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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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장주(莊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다.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蒙)출신으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때 칠원성(漆園城)의 말단 관직에 있었으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노자와 사상이 비슷하나, 노자는 '공을 이루면 뒤로 물러나야 위험이 없다', '정치함에 있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마라'는 정치술에 가까운 반면, 장자는 정치를 떠나 세속을 초탈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2][3] 삶은 '맞다 or 아니다' 중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며, 두개의 상반된 가치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도르래와 같아서, 둘을 나누어서 단정하지 말고 큰 하나로 보아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회생활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하고, 사람이 변해서 늙고 죽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개의치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작은 생각에 머물러서,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지지 말고, 하늘을 뒤덮는 대붕 처럼 크게 생각해서 너그럽게 이해하라는 것. 따라서 이렇게 바라보면, 추한 사람도 인기가 많을 수 있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4]
2. 장자의 사상
장자의 사상을 최대한 쉽게 요약하자면 '상대주의' 또는 '시각주의(perspectivism)'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장이나 여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는다"는 장자의 말처럼, 우리의 판단은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른 것이므로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오리발이 짧은지, 학의 목이 긴지,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사물 간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장자 제2편에 나오는 망량(엷은 그림자)와 영(본 그림자)의 대화(여기서 '망량'은 '영'을 보고 "물체가 움직이는 데 따라 그대로 가닥 서고 앉았다가 일어서니 도대체 왜 그렇게 줏대가 없느냐"고 따진다)는 사물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관성을 묘사하는데,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존재의 바탕이자 움직임의 근원은 도(道)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결국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은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다. 조삼모사의 일화는 깨치지 못한 인간들이 사물의 양면을 보지 못함과, 궁극적인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또한 호접지몽의 이야기도, 물아일체의 신성함이나 인생무상 같은 것의 호소를 추구했다기보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모호한 실재세계의 모습을 반영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것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장자는 "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은 도가 아니다"고 말한 노자의 노선을 따른다. 한마디로 절대 진리는 말이나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한쪽만을 절대시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별지(分別知)를 초월해야 하며, 좌망(坐忘: 고요 속에 머무는 것)과 심재(心齋: 마음을 비움)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를 잃어버린 상태(吾喪我)에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그것이 곧 양생이 되고, 처세의 도가 된다.[5] [6] [7]
유명한 고사론 호접지몽, 조삼모사[8] 가 있다. 그 외에도 대붕이나, 포정해우[9] , 혜시[10] 와의 대담 등이 대표적인 일화이다.
3. 여담
- 삼국지연의에서는 남화노선이라는 이름으로 장각에게 나타나 태평요술도를 던져주었다.(…)
- 서시를 안 좋게 보았다. 이도 장자 철학과 연관되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서시 문서 참고.
- 맹자(BC 372? ~ BC 289?)와 생몰연대가 비슷하다고 추정된다.
4. 서적 장자(莊子)
장주(莊周)와 그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과 장자의 후학들의 사상을 기록한 책.
