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룡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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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조선 미술 대관에 실려있는 쌍룡검의 사진[1]
1. 소개
2. 쌍룡검은 어디에 있는가?
3. 반전?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주득쌍룡검 천추기상웅 맹산서해의 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진 글귀.


1. 소개


雙龍劍
충무공 이순신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환도. 이게 사실이라면 당연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됨이 아깝지 않은 보물이나 안타깝게도 100년째 행방이 묘연하다. 물론 아래 항목에도 나오듯 이 도검은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과는 달리 정말로 이순신이 사용한 도검이었다는 확증은 없다.
충무공과 관련된 검은 총 8자루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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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에서 보관중인 거환도 2자루[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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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에 소장된 4자루[4]. 왼쪽은 참도, 오른쪽은 귀도다.
여기까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순신 관련 검이며, 여기에 이 짧은 환도인 쌍룡검 2자루를 합치면 총 8자루가 된다.
쌍룡검을 소개할때마다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다니지만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무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록에 전혀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 최고 지휘관의 신분이었던 만큼 직접 무기를 들고 적과 교전한 사례가 없기에 이순신이 지니고 다닌 무기가 실제 전투에 쓰였는지 의장용인지 구분을 하는건 큰 의미가 없는 일임에도 이상하게 쌍룡검이 실전용 무기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이는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이 길이가 2m에 가까워 현대의 검도 및 매체에서의 짧은 도검에만 익숙한 이들이 막연히 이런 긴 검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지레짐작을 해서 자기들이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기는 짧은 도검에 집착해서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짧은 환도는 적의 긴 무기와 교전할때 극히 불리하기에 실전에서 쓰기 보다는 지휘관의 의장용 검으로 쓰이는게 보통이었고 지휘관이 직접 교전에 뛰어야 될 상황에서는 먼저 활을 쏘고 그 다음에 긴 무기를 들지 이걸 놔두고 도신이 짧고 한 손으로 운용해 힘이 실리지 않는 짧은 환도를 들리 만무하다.

2. 쌍룡검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이미 18세기에 한 차례 실종됐다가 1811년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발견[5]되어 조선 전체를 한 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다. 다만 이것이 실린 《돈암집》권6 <원융검기>에는 "쌍룡검은 궁내부[6]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나와있지 않아 있다.
박종경의 기록에 따르면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시(검명)가 새겨져 있었고, 박종경은 시구의 ‘쌍룡검’이라는 것에 착안해 다른 한 자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자루를 탐문해 열흘 뒤 아산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다른 칼을 구했고 이후 이 쌍룡검을 충무공 이순신의 칼로 여겨 간수했고 이후 검이 궁내부 박물관이 소유하게 되었다고 기록해 놨다.
1909년 대한민보[7]에서 "충무공의 군도는 동궐 내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라고 했으며 1910년 사진집인 《조선미술대관》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행방이 묘연했으나 주간경향이 1912년 5월 26일자 권업 신문에 "동관 대궐에 이순신의 원융검(元戎劍) 및 조선 유물들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다 치우고 그림이나 글씨같은 것들만 전시해놨다."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 기록으로 궁내부 박물관 측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어느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일제 시대 초기에 행적이 점점 묘연해지기 시작해서, 현재는 193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만 남아있다고 하나 그나마 그 사진들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 이순신 사망 후 행방이 묘연.
2. 한 자루는 병조판서 심상규, 한 자루는 아산에 사는 어떤 이가 가지고 있었음.
3. 1811년 박종경이 두 자루의 쌍룡검을 얻음.
4. 이후 친위부가 소유하게 되었다가 궁내부 박물관 소유로 이동.
5. 1912년 이후 행적이 묘연.
2010년 7월 10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추적을 해봤지만 찾은 건 애먼 사인검 마이너카피(?)인 삼인검이었다. 한 미 해병대 부사관이 조선칼과 왕관(Korean sword and crown)을 해외로 반출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이후의 조사는 힘들었다. 일본이나 미국 어딘가에서 가치도 모른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쌍룡검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3. 반전?


