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허정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대한민국'''}}}
{{{-2 51대, 57대, 66대


'''클럽'''
'''전남 드래곤즈'''}}}
{{{-2 2대, 5대


'''대전 하나 시티즌 역대 대표 이사'''
최용규
(2019)

''' 허정무'''
''' (2020~)'''



'''허정무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image] '''올해의 감독상'''
'''2008년'''

'''2009년'''

'''2010년'''
니시노 아키라
(감바 오사카)

'''허정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오카다 다케시
(일본 국가대표팀)
김광민
(북한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김태희
(대한민국 U-17 여자 국가대표팀)



''' Daejeon Hana Citizen FC'''
<colbgcolor=#9b2743> ''' 이름 '''
'''허정무'''
'''許丁茂 | Huh Jung-Moo'''
''' 출생 '''
1955년[1] 1월 13일 (70세)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중동중학교
영등포공고
연세대학교
''' 병역 '''
[image] 대한민국 해병대 357기
''' 가족 '''
아내 최미나, 장녀 허화란, 차녀 허은
''' 신체 '''
174cm, AB형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공격수, 수비수[2]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 소속 '''
<colbgcolor=#9b2743> ''' 선수 '''
한국전력 축구단 (1978)
해병대 축구단 (1978~1980, 군 복무)
'''PSV 에인트호번 (1980~1983)'''
울산 현대 호랑이 (1984~1986)
''' 감독 '''
대한민국 대표팀 (1989~1990 / 트레이너)
포항제철 아톰즈 (1991~1992 / 코치)
포항제철 아톰즈 (1993~1995)
대한민국 대표팀 (1993~199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95)
'''전남 드래곤즈 (1996~1998)'''
대한민국 대표팀 (1998~2000)
대한민국 대표팀 (2004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5~2007)
'''대한민국 대표팀 (2008~2010)'''
인천 유나이티드 (2010~2012)
''' 기타 '''
대전 시티즌 (2014 / 기술자문위원)
대한축구협회 (2013~2014 / 부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2015~2019 / 부총재)
대전 하나 시티즌 (2020~ / 재단이사장)
''' 국가대표 '''
103경기 30골(대한민국 / 1974~1986)
''' 종교 '''
무종교개신교(감리교)[3]
''' 소속 정당 '''
[4]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2.3. 플레이 스타일
2.4. 기록
2.4.3. 통산 성적
2.4.3.1. 국가대표
2.4.4. 주요 개인 수상
2.4.4.1. 표로 보기
4. 해설자 경력
5. 행정가 경력
6. 차범근과의 갈등
7.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
8. 여담
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이다. 현재는 하나금융축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PSV 에인트호번 등에서 활약했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한국인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으며, 2011년까지 계약되어 있었으나, 휴식 기간을 갖기 위해 2010년 7월 2일 연임을 포기하였다. 이후 한 달 반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2012년 4월 인천 유나이티드의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였다. 2013년 3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브라질 월드컵 성적 부진으로 인해 2014년 7월 10일 대한축구협회에서 부회장 직을 사퇴했다. 본관은 양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프로 출범 이전


K리그가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축구 팬들 사이에서 '고려대학교차범근, 연세대학교의 허정무'라는 인식이 있을 만큼 일세를 풍미한 스타 선수였다. 저도의 축까 사이에선 조중연 축협 부회장과 학연으로 연결되었다고 운운하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져 있지만 정작 조중연고려대학교 출신. 뭐든지 그렇지만 까는 것도 제대로 알고 까야 먹혀드는 법이다.
하지만 의외로 축구는 늦깎이었다. 7남매중 네째였던 허정무는 경제적 사정으로[5] 고등학교를 진학할 방법이 체육특기생 밖에 없었고, 먼 친척뻘인 허윤정[6]의 권유로 중동중학교의 유판순 감독을 만난다. 하지만 축구 비경험자에 당시 153cm의 왜소한 신체 조건을 보고 단칼에 거절당했으나, 사정사정해서 중졸이지만 '''2년을 꿇고''' 다시 중동중학교에 편입해서 축구를 배운다.
강훈련으로 유명한 유판순 감독이 나중에 질려서 만류할 정도로 독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축구를 시작한 지 4년만에 U-20 대표팀에 뽑혔고, 다시 2년 뒤 국가대표에 뽑힌다. 흠좀무
영등포공고 졸업시절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웃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허정무는 연세대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려대 역시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은사인 유판순 감독을 통해 허정무를 스카웃하려 했고 아예 연세대 팀이 얼씬도 못하게 고려대의 설립자인 김성수의 고향인 고창군삼양사 쪽으로 데려놨다.[7] 그러다가 어찌저찌해서 허정무의 소재가 파악되어 연대의 김지성 감독과 이미 약속을 했던 허정무의 아버지가 직접 설득해 허정무를 데려갔고, 이번엔 연세대 쪽 사람들이 운동부 숙소인 무학사에 데려가 대학시험 보는 날까지 사람을 붙였다고..

