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키르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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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2. 나폴레옹과의 숨바꼭질
3. 전투 전개
4. 결과


1. 배경


제1차 대불동맹이 박살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전열에서 이탈해버리자 영국만이 프랑스의 맞수로 남았다. 영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해군을 동원해야 했지만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유능한 해군 인프라가 사라져버린 프랑스[1] 로서는 해군이 능력을 제대로 낼수가 없었다.
영국은 프랑스 해군보다 우월한 해군력으로 프랑스의 대서양 군사항구를 모조리 봉쇄해 버렸다. 프랑스는 교역로를 차단당하자 영국에게 타격을 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불철주야 머리를 싸맸고 마침내 방법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인도였다.
당시 영국은 인도와의 동방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그 자금은 강대한 영국 함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프랑스는 인도를 공격하면 영국의 동방 무역에 피해를 줄 수 있고 자연스럽게 영국 함대의 활동에도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시나리오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인도를 무슨 수로 공격하느냐'''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각하자면 대서양을 지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으나 수준 미달의 프랑스 함대가 그런 대규모 수송 작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더군다나 전 세계 바다에 포진한 영국 함대가 이 짓을 가만히 놔 둘 리도 없었다.
하지만 해결책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것은 바로 지중해를 가로질러 수에즈 지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영국 함대가 프랑스의 항구를 봉쇄해두기는 하였으나 이 항구 봉쇄라는 짓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2] 대서양쪽 라인만 틀어막는 것에 그쳤고 지중해에 위치한 툴롱항은 멀쩡했다. 쉽게 말하자면 함대를 동원해 툴롱에서 병력과 물자를 수에즈 지협까지 수송한 다음 이집트를 때려잡고[3] 인도로 진격하자는 복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공 보고서를 총재 정부에 제출했고 총재 정부는 이를 승인한다. 프랑스는 대대적인 준비에 돌입하여 보병 3만, 기병 2천8백, 야포 60문과 공성포 40문, 그리고 공병 2개 중대에 수병까지 총합 4만이 넘는 인원을 원정 병력으로 꾸렸다. 이 밖에도 수학자, 화학자, 역사학자들도 원정군에 포함시켰고 이를 수송하기 위한 전력으로 120문 오세앙급 전열함인 기함 오리앙(L'Orient)을 위시한 전열함 13척, 프리깃함 7척, 수송선 300여척을 준비시켰다.
영국도 프랑스 전역에서 첩보망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툴롱에 대병력과 함선들이 속속들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원정 계획을 철저히 기밀에 부치는 바람[4]에 원정군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마침내 원정군은 1798년 5월 20일, 성공적으로 툴롱 항에서 출항을 개시했다.

2. 나폴레옹과의 숨바꼭질


영국은 스페인 연안에 대기하고 있던 지중해 함대에게 프랑스 함대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곧 호레이쇼 넬슨의 지휘하에 3급 74문 전열함 뱅가드(HMS Vanguard)를 기함으로 전열함 3척, 프리깃함 3척이 차출되어 추격 함대가 편성되었고 추격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지중해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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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키르 만 해전에서 넬슨이 탑승했던 74문 3급 전열함 HMS 뱅가드(HMS Vanguard) 호의 모형.
3급 전열함은 가장 이상적인 스펙을 가진 함선이어서 영국 함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참으로 재수없게도 5월 21일 툴롱 서쪽 해역에서 넬슨의 함대는 폭풍우에 휘말렸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넬슨은 간신히 사르디니아 섬 인근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 섬에 함대를 재집결 시켰으나 프리깃함 3척의 행방은 끝내 찾지 못했다.[5] 넬슨은 함대를 재정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6] 추격을 중단했다.
응급 수리를 끝낸 영국 함대는 다시 지중해에 진입했고 거기서 추가 전력으로 전열함 11척[7]을 증원받는다. 다시금 프랑스 함대 추격에 나선 넬슨은 엘바섬을 향했으나 별 정보를 얻지 못했고 나폴리로 가서야 프랑스 함대의 행방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8] 자신들이 크게 뒤쳐진 것을 안 넬슨은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드에게 프리깃함 몇 척을 빌려줄것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폴리 국왕은 요청을 거부한다.
나폴리를 떠나 몰타로 향하던 넬슨은 또 다른 선박을 만나 나폴레옹의 함대가 5월 16일[9] 말타를 떠나 동쪽으로 갔다는 정보를 얻는다. 넬슨은 직감적으로 나폴레옹의 목표가 이집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속력으로 함대를 몰아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했다.
