. 한편, 디백스의 홈임에도 원정 유니폼을 입은 이유는 당시 퍼펙트게임 경기가 애틀랜타 원정이었기 때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50세를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팔로만 집어던진 공이 레이저처럼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간다. '''"그 날로부터 모두 열 살을 더 먹었습니다. 당신만 빼고요."'''라는 해설자의 반응이 압권.
2014년 11월달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마리아노 리베라에 이어 또 다른 메이저리그 전설이 같은 해, 같은 달에 한국을 찾은 근래 보기 드문 사례. 방문지 중에는 해군사관학교와 미군기지가 있다. 거북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개인 행사인 리베라와 달리 랜디 존슨은 미군에서 초청한거라 한국 팬들과 쉽게 만나기는 힘들지도.
2015년 명예의 전당 투표를 앞두고 몇몇 기레기들이 다른 아쉬운 선수들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이유를 들며 랜디와 페드로를 뺀 투표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1월 6일 페드로 마르티네즈, 존 스몰츠와 함께 입후보 첫해 입성에 성공했다. '''97.3%''' (534/549)의 득표율은 매덕스를 0.1% 앞선 역대 10위 기록[39]이며 투수로 한정할 경우 마리아노 리베라(100%), 톰 시버(98.84%)와 놀란 라이언(98.79%)에 이은 4위이다.
[image]
2015년 명예의 전당 공식 입회식 사진.[40] 키 큰 사람이 랜디 존슨.
기자회견장에서 명예의 전당 유니폼 단추를 매던 중 스몰츠가 의자 위에 올라가 자신의 머리 위에 모자를 씌어주는가하면 단추를 잘못 끼워 기자들을 폭소케 하기도 했다. 빅 유닛 챙겨주는 스몰츠 한편 존슨은 27%의 득표율로 고배를 마신 에드가 마르티네즈도 명전에 헌액되어야한다는 지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디백스 측에서는 명예의 전당 헌액이 확정되던 날 존슨을 대표 겸 CEO 특별보좌에 임명하고 그의 등번호 5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존슨은 디백스의 팜에 있는 어린 투수 유망주들에게 멘토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존슨 본인 또한 너무나 큰 키 등 신체적 특징이 남달라 프로 커리어 초반에는 제구력 문제 등을 보였고, 본인에게 맞는 투구동작과 패턴을 익히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어린 유망주 투수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것 같다고. 덧붙여, 명예의 전당에 새겨질 동판에 디백스의 모자를 새기기로 결정하였다.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등록된 그의 주요 팀(primary team)은 시애틀 매리너스이나, 세간에 널리 인식되는 건 동판에 새겨지는 모자 로고이니 사실상 그를 대표하는 팀은 애리조나인 셈.[41]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음에도 시애틀 매리너스의 영구결번은 아직 받지 못했는데, 명전에 애리조나 모자를 쓰고 간 것도 있지만 시애틀의 51번은 존슨 말고도 스즈키 이치로가 있어서 양키스의 빌 디키/요기 베라를 공동 영구결번한 사례처럼 이치로가 명예의 전당에 간 후에 존슨/이치로 공동 영구결번 처리를 하지 않겠냐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6. 구질 및 평가


[image]
늘린 사진이 아니다(!!)
{{{#!html
<iframe width="42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A5eS8a-o32k"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타석의 타자는 케니 로프턴
[image]
투구폼. 구속은 97마일(156km/h)
208cm(6'10")의 큰 키[42]에서 뿌리는 직구는 그 자체로도 위력적인데 '''평균구속이 95~98마일(153~158km), 최고 구속은 102마일(164km)'''[43]이다. 일반인은 130km만 돼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프로선수들도 160km의 공은 완전히 한가운데로 몰리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못친다. 그런 공을 경기마다 몇 번씩 던져댔으니 뭐... 더욱 대단한 건 경기 후반에도 구속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떨어져봤자 150km/h대 중반을 유지했다. 만 40살 때 퍼펙트 게임 경기에서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공이 117구 98마일 패스트볼이었다. 이시절 당시 메이저리그 선발 평속이 147인데 이 선수는 평균이 157이다. 강속구를 넘어서 광속구인 수준.