2.1.2. PSV 에인트호번


[image]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에 자극을 받아 해병대에서 제대한 후 해외 진출을 꾀하다가,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명문 클럽인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원래는 후에 이청용이 거쳐갔던 독일의 보훔과 먼저 계약을 하기로 했으나 탄광도시라서 우중충했던 보훔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비해 밝고 평화로워 보였던 에인트호벤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에인트호번에서 활동했던 3시즌 동안 77경기에 출장해서 11골을 넣었다. 이 때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것을 감안하면 꽤 준수한 기록이다.
팀 적응기인 반년 정도 교체 멤버로 뛰다가 그 뒤로는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고, 주로 미드필더로 뛰면서 1982-1983 시즌 팀의 준우승에 기여하였고, 1983년에 계약이 만료된 후 국내로 복귀하게 되었다.
[image]
네덜란드의 전설인 요한 크루이프를 전담 마크해 인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기도 했으며[8], 세계적인 공격수 뤼트 판 니스텔로이도 그가 어렸을 적에 허정무의 활약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영상 위트레흐트의 반 하네햄[9]은 허정무의 밀착마크에 짜증나서 동양인을 비하하는 눈 찢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영상 5:10초 참고. 허정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무렵에는 네덜란드 측에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정도로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네덜란드에서의 활약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3. 울산 현대 호랑이


1983년 시즌 중 PSV와 계약이 만료되자[10][11] 귀국한 그는 현대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K리그에서 활동했으며, 1986년에 월드컵 국가대표를 지낸 뒤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2.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4년 킹스컵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게 된다. 김재한이나 조동현과 같은 장신의 중앙공격수와 함께 작고 민첩한 중앙공격수 역할로 주로 뛰었으나 팀 사정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보았다. 그러다 78년 김진국이 은퇴하면서 왼쪽 윙포워드로 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국대 주전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PSV 진출 이후로는 팀에서의 포지션에 맞춰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1985년 김정남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442에서 왼쪽 미드필더를 맡게 된다.
허정무는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려서는 흔히 그랬듯 공격수였고 주포지션은 왼쪽 윙어 내지는 공격형 미드필더. 한 때 좌정무 우범근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12] 대표팀에서 101경기에서 30득점이나 했는데 이게 과연 수비형 미드필더의 스탯인가... 자서전에 의하면 74 방콕 아시안게임 중국전 후반에 사이드백으로 내려가 뛴 것(그리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함.)이 첫 포지션 변경. 이후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며 뛰게 되었다고. 수비형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이 된 것은 PSV 이적 이후. 공격진에 너무나 뛰어난 선수가 많아 수비 포지션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비적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77경기에서 11골이나 넣었다.

2.2.1.1.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1986년 박창선, 차범근, 최순호 등과 함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국가대표로 뛰었다. 왼쪽 풀백으로 출전하였는데, 아르헨티나전에서 마라도나를 걷어찬 일화# [13]가 유명하다. 마지막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왼쪽 풀백으로 나왔다가 후반전에서는 왼쪽 미드필더로 뛰던 김주성 대신 정종수가 들어가 왼쪽 풀백을 보고 허정무가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14] 허정무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강한 승부욕과 체력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 전담 마크맨의 임무를 맡겨도 별 무리 없이 수행했다.관련한 칼럼

2.3. 플레이 스타일


'''대한민국 역대 NO.1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힌다.'''[15] 경이적인 체력과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많은 운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었다.
선수시절 큰 장점으로 멀티플레이 능력이었다. 본업인 수비형 미드필더 외에 양쪽 풀백, 양쪽 윙어, 중앙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A매치 득점을 30골이나 기록한 것이다. 대표팀에서 유상철 감독이 맡던 롤의 선구자라고 보면 될 듯하다.
사실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라 보기에는 어려운 플레이 스타일이긴 하지만 워낙 PSV에서의 활약이 인상깊게 남았기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것이다.

