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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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역사
2.2. 형태
2.2.1. 칼날 단면
2.3. 칼날 휘임각과 대체적인 형태
2.3.1. 슴베
2.3.2. 방패[1]
2.3.3. 잠금장치
2.3.4. 칼자루
2.4. 휴대 방법
2.5. 제작법
2.6. 정리 및 요약
3. 구매 및 유통
4. 매체에서의 등장
5. 관련 문서


1. 개요


環刀, Hwando, Ringed Blade, Korean Arming Sword
대한민국의 전통 무기로 고리를 사용하여 패용(佩用)하였던 도검(刀劍)들을 일컫는다.[2]
조선시대 때는 대체로 전투용 칼은 다 환도라고 불렀다. 여기엔 외날뿐 아니라 양날도 포함된다. 일본도를 그냥 환도나 왜환도라고 부르기도 했고, 심지어 19세기에 이양선이 찾아와서 문정을 했을 때 남긴 기록에서도 커틀러스 같은 서양검 또한 환도라고 적었다.[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운검, 패도, 패검 등 명칭이 기록되었지만 이름이 다를 뿐 모두 환도의 일종이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예도, 쌍수도, 쌍검, 왜검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은 검법의 명칭이며 실제로는 대부분 환도를 사용하여 수련했다. [4]

2. 상세



2.1. 역사


한국의 기록에서 환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고려시대 충렬왕 때이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외날 곡도 스타일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유입됨으로써 환도가 나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철제대도나 환두대도, 6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 심부대도는 칼코등이를 갖추고 뒤에 환두가 작아지는 등 환도와 유사한 모습을 지니긴 했지만 칼날은 직선형에 가까워서 찌르기를 중심으로 하는 형태였다. 삼국시대 유물 중에서도 곡률이 큰 대형 검 유물이 발견되긴 하지만 이들은 월도를 길쭉하게 만든 모양과 가깝거나 직선 대검에 곡률을 넣은 정도이다.
중동이나 서양에서도 사브르, 시미터와 같이 곡률이 큰 한손 도검 형식은 몽골 침입 이후로 나타났다. 일본도 역시 원래는 한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였다가 동북부 원주민에미시의 영향으로 휘어진 디자인을 띄게 되었던 걸 생각하면 일종의 수렴 진화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찌르기 편한 직도와 베기 편한 곡도가 공존했다. 박도의 튼튼한 디자인을 조합한 유물도 존재한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도와 맞서기 위해 길이를 90cm 이상으로 늘리고 양손으로 내려치는 환도까지 나왔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장품화 되어서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까지 담긴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한 50cm 정도의 짧은 환도나 '''아예 대나무로 만든 것'''들도 제작되었다.