이게 테일링까지 걸리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이걸 치라고 하는 것부터 공포다."'''인 셈.
거기다 팔도 길고[44]팔각도가 낮은 사이드암에 가까운 쓰리쿼터라 타석에 들어선 좌타자들 눈에는 그야말로 '''뒤통수에서부터 날아들어온다.''' 저 위의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뜩이나 광속구인데 초창기 제구력이 별로 안 좋았을때는 좌타자 입장에선 헬 오브 지옥. 말년에 많이 까먹었음에도 통산 좌타자 상대 타출장이 199/.278/.294이니 뭐... 그래서 존슨 등판 예고일 전날 밤 타자들(특히 좌타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랜디 존슨의 투구가 그 무시무시함을 보여줬던 예로, 1993년 올스타전에서 존 크럭(John Kruk, 당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1루수 겸 3번타자, 현 ESPN MLB 해설자)이 존슨의 손에서 빠진 공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자 여기에 쫄아서 홈플레이트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든지,[45] 1997년 올스타전에서 래리 워커도 존 크럭이 당했던 것(?)처럼 당하다 결국 우타석에 들어서 헬멧을 거꾸로 쓴 개그를 선보인 등의 사례가 있다. 좌타자들이 잠을 설쳤다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
이 아저씨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준 건 바로 슬라이더.[46] 대부분의 선수들이 80마일 초반대, 즉 130km대의 슬라이더를 던지는데 비해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는 80마일 후반대~90마일 , 즉 143km 정도. 웬만한 KBO투수들 직구수준. 변화각도 얼굴로 날아오다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가는 수준이라 타자들은 속수무책.
에릭 캐로스에 따르면 직구와 슬라이더를 던질 때의 습관 차이[47]를 타자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알고도 못 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이야기인가.[48]
사실 슬라이더는 투수의 팔, 특히 팔꿈치에 매우 무리를 주는 구질이라서 이걸 주로 구사하는 투수들의 경우 부상이 잦은 편이지만...이 아저씨의 경우 나이들어서 애리조나 말기에 몇 번 드러누운 거 빼고는 부상도 없었다. 여러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어느 하나 딱 맞는 설명은 없었다.[49] 그냥 의 축복으로 이해하자.[50]
게다가 프로선수뿐 아니라 일반인도 키가 크면 나이와 상관없이 무릎 부상 또는 관련 질환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아저씨는 무릎 부상도 나이들어서 왔고 젊어서는 쌩쌩했다. 키가 너무 크다보니 뭔가 어색해 보이는 투구폼이긴 했지만 중심이동이 매우 깔끔했다. 전성기 이전에는 키킹 동작이 커서 전반적으로 투구폼이 커 보였으나,[51] 키킹 높이를 완전히 줄이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폼을 찾은 덕분에 최고의 구위를 유지하며 제구를 잡는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image]
흔히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투피치만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디백스 입성 후 패스트볼 중에서도 투심의 비중을 높이고 이후 스플리터를 추가했다. 물론 이 두 구종의 비율이 크게 높았던 것은 맞다.
[image]
현역시절 스플리터.
