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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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鉉謨
1894년 1월 8일[1] ~ 1975년 1월 29일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2] , 자는 윤국(允局), 호는 해관(海觀)이다.#
1894년 황해도 연백군 봉북면 소성리(현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해주 연흥학교·경신학교·황해도도립농학교·중앙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 등에서 수학하였으나 모두 3학년 때 중퇴하였으며, 서북학회회관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일합방 후 1917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인국민회에 가입, 산하 클레몬드청년훈련소를 수료하고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1923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테네시에 있는 링컨메모리얼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캔사스 클라크상업학교와 뉴저지 라이더대학 경제과를 차례로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상무이사를 역임하였고 《국사강의록(國史講義錄)》을 발간하는 한편,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상무로 있으면서 조선어학회에 참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 및 표준어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1년 석방될 때까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이듬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재정위원, 한국민주당 중앙상임집행위원, 국민의회 황해도대의원 등 정치활동 및 도산선생기념사업협회 이사, 한중협회와 한미협회의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에도 종사하였다. 생업으로는 출판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 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서 경기도 연백군 을 선거구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제헌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회재정경제위원회 제1분과 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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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鉉謨
1894년 1월 8일[1] ~ 1975년 1월 29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2] , 자는 윤국(允局), 호는 해관(海觀)이다.#
2. 생애
1894년 황해도 연백군 봉북면 소성리(현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해주 연흥학교·경신학교·황해도도립농학교·중앙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 등에서 수학하였으나 모두 3학년 때 중퇴하였으며, 서북학회회관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일합방 후 1917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인국민회에 가입, 산하 클레몬드청년훈련소를 수료하고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1923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테네시에 있는 링컨메모리얼 대학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캔사스 클라크상업학교와 뉴저지 라이더대학 경제과를 차례로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상무이사를 역임하였고 《국사강의록(國史講義錄)》을 발간하는 한편,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상무로 있으면서 조선어학회에 참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 및 표준어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1년 석방될 때까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이듬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재정위원, 한국민주당 중앙상임집행위원, 국민의회 황해도대의원 등 정치활동 및 도산선생기념사업협회 이사, 한중협회와 한미협회의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에도 종사하였다. 생업으로는 출판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 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서 경기도 연백군 을 선거구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제헌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회재정경제위원회 제1분과 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