2.2.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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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는 시기에 따라 표본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지만, 대개 방패를 병용하는 한손검으로 쓰였다. 따라서 찌르기에 유리한 형태 또한 많이 보인다. 칼날의 휘임은 일반적으로 중국일본의 중간 정도라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 환도 유물들을 보면 그 정도가 제각각이기에 꼭 이러이러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초기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의 설명을 보면 당시의 환도는 칼머리에 두석 장식을 둘렀고, 칼자루에는 구멍을 뚫어 랜야드 역할을 하는 끈인 홍조수아(紅條穗兒)를 드리웠으며, 칼자루 감개나 칼자루 싸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칼집은 어피로 감싸고 검은색이나 주홍색으로 칠했다.
대체로 조선시대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1~2자루에 화살 20여 대, 갑옷과 환도를 착용한 중무장이었기 때문에 이 상태로 '''300보'''를 달려갈 수만 있어도 갑사(직업군인)로 채용될 수 있었다. 게다가 백병전보다는 궁시전을 중시했기 때문에 휴대가 편하고 활을 다루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짧고 가벼운 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동아시아 양식 갑옷을 뚫기 위하여 찌르기에 유리한 칼날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한 조선시대 환도 규격은 다음과 같다. (영조척)
  • 보병용: 칼날 55.63cm / 자루 20cm / 합계 73.63cm
  • 기병용: 칼날 49.60cm / 자루 16cm / 합계 65.60cm
해당 길이는 건물의 높이를 재던 영조척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당시 일반적인 길이를 재던 주척을 기준으로 한다면 칼날 길이가 여지없이 줄어든다. 보병용 칼날의 경우는 35.638cm, 기병용 칼날의 길이는 32.96cm로 자루의 길이를 합한다면 보병용은 55,638cm, 기병용은 48.96cm로 영조척을 기준으로 했을 때보다 더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이는 딱히 이대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정해진 게 아니라, 병사들이 훈련을 편하게 하려고 칼의 길이를 짧게 하던 것이 눈에 거슬렸던 영조가 보병의 환도 길이를 '''이 길이 이상'''으로 만들 것을 명한 수치이며 이 길이보다 훨씬 긴 환도도 얼마든지 있었다. 조선 후기 무예도보통지의 검술은 등패와 쌍검을 제외하고 전부 양손으로 펼쳤는데 실제로 무예도보통지에서 권장하는 환도의 길이는 날의 길이가 3척 3촌, 자루의 길이가 1척이며 어느 척도를 사용했는지 불분명해 현대의 척도로 환산하기 힘들지만 무예도보통지 편찬 시점과 근접한 시점에 나온 환도에 현대까지 유물로 남아 규격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영빈이씨 패월도의 길이가 칼날이 80cm, 자루의 길이가 24.5cm라 무예도보통지에 나온 환도 규격의 날, 자루 비율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만큼 대략 이정도 길이의 환도로 무예도보통지의 검술을 연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손으로 자루를 잡기 위해서는 자루 길이가 24cm는 넘어야 안정성이 있고 일부 단체들이 주장하는 20cm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빈이씨 패월도의 무게도 0.86kg으로 무예도보통지의 환도 무게인 1근 8량(0.9~1kg)에 비해 오히려 약간 적게 나가는 무게이다.

2.2.1. 칼날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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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환도는 삼각도나 편삼각도, 또한 일본도와 같이 육각도로 이루어진 사례도 존재한다. 다만 삼각도와 편삼각도는 내구도 문제로 인해 창포검 등 개인 호신용, 암살용으로 주로 쓰였고 실제로 널리 사용된 군용 제식 환도는 배형도였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식 육각도(일본도)를 얻으면 칼등과 옆의 경사면(시노기)을 갈아내서 배형 구조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5] 성호사설 설명대로라면 옆면이 평평하고 칼날 부분에만 각이 진 모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현존하는 유물을 보면 일본도의 시노기와 같이 명확히 각 진 칼배를 지녔다. 다만 칼배에서 칼등으로 갈수록 두께가 명확하게 좁아지는 경우가 많고, 칼등에 일본도와 같이 튀어 나온 각이 잡힌 경우는 드물었다. 간단하게 말해 단면이 오각형인 경우가 많다.[6]