이미 로저 클레멘스,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함께 1980년대~2000년대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았지만...[52] 동시대의 약물복용 의혹자들이 드러나면서 더더욱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던 로저 클레멘스가 약물복용자라는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면서, 안 그래도 놀라운 커리어인데 약물없이 약쟁이 타자들을 그것도 투수의 로망인 불꽃 강속구로 다 제압하면서 리그를 평정했으니 그의 명예가 더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MLB 네트워크 프라임 9에서는 그를 역대 최고의 좌완 2위에 선정했다. 1위가 레프티 그로브가 1920년대 투수임을 감안할 때 그가 현대야구 최고의 좌완임을 인정받은 셈.[53]

7. 그 밖의 이야깃거리


[image]
일명 '''새 폭파 사건'''[54]
시범경기라 공식 영상이 없으며 팬이 촬영한 비디오라서 화질이 좋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공에 맞은 후에도 날개를 퍼덕이는 걸 볼 수 있다. 전광판엔 95 mph(153 km/h)가 찍혔다. 당연히 비둘기는 뼈도 못추리고 즉사, 사체는 깃털이 몽땅 빠져나간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고 한다. 공에 맞자마자 깃털이 날리는 모습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시체 자체가 폭발하듯이 분해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새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가 160 km/h에 가까운 물체에 부딪힐 확률을 내봤더니 190억 분의 1이라는 로또보다도 더 답이 안나오는 수준의 숫자가 나왔다고 한다. 미국의 한 프로그램은 이 사건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놓고 진짜 새 대신 생닭을 수십 수백 수천 번 쏘아대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 랜디 존슨의 구위를 설명할 때 주로 첨부되는 영상이다. 해당 투구를 주심은 노카운트로 처리했다. 현재 야구 규정에는 '타구'가 아닌 투구가 새에 맞는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볼로 처리하는 것도 애매하다. 시범경기에 벌어진 게 천만 다행이라면 다행. 랜디 존슨 자신도 인상 깊었는지 자기 홈페이지 로딩 화면이나 로고가 새가 깃털 휘날리며 기절한 모습이다. 랜디 존슨의 홈페이지
[image]
당시 PETA에서 그를 고소하기도 했는데 농담이 아닌 정말로 진지한 고소라서 랜디 존슨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까지 고용해야 했다. 이 일화는 현재도 극단적 동물 보호 단체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될 정도로 유명한 사례이다. 기사1(현재는 삭제됨), 기사 2.
  • 내셔널리그에서도 활동했던 선수라 타석에도 들어섰는데, 대부분의 왼손잡이들이 좌타자인 반면, 랜디 존슨은 우타석에 들어서서 좌투우타라는 괴랄한 투타형태를 띠게 되었다. 원래 야구가 공격할 땐 좌타자가 유리하고 수비할 땐 오른손잡이가 유리해서[55] 우투좌타는 드글드글하지만 좌투우타는 공수의 유리함을 다 포기하는 형태라서 거의 없다...지만 이 아저씨는 투수라서 상관없다.[56] 좌투수기 때문에 공을 던지는 왼팔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데 우타석에 들어서면 투수쪽으로 보이는 팔은 왼팔이다. 이는, 타격 메커니즘에서 스윙을 할 때 위로 잡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왼손은 거들 뿐과 같은 이치로 생각하면 된다.[57] 참고로 타격 실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통산 타격 WAR는 -2.5. 사실 도저히 잘 칠 만한 체격조건이 아니기도 했고.
  • 디시 야갤 초창기 때 '푸졸스가 맞아요. 아니면 랜디 혼슨인가요?'라는 뻘플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58] 굳이 따지자면 스웨덴계스웨덴어로 읽은 본래 성씨는 욘손이다.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투병중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임수혁 선수 돕기 행사(2002년)에서 랜디 존슨이 행사를 돕기 위해 'Big Unit'이 새겨진 모자를 경품에 내놓았던 적이 있었다.# 이 때 당시 랜디 존슨 뿐만 아니라 임수혁 선수 돕기 행사에 애장품을 경품으로 내놓았던 선수로 후루타 아츠야(저 기사에는 오타가 났다), 카네모토 토모아키, 박찬호 등의 야구선수 외에도 홍명보, 최경주, 그리고 김동성 등이 있었다.
  • 2012년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다르빗슈를 평가한 적이 있다.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르빗슈의 투구 영상을 들고 찾아와서 평을 부탁했고 이에 응한 것.

