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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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Gimpo Football Club
이름
고정운
高正云 | Ko Jeong-Woon
출생
1966년 6월 27일 (57세) /
대한민국 전라북도 완주군
국적
대한민국
신체
177cm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1d8b44> 선수
[image] 일화 천마 축구단/천안 일화 천마(1989~1996)
[image] 세레소 오사카(1997~1998)
[image] 포항 스틸러스(1998~2001)
감독
선문대학교(2003)
전남 드래곤즈(2004 / 코치)
FC 서울(2005~2006 / 코치)
성남 일화 천마(2008 / 유소년코치)
풍생고등학교(2010~2011)
FC 안양(2018)
김포 FC(2020~)
국가대표
77경기 10골(대한민국 / 1989~199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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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건국대학교 학사
가족
딸 고나래, 아들 고태규[12]
종교
불교

1. 개요
2. 선수시절
2.1. 클럽
2.2. 국가대표
3. 우승
4. 은퇴 이후
4.1. 지도자
4.1.1. 초기
4.1.2. FC 안양 감독
4.2. 해설자
5. 수상 기록
5.1. 표로 보기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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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 해설가이다. 2020년부터 K3리그 참가팀 김포 FC의 감독을 맡고있다.
성남 일화 천마K리그의 전설로 통한다. 현역시절 빠른 움직임 덕분에 '적토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2. 선수시절



2.1. 클럽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으로 이리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9년 일화 천마에 입단하였다. 입단 첫해 주전자리를 꿰차며 31경기 4골 8도움을 기록하며 그해 신인왕에 올랐다. 왼쪽 측면에서 저돌적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흡사 적토마를 연상케 하였고, 그의 별명이 되었다. 일화에서 9시즌을 보내며 프로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하였다.
1991년에는 40경기에 출장해 13골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득점 커리어에서 최고 기록을 세웠고, 그 해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94 시즌은 최고 전성기였다. 21경기에 출장해 4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작년 시즌에 뒤이은 팀의 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그 해 리그 MVP와 도움왕, 베스트 일레븐을 차지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95년과 1999년에도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되는 등 그의 활약은 꾸준하였다.

199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세레소 오사카에서 2시즌 동안 29경기 3골을 기록하였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며 국내로 복귀하였다. 포항에서 첫 시즌인 1998년 16경기에 출장해 5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특히 9월 5일 역대 최초로 40-40 클럽(40골 40도움)에 가입하는 대기록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999년에도 21경기 9골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활약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출장기간이 줄어 2000년에는 1경기도 출장하지 못하였고[1] 2001년에도 4경기 출장에 그치게 되었고, 8월 5일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2.2. 국가대표


대표팀에서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대학교 재학기간 내내 단련한 런닝 크로스는 대표팀 역대 측면자원을 통틀어서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했다. 대표팀 후배 중에선 설기현 정도를 제외하면 비견될만한 선수가 없다.
1989년 5월 23일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예선 싱가포르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어 10번을 달고 조별리그 전경기에 풀 타임 출전하였다. 미국 월드컵 당시 기존의 장점이었던 전진 돌파력에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크게 향상된 모습으로 스페인전에서 상대팀의 핵심 수비수였던 미겔 앙헬 나달[2]을 퇴장시키기도 하는 등 예선 3경기에서 전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으며, 2골을 넣은 홍명보와 함께 해외진출이 가장 유력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3] 특히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독일의 우측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는데, 골에 가까운 슈팅 두차례 포함 [4] 끊임없는 돌파, 크로스를 작렬시키며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후 활약을 이어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결국 소속팀 일화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국대 에이스로 쌓은 입지로, 한국인 최초 K리그 출신 J리거로[5]세레소 오사카에 영입된다.
이후 나이가 들며 조금씩 하향세를 탔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엔트리에서는 제외되었다. 사실 차범근호의 기본적인 골격은 고정운과 서정원을 양 날개로 두고 백업으로 이상윤과 김대의를 사정에 따라 교대로 기용하는 것이었는데, 2차전인 우즈베키스탄전까지도 사실 고정운은 평소처럼 상대 측면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하며 거의 골에 가까운 슈팅들을 뿜어냈으나, 하필 그의 백업인 이상윤이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존재감이 묻혔고, 이후 3차전인 한일전에서의 역대급 실책으로 인해, 이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내내 뭐에 씌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당시 지역예선에서 최용수 다음가는 맹활약을 한, 고정운의 대체자원인 이상윤 의 상승세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다. 상술한 1997년 9월 28일 한일전 당시 아군진영으로 공을 몰고가다가 빼앗기면서 일본의 미드필더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한마디로 원조 역주행(...).[6]
사실 당시 장면을 되돌아보면 고정운의 실수 이후에 수비진이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김병지의 머리 위를 넘긴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로빙슛이 워낙 절묘하기도 했기에 실점 장면이 완전히 고정운만의 잘못이라 하긴 뭐하지만, 당시 경기가 하필이면 한일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평가전도 아닌 월드컵 최종 예선이라는 중요한 경기였다는 점에서 많이 까였다. 그나마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역전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패하거나 비겼어도 두고두고 씹힐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국대에서 에이스급이었던 고정운은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나이가 이미 32세에 들어서 노장축에 들기도 했지만 도쿄 대첩에서의 저 실수의 여파때문에 98년 월드컵에서도 낙마했다.[7]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성기가 짧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의 임팩트 있는 모습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다.