2.3. 칼날 휘임각과 대체적인 형태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중, 일 도검의 휨을 각각 평균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같은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게 아닌 이상 칼날의 휨은 개별적인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5cm 휨을 가진 것부터 해서 직도와 가깝게 2,3mm 정도 휨을 가진 것들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결국 곡도의 평균적인 휨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와는 별개로 한 예시를 들자면 조선시대의 칼은 칼끝이 모호하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약간 솟아오른다.[7] 조금 더 설명을 끼워넣자면 환도는 일본도와 마무리 연마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요코테가 생기지 않고, 그러한 특징의 유무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적었다. 하지만 환도로 개조된 일본도인 경우라면 원래부터 있었던 일본도식 특징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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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출토 환도 유물. 환도의 모양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형태가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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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임금의 호위무사인 운검이 소지한 환도인 '''운검(雲劒)'''.[8] 환도 특유의 곧고 안정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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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 실린 환도. 무예도보통지의 환도가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환도 하면 바로 떠올리는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략적인 모습은 위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환도는 관청에서 지급하는 양산품 성격도 강한 편이므로 실제로 저런 종류를 병사들에게 지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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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후기 관료인 병와 이형상의 유품들 중 일부. 중간에 곡도(曲刀, 장도(長刀)라고도 한다.)는 임란 이후 조선시대 도검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칼의 크기는 길이 67.8㎝, 폭 3㎝, 자루길이 12.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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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이 생전에 사용한 환도인 추련도.# 미터법 기준으로 전체 길이는 101.4cm, 폭 6cm, 칼날 길이 86.7cm이다.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검 양식을 뒤섞은 고전적인 스타일이다. 중국에서도 같은 양식이 있어서 원나라-명나라-조선-청나라까지 무려 4개의 나라에서 곡도, 박도, 직도가 뒤섞인 유물들이 발견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직도를 사용했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고려시대부터 이미 곡도 양식의 한손검도 혼용되었다. 이후 중국에서는 전형적인 한족 스타일의 도검이 다시 나타나고 조선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환도가 유행하면서 이렇게 과도기적인 도검의 유행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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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환도의 모습이다. 다만 위 사진은 잠금장치가 없는 현대의 소장용 환도이다. 대략적인 모습은 비슷하지만 전통적인 환도 중에서는 다른 색깔이나 치장법이 더 많다. 상태가 좋은 환도 유물은 금속, 상어가죽, 그 밖에도 다양한 장식으로 치장하여 예술성이 높다. 환도라고 하면 썰렁한 모양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디자인도 많다.
대체로 일본도와 환도의 차이점을 예로 들 때, 일본도는 예술성을 중시하고 환도는 공산품이므로 실용성을 중시한다는 구분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맞는 말이다. 일본도는 무사들 사이에서 부품을 바꿔가며 사용하는 방식이 널리 퍼진 점이 있고, 환도는 그러한 목적으로는 아예 분해가 불가능할 만큼 튼튼하게 제작된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환도의 경우에도 왕이나 왕실 관련 인물들이 사용한 물건은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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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수원화성 박물관에 소장된 대모보검의 경우, 일반적인 환도는 칼집과 자루의 몸체를 그냥 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어피나 삼베 등으로 감싸 옻칠하여 마감하는 방식이지만 대모보검은 '''통째로 바다거북 껍질을 이용해 제작해서 칼집 속 칼날이 비쳐보이며''', 그 외에도 장식에 , , 과 같은 각종 귀중한 재료들이 들어간 물건으로서 예술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2.3.1. 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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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가 많은 환경 때문에 손잡이를 분해해서 슴베를 꺼낼 수 있도록 '메쿠기' 라는 대나무 못을 1개 사용해 고정하는 일본도와 달리, 손잡이를 분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슴베 고정도 대나무 못(목정) 대신 짧은 황동 파이프(유소)를 병용하거나 2개소에서 고정하는 경우가 많다. 위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서양 검과 비슷하게 슴베를 손잡이 뒤쪽 끝까지 길게 빼서 칼날이 손잡이에서 빠져버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도 있다.

2.3.2. 방패[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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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면서도 튼튼한 구조 등 손의 방어, 즉 실용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10]
방패의 재료로 옥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런 경우는 대개 어도(왕의 검)나 운검, 별운검(국왕 호위무사의 도검)이라고 한다.

2.3.3. 잠금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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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에는 비녀장이라고 하는 잠금장치가 사용되었다.## 이는 칼집에서 칼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방패 칼등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비녀장으로 칼을 고정시키기 위함이다.
이후 조선시대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클립을 이용한 버튼식 잠금장치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잠금장치는 클립을 호인 내부에 장착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클립 자체는 물론 잠금장치를 보호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조선식 잠금장치는 대체로 칼집에, 일본식 잠금장치는 대체로 칼 손잡이에 붙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다. 조선식은 칼을 뽑아들었을 때 손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없지만 칼을 뽑을 때 양손을 써야 하고, 일본식은 칼을 뽑아들었을 때 엄지 뿌리에 단추가 걸리지만 한손으로도 뽑아들 수 있다. 어째 전투에서 선호하는 전술을 보자면 서로 거꾸로 된 것 같지만...

2.3.4. 칼자루


칼자루에는 어피나 가죽끈을 감긴 했지만, 한국은 일본에 비해 습도가 낮은 편이기 때문에 일반 호신용 도검에는 칼자루감개나 칼자루싸개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칼집처럼 옻칠이 되어 있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 군용 도검에는 칼자루를 가죽끈으로 감는 것이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한쪽 방향으로 엇갈려 감기가, <융원필비>에서는 일본도와 유사하지만 끈이 교차하는 매듭의 횟수가 훨씬 적은 방법이 나와있다. 칼자루의 길이는 1451년 기준으로 마병은 한 뼘 세 손가락이고, 보병은 두 뼘이다.