2.4. 기록



2.4.1. PSV 에인트호번


  • 에레디비시 준우승 1회 : 1982-83

2.4.2. 울산 현대 호랑이


  • 프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 1986

2.4.3. 통산 성적



2.4.3.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 - 17
0
0
U - 20
0
0
U - 23
0
0
A 대표
103
30
종합기록
103
30

2.4.4. 주요 개인 수상


  • 체육훈장 백마장 : 1979
  •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84
  • 체육훈장 거상장 : 1986
  •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 : 1978
  • 제10회 서울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 : 1986

2.4.4.1. 표로 보기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백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조영증
DF
정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정종수
GK
오연교

3. 지도자 경력



4. 해설자 경력


'''"슈웃!"'''

1998년 월드컵 당시 전남 감독으로 재직 중인 상태에서 SBS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KBS에서 해설을 맡았었는데[16]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vs멕시코전에서 황선홍이 골을 넣자

'''역시 방귀가 잦으면 이 나온다고요'''라는 망언을 남겼다. 그리고 깨알같은 서기철의 '''그렇습니다'''

2012년 인천 감독직에서 사퇴한 후 다시 MBC에서 해설자가 되었다.주로 지상파 국가대표 경기 해설을 하였으며, 2012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경기 해설도 맡았다.
해설자로서의 평가는 한마디로 동네 아저씨. 공격시엔 시도때도 없이 슛을 지르라고 외치고,#[17][18][19] 실점을 하면 거침없이 앙탈 혹은 짜증을 낸다.# 반면 선방이나 득점상황에는 그 누구보다 좋아한다. 런던올림픽 영국전에서 남긴 명언이 '이게 하늘의 뜻입니다'
6월 4일 월드컵 지역예선 레바논전에서는 경기 내내 이동국을 극딜하는 모습을 보였다.[20] 전술적 분석보다는 결과론적인 선수 비난이 잦다. 게다가 A매치 경기 해설에 있어서 사전 정보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 을 보이기도 했고 페루와의 경기에서 조찬호가 과감하게 돌진하다가 공을 빼앗기자 '''바보 같은 플레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축구팬들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물론 허정무의 구력이 엄청나고 지도자 경력도 길었던 만큼 완전히 무가치한 해설은 아니다. 가끔 듣다 보면 괜찮은 얘기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철저히 데이터를 조사해서 양 팀의 전술이나 경기의 흐름을 잘 짚어주는 이영표나 한준희와는 달리 허정무는 정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따라 방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본인이 명감독이라도 자료가 부족하면 경기 흐름을 잘 짚어줄 수 없는데 마치 허정무의 해설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쓸데없는 소리나 감탄사는 많이 터트리지만 경기의 흐름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설을 하지 못한다. 그래도 한 경기에 몇 번씩은 순간적인 상황해설이 좋을 때가 있는데 그뿐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호 단장을 맡으면서 MBC 해설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로 취임한 이후에는 JTBC에서 국가대항전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5년 6월 16일 JTBC에서 생중계한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미얀마전의 해설을 맡았으며, 동년에 JTBC/JTBC3 FOX Sports가 단독 중계하는 2015 동아시안컵 대회 해설진에도 합류했다. 이후 동년 10월 8일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쿠웨이트전 해설도 박찬하 위원과 함께 맡았다.

5. 행정가 경력



5.1. 대한축구협회


2012년 인천에서 사퇴한 뒤, 2013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복귀했다.
2013년 3월 7일 정몽규 축협회장이 선임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행정가의 길로 들어섰다.
2014년 7월 3일 브라질 월드컵 졸전을 펼친 홍명보 감독의 유임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유임을 발표하였다.
1주일 후, 홍명보 감독이 자진 사퇴하자 본인도 결국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1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초기에는 경기위원장을 겸임하였으나, 2016년 조긍연 경기위원장이 선임된 이후에는 부총재 역할만 하는 듯.
2017년 6월 14일 슈틸리케호가 최종예선 8차전인 카타르전에서 2:3 참패를 겪으면서 월드컵 본선 직행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15일 슈틸리케가 경질되었다. 그러면서 '''슈틸리케호 이후를 이끌 감독 후보군에 오르고 있다'''. 기사 1 기사 2 대표팀 감독을 두 번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첫 원정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지지의 근거. 다만 5년동안 현장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약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언론에서는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임과 동시에 네티즌 여론은 상당히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극과극의 대비를 이루는 후보. 하지만 신태용이나 최용수 등 젊고 유망한 감독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했다가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면 해당 감독은 책임을 뒤집어쓰고 커리어를 망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허정무나 김호곤 등 이미 감독으로서 커리어가 비교적 최근에 끝났으면서 현역 시절 지도력이 검증된 원로가 임시 감독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축구팬들은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실책 그리고 축구협회의 파벌 그리고 5년동안이나 현장을 떠나있었다는 점에서 반대하고 있다. 대신 국가대표 수석코치 출신이자 소방수로써 올림픽 8강, 청소년 월드컵 16강 등 괜찮은 성적을 내고 최근까지 대표팀을 이끌고 다양한 전술을 쓸 수 있는 신태용 감독을 원하고있는 추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신태용이 감독으로 뽑혔다. 관련 사항은 신태용호 항목에 적혀있다.

