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호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 이름 '''
'''신병호'''
''' Sin Byung-Ho'''
''' 출생 '''
1977년 4월 26일 (47세) 제주시
''' 학력 '''
건국대학교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은퇴)
감독
1. 개요
2. 경럭
3. 클럽 기록
4. 국가대표팀 기록
5. 지도자 기록
6. 유소년 생활
7. 해외진출 시도
8. 울산과 전남 시절
9. 경남 시절과 현역 은퇴
10. 여담


1. 개요


신병호 (1977년 4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인으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K리그에서 활동하였던 스트라이커이다.

2. 경럭



3. 클럽 기록


연도
클럽
출전 (골)
2000
요코하마 F. 마리노스
0 (0)
2000
그레미우 상카렌세
0 (0)
2001
미토 홀리호크
28 (11)
2002
울산 현대 호랑이
0 (0)
2002-2005
전남 드래곤즈
88 (26)
2006
경남 FC
16 (2)
2007-2008
제주 유나이티드
10 (2)

4. 국가대표팀 기록


연도
소속
출전(골)
1999
대한민국 U-23
10 (4)
1997-2000
대한민국
2 (0)

5. 지도자 기록


연도
소속
2009
제주중학교 (코치)
2010
제주중학교

6. 유소년 생활


제주서초등학교, 제주중학교, 대기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주 출신의 프렌차이즈 스타이다. 대기고 시절, 전국체전에서 제주고교선발팀의 사상 첫 금메달 획득에 공헌한바 있다. 이 때의 활약을 계기로 건국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건국대 시절에는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에 참가하여 이동국 등과 함께 올대 스트라이커로 활동하였다. 특히 1999년 10월에는,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1차전 對 중국 U-23 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올대 스타로 급부상하기에 이르렀는데..

7. 해외진출 시도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신선수를 두고, K리그 각 구단들의 제의가 이어졌으나 신선수는 2000년 드래프트 참가 거부를 선언하고 해외진출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J리그,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중국 갑리그까지 두드렸지만 해외진출은 여의치않았고 결국 요코하마 마리노스, 브라질 그레미우 등지를 떠돌며 연습생으로만 활동하다 1년 넘는 시간을 '무적 선수'로 허비해야 했다. 결국 2001년 6월 J2리그의 미토 홀리호크에 입단하여 29경기 출장 11골을 기록한 뒤 국내 복귀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8. 울산과 전남 시절


2002년 자유계약으로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였는데, 당시 울산은 신병호 선수와 계약금 3억원, 계약기간 5년, 연봉 4800만원 등 총 5억4000만원에 달하는 호조건으로 신선수를 영입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선수는 불어난 체중과 컨디션 저하 등으로 경기력 유지에 애를 먹는 상황이었고, 결국 6개월여만에 울산 현대를 떠나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였다. 이후 전남에서는 컨디션을 끌어올리며 부활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적 후 8골을 넣어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알렸다. 활약은 이듬해 2003년에도 이어졌는데, 신입 외국인 선수 이따마르의 맹활약과 더불어 신 선수도 이회택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에서 기량을 만개하였고, 42경기에 출전해 16득점 4도움을 올려 K리그 정상급 공격 자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 전남이 브라질 특급 모따를 영입하고, 이장수 신임 감독이 전남의 사령탑에 오르자 점차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이따마르는 방출 대상으로 여겨지면서도 기회마다 득점을 곧잘 성공시켜 시즌 11득점을 올리는 모습에 신 선수는 이들의 백업 자원 수준으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다. 이후 2005년까지 부진을 이어가고 말았다.

9. 경남 시절과 현역 은퇴


결국, 2005년 부상과 부진으로 한 해 동안 불과 8경기 출전에 그치고 득점이나 도움도 올리지 못하는 미진한 모습에 전남에서 방출 대상자로 점차 여겨지게 되었고, 시즌 종료와 함께 전남을 퇴단하고 삼성 하우젠 K-리그 2006에 참가하는 신생팀 경남 FC의 창단 멤버로 박항서 감독을 따라 산토스ㆍ김도근 등의 선수와 함께 입단하였다. 여기에 경남 측은 프로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선수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이러한 기대는 신 선수에게도 이어져 창원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중국 슈퍼리그의 충칭 리판과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을 성공시켜 이에 보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에는 신예 김진용의 쾌조의 컨디션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고 말았고, 신 선수는 경기력 측면에서 노련함을 더해준 모습으로 조연에 머물러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10. 여담


  • 2년 가까운 시간을 해외진출 시도로 낭비했음에도 불구, K리그로 돌아와 정상급 기량을 발휘하였던 선수이다. 여타 해외진출 시도 후 국내무대로 리턴했던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신선수의 기량이 얼마나 탁월했던 것인가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2000년 드래프트 거부를 하지않고 K리그로 곧바로 진출했다면 더 좋은 기량을 바탕으로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승선, 해외진출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짙게 남는 선수이기도 하다.
  • 신병호 선수에게도 나름의 흑역사가 있는데, 전남 소속이었던 2002년 9월 11일 對 전북 현대 모터스 전에서 혼전 상황 중 손으로 골을 넣고도 태연하게 골 세레머니를 펼친바 있다. 이후 전북 측의 항의로 비디오 판독 결과, 신선수의 손을 맞고 골이 들어가는게 확인되면서 논란이 더욱 과열되었는데.. K리그 연맹 측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며 유야무야 넘어가버려 욕을 득뿍 먹었던바 있다.
  • 2002년 월드컵 때 폴란드와의 예선전 첫경기 1,2호골은 당시 건국대 선후배 황선홍과 유상철이 녛었다. 이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는데 그들의 뒤에는 정종덕 감독이 있었다. 정감독이 이끌던 당시에는 대학축구의 정상을 이끌었다. 당시의 주축이 황선홍, 유상철, 이영표, 현영민, 고정운, 유승관, 이상윤, 공문배, 유영록, 권우진, 신병호, 노규영등이 국가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