2.4. 휴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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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도검 패용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띠돈을 이용하여 칼자루가 등 뒤로 향하도록 하고 칼집 끝이 전방 아래쪽으로 늘어지도록 허리에 차는 띠돈 매기 방식이다. 전통무예연구가 최형국 박사의 말을 따르면, 칼자루를 뒤로 가게 하는 편이 일상 생활을 하는데 훨씬 편하기에[11] 이나 같은 무기 없이 환도만 단독으로 찬다고 해도 일반적으로는 칼자루를 뒤로 가게 하여 찼다고 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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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패용 방식은 활동상의 편의성, 특히 활을 쏘는 데 있어서의 편의성을 크게 고려한 것이다. 그래서 역시 활이 중시되던 몽골이나 청나라 또한 같은 방식으로 패용하는 경우를 (항상은 아니지만) 볼 수 있다.[13]
칼자루가 등 뒤로 향하도록 하는 방식은 기병을 중심으로 운용했던 일부 국가들의 특징인데, 칼집이 뒤를 향하도록 패용하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릴 시 칼집이 말을 때려 움직임을 방해하기 때문. 청나라와 근세 유럽, 일본 군도 패용 방식에서도 나타는 보편적인 패검 방식이지만 만화, 애니메이션 등 미디어 매체를 통해 알려진 카타나식 패용법을 자주 접하다 보니 비교적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칼을 쉬이 뽑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쉽게 회전이 가능한 띠돈이 고안됨으로써, 필요할 경우 칼을 쉽게 돌려 찰 수 있게 되었다. 칼을 뽑을 때는 왼손으로 칼집을 재빨리 앞으로 돌려 손잡이가 겨드랑이 사이를 거쳐 앞으로 나오게 잡고 오른손으로 뽑는다. 뽑은 후에 칼집은 다시 자연스럽게 뒤로 향하여 사용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다.[14] 왼손으로 칼집을 등 뒤로 밀어올리며 오른손을 머리 뒤로 넘겨 뽑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리 환도가 짧아도 띠돈으로 맨 환도를 뒤에서 뽑는 것은 신체 구조상 힘들고 불편하다. 환도에는 잠금장치가 있는 경우가 많아 칼집 부리를 잡지 않으면 뽑을 수 없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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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돈 매기 방식과 더불어 조총수와 창수가 자주 사용한 패용 방식으로 등 뒤 허리띠에 칼을 찔러넣는 뒤꽃이 방식이 있다. 일본도는 칼집에 쿠리카타(栗形)라는게 있어 그냥 허리띠에 꽂아도 충분히 고정되지만 환도는 뒤춤에 그냥 찔러넣어 휴대하게 되면 칼이 빠져버리기 때문에 칼집 중간의 끈목 안쪽으로 전대를 통과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관련 영상은 여기로

2.5. 제작법


단조로 환도를 만드는 김봉경 도검장 영상, 도검장 이상선
일부 환도에 쓰이는 철은 뽕쇠(고탄소 공구강) 판을 ㄷ자형으로 구부러진 시우쇠(저탄소강)로 감싸 서로를 맞물려서 단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방법은 환도가 아니라 조선시대 호신용 소형칼인 장도 만드는 법 중 하나인데, '조선의 무기와 갑옷'의 저자 민승기 씨가 저서에서 환도 제작에 비슷한 방법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개인 견해를 밝혔다. 이는 뽕쇠를 시우쇠로 완전히 감싸는 것이 아니라 칼날 부분만을 남겨놓고 감싸서 뽕쇠의 칼날이 1/3정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복합구조는 일반적인 제작법은 아니다. 대부분은 단조를 통해 쇳덩이를 두드려 펴서 모양을 잡았다. 이렇게 단조작업을 통해서 칼날의 형태를 잡은 뒤, 까끌질과 거친 숫돌질로 칼날의 기본 형태를 잡은 후 다시 숫돌로 갈아 날을 세웠다.
환도 단조과정에서 일본도와 유사한 복합재질 구조는 간혹 발견되지만 접쇠 공정의 적용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접쇠로 제작된 환도는 전부 일본도의 도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일본도와 다르게 접쇠 공정을 쓰지 않는 건 강철 생산 및 가공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접쇠 공정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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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은철 장인의 말을 따르면 사철이 환도 제작에 아예 쓰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16] 이은철 장인 말대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사철 광산이 전체 철광산 36개소 중 21개소로 오히려 과반보다 많았고,[17][18] 사철 채집에 수군까지 동원되었으며 각 기록에서 꾸준히 사철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 현대에서도 사철을 이용한 전통 사철제련법을 통해 도검제작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통도검제작소의 홍석현 환도장도 사철을 이용해 환도를 복원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19]
칼집은 2개의 나뭇조각에 각각 칼날 모양을 파고, 이 두 조각을 찹쌀풀을 이용하여 붙여 만든다. 우리나라의 칼집은 일본의 것에 비해 나무의 두께가 얇은 편인데, 이는 전통 칼집이 전통 한지나 삼베 등에 풀을 발라 단단히 감싸주는 구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옻칠을 하여 완성했다.
칼자루는 칼집과 동일한 목재로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하며, 가끔은 사어피(沙魚皮, 상어가죽 혹은 가오리가죽)로 감싸고 가죽끈으로 감기도 했다.[20] 또한 칼자루에 홍조수아를 드리우는데 홍조수아는 붉은색의 유소(流蘇)를 길게 드리워 칼을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장식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칼을 놓치지 않도록 끈을 손목에 묶고 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6. 정리 및 요약