3. 우승


  • 성남 FC (1989 ~ 1996)
    • K리그 1 : 1993 , 1994 , 1995
    • K리그 리그컵 : 1992
    • AFC 챔피언스리그 : 1995
    • 아시안 슈퍼컵 : 1996
    • 아프로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 1996

4. 은퇴 이후



4.1. 지도자



4.1.1. 초기


은퇴 이후 2003년 선문대학교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2004년 전남 드래곤즈의 코치직을 맡았고, 2005년부터 2006년까지 FC 서울의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8년 성남 일화 천마의 유소년코치를 맡았다가 성남 일화의 U-18팀으로 운영하던 풍생고등학교 감독으로 2010년 부임해서 다음해인 2011년까지 지냈다. 2012년 풍생고에 역시 성남 출신인 김우재 감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5년 호원대학교 스포츠학부 교수가 되었다.

4.1.2. FC 안양 감독


[image]
2017년 FC 안양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부임 후 데뷔 경기인 부천 FC 1995와의 경기컵 대회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성공적인 데뷔 경기를 치렀다.
[image]
하지만 가정폭력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데다, 과거 연고이전 문제로 안양팬들에게 원수 취급 받는 FC 서울 선수인 심우연을 다이렉트로 영입하면서 논란이 일었고[8] , 안양팬들은 시즌 시작도 전부터 고정운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안좋은 여론을 의식했는지 심우연은 안양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논란이 될만한 선수를 영입하려했다는 점에 있어서 팬들의 비난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팀을 '원(one)팀' 으로 만들겠다면서 선수들에게 튀는 머리나 튀는 등번호를 금지한다며 77번, 99번, 100번 같은 번호는 달지 말라고 했고, 배번을 1번~36번으로 제한하는 등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선수단으로 관리했다. 이로 인해 쭉 77번만 달아오던 김원민은 32번을 달아야 했고, 팀에서 고참에 속하는 박성진과 김민식은 35번과 36번이라는 어색한 등번호를 달아야했다. #
그런디 성적만 좋다면 카리스마라고 인정받을만도 했는데, 추후 경기들 때문에 튀는 외모/등번호 금지령은 꽉막힌 꼰대짓이 되어버렸다. 감독 데뷔전인 2018 K리그2 광주와의 개막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두었다. 하지만 개막 이후 11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을 세우며 리그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채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있다.
5월 20일 광주 FC전을 통해 겨우 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양 팬들은 광주 FC 전부터 임은주 및 고정운 사퇴 전 까지 응원 전면 중단을 선언한 상태라 승리했음에도 고정운은 사퇴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다. 2015년 18경기 무승 당시에도 이우형 감독 사퇴/및 촉구나 응원 중단과 같은 강수는 두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응원하던 안양 서포터가 응원을 중단하고 사퇴 압박을 한다는걸 보면 구단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 수 있다.
이후 11경기[9] 에서 6승 2무 3패 20득점 14실점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시즌 초반 11경기 무승하던 안양이 맞나 싶을정도로 좋은 경기력과 성적을 거두고 있다.
시즌 초반과는 달리 점점 전체적인 조직력이 다져지고 전술이 생기며 시즌 초반과는 확실히 달라진 경기력을 보이자, 고정운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안양 팬들은 응원 재개 시점을 임은주 사퇴 후로 변경했다.
그러나, 약속한 11경기가 잘 지나간 뒤, 귀신같이 경기력이 다시 개판이 됐다. 전체적으로 잘 다져졌던 조직력은 뭐에 홀린 것 마냥 도로 무너져버렸고, 잘 통하던 전술이 안 먹히기 시작했는데도 한가지 전술만 고집하는 고정운 감독에다가, 선수들은 이전 11경기에서 보여주던 투지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후 임은주가 사퇴하고 난 후 첫 경기, 1위 아산 무궁화 전에서 지난 경기 개판이였던건 또 어디로 가고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그동안 한번도 이기지 못한 아산을 무려 3-0이라는 스코어로 박살낸다. 역대 전적(1무 5패 안양 열세)과 1위와 9위에 대결이였다는 것과 3경기 연속 무득점이였다는걸 생각하면 놀라울 수준. 그리고 부천 FC 1995를 상대로 또 3-1로 이기고, 1위인 성남과 1-1로 비기고 수원 FC또 3-1로 이기며 3년만에 수원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단장 사퇴 이후 3승 1무 10득점 3실점을 기록하는걸 보아 정말 단장 사퇴 버프가 실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마지막 홈 경기에서 부산 아이파크에 1-2로 패한 뒤 이어지는 원정 경기에서 3연승을 달렸다. 그동안 원정 경기에서 1승만을 거둔걸 생각하면.. 흠좀무.
하지만 대전 시티즌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0으로 이겨가다가 내리 두 골을 허용하며 무승부를 거두며 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면서 재계약에 실패,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1.3. 김포 FC 감독


