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두영
申斗泳
1918년 ~ 1990년 3월 4일
대한민국의 전 관료이다. 본관은 평산이다. 호는 수졸(守拙)이다.
1918년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잠시 모교인 공주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충청남도청 서무과장에 임용되면서 관료로 근무하였다. 이승만 정부 후기 국무원사무국장, 국무원사무처 차장을 지냈다. 이때 공무원 공개채용제도를 도입하였고, 공무원연금법을 제정하였다.
1963년 총무처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을, 1964년 총무처차관을 지냈다. 1971년 감사원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사정담당특별보좌관으로 승진하였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감사원장을 지냈다.
이승만 정부에서 국무원 사무국장을 지낸 1958년 1월부터 1960년 4월까지 국무회의의 모든 내용을 기록한 비망록을 남겼다. 본래 국무회의는 의결내용만 기록하며 회의중의 발언은 기록에 안남는것이 각 정부마다 내려오던 관행이었으나, 신두영만은 유일하게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장관등 모든 참석자들의 발언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1958년부터 4.19 혁명 당시까지의 이승만 정부의 동향과 이승만 대통령과 장관들이 시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수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을 처형한 진보당 사건의 경우에 1958년 3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홍진기에게 사건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승만이 "조봉암 사건은 어찌되었나"라고 묻자 홍진기는 "현재 공판중이며 특무대가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제 확증이 있어 유죄라고 하면 전에는 '''증거없는것을 기소한것처럼 들린다. 외부에 말할때 주의하도록 하라'''"라고 주의를 주는 부분이 있다. 심지어 조봉암에게 1심판사가 징역 5년을 선고하자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불만을 표시하면서 '''"법관들만 무제한의 자유가 허용된다는것은 이해할수 없다.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자 홍진기가 탄핵의 방법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어렵고 임기만료자를 재임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답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 판사들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여러가지점을 생각하여 그만두었다.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일(1심판결)이 없도록 해야한다."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만약 국무회의의 결과만 기록했다면 진보당 사건에 대해서 논의했다 정도로 끝났을테지만 모든 발언을 기록한 덕분에 이승만이 조봉암에게 사형이 내려지지 않은 판결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고 심지어는 판사들을 처리하려고 했다는 행정부 수장으로선 해선 한될 소리까지 했다는게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신두영은 국무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이를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전해지며, 청와대와 정부 그리고 신두영 본인이 각각 한부씩 보관하고 있었으나,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면서 청와대, 정부 보관본은 사라지고 유일하게 신두영 본인이 보관하던것만 남아있었다가 1990년 공개되었다. 1990년에야 공개된것은 기록에 등장하는 인사들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망할때까지 기다려서 공개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