하지만 6월 29일[10] 영국 함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온한 알렉산드리아항의 앞바다였다. 공황 상태에 빠진 넬슨은 동부 지중해로 다시 방향을 틀어 항구란 항구는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웃긴건 '''프랑스 함대의 최종 목적지가 알렉산드리아항이 맞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함대보다 늦게 항진하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넬슨이 동부 지중해로 향한 사이 나폴레옹은 유유히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해 이집트 원정을 개시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깽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넬슨의 귀에 들어간 것은 7월 28일이었다. 영국 함대는 거의 2달 동안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분노한 넬슨은 미친듯이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상륙했다던 알렉산드리아항에는 수송선들만 정박해있었고 프랑스 주력 함대는 없었다.''' 알렉산드리아항의 수심은 너무 얕아 대형군함인 전열함들이 정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송선들을 확인한 넬슨은 주력함들이 분명히 어딘가 다른 곳에 기항하고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 프랑스 함대의 최종 목적지로 아부키르 만을 지목한다.
마침내 1시간 뒤, 74문 3급 전열함인 HMS 젤러스(HMS Zealous)호가 아부키르 만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3. 전투 전개


프랑스 함대도 영국 함대가 자신들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고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그 대비책이란 '''함대를 아부키르 만 해안선을 따라 일렬로 주욱 줄세워서 방어진을 구축하는 것'''.
프랑스 함대가 이런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였는데 바로 함량 미달의 함선 운용 능력 때문이었다. 범선은 생각보다 매우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어서 함선을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원들이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해군 장교단부터 능력이 떨어졌고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함대를 맞아 기동전을 펼쳐봤자 박살이 날것이 너무 뻔하니 닻이나 내리고 대포나 쏘며 방어전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
계획에 따라 프랑스 함대는 함선과 함선 사이를 (영국 함대가 파고들어 함선 후방에 포격을 해서 진형을 흐트러 뜨리지 못하도록)일렬로 붙여서 전열을 짰고[11] 아부키르 만 입구에 있는 아부키르 섬에 4문의 포와 1문의 박격포를 설치해 놓았다. 함대 전열도 아부키르 만 해안선에 최대한 가깝게 배치해놓아서 영국 함대가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무리해서 해안선과 프랑스 함대 전열 사이로 파고들다가는 함선이 모래톱에 좌초될 위험성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해안선과 전열함 사이는 74문급 전열함 한척이 간신히 통과 할수있는 수준이었다. 프랑스 해군 입장에서는 충분해 보였으나 더 능력이 앞서는 영국해군 입장에서는 어렵긴 하지만 통과를 시도해 볼만한 수준이었던 거였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프랑스 함대는 경계를 소홀히 했고 마침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상당수의 선원들이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하선하여 함대에서 멀리 벗어난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이 원정을 개시하면서 함대가 가진 식량을 전부 가져가 버린 탓이다.
영국 함대가 나타나자 프랑스군은 급히 선원들을 다시 불러모았으나 선원들이 워낙 넓게 흩어진 탓에 단시간에 모이는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전투에 투입할 선원들이 모자라게 되자 프랑스 함대는 급한대로 프리깃함의 선원들을 각 전열함으로 나누어 배치시킨다.
참고로 전열함끼리 맞붙는 전투에서는 가만히 있는 프리깃함에는 먼저 포격을 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배의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나서 비겁한 행동으로 봤기 때문이다. 물론 프리깃함에서 먼저 발포하면 죽도록 두들겨주었다.
한편 프랑스 함대 수뇌부는 작전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브뤼예(Francois-Paul Brueys d'Aigalliers) 제독은 당황하여 처음에는 기존의 방어 전략을 버리고 함대 기동전을 벌일 것을 명령했지만 참모들은 선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여기서 브뤼예 제독은 중대한 판단 미스를 범하게 되는데 영국 함대의 접근 속도가 느린것을 '영국 함대가 해가 지는 시간대를 앞두고 야간전을 벌일 생각이 없다'로 오판하고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선원들의 기량과 인원부족 때문에 기동전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영국 함대가 바로 공격해오지 않은 것은 후미에 있는 함선들이 합류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넬슨과 참모들이 노리는 것은 딱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후미는 내버려두고 선두와 중앙부만 철저히 격파한다.'''