4.1. 역사
지금은 상당 부분이 소실된 상태다.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내편 7편, 외편 28편, 잡편 14편, 해설 3편 총 5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사기에 따르면 10여만 언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4세기에 곽상이[11] 일관성이나 글의 질을 기준으로 내편 7장 외편 15장 잡편 11장, 총 33장으로 추린 것이다. 보통 내편의 7장은[12] 많은 부분이 장자 본인의 저작으로 여겨지고 있고, 외편과 잡편은 후대의 인물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3]
4.2. 개요
기존의 틀에 박힌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에 적힌 활자가 이해가 안 될수 있다.[14] 심지어 같은 장자 안에서도 읽다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서술마저 보인다. 그러나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장자를 독해한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비논리인 장자의 책이 일정한 논리구조를 바탕으로 저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15] 문학적인 가치 역시 큰 편.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도 이분법 사고의 해체를 논한 장자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6] 이런 요소는 이 책에 대한 비평학적인 부분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가령 이분법적인 사고 하에서는 장자가 도가의 형이상학적 부분을 촉진했다는 점과 도가의 현실주의에 집중했다는 점이 서로 충돌하여 모순을 빚는 듯 하나 장자를 올바르게 독해한다면 이러한 이분법은 이 책을 독해하는 데 있어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징으로는 간결한 단어와 문구로 주로 사상을 해설했던 노자의 도덕경과는 달리, 풍부한 우화와 각종 비유로 자신의 사상을 설명했다. 때문에 쉽게 읽기 좋은 평가를 받는다. 분량에서도 노자의 도덕경보다 20배가 넘는 분량을 자랑한다. 보면 장자가 하는 말에 혜시가 트집을 잡거나 말꼬리를 잡다가 관광당하는 패턴이 많은데, 장자가 "그 친구 머리는 좋은데 재능을 낭비한다"라며 확인 사살을 하기도 한다.(...) 물론 혜시와 장자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절친이였고, 혜자가 죽었을 때 장자가 허무감을 느낀 것에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참고로 혜시 역시 명가 사상의 주요 인물로, 당대 논리학의 거두였다. 동양권에서는 보기 드문 연역론자. 현재 혜시의 저서는 남아있지 않은데, 장자 외에도 한비자, 순자, 여씨춘추, 전국책에서 혜시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장자가 제일 많이 기록하고 있기는 하다.
이 외에도 전국시대를 포함해 이전 시대의 역사적, 인문학적 거물들을 탈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로 각색하여 예화에 출현시켜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공자와 안회의 대담. 하지만 사실 장자에 나오는 공자는 썩 대우가 좋지는 않다. 많은 일화가 공자가 이러이러하는데 다른 사람이 이러이러하니 공자가 데꿀멍했다는 식의 이야기. 뭐 유명인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외로 장자가 공자를 높게 평가하는 일화도 있는데, 우언편에 혜시가 공자는 아직도 지식 때문에 마음고생 하고 있냐고 묻자 장자는 공자가 이미 그런 경지를 넘어섰으며 자신은 도저히 공자에 미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4.3. 대표적인 일화[17]
4.3.1. 곤(鯤)과 붕(鵬)
장자 소요유편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시작부터 굉장히 난해하고 은유적인 내용이라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대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북쪽 심해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떨치고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았다. 이 새는 바다의 흐름에 따라 남쪽 심해로 옮겨간다. 남쪽 심해란 하늘의 연못(天池)이다.
《장자》 소요유 [18]
- 북쪽 바다를 인간세, 곤을 각종 세속적인 이분법 등에 찌들었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인간 군상, 붕을 그 무한한 잠재력을 발현하여 초월한 자로 보아서 인간 찬가적인 내용으로 해석한다.
- 이 뒤에 나오는 작은 생물인 '새와 매미'와 대비시켜, 새와 매미는 큰 뜻을 보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 군상, 곤과 붕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만물의 변화에 통달한,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인(至人), 성인(聖人), 신인(神人)과 같은 달인을 표현하는 것이다.
-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거대한 생물인 곤과 붕을 등장시키고, 그리고 이 바로 뒤에 인간 기준으로도 작은 생물인 새와 매미를 대비적으로 등장시킴으로서 단순히 '인간의 크고 작다라는 기준은 상대적인 판단이다'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4.3.2. 상대적인 기준에 대해
'일반적인' 관점에선 가을에 가늘어지는 짐승의 털은 매우 작고, 태산은 매우 크며, 요절한 아이는 일찍 죽었고, 팽조는 매우 오래 살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작은 벌레의 입장에선 짐승의 터럭도 크게 느껴질 것이요, 우주에 나가서 지구를 내려본다면 태산은 매우 작을 것이며, 하루살이가 보면 요절한 아이도 장수한 것이고, 지질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낱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그 시간은 찰나와 같을 것이다. 즉 모든 기준은 상대적임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천하에서 가을에 짐승의 털 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태산을 작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요절한 아이보다 더 오래 살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팽조[19]
를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고, 만물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 이미 하나가 되어 있으니 또한 이론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미 하나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또 이론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이론은 두 가지가 되며, 그 두 가지와 하나는 또 세 가지가 된다. 이렇게 미루어 나간다면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산해 낼 수 없을 것이니,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어찌하겠는가? 그처럼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도 세가지가 되었으니, 하물며 있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는 어찌 되겠는가? 나아감이 없이 인시(因是)를 근거로 해야 할 것이다.
