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군

 



연안군


延安郡 / Yŏnan County
1. 개요
2. 역사
3. 지리
4. 교통
5. 대한민국과 연안군


1. 개요


황해남도의 연백평야 서쪽에 있는 군. 동쪽으로는 배천군, 서쪽으로는 청단군, 북쪽으로는 평산군과 접해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해와 접해있다.

2. 역사


삼국시대 고구려가 차지한 후 동삼홀군(冬彡忽郡)을 설치했다.
신라가 차지한 뒤 신라 경덕왕이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염주(鹽州)였다.
조선시대 때 연안도호부였고 1895년에 연안군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1914년에 배천군과 합쳐졌으며, 두 군의 앞글자를 따서 연백군이 되었다. 8.15 광복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군 대부분의 지역이 경기도 연백군에 속해 남한지역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전지역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1952년에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분할되었다. 휴전선이 그어진 후 이 지역은 주민들의 출신성분이 복잡하다고 판단하여 신해방지구(특별감시대상지역)으로 지정하였고, 주민들에 대한 통제감시를 강화했다.
임진왜란 이전 연안부사로 있었던 신각[1]이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조헌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곳의 성곽과 방어시설을 보수하였고, 이후 이정암이 이를 이용하여 의병들을 이끌고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 5,000여 명의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연안성을 사수하고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결과 황해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3. 지리


군의 상당수 지역이 연백평야에 해당한다.

4. 교통


도로는 해주 배천간 2급도로(대한민국 기준으로는 50번 국도)가 동서로 지나간다. 철도는 토해선이 지나갔으나 북한에 의해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연안역이 있다.

5. 대한민국과 연안군


8.15 광복 이후 6.25 전쟁 전까지 38선 이남의 연안군 지역은 대한민국의 실효영토였으며 경기도 연백군[2]에 속해 있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와 거리상 매우 가깝다. 그래서 연백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하기도 했다. 통일 후에는 교동도와 다리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국토개발계획에 의하면 서해안고속도로가 교동도를 지나 연안군으로 연장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임진왜란에서 육지에서의 첫 승리인 양주 해유령 전투의 주역.[2] 1952년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남연백군이라고 불렀다. 38선 책정 후 북한은 38선 이북의 연백군과 평산군 일부를 합쳐 연백군을 따로 설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