5.2. 한국프로축구연맹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 부총재 직을 역임했다.
허정무 부총재 시절 K리그1, 2 중계 확대와 유소년 시스템 구축 등에 힘써서 리그가 안정화 되는데 기여하였다.

5.3. 대전 하나 시티즌


2020시즌을 앞두고 대전 시티즌하나금융그룹에 매각되면서 재단 이사장에 부임하였다. 대전으로서는 김호에 이어 두번째로 축구선수, 감독 출신 대표이다.
2019년 여름,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였던 허정무는 하나금융그룹과 의견을 나누며 대전하나시티즌 창단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하나금융그룹이 이사장직을 권유했다고 한다.#
대전에 가기로 결정하면서 프로축구연맹에는 사의를 전했다.
허정무는 대전시에 대전 시티즌 인수 조건으로 경기장 내의 주변 시설 운영권 양도를 요청했으며, 허태정 시장을 만나 대전월드컵경기장과 덕암 축구센터 사용 권한을 하나금융이 갖고, 시설 유지 보수만 대전시설공단이 2년간 지원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21][22]
9월 황선홍 감독이 사임하였는데, 문제는 구단 고위 관계자가 드레싱룸에 들어가거나 훈련장에서 개입을 해 황 감독이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는 내부고발이 나오면서 감독 출신인 허정무가 감독의 전술 등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나왔으며, 7월 초 황 감독이 수원FC전 패배 이후 “좋은 팀이 되기 위해선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 승리를 위해 구단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대하겠다. 믿음과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좋은 팀이 될 수 없다”라며 구단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등 허정무의 구단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것과 더불어 불화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전 구단 사정을 잘 아는 축구인에 따르면, 주위에서는 FC 서울에서 실패한 지도자라는 인식 때문에 황 감독의 선임을 반대했지만 허정무 이사장이 한국 축구를 위해서라도 황선홍과 같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지도자가 명예 회복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며 황 감독을 강하게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황 감독이 이끄는 선수단은 특징 없는 축구로 내용면에서는 낙제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처음에는 여름까지 대대적인 선수 영입으로 선수단을 전폭 지원했던 허 이사장도 제자이자 후배인 황 감독에게 몇 차례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이는데 황 감독 입장에서는 그걸 구단의 월권이자 간섭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언급하면서 허정무 이사장도 황 감독에게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다만 이는 좀 걸러들어야 하는데, K리그 지도자 경력만 보자면 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2회, FA컵 준우승 2회, 더블까지 달성했던 황선홍이 허정무보다 압도적으로 위다. 인천에서 금지어 수준까지 내몰리고 결국 지도자 커리어가 끝장난 허정무가 명예회복이니 조언이니 운운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9월 18일 조민국을 감독대행 자리에 앉혔다. 일단 조민국 전력강화실장을 대행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전력강화실장은 진작 팀을 떠났고, 조민국은 황선홍이 사퇴한 뒤 공석인 전력강화실장에 앉았다'''. 즉 청주대학교 감독 조민국을 대행으로 삼는다고 하자니 모양새가 안나서 구차한 꼼수를 쓴 것. 당연히 각종 축구 커뮤니티는 발칵 뒤집어졌다.
여론은 허정무 이사장의 월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은행을 호구로 보고 막나간다며 매우 부정적이다. 관련기사
아니나 다를까 조민국 대행 체제에서 '''5경기 1무 4패'''를 기록하면서 6위로 추락, 승강 플레이오프 경쟁에서도 밀려나는 모양새다. #
김호곤 단장이 있는 수원 FC가 시민구단의 한계를 딛고 제주 유나이티드와 1위 경쟁을 하는 작금의 K리그2 판도를 볼 때, 허정무 대표이사의 무능과 책임은 명백하다.
많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전반기엔 감독의 책임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으나, 이후 불거진 감독 불화설과 월권설, 뒤이어 감독의 석연치 않는 사퇴, 석연치 않은 감독대행 임명 등 프론트의 잘못으로 보이는 모습이 너무 많아 시즌 목표 달성 실패시 그 책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11월 25일 준플레이오프에서 대전이 경남과 1:1로 비기며 K리그 승격은 실패로 돌아가면서 허정무 이사장은 축구계로부터 큰 지탄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6. 차범근과의 갈등