  • 길이
환도의 길이는 시대를 따라 규격과 형식이 지속적으로 변화하여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 초기~임진왜란 전까지 평화로웠던 시기는 길이가 일본도에 비해 짧아지고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는 일본도에 대항하여 길이가 길어졌으며 이후 무예도보통지 저작 시점인 조선시대 중후기까지 그 길이가 유지, 권장되다가 구한말 혼란기에 다시 짧아졌다.
  • 곡률
곡도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반대로 문종실록의 환도는 직단이라는 기록이 있어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환도의 곡률은 매우 다양하여 시대를 따라 직도와 곡도가 혼용되었으며 곡률 유형과 편차가 다양하여 평균의 의미가 없다.
  • 칼날과 형태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요코테가 존재하는 환도인 경우 노획하거나 수입한 일본도의 칼날을 환도로 개조한 물건이므로 요코테의 유무로 조선제 환도날인지 구분할 수 있다. 조선에서 만든 환도날인 경우 마무리 연마방식이 달라서 칼끝과 칼몸 경계에 있는 선인 요코테가 존재하지 않는다.
칼날의 단면도 다양한 모양을 띄고 있으나 배형도가 다수를 차지하며, 삼각도는 창포검 등 가벼운 호신용 검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육각도(일본도)를 얻으면 칼등을 갈아내서 배형도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혈조(Fuller)는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환도 유물에는 혈조가 파여있지 않다. 문서 최상단의 도검(관제녹칠어피갑장환도) 같이 혈조가 있는 환도는 소수 케이스. 애초에 혈조의 기능은 장식이나 무게 대비 강도를 늘리기 위한 목적만 있을 뿐이다.[21] 실용성 면에서는 혈조가 없이 매끈한 경우가 생산하기에 편하다보니 관제 도검 문화가 짙은 조선에서는 혈조가 없는 유물이 많은 것. 일본도도 혈조가 없는 것은 많다.
  • 부분 열처리
인문(하몬) 존재 여부는 환도와 일본도의 차이점 중 하나이다. 환도도 부분 열처리 과정을 거치기에 일본도 양식의 연마과정을 거치면 인문이 드러나게 되지만 환도는 그러한 연마 과정은 생략하고 날 자체를 세우는 마광 과정만 거친다. 애초에 환도와 일본도의 제작 방식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차이다. 다만 단접을 통해 만든 환도는 하몬과 유사한 희미한 물결 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요코테를 통해 구분 가능하다.
  • 패용 장식
칼집에 달린 패용 장식이야말로 환도의 정체성이다. 조선시대 초기 때는 칼을 차기 위한 패용 장식에 고리가 달린 것이었고 조선시대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패용 장식에 추가로 띠돈 장식을 한 것이 주류가 된다. 이 띠돈 매기는 환도에서만 보이는 양식이다.
  • 칼자루에서 도신 고정
일본도는 대나무 핀인 메쿠기를 박아 분해, 재조립이 가능하지만 환도는 유소 구멍에 금속제 유소관으로 고정하여(리벳 고정과 비슷하다.) 분해, 재조립이 불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슴베 끝이 칼자루 윗마개로 뚫고 나온 뒤 두드려 마감하여 이중으로 고정한 경우도 보인다. 일본도 양식처럼 메쿠기 위치에 금속 고정 못으로 고정하고 그 위에 유소 구멍으로 이중고정한 양식도 보인다. 이는 상품으로 팔려 주인 취향에 따라 맞춤 재조립 되는 일본도와 관제 군수품으로서 실용성 위주인 관제 도검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각의 문화 특성에 따른 것으로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용성 측면에서 환도는 전투시 칼날이 부러질지언정 칼자루에서 칼날이 빠지는 경우는 없는 장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방패
본래 환도의 방패(코등이)에는 칼날 양쪽에 나 있는 구멍인 소병궤혈, 궤계혈 양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비녀장 구멍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국 환도장들이 장식적인 의미로 소병궈혈과 궈계혈을 환도 방패에 도입하기도 했다.
  • 칼자루
환도의 칼자루는 본래 어피나 삼베 등으로 감싸거나 그낭 나무 위에 옻칠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흔히 일본도로 인식하는 교차매기식 줄 감기가 조선시대 중후기 이후 일부 환도에 도입되기도 했다. 이는 실용성 측면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 칼집 마감
칼집의 경우 갈대줄기, 어피, 옻칠을 한 복합소재의 칼집이 다수의 환도에서 확인된다. 그에 반해 일본, 중국의 경우 단일방식의 마감 이외에는 드물다.

