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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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내무부 장관
홍진기
洪璡基 | Hong Jin-ki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17년 3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
(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사망'''
1986년 7월 13일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본관'''
남양 홍씨 당홍계[1]
'''호'''
유민(維民)
'''재임기간'''
제7대 법무부 차관
1954년 2월 17일 ~ 1955년 10월 5일
제2대 해무청장
1955년 10월 5일 ~ 1958년 2월 20일
제9대 법무부 장관
1958년 2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제19대 내무부 장관
1960년 3월 23일 ~ 1960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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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홍성우, 어머니 이문익
'''배우자'''
김윤남
'''자녀'''
홍라희, 홍라영
아들 홍석현, 홍석조, 홍석준, 홍석규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전주지방법원 판사
제7대 법무부 차관
제2대 해무청장
제9대 내무부 장관
제19대 내무부 장관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중앙일보 대표이사
한국신문회관 이사장

'''상훈'''
금관문화훈장 추서

1. 개요
2. 일생
2.1. 일제강점기
2.2. 해방 이후
3. 가문
4. 가족 관계
5. 기타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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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제국대한민국의 관료, 법조인, 언론인으로서 중앙일보의 초대 회장, 보광그룹 창업주이다.

2. 일생



2.1. 일제강점기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그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 때 아버지가 금광사업에 실패하였고 가게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는 등 온 가족이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탁월한 성적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하였다. 그 때 그의 어머니가 학교 근처인 청량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하숙을 치면서 길거리 채소장사를 하여 홍진기의 학비를 댔다고 한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일본국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이른바 개천룡, 즉 신분수직상승의 예가 일제 하에서도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발령받기 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의 조수(조교)로 일하였는데 이 시기에 쓴 논문은 일본 학자의 호평을 받았다. 그가 쓴 논문 "주식회사의 합병에서의 교부금(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은 창씨명인 토쿠야마 신이치(德山進一) 명의로 경성제국대학 법학회 논집 제 13책 1호에 게재되었다. 이는 경성제대에서 발행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단 2명의 조선인 중 한 사례다.[2] 이후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로서 법조계에 몸담았다. 이러한 일제시대의 그의 행적은 친일 경력이 되어, 자신의 이름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겨두게 되었다.

2.2. 해방 이후


8.15 광복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법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3년 한일 회담에서 대표로 참석하여 그 유명한 구보타 망언[3]을 듣고 반박, 해명 요구를 하였다.
그러다가 1958년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하였다. 법무부에 재직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조치하고,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하기도 하였다.[4]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내무장관까지 지냈지만 1960년, 장관 재직 중 4.19 혁명을 맞았다. 이 때 시위대에 서슴지 않고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이후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감형되었고, 박정희의 특사로 소리소문없이 석방되었다.[5]
이 때부터 그는 정권에 비판적인 모습으로 변했던 듯 하다.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인이 되었으며, 1965년 중앙일보의 창간을 진두지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 핵심 기자들을 대거 빼오는 바람에 한국일보는 그 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사이가 지금도 별로 좋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홍진기는 경향신문도 폐간시킨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역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1968년에는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주식회사 동양방송의 회장까지 겸임해 매스컴센터 변모에 힘썼고, 1974년에는 두 언론사를 통합하여 '(주)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출범시켜 신문부문을 총괄했다가 1980년에 신문부문을 이종기 전무에게 승계하고 회장으로 승진하였으나, 그 해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그 외에도 1980~81년까지 한국신문회관 이사장, 1982년에는 국제신문발행인협회 집행위원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83년에는 TV브라운관 생산업체 (주)보광을 세우기도 하였다.

3. 가문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남양군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던 홍순목, 사대당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홍영식,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홍만식 등이 바로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4. 가족 관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자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이건희는 자신의 스승으로 선친 이병철 회장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는데, 홍진기에게 경영이나 정치, 법률, 경제 등 경영에 필요한 지식들을 많이 배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 25년]평생의 스승 이병철·홍진기. 아시아 경제

5. 기타


1999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유민문화재단'이 세워졌고, 2003년 서울대는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15동 1층)를 '유민홀'이라 명명했는데, 물론 여기서 '유민'은 홍진기의 호다.[6] 이 건물 5층에는 '조영래홀'도 있는데, 서로 상반되는 삶의 궤적을 살아온 두 인물의 이름이 한 건물 안에 명명되어 있어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휘닉스 제주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미술관의 이름은 홍진기의 호를 딴 것이다. 함께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함께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로도 유명하며 예전에는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라고 불렸다. 원래는 명상센터로 지은 것인데 2017년에 홍진기의 유리 공예품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면서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그에 맞는 독서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책읽기를 많이 시켰으며, 정치나 사회 이슈를 주제로 자유로운 토론을 자주 하였다고 전해진다.[7] 이것은 사위였던 이건희 회장에게까지 이어졌고, 후에 이건희는 자신의 인생 스승은 두 사람,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였다고 회고했다.
2016년 7월 홍석조를 이사장으로 하여 재단법인 홍진기법률연구재단이 설립되었다.
왕십리 쪽이 본적인 서울 토박이이다. 그것도 무려 8대조부터 내려온 진성 토박이.

6. 관련 문서


[1] 남양군파 36세손 '鎭' 항렬이다.[2] 나머지 1명은 경성대학 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이종갑으로, 그 역시 창씨명인 토요카와 쇼코(豐川鐘甲) 명의로 게재되어 있다.[3] 일본측 대표로 나온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제가 오히려 조선을 발전 시켜줬으니까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발언이었다[4] 이 때 창랑 장택상조봉암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을 폈고, 홍진기를 찾아가 도움을 약속 받았으며,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는데, 결국 조봉암이 처형되자 홍진기에게 대단히 분개했다는 뒷이야기가 존재한다.[5] 3.15 부정선거의 실행, 선거 당일의 마산 시위에 대한 경찰 발포 등의 혐의로 함께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홍진기의 전임내무장관 최인규는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홍진기는 풀려났다.[6] 홍진기의 아들인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과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의 지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 리모델링 전에는 강의실이 있었다.[7]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일가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