현역 시절부터 차범근과는 자의반 타의반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대학 때는 연세대-고려대 선수로, 해외에선 네덜란드-독일 리그로, 감독 생활도 포항-울산으로 계속해서 라이벌 비스무리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한편 둘의 관계가 악연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이 기사로 나온 적이 있으나, 직접 읽어보고 판단바람.[23]
그리고 직접적인 충돌은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감독 차범근 vs 해설자 허정무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대개 많은 사람들은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한 이후 허정무와 차범근이 언쟁했던 것만 알고 있으나 이전부터 둘의 충돌은 잦은 편이었다. 특히 월드컵 전부터 허정무는 차범근의 수비 중심의 전술은 안 된다고 계속해서 비판해왔으며 무조건 공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상황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조별 리그 1차전 멕시코전을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었는데 여기서 차범근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최용수도 정상 컨디션이 아닌지라, 김도훈을 원톱으로 하는 3-6-1 전술로 멕시코전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기자도 아닌 해설자 허정무가 불쑥 끼어들어 이런 뜬금없는 돌직구를 날리게 된다.

'''"차 감독, 만약 황선홍이 뛰고 싶다고 하면 뛰게 해 줄 겁니까?"'''

이게 사석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될 발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외신 기자들까지 다 불러놓고 진행하는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이미 감독이 황선홍의 출장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하고 그에 따르는 전술까지 발표한 상태에서 기자도 아닌 사람이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대놓고 감독을 디스하는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차범근도 이 때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이 허정무에게 이번은 당신이 잘못한 거라며 차범근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해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억지로 차범근에게 사과를 했으나 차범근은 이 사과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전개는 아시다시피...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 때 당시 타 방송국의 해설자였던 MBC의 신문선과 KBS의 이용수는 해설을 했는데, SBS의 허정무는 작정하고 경기 내내 '''다른 나라''' 전문가들처럼 차범근을 비난했다. 이미 0-5 대패로 마음이 무거웠던 시청자들이 해설은 음소거를 하거나 타 채널로 돌렸다는 경험담이 있을 정도. 이후 차범근이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나서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Round 2를 벌인 걸로 알려져 있으며, 허정무가 후임으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고 나서 밝힌 모토가 "용맹한 공격축구" 로 사실상 차범근 간접 디스. 이후 차범근의 K리그 승부조작 발언에 대해서도 허정무가 앞장서서 차범근을 비난하였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둘의 관계는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였으며 차범근이 공개적으로 허정무를 콕 찍어 지목하며 너무했다는 식으로 언급해 남보다 못한 사이로 결론되는 분위기였으나...
세월은 흘러 서로 갈등한 것도 인간적으로 싫어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축구관이 다르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허정무 본인도 처음 국대 감독 맡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차범근과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질들이 죽고 감상적이 돼서 그런지 둘은 2005년에 전격적으로 공개 화해를 했다. 당시 수원 감독이었던 차범근과 전남 감독을 새로 맡게된 허정무가 오랜만에 감독으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서로 아는 체도 안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허정무가 어찌되었건 축구계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지켜야 한다면서 수원 벤치로 찾아가 차범근에게 폴더 인사를 하고 차범근도 당시 감기 몸살로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허정무의 인사를 받고 반갑게 화답하면서 지난 앙금을 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 땐 입장이 바뀌어 허정무가 감독-차범근이 해설자였는데 당시 허정무가 아르헨티나전 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차범근은 전쟁 중에는 장수를 흔들어선 안된다며 허정무를 적극적으로 감쌌다. 아직까지도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공개적으로 언급하길 꺼리는 프랑스 월드컵 사태에서 차범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긴 인물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싸는 걸 보면 과거의 악연은 묻어둔 걸로 볼 수 있을 듯. 또한 허정무가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를 대표팀 감독 시절 다시 불러들여 주전 풀백으로 자리잡게 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최근 2013 U-20 월드컵 때도 훈련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 기사로 올라오기도 했다. #

