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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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white,#2d2f34>'''두보(杜甫)'''[1]
'''출생'''
712년
당나라 허난성 정저우 부 궁이 현[2]
'''사망'''
770년[3]
'''자'''
자미(子美)
'''호'''
소릉야로(少陵野老)
'''별칭'''
시성(詩聖),두소릉,두공부[4]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여담


1. 개요


語不驚人死不休。

시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

- 두보[5]

이백과 함께 중국 2대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 동시대 인물이기도 하며 이백이 두보보다 12살 연상이었는데 두보가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6]
이백이 시선(詩仙)이라면 두보는 시성(詩聖)이라고 한다. 이것은 누가 더 우월한가에 따라 붙인 명칭이 아니고[7] 각자의 스타일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강산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이백의 시에서는 도교적인[8] 정취가 짙게 묻어나고, 사회풍자와 교훈적인 주제를 담아낸 두보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백에게는 도교 신선의 이미지를 붙여준 것이고, 두보에게는 유교 성인의 이미지를 붙여준 것이다.
역대 중국왕조에서는 정치사상적으로 유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대대로 두보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 대중들에게는 역시 술마시며 놀다가 멋들어진 풍류를 읊는 이백이 더 인기 있었다. 이런 엇갈리는 인기는 조선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왕조에서는 대대적으로 두보의 시를 장려하며 '교과서'로 삼았는데,[9] 선비들 사이에서 술좀 마시고 시좀 쓴다는 인물들은 흔히 자신을 이태백에 견주곤 했다.

2. 생애


재능 하나는 정말 뛰어났지만 그만큼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삼국지를 종결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인 두예의 먼 후손이며, 조부인 두심언도 시인이었지만[10]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과거도 억울하게 계속 낙방하여 방랑의 삶을 살았다. [11] 게다가 성격도 강직하여 아첨을 싫어했기에 과거에 급제했어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긴 어려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두보는 백성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시로 써[12] 고위층의 사치와 대비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 때문에 두보는 현실적이고 사회성이 높은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사회상을 거울과 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이 그를 ‘시사(詩史)’라고도 불렀다. 물론 두보의 시 가운데선 낭만주의적인 시도 꽤 많다.
이백과 달리 안사의 난이 그에게는 입신양명의 발판이 되었다.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은 그대로라서 결국 지방관으로 좌천되었고, 그나마도 그 지역에 어마어마한 기근이 닥치면서 끼니도 못 구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굶주리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상관들에게 구호식량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분노하여 48세에 사직하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촉 땅의 청두에 정착해 성 밖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세웠다. 잠시 친구였던 촉 절도사의 막료로 있기도 했다.[13] 이후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내려가서 기주(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2년간 더 방랑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에서 5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참고로 두보가 사망한 해인 770년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이라는 시에서 당시 말년의 두보가 느꼈던 회한을 느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으로.

