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성지는 1831년 12월 18일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심하(沈鍜)와 어머니 남평 문씨 문석구(文錫龜)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기골이 준수하고 머리가 총명했다고 한다. 9살 때 어머니의 상을 엄숙하고 성실하게 치렀으며, 11살 때 처음 글을 배우면서 스스로 깨닫고 명확하게 알아 당나라 및 송나라 시대의 문필가들의 서적과 이백, 두보의 시를 암송했다고 한다.
심성지는 18살 때 둔와(遯窩) 유양흠(柳養欽)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는 중용을 읽던 중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구절에 마음이 동하게 된다. '소덕'이란 사소한 덕, 모든 존재의 바탕에 깔려 있는 덕성과 마음을 뜻하고, ‘대덕’이란 소덕이 모여 이루는 만물의 큰 인덕을 뜻한다. 즉 '소덕천류 대덕돈화'란, 소덕은 작은 냇물의 흐름과 같지만 본류에 모여 넓고 큰 덕을 이루면 만물을 단단하게 변화시킨다는 의미다. 심성지는 이 구절의 '소류(小流)' 두 글자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리고 훗날 거처하는 곳을 소류정사(小流精舍)라고 이름 지었다.
1859년에는 계모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그는 슬픔 속에서 3년 상을 치른 후 문을 닫고 학문에 열중했다. 이 무렵 심성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게 되는데 초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지만 회시에서 실패한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 독서에 전념했다. 그는 비록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역학(易學)과 심성론(心性論)을 연구해 당대에 유학을 통달한 선비로 명성이 높았다. 1883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을 치르고 묘소 근처에 여막(廬幕)을 지어 조석으로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고종 28년인 1888년에 그의 학행이 조정에 알려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894년에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발발하자, 1896년 초 안동의진의 소모장 류시연(柳時淵)이 3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들어와 청송의 무기고(武器庫)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에 청송의 유림에서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청송향교에 모인 유림 200여 명은 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의병장(義兵將)으로 심성지를 추대했다. 당시 66세의 고령이었던 심성지는 향중(鄕中)의 뜻에 따라 청송의병장을 수임했다.
청송의진은 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에 지휘부를 두었으며 객사 앞 용전천 백사장에서 훈련에 들어갔다. 동시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해 군량미를 모았다. 또한 참모진을 구성했는데, 중군장에 김대락, 우익장에 남두희, 소모장에 서효신(徐孝信), 사병도총(司兵都摠)에 남승철 등을 임명해 진용을 갖췄다. 이때 심성지의 장손 심능찬(沈能璨)은 부친을 도와 군관(軍官)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심능찬은 의병을 사칭해 민폐를 끼치는 자들을 응징하기도 했다.
심성지는 의병을 일으킨 후 주변의 안동, 진보, 영양, 의성, 영덕 등의 의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남하한 김하락의 이천의진 등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연합부대를 편성해 활동했다. 그러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해산령을 내리면서, 그는 5월25일 본진을 해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진을 소규모로 분산해 유사시 서로 조응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았고, 면군 체제 하에서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후 청송의진은 면단위 출진소를 기반으로 경주·흥해·영덕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7월 하순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출전 중에 마평(馬坪,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의 화전등(花田嶝)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고 패전했다. 이후 관군의 추격을 받던 청송의진은 끝내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했다.
의병을 해산시킨 뒤, 심성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류정에 은거했다. 장자의 '동서명(東西銘)'과 주자의 '거가요훈(居家要訓)'을 자리 오른쪽에 내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보았다고 한다. 스스로의 학문에 정진하는 가운데에도 수십 명의 문하들에게 도를 강학하고 학문을 논하며 교분을 돈독히 유지했다. 심성지는 강론을 마치면 항상 단정히 앉아 깊이 침잠(沈潛)하며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고 한다.
1904년 11월 12일, 심성지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심성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청송 화전등에 위치한 항일의병기념관에는 심성지가 쓴 '강병론'과 후손들이 그의 시와 글 들을 모아 1907년에 간행한 '소류선생문집(小流先生文集)'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