그런데 2019년 1월 7일 주간경향 1309호를 통해 국내 이순신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역사평론가 박종평이 놀라운 견해를 내놓았다.'''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했던 쌍룡검이라는 이름의 검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박종평은 고종 때의 문신 임헌회가 쓴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復淵·1688~?)의 묘갈명인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使李公墓碣銘)>에, 쌍룡검에 새겨져 있었다는 명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한시가 이복연의 시라는 기록과 그 내용이 있음을 주장했다.

"공(통제사 이복연)이 한 쌍의 장검을 만들고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는 글귀를 새겼다(公鑄得一雙長劒 刻以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之句). 대개 공은 평생 이 충무공을 우러르며 그리워했기에 그 마음을 이처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박종평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종경이 쌍룡검을 얻었다는 시점과 거의 멀지 않은 시점인 1819년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李浩彬, 1777년∼?)이 저술한 <신정아주지>[8]라는 글이 있다. 이 신정아주지에선 현존하는 현충사 소장 장검과 쌍장검(쌍룡검)을 각기 따로 설명하고 있는데, 쌍장검은 이순신의 칼이 아니라 이복연이 만든 칼임을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에게 한 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鳴)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또 하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핏빛이 산하를 물들이도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현충사 소장 장검에 대한 기록.

“'''이복연은 단석(端錫)의 아들로 통제사로서 한 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과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분은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고 했다.''' 모두 이 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9]

”- 쌍장검(쌍룡검)에 대한 기록.

아울러 원융검기보다 이전의 기록으로 충무공의 4대손 이홍의(李弘毅)가 간행했던 <충무공가승>과 그로부터 약 90년 뒤인 1795년규장각에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모두 '''현충사 소장 장검만 언급하고 쌍룡검이라는 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박종평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쌍룡검이라는 검은 사실 이순신의 것이 아니라 그의 후임인 이복연이 이순신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했던 것이며 이를 후대에 이순신의 검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박종평에 따르면 이순신과 이복연 모두 아산 지역에 연고가 있고(이순신은 아산이 외가였고, 이복연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다) 똑같이 이씨이며(다만 이복연은 전주 이씨)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전력이 있어서(이순신은 초대와 3대, 이복연은 99대) 더욱 착각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한 검이 아니라고 해서 조선 시대의 도검 유물로써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종평의 견해대로 지금까지 이순신의 유물인 줄로 믿고 애타게 찾아다녔던 칼이 사실은 병조판서 심상규와 훈련대장 박종경의 오해에서 기인해 이순신의 유물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고 하면 매우 김이 빠지는 것은 사실.

[1] 이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2] 길이가 2m에 육박해서 매체의 짧은 도검에 익숙한 선입견으로 인해 장식용으로만 인식이 되지만 총지휘관이 적의 습격을 받아 직접 전투에 나서야 할 경우 전투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검이다. 태구련 등을 생포한 뒤에 이들이 대장장이라는 증언을 확인할 겸해서 만든 물건. 길이 때문에 쌍수도라 칭하는 경우가 꽤 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규격의 물건이다. 참고로 태구련 등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에게 잡혀가 일본도를 납품하다가 요행으로 탈출한 도검장들이다.# 때문에, 우리 환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도의 특성이 가미돼있다.[3] 참고로 저 사진에서 보여지는 붉은 선은 이후 누군가가 페인트를 칠한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며 문화재청에서 난리가 났다. 2015년 지금은 벗겨낸 상태.[4] 충무공 사후에 명나라에서 보낸 것[5] 조선 후기 무기개설서 융원필비의 저자이자 순조의 외숙부이기도 하다.[6] 조선 말기, 왕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7] 처음으로 시사만화가 실린 신문이다.[8] 아산 지역의 다른 이름이 아주이다.[9] 李復淵 端錫也 以統制使鑄一雙長劍 銘曰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蓋慕李忠武之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