3. 기타


  • 이태백이 낭만적이라면 두보는 사실적이요, 이태백이 유미주의적이라면 두보는 현실주의적이라 볼 수 있다. 또 이태백의 시는 일필휘지[14], 영감이 떠오르는대로, 즉흥적으로 쓴 것이 많으나 두보는 숱한 퇴고를 거쳐서 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물론 둘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세간은 평하며, 각자 특색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15]
  • 야사에 따르면 매우 굶주리다가 간신히 잔칫집을 방문하여 폭식하다가 생긴 배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대만의 시사만화가 어부는 두보의 열전을 만화화하면서 이 '어사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고 논박하긴 했는데, 어쨌든 물에 비쳐진 보름달을 보고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태백보단 현실적이다.
  • 왠지 이백과 대조되어 문약하고 꼿꼿한 선비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이백 못지않은 술고래였다. 그래서 친구들을 대동하고 2차, 3차까지 끝장을 보았으며 장안에서 이백과 잠깐 교류할 때에는 둘 다 고주망태가 되어 한 침상을 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너무 술을 좋아한 나머지, 심지어는 관아의 빈민구제용 비축미까지 암시장에 내다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한다(...). 두보에게서 강직하고 대쪽같은 이미지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화일 것이다. 두보 자신의 말로는 몇 말 안 된다고 하지만.
  • 이백처럼 유협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보 역시 무인의 기질이 있었다. 말안장에 용천검을 차고 다니는 것을 즐겼으며, 검술 또한 어느 정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는 귀족 사대부들은 검을 차는 것을 즐겼고, 검법 또한 매우 발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다.
  • 또한 말까지 잘 탔는데 어느날 술김에 말을 타고 벼랑을 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된통 다친 적도 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어렵게 사람들이 저급술을 빚어서 주자 무척 기뻐하며 그 심정을 시로 쓰기도 했다.
  • 이백이 곽자의 한 명에 대한 시만을 남김에 비해, 두보는 심심하면 그 당시 유명인물에 대한 시를 남겼고 그 중에는 고선지 장군에 대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라는 시도 남겼는데 고선지의 애마 한혈마와 같이 고선지를 찬양한 시였다. 고선지 문서로.
  • 그의 후손은 한국에도 1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정확히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두 아들과 조선으로 귀화한 장군 두사충의 후손들이다.
  • 두보의 시 중 '강촌'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된 단 셋 뿐인 외국 문학작품 중 하나이다.[16] 다음은 해당 시의 전문.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 탕현조의 희곡 모란정환혼기의 여주인공 두여랑(杜麗娘)은 설정상 두보의 후손이며, 그의 부친인 두보(杜寶)는 한국 한자음 한정으로 아예 동명이인이다.
  • 쓰촨에서 오래 있어서인지 유비제갈공명에 대한 시도 꽤 지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해 지은 <촉상(蜀相)>(촉나라의 승상)이고 다음은 그 중 하나인 고백행(古柏行,늙은 측백나무)

古柏行(늙은 측백나무)

孔明廟前有老柏(공명묘전유로백)

제갈공명의 사당 앞에 오래된 측백나무

柯如靑銅根如石(가여청동근여석)

가시는 청동같고 뿌리는 돌같구나

霜皮溜雨四十圍(상피류우사십위)

서리 견딘 껍질에 흘러내린 물방울, 둘레는 사십 아름이라

黛色參天二千尺(대색참천이천척)

검푸른 잎새는 하늘로 이천 척이나 솟아있구나

君臣已與時際會(군신이여시제회)

군신이 이미 시국에 따라 함께 모였으니

樹木猶爲人愛惜(수목유위인애석)

사당 앞의 나무도 사람의 아낌을 받고 있구나

雲來氣椄巫峽長(운래기접무협장)

구름 몰려오면 그 기운 길게 무협으로 이어지고

月出寒通雪山白(월출한통설산백)

달 떠오르면 그 찬기운 설산의 흰 눈과 통하는구나

億昨路繞錦亭東(억작로요금정동)

지난 날을 생각하노라, 길 따라 금정 동쪽을 도니

先主武侯同閟宮(선주무후동비궁)

선주 유비와 무후 제갈공명이 같은 사당에 모셔있었다

崔嵬枝幹郊原古(최외지간교원고)

나무 줄기는 크고 높았고 교외의 들판도 오래되어

窈窕丹靑戶牖空(요조단청호유공)

단청은 으슥했으나 창문 안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었다

落落盤踞雖得地(락락반거수득지)

측백나무는 가지 늘어뜨리고 서리어 땅을 얻고 있으나

冥冥孤高多烈風(명명고고다열풍)

어둑하도록 높이 자라 사나운 바람 많이 받는구나

扶持自是神明力(부지자시신명력)

자신을 부지한 것은 곧 신명의 힘이요

正直元因造化功(정직원인조화공)

바르고 곧게 자란 것은 조물주의 공덕일 것이다

大廈如傾要梁棟(대하여경요량동)

만약 큰 집이 기울어져 대들보나 기둥감이 필요하여도

萬牛回首丘山重(만우회수구산중)

나무가 산처럼 무거워 만 마리 소도 고개 돌려 외면할 것이다

不露文章世已驚(불로문장세이경)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사람들 이미 놀라

未辭剪伐誰能送(미사전벌수능송)

베기를 거절하지 않아는다 해도 누가 능히 운반해 갈 수 있으리

苦心未免容螻蟻(고심미면용루의)

개미에게 당하는 마음 속 괴로움 면하지 못하고

香葉終經宿鸞鳳(향엽종경숙란봉)

향기로운 나무 잎새는 난새나 봉황새의 잠자리도 되었을 것이다

志士幽人莫怨嗟(지사유인막원차)

뜻 있는 선비나 숨어사는 사람들은 원망하고 한탄하지 말아라

古來材大難爲用(고래재대난위용)

예부터 인재가 크면 쓰이기가 어려웠노라

  • 생애에서 언급된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17]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江南逢李龜年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18]

岐王宅裏尋常見(기왕택리심상견)

기왕[19]

의 저택에서 늘상 보았고.