이것은 영국 함대가 아주 즐겨쓰는 전법이었는데 적 함대의 2/3만 골라 두들겨패면 나머지 1/3은 자동적으로 통제 불능이 되어서 상대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후 5시에 이르러 영국 함대는 전투 준비를 모두 끝냈고 프랑스 함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사실 넬슨 제독이 야간 전투를 각오하고 공격을 개시한 이유는 공격적인 성격도 이유지만 영국함대에 유리하게 불고있는 바람이 밤이 되면 약해지는 원인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국 함대가 야간전을 감수하고 당장 싸울 작정임을 알아챈 브뤼예 제독은 크게 당황해 기함에 모인 함장들에게 각자의 함선으로 돌아갈것을 명령하고 응전을 준비한다.
저녁 6시 20분, 영국 함대의 선두에서 쾌속으로 접근해오던 영국 전함 HMS 골리앗(HMS Goliath) 호와 HMS 젤러스(HMS Zealous) 호에게, 프랑스 함대 선두에 있던74문 게리에(Guerrier) 호와 74문 콩퀘랑(Conquérant) 호가 포격을 날리며 전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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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키르 만 해전 전황도
원래 영국 함대는 해안선 안쪽 사이의 공간으로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프랑스 함대의 진열을 따라 쭈욱 늘어져서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골리앗호의 함장인 폴리(Thomas Foley)는 프랑스 함대와 아부키르 만 해안선 사이의 공간을 보고는 ''''저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폴리 함장은 주저 없이 자신의 함선을 빈 공간으로 몰았고 뒤따르던 HMS 젤러스(HMS Zealous) 호, HMS 오라이언(HMS Orion) 호, HMS 오데이셔스(HMS Audacious) 호, HMS 테세우스(HMS Theseus) 호도 폴리 함장의 의도를 눈치채고 뒤따라 진입한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함대는 양쪽에서 적함을 상대하게 되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프랑스 함대는 훈련이 덜되어서 대포 발사 속도도 영국 함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인원 부족으로 왼쪽의 포문은 짐으로 막아놔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예정했던 전열함들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게 설치하려던 밧줄들도 설치하지 못한 함선들이 많아서 영국해군의 전열돌파 포격인 종사를 허용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함대 선두는 함대 중앙부를 목표를 하는 영국 함선들에게 돌아가면서 폭행을 당해 전투 불능상태에 빠졌고 전체적인 전개는 영국 함대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점철된다.
다만 영국 함대도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다. 74문 3급 전열함 HMS 벨레로폰(HMS Bellerophon)과 HMS 마제스틱(HMS Majestic)은 원래 프랑스 함대 중앙 선두를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닻을 내리는 타이밍을 놓쳐 프랑스 함대 기함인 120문함 오리앙(L'Orient)과 80문함 토낭(Tonnant)을 상대하게 된다.(참고로 2단층 80문함은 영국의 98문 3단층 전열함과 거의 맞먹는 대형함이다.) 벨레로폰과 마제스틱은 죽을 힘을 다해 분전하였으나 체급 차이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마제스틱은 함장 웨스트캇(George Blangdon Westcott)이 전사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벨레로폰도 오리앙에게 집중 난타를 당해 중앙 돛대와 뒷 돛대를 잃고 사상자도 200명에 달할 정도의 피해를 입는다.[ 불구가 된 벨레로폰은 급히 탈출하고자 닻줄을 끊었으나 그 과정에서 토낭 호의 포격까지 뒤집어 써서 앞 돛대까지 부러지고 만다. 결국 벨레로폰은 전투 종료시까지 표류하는 신세가 된다.
한편 가장 후위에서 접근하던 74문 3급 전열함 HMS 컬로든(HMS Culloden)은 진입하던 도중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었다. 50문 4급 전열함인 HMS 리앤더(Leander) 호와 브릭함(brig)[12]인 HMS Mutine(뮤틴) 호가 구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컬로든은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전투 양상은 시종일관 영국 함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 컬로든 호를 구조하려던 리앤더 호와 뮤틴 호도 컬로든을 포기하고 전투에 돌입해 오리앙호에게 포격을 가한다. 설상가상으로 HMS 스위프트슈어(Swiftsure) 호와 HMS 알렉산더(Alexander)호도 오리앙을 노리고 달려들었고 오리앙은 집중 포격을 당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미 벨레로폰 호와 맞붙은 상황이어서 오리앙은 다수의 적함을 상대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브뤼예 제독은 날아온 포탄에 허리가 부러져서 얼마후에 전사하고 만다.