7.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좋지 않다. 거스 히딩크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임해서 한창 삽질할 적에는 조광래 등 국내 지도자들과 더불어서 깠고, 움베르투 코엘류핌 베어백 등에게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다.
비판에 대한 이유는 이들이 코앞의 성적에 급급하고 세대교체나 유망주 발굴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코앞의 성적에 급급해서 히딩크를 영입한 건 축협이다.''' 코엘류 감독은 김호곤의 올림픽 대표팀에 지원이 쏠리는 바람에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했고, 이후 취임한 본 프레레는 몰디브 쇼크를 만회하기 위해 영입된 인사였다. 그 봉프레레가 부진하다고 쫓아내고 월드컵 1년 앞두고 부임된 사람이 딕 아드보카트였고, 그 후임을 찾지못해 허둥지둥하다 지휘봉을 맡게 된 사람이 베어백이다. 결국 외국인 지도자들이 성적에 급급하게 된 것은 축협의 근시안적인 행보 탓이다. 이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외국인 지도자들을 탓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허정무는 외국인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는데, '''박지성을 윙어로 안착시켜 키운 게 히딩크였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윙백으로 송종국을 발탁했고, 부임 초기에는 울산 수비수 서덕규를 전격 기용하기도 했으며, 월드컵 대표팀에 청소년 대표인 정조국, 여효진, , 을 훈련 파트너로 합류시켜 키우기도 했다. 거기다 부지런히 뛰는 것 밖에 못한다던 조재진을 원톱으로 발탁한 건 코엘류였고, 약관을 겨우 넘긴 김진규를 월드컵에 데려간 게 아드보카트였으며, 홍명보김태영 은퇴후 난황을 겪던 수비진에 유경렬이나 김영철 등 중견 선수들을 영입해서 안정을 꽤하기도 했다. 2007 AFC 아시안컵 졸전으로 욕먹은 베어백도 예선에서는 올대선수들을 발탁해 출전시켰다. 그리고 현재 한국 대표팀의 포백은 히딩크 감독 시절을 거쳐 베어백 시절에 완성되었다[24]