2020시즌을 앞두고 새로 개편된 K3리그 참가팀 김포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팀은 첫 시즌에 16개팀중 리그 8위를 기록하면서 정확히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쳤다.

4.2. 해설자


슈띵을 해야지 댑니다

그마만큼 몸싸움이 강한 리그고든요

2014년 SPOTV해설자로 데뷔한 이후 K리그 클래식 해설을 맡고 있다. 해설 스타일은 한마디로 축구판 모두까기 인형. 야구중계에 이순철이 있다면 축구중계에 고정운이 있다!
같은 선수 출신인데 이런 소소한 단점까지 들춰내고 지적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깐다. 못하는 플레이도 까고 잘 하는 플레이도 깐다. 단순히 선수만 까면 또 몰라도 감독도 깐다. 사전 구상 미스, 전술 미스, 선수 교체 미스, 실시간 경기 운영 미스..... 동료 선후배 그딴거 없다. 못하면 가차없이 깐다. 선수를 비판할 때 선수가 고정운 해설위원 선수시절 만큼 못하면 비판한다.
결국, 문제는 고정운 해설위원이 평범한 선수가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상당히 레전드급 수준의 선수였다는 것이다. 특히, 공격수의 기준점이 해설위원 본인이니 안 까이기가 힘들다.
다만 원조 모두까기 인형과 다른 점이라면 "이게 다 형님이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거다." 하는 티를 팍팍낸다는 것이다. 즉, 방송 초보답게 해설자의 객관성보다는 지도자의 주관이 담뿍 담긴 지적이다. 때문에 팬들은 '날방송 레벨이라 거북하다'는 쪽과 '식상한 해설보다 낫다'는 쪽으로 호불호가 확연히 갈린다.
또한, 잘한 플레이가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크게 칭찬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설 내용을 보면 고정운 본인의 축구철학은 점유율 축구인듯 한데, 고전적인 킥 앤 러쉬나 영혼의 텐백 전술도 제대로 해내면 잘한다고 칭찬한다(...) 일례로 2015년 5월 30일 포항과 대전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대전이 일찌감치 텐백 잠그기를 시도하고 포항이 수비벽을 뚫지 못하고 고전했는데[10] 몇번이나 반복해서 초조한 마음에 자잘한 실수가 많았던 포항 선수들을 까고 반대로 포항의 파상공세를 악착같이 막아내는 대전의 수비라인을 극찬했다.
특유의 말투 덕분에 호불호가 다소 갈린다. 방송용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진 음색이나 말투와는 제법 거리가 있으며 어휘선택도 부자연스럽다. '역시', '~거든요'를 즐겨 사용하고 '그...', '저...'하며 말을 자주 질질 끄는 편이라 답답하다고 느끼기도 시청자들도 많다. 그래도 듣고 있다 보면 묘한 중독성이 있다고. 또한 일반 상식도 부족한 편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면 2017년까지도 울산을 직할시라고 부른다던가.[11]
FC 안양의 감독으로 내정된 후 그는 상주에서 있었던 상주와 부산의 승강 PO 2차전 중계의 해설을 맡아 승격 팀 최초의 클래식 잔류라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5. 수상 기록