《장자》 [20]
이 역시도 아름답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모장과 이희[21]
는 사람들이 미인이라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녀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는 그녀들을 보면 후다닥 달아난다. 네 가지 것들 중 누가 천하의 바른 색깔을 알고 있는 것인가?
《장자》 [22]
4.3.3. 무용지용(無用之用)에 대해
쓸 데가 없다는 무용(無用)이야말로 관점을 좀 달리 생각하면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장자의 생각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혜시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 있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똥나무라 부르오. 그 큰 줄기에는 혹이 많이 붙어 있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도 없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도 거들떠 보지도 않소. 지금 당신의 말도 크기만 했지 쓸 곳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상대도 안 할 것이오."
장자가 말하였다.
"...(중략)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 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에다 그것을 심어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갔다하거나 그 아래 어슬렁거리다가 낮잠을 자지 않소?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그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쓸 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장자》 [23]
온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한 곱추를 보면 보통 사람들은 '저런 놈이 사람 구실이나 하고 살까' 하고 혀를 끌끌 차거나, 아니면 동정 내지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장자는 여기서 지리소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몸이 심한 불구여서야말로 부역에 끌려가지 않고, 정부에서 구휼(救恤)을 할 때 이득을 보는 등 언뜻 보면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가 됨으로써 쓸모없는 것도 관점을 바꾸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지리소(支離疏)라는 사람은 턱이 배꼽 아래 감추어지고, 어깨가 머리보다 높으며, 머리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고, 오장육부는 윗쪽에 붙어 있고, 두 다리가 옆구리에 와 있었다. 그러나 바느질을 하여 입에 풀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키질을 하여 쌀을 불려 열 식구를 먹이기에 충분하였다.
위에서 군인들을 징집하더라도 지리는 팔을 휘저으며 그곳을 노닐 수 있었다. 큰 부역이 있다 하더라도 지리는 언제나 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에 끌려가지 않았다. 위에서 불구자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적에는 세 종의 곡식과 열 다발의 땔감을 받았다. 그의 형체가 불완전한 사람은 그래도 그 자신을 충분히 보양할 수 있고, 그가 타고난 목숨대로 다 살 수 있는 것이다.
《장자》 [24]
장자에는 특히 이런 류의 우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장자의 이런 일화들을 '남들 눈 밖에 나는 짓 하지 말고 튀지 않게 살아야 장생한다'는 식의 처세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장자라는 책 자체가 워낙 해석의 방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4.3.4. 조삼모사
이 일화는 사실 '똑같이 7개의 도토리를 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아침에 많이 주니 눈 앞의 득만 보고 좋다고 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고 수고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침에 세 개'라고 말한다. 무엇을 '아침에 세 개'라고 하는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조삼모사, 朝三暮四)"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내는 반응을 보인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된 자연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 '자기와 만물 양편에 다 통하는 것(양행, 兩行)'이라 한다.
《장자》 [25]
4.3.5. 호접지몽
이 일화는 단순히 인생무상, 일장춘몽 등과 같은 의미로 알려져 있으나 역시 문맥을 보면 전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옛날에 장주[26]
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춤을 추는 나비였다. 스스로 깨닫기를, 뜻에 딱 맞았던가?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을 깨니 엄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가? 장주와 나비라면,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인데... 이것이 '물(物)로 바뀜(化)'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 [27]
4.3.6. 공자와 노자의 대화
유가와 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는 우화이다. 유가 사상에서는 인(仁)과 의(義)를 대전제, 수학을 예로 들면 공리와 같은 것으로 두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반면, 이는 도가적인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인위(人爲)에 지나지 않고, 인의와 같은 것은 오히려 사람의 본성을 기만하는 개념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공자가 서쪽 주나라 왕실 서고에 책을 넣어 두려 하였다. 자로가 그에 관해 상의하며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주나라의 서고를 관리하던 관리 중에 노담(老聃)[28]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돌아가 집에 살고 있다 합니다. 선생님께서 책을 넣어 두시려면 가서 부탁해 보시지요."공자가 말했다.