랜디옹의 평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르빗슈는 분명 좋은 공을 가지고 있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낯설어 할만한 뭔가는 없다. 자막에는 메이저리거들과 같은 결정구가 없다고 나왔지만 자막이 틀렸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본 적 없을 특별함이 없다는 것. 정확한 근거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다르빗슈의 투구 스타일, 즉 빠른 패스트볼에 브레이킹볼을 결정구로 삼는 우완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도 많기 때문에 타자들이 쉽게 적응할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저런 조언을 한 것 같다. 또한 일본보다 빡빡한 경기일정을 치르다 보면 몸의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 없으므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결정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자신도 다르빗슈에게 기대하는게 많으니 이전보다 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훈훈한 덕담을 덧붙였다. 인터뷰를 끝내며 다르빗슈의 첫 시즌 승수를 예측해서 야구공에 적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6'이란 숫자를 적었는데 다르빗슈는 정말로 데뷔 시즌에 귀신같이 16승을 거두며 랜디옹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 한손에 야구공을 7개나 들어올리는 엄청난 손 크기와 악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16년 커쇼가 기록한 6개보다 더 많은 것이다. 야구공 7개 쥐기 기록은 존슨 외에도 쟈니 벤치등이 가지고 있다.
  • 록 음악(특히 하드록)과 메탈을 매우 좋아하며, 특히 러시의 광팬이다. 실제로 러시 40주년 공연 무대 뒤에서 포토그래퍼로 활약했으며, 드러머 닐 퍼트에게 드럼셋을 선물로 받는등 밴드원들과의 관계 역시 친밀한 편. 실제로 인스타그램으로 들어가보면 거의 날마다 여러 밴드의 고퀄 공연사진이 하나 이상은 꼭 달려있다.


  • 포스트시즌에서는 좋은 성적을 보이지는 못했다. 통산 성적 7승 9패 3.50으로 통상적으로 강속구 투수가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보인다는 속설에 어긋나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성적을 찾아보면 특이한게, 디비전 시리즈에만 유독 약했다. 휴스턴,애리조나때 NLDS의 통산성적은 5전 전패 36.1이닝 방어율 4.46이고, 시애틀,뉴욕 양키스때 ALDS의 통산성적은 2승 3패 36이닝 방어율 5.25이다. 이정도면 빼박 새가슴 같은데 그건 또 아닌게, 시애틀 시절 ALCS의 통산 성적은 1패 15.1이닝 방어율 2.35, 디비전 시리즈를 뚫고 올라온 NLCS때는 2경기 2승 16이닝 2자책 방어율 1.12, 월드시리즈에서는 3승 17.1이닝 2자책 방어율 1.04였다. 통산 NLDS 5패를 2001년 NLCS,월드시리즈 5전 전승으로 다 메꾼 케이스.