3. 구매 및 유통


한국에서는 환도를 제작 해주는 곳으로 윗 문단과 방송에서 소개된 김봉겸 도검장이 운영하는 경기도 광주의 대한도검, 이상선 도검장이 운영하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고려왕검연구소등이 있고, 방송에는 안나왔지만 홍석현 도검장의 전통도검연구제작소가 있다. 그 외에 모조 일본도 제작 전문인 부천시의 도검미술과 원도검등에서도 주문제작으로 환도를 만들고 판매하였었으나 현재는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밖에도 국내 도검제작 및 유통사에서도 기성품으로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경복궁이나 수원화성 의장대에 납품하는 업체로는 화랑도검이 유명하다. 대체로 전통환도의 경우 검집이나 손잡이에 쓰이는 어피용 가죽이나 장식재 및 마감등에서 고급재료를 쓰기 때문에 국내에서 제일 많이 유통되는 모조일본도[22]보다 가격이 전체적으로 비싼편이다.

4. 매체에서의 등장


보통 사극에서는 칼집을 '''한 손으로 들고 다니는''' 괴이한(?) 파지법을 사용하고 있다. 추노뿌리깊은 나무 처럼 칼자루가 뒤로 향하도록 패용하는 방식이 고증된 사극도 있지만 이 작품들도 모든 장면에서 고증을 지키는게 아니라 손에 들었다가 허리에 패용했다가 들쑥날쑥이고, 띠돈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끈으로 묶어서 뒤로 돌려매기도 했다.
명량에서는 띠돈 비슷한 고정구로 허리띠에 칼을 매단 것은 고증했으나 칼 찬 사람 전원이 칼자루를 앞으로 향하게 패용하고 있는 고증을 보여주었다.[23]
반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고증이 상당히 철저한 환도가 등장했다. 사용법 역시 기가 막히게 잘 구현하여 호평을 받았다.
만화, 웹툰 쪽에서는 네이버 웹툰 <칼부림>이 조선시대 환도 패용 방식 및 검법을 '''아주 제대로''' 고증했다.
국산 코레류 게임 라스트 오리진에서 금란 S7이 환도를 사용하는데, 고증에 가까운 패용법을 사용한다. #, ##
이것말고도 남한산성,간신,순수의 시대,육룡이 나르샤를 보면 환도패용이 된 걸 볼 수있다.
온라인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 별운검이 등장한다. 레어무기가 아닌 일반 검을 파는 마을에서는 나름 고가의 검이다. 다문천왕의 주요 사냥터인 검창병에서 드랍되며 나름 쏠쏠한 수입원이 된다. 중국의 장수 각성 오행기의 전용무기 재료로 사용되며 향후 전설장수 노부츠나의 재료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5. 관련 문서