"좋겠군."
그리고 가서 노담을 만났으나 청탁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는 십이경(十二經)[29]
을 펼쳐 놓고서 설명하였다. 노담은 그의 설명에 동의하면서 말하였다."너무 산만합니다. 그 요점만을 들려 주십시오."
공자가 말하였다.
"요점은 어짊(仁)과 의로움(義)입니다."
노담이 말하였다.
"어짊과 의로움은 사람의 본성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군자는 어짊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의로움이 아니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짊과 의로움은 참된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하였다.
"무엇을 어짊과 의로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마음 속은 부드럽고 사사로움이 없이 모두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어짊과 의로움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노담이 말하였다.
"아아, 뒤에 하신 말씀은 위태롭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바로 사사로움인 것입니다. 선생은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육을 잃지 않도록 하고자 하십니까? 하늘과 땅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있고, 해와 달에는 본시부터 광명이 있고, 별과 별자리에는 본시부터 배열된 자리가 있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본시부터 무리가 있고, 나무에게는 본시부터 서서 자라는 본성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자연의 덕을 본받아 행하시고, 자연의 도를 따라 나아간다면 이미 목적에 달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짊(仁)과 의로움(義)을 높히 들고 나오는 것이, 어찌 의기양양하여 북을 치면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이 하십니까? 아아, 선생은 사람들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장자》 [30]
이 일화에서 소개되는 공자와 노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일이 사기의 공자세가, 노장신한열전 등에서도 확인이 되므로, 적어도 공자와 노자가 만났다는 것 자체는 실제 있었던 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우화적인 내용이 많은 장자의 특성상 대화 내용도 이와 같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1가지 재미있는 점은, 사기에 따르면 이 때 공자와 노자가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공자는 노자를 "용과 같이 변화무쌍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칭송하고, 반대로 노자는 공자를 "뼈같이 썩어 문드러진 궤변으로 무장한, 겉만 그럴싸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공자의 면전에서''' 비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노자의 사상을 어느정도 계승했다 여겨지는 장자에는 이 사건을 인용한 우화가 이것 말고도 상당히 많다.
4.3.7. 죽음과 자연
혼돈의 몸에 구멍이 없었던 것을 보고 불편해할 거 같아서 통념에 따라 인위(人爲)를 가해 구멍을 내 주었더니 더 편히 살기는커녕 죽어 버렸다는 얘기. 사람을 억지로 어떠한 기준에 맞추지 말고 난 그대로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혹은 혼돈을 사람이 아닌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 상태', 즉 자연 그 자체로 보아서 자연에 인위를 가하는 순간 자연은 스러져 버린다는 은유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남해의 제왕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제왕을 흘이라 하고, 중앙의 제왕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흘이 어느 때, 혼돈의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혼돈이 이들을 매우 잘 대접하려 숙과 흘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법을 의논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7개의 구멍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있는데 혼돈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에게도 구멍을 뚫어 봅시다."
그리고는 혼돈의 몸에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나갔는데, 7일만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장자》 [31]
장자의 자연관, 인생관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우화이다. 당연히 장자가 자기 처가 죽었다고 기뻐했던 것(...)은 아니고, 삶과 죽음이 본시 자연의 일부분이자 순환의 일부분이니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간다 한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장자의 처가 죽자 혜시가 조상(弔喪)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를 본 혜시가 말하였다.
"부인과 함께 살아왔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지 않았는가.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고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 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
《장자》 [32]
장자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화.[34] 위 장자의 처의 죽음과 더불어 장자의 자연관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장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과 함께 살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막연한 공포마저도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장자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그를 성대히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 때 장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겉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고 하니, 나의 장구는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겠느냐?"
제자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어버릴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땅 위에 놓아 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어찌 그리 편협하게 생각하느냐?"
《장자》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