8.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1988
MON
4
3
0
0
0
26
2.42
23
3
7
0
25
1.15
151
0.4
0.6
1989
7
0
4
0
0
29⅔
6.67
29
2
26
0
26
1.85
54
0.0
-0.8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1989
SEA
22
7
9
0
0
131
4.40
118
11
70
3
104
1.44
92
1.6
0.2
1989 시즌 합계
29
7
13
0
0
160⅔
4.82
147
13
96
3
130
1.51
82
1.6
-0.6
1990
SEA
33
14
11
0
0
219⅔
3.65
174
26
'''120'''
5
194
1.34
108
2.0
2.2
1991
33
13
10
0
0
201⅓
3.98
151
15
'''152'''
12
228
1.51
103
2.6
3.0
1992
31
12
14
0
0
210⅓
3.77
154
13
'''144'''
'''18'''
'''241'''
1.42
105
3.4
2.4
1993
35
19
8
1
0
255⅓
3.24
185
22
99
'''16'''
'''308'''
1.11
135
7.0
6.6
1994
23
13
6
0
0
172
3.19
132
14
72
6
'''204'''
1.19
152
5.2
5.5
1995
30
18
2
0
0
214
'''2.48'''
159
12
65
6
'''294'''
'''1.05'''
'''193'''
'''9.5'''
'''8.6'''
1996
14
5
0
1
0
61⅓
3.67
48
8
25
2
85
1.19
136
1.6
1.2
1997
30
20
4
0
0
213
2.28
147
20
77
10
291
1.05
197
7.0
8.0
1998
23
9
10
0
0
160
4.33
146
19
60
11
213
1.29
106
4.2
1.5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1998
HOU
11
10
1
0
0
84⅓
1.28
57
4
26
3
116
0.98
329
3.1
4.0
1998 시즌 합계
34
19
11
0
0
244⅓
3.28
203
23
86
14
329
1.18
135
7.3
5.5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1999
ARI
35
17
9
0
0
'''271⅔'''
'''2.48'''
207
30
70
9
'''364'''
1.02
'''184'''
'''9.0'''
'''8.6'''
2000
35
19
7
0
0
248⅔
2.64
202
23
76
6
'''347'''
1.12
'''181'''
'''9.6'''
8.1
2001
35
21
6
0
0
249⅔
'''2.49'''
181
19
71
18
'''372'''
'''1.01'''
'''188'''
9.9
9.5
2002
35
'''24'''
5
0
0
'''260'''
'''2.32'''
197
26
71
13
'''334'''
1.03
'''195'''
7.9
10.5
2003
18
6
8
0
0
114
4.26
125
16
27
8
125
1.33
110
2.5
1.7
2004
35
16
14
0
0
245⅔
2.60
177
18
44
10
'''290'''
'''0.90'''
'''176'''
9.4
8.2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5
NYY
34
17
8
0
0
225⅔
3.79
207
32
47
12
211
1.13
112
4.0
5.7
2006
33
17
11
0
0
205
5.00
194
28
60
10
172
1.24
90
3.2
1.7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7
ARI
10
4
3
0
0
56⅔
3.81
52
7
13
4
72
1.15
125
1.5
1.2
2008
30
11
10
0
0
184
3.91
184
24
44
6
173
1.24
118
3.6
3.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9
SF
22
8
6
0
0
96
4.88
97
19
31
2
86
1.33
87
0.2
0.1
<color=#373a3c> '''MLB 통산'''
(22시즌)
618
303
166
2
0
4135⅓
3.29
3346
411
1497
190
4875
1.17
135
108.4
101.1

9. 관련 문서