[1] 사실 흔히 사용하는 코등이이란 단어는 일본검도에서 유래한 단어다.[2] 환도에서 '환'은 '''고리 환(環)자다. 휘어진 칼이라서 환도가 아니다.''' 기병이나 궁수가 패용할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띠돈을 걸 수 있게 칼집에 고리가 있는 검이라 하여 고리 환자를 쓴다.[3] 지금으로 보면 M4, AK, K2, 드라구노프, SR-25 등 수많은 화기들을 소총용 탄환과 강선 총열 사용 등의 구분법으로 소총이라 구분해 부르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4] 해당 검술이 기록된 더 오래된 문서에 따르면 예도(조선세법)은 중국식 쌍수 양날검, 쌍수도는 묘도(중국식으로 개조한 노다치 ) 왜검은 일본도로 사용한다. [5] 하지만 이렇게 하면 내구력이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단조법으로 만들어진 환도에 비해 일본도는 무른 철(신가네)을 고탄소강(하가네)으로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졌기에 칼등과 경사면을 갈게 된다면 가운데 박힌 무른 철이 노출되어 검이 부러질 확률이 높았다.[6] 참고로 일본도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은 곡률이 아니라 크기인데, 일본도가 한창 보이던 시기에는 보병용 환도의 길이가 한손검 길이 이상으로 제법 길어졌었다.[7] 일본도의 버선코형이라고 불리는 킷사키를 재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만든거라는 주장이 있는데, 애초에 일본도의 킷사키는 그런 식으로 접어 올리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신가네가 노출되어 버리는 재질, 제법상의 한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통짜 쇠를 쓰거나 접쇠를 쓰더라도 칼뿌리 부근에만 시우쇠를 덧대는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채용할 필요가 없는 기술이었다고 보는게 맞다.[8] 운검이라는 명칭은 검의 이름이자 동시에 검을 소지한 호위무사의 직책이기도 하다. 다른 명칭은 '''별운검(別雲劒)'''. [9] 사실 흔히 사용하는 '''코등이'''이란 단어는 일본검도에서 유래한 단어다.[10] 링크.[11] 예를 들어 칼을 찬 상태에서 잠깐 앉아서 쉰다고 가정해보면, 칼자루가 뒤로 가는쪽이 훨씬 편하다는걸 알 수 있다.[12] 그렇다고 허리띠에 띠돈으로 환도를 맨 상태에서 칼자루를 앞으로 가게 둔 것이 고증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image]일례로, 대마도 정벌 당시의 그림인데 맨 좌측의 파란 깃발을 든 장수와 가운데의 앉아있는 장수는 칼자루가 앞으로 가도록 패용했다.[13] [image][14] 재미난 것은 국군의 제식 K2 소총개머리판 부위를 접어서 총구가 아래로 가게 등에 차게 하여 비전투용 작업 시 움직이기 가장 편하고, 유사 시 겨드랑이 사이로 끌어올려 쏘기도 좋은 구조이다.[15] 일본의 도검 제작에서 접쇠공정이 발달하였던 것은 일본에서 사출되는 대부분의 철광석이 사철인 타마하가네(玉剛, 옥강) 형태여서 그 순도가 낮았기 때문.[16] 출처[17] 출처[18] 출처[19] 기사[20]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남아있는 환도 유물 중에서 가죽끈으로 칼자루를 감은 것은 그렇지 않은 것 보다 적은 편이다.[21] 흔히 퍼져 있는 낭설로 혈조가 적을 찔렀을 때 피가 흐르는 길이라거나 공기가 들어가서 뽑기 쉽도록 한다는 것은 별다른 근거가 없다.[22] 중국제의 경우 최하 10-30만 원, 국내산의 경우 60-120만 원 정도에 판매된다[23] 고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실제로도 팽배수나 살수처럼 활을 사용하지 않던 병과는 칼자루가 앞으로 가도록 패용하기도 했고, 일반 하급 병졸들은 띠돈도 없이 허리띠를 이용하여 허리 뒷춤에 대충 꽂고 다니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말타기 같은 건 안 하는 수군 위주로 나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