8. 여담


두시탈출 컬투쇼에 소개된 사연에 의하면 1980년대 초, 허정무가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가장 전성기에 있었던 시기에 자기 고향 면민체육대회에 출전해 다른 리(里) 주민대표팀을 능욕한 전설이 해당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경기 전 프로선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상대 쪽이 항의해서, 허정무는 하프라인을 넘으면 안된다는 조건을 걸고 시합에 참여했지만 하프라인에서 쏴도 죄다 골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체육대회가 졸지에 싸움대회가 되고 말았다고....[25]
실제로 뛰어 보면 국제 리그 선수들의 경우는 축구 좀 한다고 하는 일반인과 리듬과 템포, 몸싸움, 발재간이 차원이 다르며 중앙선에서 골을 넣을 정도의 킥력을 보유하고 있다. 빅리그 선수 정도 되면 만약 EPL 선수가 먼저 공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1:11로 뛰어도 EPL 선수에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한국 내셔널리그 선수랑 시합 하다가 그냥 대놓고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는데 그냥 튕겨나갔다고 할 정도라고……. 어떤 군대축구 대회에서는 한 팀이 영혼의 9백 수비를 하고, '''K리그 수비수 출신이 혼자 공격'''을 했는데, 나름대로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을 전부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팀이 그 혼자서 공격하는 걸 못 막아서 패했다고 한다.
이 건 비단 축구선수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프로선수가 다 이렇다. 보스턴에서 쫓겨난 채태인이 사회인 야구에서 타자로 잠깐 뛰었는데 그야말로 무쌍 찍었다(...) 그만큼 프로에서 아무리 못 한다고 해도 아마추어와의 갭은 상당히 크다.
허정무의 psv 시절에 대해 한 매체가 정리한 기사가 있다. 허정무는 결혼 5일 만에 네덜란드로 날아가 단 한 번의 연습경기 후 파격적인 대우로 팀에 입단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해병대 357기라고 한다. 인천 구단은 현빈이 인천 백령도로 발령나자 이를 이용해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배우자 최미나(본명은 최종숙)는 1970년대 후반 동양방송에서 MC로 활동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스타였다. 오히려 결혼 당시에는 최미나가 결혼하기에 아깝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다고. 그리고 허정무 슬하에 두 딸이 있는데, 방송에 출연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최근 허싱와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6년 전남 감독 시절 경기 전 악수를 하면 진다는 징크스가 있던 고재욱 감독이 이끌던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고재욱 감독이 징크스 때문에 악수를 거부하고 뒷짐을 지자 몰래 뒤에서 따라와서 고재욱 감독의 손을 잡아 억지로 악수를 했다고 한다. 결과는 전남의 3-2 승리, 그러니깐 울산의 패배. 1 2 토요미스테리에 가끔씩 재미난 이야기가 나올 때도 나온 이야기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SBS 축구 해설위원으로 참여했는데,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마르세이유에 도착했을 때 한때의 네덜란드 응원단들이 몰려와 한국 중계진들을 향해 욕설과 야유를 퍼붓자 그들을 향해 네덜란드어로 맞욕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 혹시 융(Jung)[26]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2016년 3월 13일 새누리당 비례대표 신청서를 제출하며 뉴스에 올랐다. 이로써 이에리사, 이만기, 조훈현에 이어 20대 총선에 참가하는 네 번째 새누리당측 스포츠 유명 인사가 되었다. 2016년 3월 22일, 새누리당 비례대표 32번으로 공천을 받음으로써 20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뱃지를 달 확률이 사실상 희박해졌고[27], 23일 비례대표에서 사퇴했다. 특별히 정치적 언행을 한 적은 별로 없지만 호남계 유명인으로는 드물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가 박지원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고향은 같고 허정무가 박지원의 명예 박사학위 수여식 때 참석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다. 한편 박지원이 2016년에 입당한 국민의당을 창당한 천정배허정무 영입을 고려한 적도 있다. 다만 본인이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러온 K리그 경기는 항상 무승부로 끝난다는 속설이 있다.
대표팀 감독 시절 부친상을 당했는데 한일전에서 패했다. 그당시 일부 무개념 악플러의 '그러니까 니 애비가 뒈지지'라는 악플들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현재까지도 인터넷 댓글을 못 본다고.
공한증을 깨버린 감독.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과 한국 축구는 한국이 전부 승리해서 중국에 공한증(恐韓症), 즉 한국과 경기가 공포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쓰였으나, 2010년 동아시안컵에서 0-3으로 경기결과, 내용, 전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공한증이 깨졌다. 당시 허정무는 중국전 패배는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고, 중국선수들은 기량이 좋았고, 우리 선수는 저조했다고 인터뷰해 책임회피라고 공분을 샀다.
중국에 첫 패배를 당한 감독이자, 슈틸리케와 함께 중국에 패배를 당한 유이한 감독이다.
허정무 FA컵 우승 후 ‘음주방송’ 논란

