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1. 개요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이 날에 목놓아 크게 우노라'''라는 의미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 친일파들을 규탄했다.
한편 양기탁과 베델이 공동 발행했던 신문인 대한 매일 신보도 이 사설을 게재하였다. 한글판인 '대한 매일 신보' 의 경우 사진으로 보도하였고, 영문판인 'The Korea Daily News.' 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판으로 번역해 '''게재'''하여 부당함을 알렸다. 해당 사실은 2017 수능 한국사 영역에 대한 매일 신보에 관한 문제인 14번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는 선지가 등장하여 복수 정답 처리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1. 원문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曩日(낭일)伊藤侯(이등후)가韓國(한국)에來(래)ᄒᆞᆷᄋᆡ愚我人民(우아인민)이逐逐相謂曰(축축상위왈)侯(후)ᄂᆞᆫ平日(평일)東洋三國(동양삼국)의鼎足安寧(정족안녕)을自擔周旋(자담주선)ᄒᆞ던人(인)이라今日(금일)來韓(래한)ᄒᆞᆷ이必也(필야)我國獨立(아국독립)을鞏固(공고)히 扶植(부식)ᄒᆞᆯ方略(방략)을勸告(권고)ᄒᆞ리라ᄒᆞ야自港至京(자항지경)에官民上下(관민상하)가歡迎(환영)ᄒᆞᆷ을不勝(불승)ᄒᆞ얏더니天下事(천하사)가難測者(난측자)ㅣ 多(다)ᄒᆞ도다千萬夢外(천만몽외)에'''五條件(오조건)이何(하)로自(자)ᄒᆞ야提出(제출)ᄒᆞ얏ᄂᆞᆫ고此條件(차조건)은非但(비단)我韓(아한)이라東洋三國(동양삼국)의分裂(분열)ᄒᆞᄂᆞᆫ兆漸(조점)을釀出(양출)ᄒᆞᆷ인즉伊藤侯(이등후)의原初主意(원초주의)가何(하)에在(재)ᄒᆞᆫ고雖然(수연)이나我(아)'''
'''大皇帝陛下(대황제폐하)'''[2]
의强硬(강경)ᄒᆞ신 聖意(성의)로拒絶(거절)ᄒᆞᆷ을不已(불이)ᄒᆞ셧스니該約(해약)의不成立(불성립)ᄒᆞᆷ은想像(상상)컨ᄃᆡ伊藤侯(이등후)의自知自破(자지자파)ᄒᆞᆯ바어ᄂᆞᆯ 噫(희)'''彼豚犬不若(피돈견불약)ᄒᆞᆫ 所謂(소위)我政府大臣者(아정부대신자)가榮利(영리)를希覬(희기)ᄒᆞ고假嚇(가혁)를恇劫(광겁)ᄒᆞ야逡巡然(준순연)觳觫然(곡속연)賣國(매국)의賊(적)을甘作(감작)ᄒᆞ야'''四千年(사천년)疆土(강토)와五百年(오백년) 宗社(종사)를他人(타인)에게奉獻(봉헌)ᄒᆞ고二千萬(이천만)生靈(생령)으로他人(타인)의奴隸(노예)를敺作(구작)ᄒᆞ니彼等(피등)豚犬不若(돈견불약)ᄒᆞᆫ外大(외대)朴齊純(박제순)及(급)各大臣(각대신)은足(족)히深責(심책)ᄒᆞᆯ 것이無(무)ᄒᆞ거니와名爲(명위)叅政大臣者(참정대신자)ᄂᆞᆫ 政府(정부)의首揆(수규)라但(단)以否字(이부자)로塞責(색책)ᄒᆞ야要名(요명)의資(자)를圖(도)ᄒᆞ얏던가金淸陰(김청음)의裂書哭(열서곡)도不能(불능)ᄒᆞ고鄭桐溪(정동계)의刃剚腹(인사복)도不能(불능)ᄒᆞ고偃然(언연)生存(생존)ᄒᆞ야世上(세상)에㪅立(갱립)ᄒᆞ니何面目(하면목)으로强硬(강경)ᄒᆞ신皇上陛下(황상폐하)를㪅對(갱대)ᄒᆞ며何面目(하면목)으로二千萬(이천만)同胞(동포)ᄅᆞᆯ㪅對(갱대)ᄒᆞ리오嗚乎痛矣(오호통의)며嗚乎憤矣(오호분의)라'''我(아)二千萬(이천만)爲人奴隸之同胞(위인노예지동포)여生乎(생호)아死乎(사호)아檀箕以來(단기이래)四千年(사천년)國民精神(국민정신)이一夜之間(일야지간)에猝然(졸연)滅兦而止乎(멸망이지호)아痛哉痛哉(통재통재)라同胞(동포)아同胞(동포)아'''
1.2. 영역본[3]
When it was recently made known that Marquis Ito would come to Korea our deluded people all said, with one voice, that he is the man who will be responsible for the maintenance of friendship between the three countries of the Far East (Japan, China, and Korea), and, believing that his visit to Korea was for the sole purpose of devising good plans for strictly maintaining the promised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our people, from the sea-coast to the capital, united in extending to him a hearty welcome. But oh! How difficult is it to anticipate affairs in this world. Without warning a proposal containing five clauses was laid before the Emperor, and we then saw how mistaken we were about the object of Marquis Ito's visit. However, the Emperor firmly refused to have anything to do with these proposals and Marquis Ito should then, properly, have abandoned his attempt and returned to his own country. But the Ministers of our Government, who are worse than pigs or dogs, coveting honours and advantages for themselves, and, frightened by empty threats, were trembling in every limb, and were willing to become traitors to their country and betray to Japan the integrity of a nation which has stood for 4,000 years, the foundation and honour of a dynasty 500 years old, and the rights and freedom of twenty million people. We do not wish to too deeply blame Pak Che Sun and the other Ministers, of whom, as they are little better than brute animals, too much was not to be expected, but what can be said of the Vice-Prime Minister, the chief of the Cabinet, whose early opposition to the proposals of Marquis Ito was an empty form devised to enhance his reputation with the people? Can he not now repudiate the agreement or can he not rid the world of his presence? How can he again stand before the Emperor and with what face can he ever look upon any one of his twenty million compatriots? Is it worth while for any of us to live any longer? Our people have become the slaves of others, and the spirit of a nation which has stood for 4,000 years, since the days of Tun Kun and Ke-ja has perished in a single night. Alas! fellow-countrymen. Alas!
1.3. 현대어 역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 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 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 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4]
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5]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6]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