5.1. 표로 보기


[image] 신인왕
1988년

1989년

1990년
황보관
(유공 코끼리)

고정운
(일화 천마)

송주석
(현대 호랑이)
[image] MVP
1993년

1994년

1995년
이상윤
(일화 천마)

고정운
(일화 천마)

신태용
(일화 천마)
[image] 도움왕
1993년

1994년

1995년
윤상철
(LG 치타스)

고정운
(일화 천마)

아미르 텔리고비치
(대우 로얄즈)
199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기근
FW
고정운
MF
김현석
MF
이영진
MF
김주성
MF
최강희
MF
이상윤
DF
정용환
DF
박현용
DF
테드
GK
김풍주
199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윤상철
FW
라데
FW
김경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황보관
DF
안익수
DF
유상철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1995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황선홍
FW
노상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김현석
MF
김판근
MF
아미르
DF
최영일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6. 관련 문서



[1] 정확히 말하자면 음주운전으로 대형마트의 입구를 들이받서이다. 새벽시간이라 인명피해는 없었다.[2] 테니스선수 라파엘 나달의 삼촌이다.[3] 당시 레버쿠젠에서 눈독을 들였다는 소문의 진위가 20년 넘게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2018년말 엠스플과의 인터뷰에서 고정운 본인이 월드컵 직후 실제로 레버쿠젠에서 오퍼가 왔고 개인합의까지 완료했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기사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당시에는 에이전트가 존재하지 않아서 차범근을 통해 오퍼가 왔으며(같은 시기 홍명보는 대표팀 기술고민이었던 비쇼베츠를 통해 오퍼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가서 협상을 벌였고 이적료 5억, 연봉 2억5천에 합의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구단에서 보내주지 않았다고(당시 모든 종목에서 구단은 그야말로 갑 중의 갑이었다). 너무 헐값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나 레버쿠젠의 오퍼가 있었던 1994년 당시 한국 프로축구 최고연봉은 김주성의 8천4백만원이었다. 참고로 프로야구는 선동열의 1억3천만원이 최고연봉이었으며,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억대연봉자는 1995년 홍명보와 고정운이 각각 1억과 1억5백만원을 받으며 탄생했다. 어쨌든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현재 K리그 최고연봉이 15억 정도 하는 것으로 볼 때 마냥 적은 금액은 아니었던 셈. 더군다나 그 때는 한국축구나 K리그의 위상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후 잉글랜드 모구단에서도 접촉하여 거의 성사직전까지 갔다가 일화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거절하여 틀어진 건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4] 그 중 하나는 당시 독일 GK 보도 일그너가 그야말로 가까스로 쳐냈다.[5] 최초의 한국인 J리거는 노정윤이다. 노정윤은 대학 졸업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바로 일본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K리그 출신은 아니다.[6] 설기현과 고정운 두선수가 모두 런닝 크로스가 대표팀 역대급으로 정확하다는점에서도 더욱 비슷하다...[7]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저건 웬 패스인가요?" "이상한 짓(...)을 했어요" 라고 대놓고 비난했다.[8] FC 안양 초대 단장은 "서울에 있는 '그 팀'과의 직접적인 교류(즉, 서울에서 안양으로, 안양에서 서울로 이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라고 약속했지만 고정운이 그것을 깨버린 것이다.[9] 5월 20일 광주전 포함, FA컵 제외[10] 경기는 후반 추가시간도 다 끝나고 마지막 공격에서 극장골이 나오면서 포항이 2:1로 역전승[11] 여담으로 울산은 직할시였던 적이 없었다. 직할시는 1995년 폐지되고 광역시로 전환되었고,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것은 2년 뒤인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