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퍼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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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군인, 싱가포르 전투 당시 영국군 지휘관이었다.
2. 생애
영국 하트포트셰어 아스펜던에서 1887년 목양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목화재배도 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종군하던 중 1916년의 솜 전투 당시 소위로 임관했다. 1917년에는 대대장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차대전 후 아일랜드의 반란진압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퍼시벌은 미국의 샌드허스트, 러시아, 나이지리아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에 영국령 말레이로 파견되었다. 1939년 프랑스 파견군 참모장, 제 43 사단장으로서 1940년 5월의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전한 후 귀국 후 제 44 사단장으로 영국본토의 연안방어에 전념했다. 1941년 중장으로 영국극동군 사령관(말레이군)이 된 퍼시발은 말레이에 주둔한 6개 사단의 증강과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수하에 있던 부대는 훈련이 덜 된 2개 사단 정도였다.[1]
진주만 공습 이후 12월 8일 오후 1시 30분.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의 제 25군 산하의 18사단이 영국령 말레이 반도 최북단의 코타마루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싱가포르 전투가 개시되었다. 일본군은 도처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영국군은 항공기와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방어선 조차 구축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개전 이틀 뒤인 12월 10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와 순양전함 리펄스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되었고 1942년 2월 8일 싱가포르가 포위되었다. 1주일에 걸친 격전 끝에 싱가포르는 함락되었고, 결국 퍼시벌 장군은 항복했다.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협상테이블에서 야마시타가 영국군 총사령관이였던 퍼시벌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2]
그 후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만주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되었다.[3] 만주국의 패망과 일본의 항복과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퍼시벌은 연합군에게 구출되어 1945년 9월에 도쿄 만의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에 출석하기도 했다. [4] 영국으로 귀환한 퍼시벌은 그 후 퇴역해 1949년에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본국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96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