[1] 나머지 두 명은 1999년 페드로 마르티네스, 2019년 게릿 콜[2] 400이닝 이상. 페드로= 10.15 랜디= 11.03[3]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존 스몰츠를 가장 많이 상대해서 마찬가지로 타율/출루율/장타율 모두 0을 기록했다.[4] 실제로 USC(남가주대학) 시절까지 농구선수를 겸업하기도 했다.[5] 여담으로 맞트레이드의 당사자인 랜디 존슨과 마크 랭스턴은 6년 뒤인 1995 시즌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우승팀 결정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각각 시애틀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선발 투수로 맞대결 했다. 결과는 랜디 존슨의 승.[6] 이 경기는 라이언 역시 감명을 받았는지, 훗날 랜디가 300승을 달성한 뒤 AT&T 파크에서 가진 기념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며 그날 경기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7] 이전에는 140~150개의 볼넷을 내주며 240~250개의 탈삼진을 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993시즌의 기록은 존슨이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매우 고무적인 성적이었다.[8] 이 해 AL 사이영 상 수상자는 데이비드 콘이었다. NL 사이영 상은 그렉 매덕스의 차지. 이 시즌에 매덕스는 본인 커리어 최저 ERA인 '''1.56'''을 기록했다.[9] 이 시즌 4월 11일 토론토를 상대로 2.1이닝 11실점을 했는데 이는 본인의 1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다.[10] 로저는 7이닝 3실점.[11]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토론토에게 큰 패착이 됐는데, 이 당시 존슨은 계약기간이 상당히 남아있었지만 헨더슨은 시즌 직후 바로 FA로 풀렸기 때문. 시즌 후 헨더슨은 토론토를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클랜드로 돌아갔고, 토론토는 1994년 시즌부터 선발진이 크게 흔들려 장기간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12] 이 해 성적 덕분에 존슨은 놀란 라이언 이래 '''최초의 탈삼진왕 4연패'''를 달성하게 된다.[13] NL의 그렉 매덕스(19승 2패)와 함께 역대 최초로 200이닝 이상 승률 9할 시즌을 만들어냈다.[14] 당시 1997년 ALDS에서 시애틀에 패한 뉴욕 양키스가 랜디에게 반해 그를 영입하려 했는데 시애틀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를 요구했다고.[15] 시즌 종합 244⅓이닝 동안 19승 11패 3.28 ERA.[16] 삼진 개수로만 따지면 랜디 존슨이 전체 1위가 맞다. 단지 시즌 중간에 AL에서 NL로 옮겼기 때문에 기록이 나눠지면서(AL에서 213개, NL에서 116개) 어느 쪽에서도 수상을 못 한 것일 뿐이다. 당시 AL의 탈삼진 1위는 271개의 로저 클레멘스, NL은 300개의 커트 실링이었다.[17] 비슷한 경우로, 1997년의 마크 맥과이어가 시즌 중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58개(오클랜드에서 34개, 세인트루이스에서 24개)로 양리그 합쳐 최다 홈런을 치고도 홈런왕은 각각 AL은 56개의 켄 그리피 주니어, NL은 49개의 래리 워커가 가져가고 맥과이어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바 있다.[18] 랜디 존슨의 집은 애리조나주의 주도인 피닉스이고, 가족들도 양키스 시절부터 피닉스에 살았다.[19] k/9이 무려 '''13.41'''이다.[20] 좌완투수로는 스티브 칼튼 이래 최초. 9년후 클레이튼 커쇼가 이어 받는다.[21] 개막전에서 노모 히데오에게 패했다. 참고로 둘의 상대전적은 3:0으로 노모의 압승.[22] 당시 두 사람의 성적을 비교하면 로켓 18-4 214⅓이닝 2.98 218K. 빅 유닛 16-'''14''' '''245⅔이닝 2.60''' '''290K'''. 이후 랜디 존슨 사례 때문인지 2006년에 16승을 거둔 브랜든 웹이 논란 속에 NL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010년 AL 사이영 투표에서 vs CC의 대결에서 킹이 사이영상을 탔다. 존슨이 이걸 보면 더욱 통탄할 노릇.[23] 그리고 클레멘스의 추악한 모습이 밝혀진 이후로는 아무도 클레멘스의 사이영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클레멘스가 1997년도부터 도핑을 했는가 안 했는가는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지만, 2005년은 이미 그것의 효과를 받을 대로 받은 뒤로 여겨진다.