9.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1953년 11월 13일 생. #[2] 과거 선수시절 센터백,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다 뛰었었다.[3] 반포동에 있는 남산감리교회에 출석한다. 신앙은 운동을 위해 중학교전학가게 된 과정에서 서울 학교 친구들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고 한다.[4] 과거 새누리당 비례대표 신청한 적 있었고 32번을 받자 사퇴했다. 2020년 현재도 당적은 유지하는 것으로 추정.[5] 개인의 가정사가 아니라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사정이 그랬다. 장남, 그것도 신동 소리는 들어야 공부하라고 대학을 보냈고 보통은 상고를 나와 고졸로 은행원이 되는 것이 출세였던 시대였다. 하물며 차남부터는 중졸도 감지덕지, 곧장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6] 1960년대 국가대표를 지냈고 홍콩 세미프로에 진출했던 축구 선수다.[7] 참고로 이때 함께 있었던 선수가 축구선수는 황재만, 야구선수김용희였다. [8] 이때 크루이프는 팔꿈치로 허정무의 코를 박살낸적도 있다(...) 당연히 팬들, 언론들한테도 비난을 받았고 왜 그랬냐는 질문이 나왔을때 '''"훌륭한 선수니까."'''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 [9] 70년대 네덜란드를 빛낸 레전드 였으며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하였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는등 화려한 실력을 뽐낸 선수 였다. 특유의 드리블과 제공권이 압권이었고 일반적인 패스를 뛰어넘는 중장거리 패스가 정확성을 가미할 만큼 일품이어서 아직도 네덜란드 역대 레전드에 뽑히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대충 전문용어로 설명하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여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10] PSV에서 3년만 활약하고 돌아온 이유는 아내의 향수병이 심했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더 뛰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타향살이에 지친 아내의 뜻을 존중했다. 마침 83년부터 K리그가 출범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11] 만약 1년만 더 있었다면...전설의 거스 히딩크와 함께 했을 수도...선수와 코치진으로 말이다. 히딩크 감독은 1984년에 PSV 에인트호번의 지도자로 들어왔다.[12] 원조는 좌진국 우범근이고 이게 더 유명했다.[13] 실제로는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냅다 걷어찬건 아니고, 정당하게 볼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의도적인 반칙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의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수비수 세명을 제끼던 마라도나를 깐 거라 관중들에게 야유를 들었다. 그래서, 반칙 장면을 자세히 보면 지금 기준으론 퇴장을 줘도 할 말이 없던 장면인데 경고도 안 받았다. 사실, 당시에 허정무만 이런 게 아니라 마라도나와 매치업된 수비수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다 이랬다.[14] 이탈리아전에서 대한민국은 2-3으로 졌다. 1:3 에서 터진 만회골... 첫 번째 골(1:1 을 만든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최순호다. 각각 대한민국의 월드컵 경기 3번째와 4번째 득점이다.[15] 기성용은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보다는 후방 플레이메이커 or 중앙 미드필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전형적 수비형 미드필더 선수로는 김남일, 김정우 등이 있다.[16] 2002년 당시 해설자로서는 부진했다. 경쟁사인 MBC는 차범근, SBS는 신문선이었다. KBS는 허정무 단독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이상철도 불렀고, 공동해설자로 최수종을 옆에 앉혀놓았으며, 폴란드전 한정으로 고종수가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17] 대표팀 선수들이 슈팅을 너무 아끼고 있으니 더 잦은 슈팅을 해달라고 조언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의 철학에 맞게 해설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게 지나쳤는데, 공이 골라인에 걸쳐있는데 슛을 외치는건 기본이고 아예 하프라인 조금 넘은 시점에서 무작정 슛을 외치거나 심지어 공이 밖으로 나갔다는데도 슛을 외치기도 한다.[18] 이 "슛!"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묘하게 중독성 있어 역대 해설위원 중 '''가장 슛을 찰지게 외치는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다(...)[19] 동영상이 거의 웃음참기 수준이다. 우울할 때 댓글을 읽으며 보면 정말 좋다.[20] 이동국은 허정무가 2002년을 대비한다고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겸임할 때,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서 동시에 소집하면서 뼛골까지 빨아먹은 선수였다. 특히 허정무가 아시안컵 3위를 할 때 이동국이 대회 득점왕을 먹으며 수훈갑 역할을 했는데 이 때 이동국은 허정무가 혹사시킬 정도로 출전 시간을 늘리는 바람에 대회 내내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를 뛰었다.[21] 허정무가 선수 시절 처음 네덜란드에 진출했을 때 경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네덜란드 축구장의 경우 그라운드만 덩그러니 있는 한국과 달리 레스토랑을 비롯해 마트 등 여러 상업시설이 있었으며, 경기장은 축구 경기가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즐기는 곳이었다고 한다.[22] 영화관과 대형마트가 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프로축구장은 경기가 없으면 텅텅 비는게 현실이다.[23] 첨언하자면 대강 허정무와 차범근의 현역 시절 둘을 촬영하기로 했는데 차범근의 아내가 이를 펑크내고 허정무를 깎아내렸다..라는 기사이다. 다만 이 건에 대해서는 오직 저 기사 하나에서만 언급되고 두 선수 사이의 공식적인 언급도 없으며 댓글에도 나오듯이 기레기의 농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차범근이 여태 쌓아온 인품을 보면 이유 없이 허정무를 깎아내려 문제를 만들 필요도 없고 더욱이 한국에서 서로 귀한 해외파 선수들끼리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었다. 여러 면에서 살펴봐도 근거나 타당성이 상당히 부족한데다 느닷없이 2007년에 나온 기사라는 것 역시 신빙성이 의심된다.[24] 히딩크 감독은 3백과 4백을 번갈아 썼고, 코엘류나 아드보카트도 4백 체제 안착을 시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경기에서는 3백과 3-4-3전술을 사용했다. 4-5-1과 4-2-3-1 같은 전술이 한국대표팀에 안착한 건 베어백 시절 부터다.[25] 생각해 보면 학교 운동장일 텐데 정식 축구장과 비교하면 규격이 상당히 작은 경우가 많아 아마도 정식 축구장에서 말하는 중앙선은 아니었을 것이다.[26] 허정무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을 당시 불렸던 별칭[27] 지난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당선자는 25명이었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의 의석수가 줄면서 17~18, 많게는 20번를 안정권으로 보고있다. 실제로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를 당해 비례대표는 17번까지 당선되었다. 18번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