마침내 밤 9시경, 오리앙 호 하갑판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일어난다. 스위프트슈어 호의 함장인 할로웰(Benjamin Hallowell)은 화재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서 하갑판을 향해 집중 발포할 것을 명령했고 오리앙 호의 불길은 더욱 거세진다. 오리앙 호가 곧 폭발할 것이 확실시 되자 주위에 있던 함선들은 서로 적과 아군 모든함이 잠시 교전을 중단하고 최대한 오리앙호로부터 멀어지려 함과 동시에 선원들을 동원해 함선에 바닷물을 뿌려댔다.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결국 오리앙 호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오리앙 호에 탑승하고 있던 1천여명의 선원들도 대부분 몰살 당했다. 나중에 학자들에 확인된 사실을 보면 한번이 아니라 2차례 이상에 걸쳐서 대폭발이 났다고 한다.
프랑스 함대 후위는 전투 내내 아군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그것은 프랑스 함대 후위가 바람이 불어가는 위치인 풍하(leeward)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4척의 함선(80문 전열함 귀욤 텔(Guillaume Tell)[13], 74문함 제네로(Généreux), 프리깃함인 쥐스티스(Justice), 디앤느(Diane))은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데 성공한다.
전투는 8월 1일 저녁부터 시작되어 8월 2일 아침에야 끝이 났다. 프랑스 잔존 함대의 최종 항복은 8월 3일에 받아내었고 아부키르 해전은 영국 함대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영국측 사상자는 전사 218명에 부상 677명, 프랑스측 사상자는 2천명에 달했다.[14]
프랑스 함대는 13척 중 대다수가 수리 불능으로 대파되어 영국 함대의 전력이 되지 못했고 고작 3척의 전함만 영국 해군에 편입되었다.
나폴레옹은 전황이 불리해지고 본국의 사정도 어지러워지자[15] 소수의 병력과 함께 슬그머니 철수해버렸고 이집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자료 참고: http://blog.daum.net/nasica/6862476
[1] 해군 고위 장교는 대부분 귀족출신 이었다. 혁명 과정에서 귀족출신 해군장교들을 대부분 단두대에서 사형시켜 버렸으니 해군을 운용할 역량이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2] 이 시대의 범선, 그러니까 전열함은 목재로 건조되어서 삭구와 밧줄등을 지속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했다. 즉 '''돈이 많이 깨진다'''는 것.[3] 당시 이집트오스만 제국의 영토이긴 했으나 이 시기에는 사실상 별 영향력을 받지 않는 상태였다.[4] 원정 계획은 나폴레옹 본인과 총재들, 고위 인사들만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출항 이후에야 자신들의 목적지가 이집트라는 것을 알았고. 영국은 프랑스 함대가 툴롱에서 출항한지 거의 2달 뒤인 7월 12일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5] 이 프리깃함들은 폭풍우에 손상을 좀 입긴했으나 작전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프리깃함 함장들은 이 정도의 폭풍우를 겪었다면 이미 함대는 대파되었을테니 넬슨이 수리를 위해 지브롤터로 되돌아갈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먼저 지브롤터로 돌아간 것이었다.[6] 전열함은 크고 속도가 매우 둔하였기에 배수량이 가볍고 속도가 빠른 프리깃함들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 했다. 프리깃함을 상실한 상태에서 프랑스 함대를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7] 이 중 한 척은 4등급함 50문급 전열함이었고 증원군에 프리깃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보 수집에 차질이 생긴 것.[8] 프랑스 함대가 시실리를 지나 말타 섬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 선박이 나폴리에 입항했었다.[9] 실제로는 5월 18일에 출항.[10] 사실 6월 22일~23일 밤 사이에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의 거리가 10Km 정도로 좁혀진 일이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 함대가 이 사실을 몰랐고('''정확히는 '영국' 함대인줄을 몰랐다''') 아무런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아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가 코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알렉산드리아로 항진했다.[11] 이걸로도 모자라 함선과 함선 사이를 스프링 밧줄로 묶어놓기까지 했다.[12] 프리깃보다 더 작은 함급[13] 귀욤 텔은 아부키르 해전 당시에 빌뇌브 소장이 탑승한 배이며 나중에 몰타섬에서 영국 함대에게 나포되어 HMS 몰타(HMS Malta)가 된다.[14] 부상자 중 상당수는 결국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