[24] 주로 51번을 달았지만 양키스에서는 버니 윌리엄스가 주인이었다. 은퇴후 영구결번[25] 이는 존슨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다. 8년 동안 통산 19경기(16선발) 7승9패 121.0이닝 평균자책점 3.50, 132k[26] 사실 슬로우 카메라로 보면 포수 호르헤 포사다의 태그가 조금 더 빨랐기에 아웃이 맞다. 하지만, 허슬 플레이에 관대한 판정을 내주는 분위기상 세이프가 선언되었고, 상대팀에서도 딱히 항의하지 않아 그대로 인정되었다.[27] 랜디 존슨은 팀에 남기 위해 기꺼이 연봉 50%를 삭감할 용의를 내비쳤지만 재정난에 빠진 디백스는 그것도 비싸다고 더 후려치는 바람에 존슨은 결국 팀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존슨이 떠난 뒤, 디백스는 '''랜디 존슨에게 제시한 금액보다 거의 두 배가 더 많은 액수'''로 선발 투수 존 갈랜드를 영입하였고, 존슨은 이에 대해 대단히 섭섭해했다. [28] 그렉 매덕스에 이은 역대 2번째이며 2019년 현재까지 마지막 기록이다.[29] 1위는 로저 클레멘스의 7회. 논란이 많은 2004년 사이영상의 결과가 랜디 존슨으로서는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30] 존슨과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999년 수상으로 각각 역대 두 번째와 세 번째(NL의 사이영상 발표가 며칠 더 빨랐다.) 양대리그 수상자가 된다. 참고로 2019년 현재까지 양대리그 수상자 명단은 여섯 명으로 게일로드 페리, 존슨, 페드로, , 로이 할러데이, 맥스 슈어저.[31] 1위는 5714개를 기록한 놀란 라이언.[32] 놀란 라이언과 타이 기록이지만 5시즌 연속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33] 1974년 놀란 라이언 383K, 1965년 샌디 코팩스 382K[34] 크리스 세일이 10.8개로 역전. 다만 2010년대의 역대급 삼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K/9이 1990~2000년대에 비해 2개 이상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존슨이 세일보다 결코 탈삼진 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그리고 세일은 아직 현역선수이기때문에 커리어 후반기때 k/9가 떨어질수도 있다.[35] 참고로 이 아저씨는 시애틀 시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19K를 잡아낸 적이 있다.[36] 1위는 샌디 코팩스맷 케인의 14개[37] 영상[38] 랜디 존슨의 최전성기였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진 약물에 기댄 장타로 명성을 날리던 타자들이 리그를 지배했던 지독한 타고투저 시대였다. 가장 뛰어난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 상의 존재와 엄청난 성적을 올린 야수들이 넘쳐났다는 리그 상황에 더하여 가장 가치있는 선수는 일년에 선발이면 35경기 남짓, 불펜이라도 아무리 많이 나와봤자 80~90경기 내외 출전하는 투수가 아닌 매 경기 출전하는 Everyday Player여야 한다는 기자들의 보수적인 투표성향이 합쳐져 1992년 아메리칸리그 MVP 데니스 에커슬리를 마지막으로 2011년 아메리칸리그 MVP 저스틴 벌랜더가 나오기 전까지 19년간 양대리그 MVP는 야수들이 독식한다. 투고타저 시대로 접어든 2010년대 이후에도 투수가 MVP를 타려면 투수 성적도 뛰어나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딱히 MVP를 줄만한 야수가 없어야 한다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투수가 MVP를 타기는 쉽지 않다.[39] 1위부터 마리아노 리베라 - 켄 그리피 주니어 - 톰 시버 - 놀란 라이언 - 칼 립켄 주니어 - 타이 콥 - 조지 브렛 - 행크 애런 - 토니 그윈 - 랜디 존슨[40] 왼쪽부터 크레이그 비지오, 존 스몰츠,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41] 'Primary Team'과는 달리 동판에 새겨지는 모자 로고는 선수의 의중도 어느 정도 반영된 거기 때문에, 랜디 존슨이 애리조나 로고를 새기기로 결정했다는 거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첨언을 하자면 모자 로고 결정에 선수의 의견을 참고한다고 하여 이를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웨이드 보그스가 대표 사례.