崔九堂前幾度聞(최구당전기도문)

최구[20]

의 대청에서도 몇 번 들었소.

正時江南好風景(정시강남호풍경)

바로 경치 좋은 이곳 강남에서,

落花時節又逢君(낙화시절우봉군)

꽃 지는 시절에 그대를 또 만났구려.


4. 여담


두보의 이명인 두공부에서 유래한 공부사우루스라는 공룡이 있다.

[1] 병음: Dù Fǔ (두푸)[2]허난성 정저우 시 궁이시[3] 악양과 담주를 전전하다가 뱃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4] 과거 급제 직후 공부원외랑이 되었기 때문에[5] 두보가 말년에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6] 우연의 일치였을지 몰라도 이백과 두보 둘 다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후예였다. 이백은 전국시대부터 나름 중견가문인 농서 이씨의 후예였고(당나라 성씨이기도 하다!) 두보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몇몇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두예의 직계 후손이라고 두보 스스로가 인증한 적이 있다.[7] 중국 고전문학계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시적 재능에 대해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8] 정확하겐 도가 사상. 도교는 여러 사상이 짬뽕된 종교라서 도가랑은 차이가 있다. 도교 문서로.[9] 세 번에 걸쳐 훈민정음으로 번역본을 편찬한 두시언해가 그 증거이다. 두보의 시에 유교적 사상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세 번이나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한글의 변천사를 연구할 때도 좋은 자료이다.[10] 유명한 고사성어 '천고마비'는 바로 이 두심언이 북방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편지로 써보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11] 이때 시험관 이림보가 두보의 문장이 너무 뛰어나서 낙방시켰다는 소리가 있는데 당시 시험관 이림보는 아예 시험지 자체를 안 보고 전원 낙방시켰다. 그리고 현종에게 "인재를 다 뽑아서 이제 인재가 없어요!"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했다.[12] "처음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갈 적에 마을 이장이 머리 싸맬 것을 주셨는데, 머리 세어 돌아오니 다시 변방으로 가라네", "'''변방에 흐르는 피가 바다를 이루어도 황제의 가시려는(변방 정벌하려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네'''"(병거행)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노파가 징발을 피해 달아난 남편을 잡으러 온 관리에게 아들 둘 있던 것도 전쟁 나가서 죽고 손자는 이제 젖도 못 뗐다면서 '''남편 말고 자기를 데려가면 병사들 밥 짓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비는 처절한 장면을 그린 작품(석호리)도 있다.[13] 일단 이 때가 두보의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둘의 사이가 친구라고 보기에는... 심지어 절도사가 두보를 죽이려다가 참은 적도 있었다.[14] 단번에 막힘없이 시원하게 글씨를 써내려 가거나 그림을 그리는, 즉흥적인 스타일[15] 두보 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두보가 도덕군자 같은 재미없는 시만 쓰지 않았냐는 편견을 가진 경우가 있는데, 재미없다는 건 개인적인 평가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도덕군자 같은 시만 썼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예 유교 도덕과는 거리가 있는 소재도 많을 뿐더러,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시라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고뇌를 풀어낸 것이 많다. 말하자면 명상록과 비슷하게, 현대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정서이다. 물론 평균적으로 봤을 때 어떤 소재를 다루든 이백에 비해 진지하고 사실적인 시선인 것은 사실이다.[16] 나머지 둘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과 두보와 같은 당나라 때 시인이었던 유종원의 강설. 유종원은 두보보다 후대의 인물이다.[17] 이구년은 당현종, 양귀비, 이백, 고력사와의 일화도 남아 있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18] 번역은 이시다 미키노스케 저, 이동철, 박은희 역의 '장안의 봄' (이산 2004)에서 재인용[19] 당 예종의 넷째아들이자 현종의 바로 아래 이복동생인 기왕(岐王) 이범(李範)을 말한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애호가였다고 한다. 사후 형인 현종에 의해 황태자로 추존되었다.[20] 비서감(秘書監) 등의 관직을 지낸 당 현종의 총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