[42] 그런데 MLB 기록은 디백스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한 존 라우시가 6'11"로 넘어섰다. 라우시는 하이 쓰리쿼터 딜리버리를 구사하는 선수였기에 상대팀들은 랜디가 한참 던지다가 라우시가 등판하면 벌벌 떨기도 했다고. [43] 참고로 공식 최고구속(102마일)을 기록할 때 무려 '''만 41세''' 생일 3일 전이였다. #.[44] 패트릭 유잉과의 사진을 보면 유잉보다 약간 짧은 정도.#, 참고로 유잉의 윙스팬은 '''243cm'''#. 즉 랜디의 윙스팬은 '''230~235cm''' 정도로 추정된다.[45] 그리고 크럭은 그 경기에서 "그런 상황에서 산 것만으로도 다행이네요." 라면서 존슨의 투구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46] 프라임 9에서는 존슨의 슬라이더를 역대 2위로 선정했다.[47] 일본식 용어로 쿠세. 글러브를 오므리면 직구, 벌리면 슬라이더였다고 한다.[48] 물론 선수생활 내내 읽혔다는 말은 당연 아니다. 존슨도 어느 순간 타자들이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글러브가 벌어지는 게 눈에 띄지 않도록 검정색 천을 덧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애리조나 시절엔 양키스의 감독 조 토레가 글러브 색깔과 다른 천이 타자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며 태클을 걸기도 해 경기 중에 글러브를 교체한 적도 있었다.[49] 전문가들 사이의 주요 의견으로는 자신에게 맞고 밸런스 잡힌, 그리고 회전을 이용해 던지는 투구폼을 지닌 것이 롱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50] 원래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른 자질을 타고 나듯이 내구성 역시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크다. 놀란 라이언의 경우가 좋은 예시인데, 이 양반은 40대 중반 은퇴할 때까지 강속구로 엄청난 이닝을 소화했다. 46세에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공은 158km...(만루홈런 맞았다.)그가 45살때 인터뷰에서 어떻게 당신 나이에 95마일을 던질 수 있죠? 라는 질문에 웃으며 "비결 같은 건 없어요 저도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역시 뭐든지 타고나야 하는 것.[51] 키킹 동작이 컸기 때문에 자연히 상체가 흔들렸다.[52] 사실 저 넷 중에는 약켓의 평가가 제일 높았다. 물론 넷 모두 첫턴 명전급이라고 평가되긴 했지만 약켓은 올타임 넘버원 급이라는 평가였으니. 하지만 지금은...[53] 3위부터 순서대로 워렌 스판 - 칼 허벨 - 스티브 칼튼 - 화이티 포드 - 톰 글래빈 - 샌디 쿠팩스 - 에디 플랭크.[54] 참고로 당시 상대 타자는 켈빈 머레이라는 선수로 18년 뒤에 MLBNFL 모두 1라운드로 지명되는 카일러 머레이의 삼촌이다.[55] 상대적으로 좌타자는 우투수에 강하고 우타자는 좌투수에 강한데, 우투수가 좌투수보다 훨씬 많으므로 좌타자가 유리하다. 수비할 때의 경우 내야수가 잡은 공의 대부분은 1루로 뿌리게 되는데, 왼손잡이 내야수의 경우 1루로 공을 던지기 매우 불리하기 때문에 거의 오른손잡이만 내야에 선다. 좌투의 경우 설 수 있는 포지션은 사실상 외야 3자리와 1루수 뿐이다. 포수의 경우에도 우타자가 훨씬 많다는 특성상 2루 송구에 방해를 받게 되어 좌투가 불리하다.[56] 좌투우타인 유명한 야수로는 리키 헨더슨이 있다. 랜디 존슨과 같이 좌투우타인 투수로는 류현진이 있다. [57] 오히려 좋지 않을 수도 있다. 2009년 7월 6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상대 투수는 로이 오스왈트) 타석에서 헛스윙하다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 이유가 헛스윙할때 오른손을 너무 일찍 떼버리는 바람에 충격을 분산시키지 못해 어깨 근육이 파열된 것이라고.[58] Pujols 를 '푸홀스'로 표기해야 하는지 '푸졸스'로 표기해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진 병림픽에서 '푸졸스'를 미는 한 갤러가 한 말이었는데 나중에 뻘플화 되어 전혀 상관 없는 게시물에도 달렸다. 덤으로 그 뻘플에 대한 야갤의 응답은 그럼 Jang Moonsuk이 '항문석'이지 '장문석'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