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전투
1. 개요
일본어 : シンガポールの戦い
영어 : Battle of Singapore, Fall of Singapor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12월 8일부터 다음해 2월 15일까지 영국군과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놓고 벌인 전투.
2. 영국 동양함대 궤멸
일본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일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동남아 지역에서의 세력 약화와 동남아 공략의 발판 및 싱가포르에 영국이 오랜 세월 구축한 각종 시설을 포함한 강력한 해군 기지를 얻으려 했고, 영국군은 당연히 그러한 일본군의 공격을 수비하는 처지였다.
우선 태국과 협의라고 쓰고 강요라고 부르는 것을 해서 미리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 다음,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일본 육군은 근처 비행장들에 전개한 육군 항공대를[1] 동원해 말레이 지역의 비행장들을 공격해 영국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킨다.
이에 영국군은 급히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 전함 리펄즈를 주축으로 함대를 꾸려 지원에 나서지만 이미 개전 초의 기습으로 인해 손상된 공군 전력으로는 아군 전투기로 공중 엄호를 할 수 없었으므로 말레이 해전에서 단순 폭격기만들에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하고 만다. 이것은 '''전함이 함대 결전 없이 항공기의 공격만으로 격침된 사상 초유의 전투'''였기 때문에 연합군 측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군은 이 전과를 바탕으로 한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까지 만들어가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3. 말레이 반도 점령
결국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 별 다른 방해 없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지만 일본군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총 병력이 겨우 3만인 데 비해 영국군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며, 진격로는 정글을 통과하는 길 3가닥, 게다가 정글에 총 3개 라인의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더군다나 싱가포르까지 거리는 800km를 넘을 뿐 아니라 보급은 일본군이 더더욱 나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인데다가, '''정글에서는 전차 같은 거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말레이 반도에 전차가 한 대도 배치되지 않았던 반면 일본군은 '''97식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과부제조기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전차이지만, 당시 연합군 측은 전차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대전차 능력이 매우 부족했고 미국 또한 필리핀에서 이 전차에게 호되게 당하게된다. 그리고 치하의 좁은 전폭과 가벼운 차체로 인해 대활약을 했다. 특히 진격로상의 대부분의 교량이 20톤 이상의 차량은 건너기 힘들었다.
그런데 치하는 15.8톤이었으므로 현지의 빈약한 교량과 밀림의 험로 등을 통과하는데 강력한 이점으로 발휘되었고, 여기에 치하의 '''없다시피한''' 장점 중 하나인 순간 가속 능력 등도 보탬이 되어 보병 위주의 영국군를 상대로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또한 전차라는 물건을 난생 처음 보는 식민지군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어 와해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만약 전차가 미리 배치되어 대전차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였다면 공황 상태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군은 전사에서 전차를 미리 배치하지 않았던것이 실수라고 명백히 인정하였다. 또 영국인들은 말레이를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의식이 호주군에 비해 부족했기에 일본군에게 밀렸다.
게다가 현지의 영국군은 기존의 숙련된 병력은 얼마 안 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 긴급한 유럽 전선으로 파병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말레이 반도에 남아 있던 영국인 연대들의 일부 대대들[2] 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이후의 전투에서 '''밥값은 다했다.'''
영국인 병력이 유럽 전선으로 파병된 후 인도인 부대가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파견되었다. 인도인 부대를 주축으로 해서 여기에 제8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주축이 된 오스트레일리아인 부대 및 현지 원주민까지 동원해서 급히 징집된 병력이 주력이었다. 호주군은 말레이를 지키는것이 자국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 열심히 싸웠다.
일본군이 골치를 썩힌 부대는 오직 호주군과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시타 토모유키는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들 중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없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인도인 부대는 영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낮았다. 인도인들은 뭐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영국 놈들 입맛대로 싸워야 하냐는 인식이 가득했다.[3] 실전 경험도 없었고 훈련도 부족했다. 제3인도 군단 예하 제11 인도 사단과 제9인도 사단 및 4개 보병 여단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3개 보병 여단은 1월 중순 이후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거기다 노동자가 부족해서 습기 많고 벌레가 들끓는 정글의 방어선을 스스로 만들어서 지켜야 하는 사태가 되자 곧바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에 쉽게 와해되어 갔다.
또한 개전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영국군이 세웠던 투우사 작전 계획 또한 패배의 원인이였는데 개전이 임박하면 태국을 공격하여 싱고라 항을 점령하여 일본군이 싱고라 항을 사용하지 못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는 태국의 중립을 무시하는 문제가 있었고 12월 6일에 일본 선단을 발견하여 작전을 발동할 기회가 있었으나 태국의 기세에 눌려 영국은 작전을 발동하지 못하였다.
공격 작전을 위해 부족한 자금과 훈련이 공격에 배정되다 보니 방어선도 부실해지고 공격 계획의 취소로 병사들은 사기의 저하와 동시에 부실한 방어선에 들어가는 악영향을 주었다.
여기다가 방어 전력의 핵심으로 파견된 영국인 편성의 제18사단은 1월 25일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뒤늦게 100 경전차 중대의 전차가 양륙되었지만 일본군의 장갑차 수준의 경전차인 빅커스 마크6은 무장이 12.7mm 기관총에 불과하여 하고는 제한적으로 상대할수 있어도 치하는 상대할수 없으며 숫자도 18대에 불과해 150대를 싱가포르에 투입한 일본군에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어차피 수가 많아봤자 일본군 전차에 비하면 성능이 현저히 떨어져 별 도움도 안됐겠지만-- 거기다가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유지하던 해군 병력들은 육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영국군 사단을 수송한 선박편을 타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전투 당시 치하가 활약한 것이 동등한 입장에선 그저 "쯧쯧, 저거 전차 맞나요?"하는 허접 전차도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대전차 화기가 부족한 보병에겐 사신임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전형적인 사례가 말레이 반도 북단의 지트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97식 전차보다 더 약체이던 95식 경전차를 소대 규모로 지원받은 600명 규모인 일본군 혼성 부대의 우회 공격에 방어하던 제11인도 사단의 병력은 말 그대로 '''단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만 쳤다.''' 정예 부대인 구르카 대대까지 도망쳤는데, 행군 도중에 삼림에서 갑자기 전차가 튀어나오면서 사격을 해댔으니 도망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구르카 대대는 나중에 다시 모여서 전투에 들어가기라도 했는데 기타 인도인 부대들은 훈련 부족으로 인해 한번 무너지면 그대로 궤주하면서 재규합이 도통 되지 않았다.
거기에 지휘부의 판단 미스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1월 7일에 슬림강 방어를 맡던 11사단의 경우 주 방어선을 탄종 말림으로 잡았고 대전차포 연대와 대전차 지뢰를 1400개나 보유했으면서도 전초 방어선인 슬림강에 무려 2개 여단을 배치하면서 대전차포 중대와 대전차 지뢰 몇십개만 주는 삽질로 방어선을 스스로 붕괴시켜면서 자멸하였다.
다만 영국 입장에서는 대전 말기까지 주 전선은 유럽이었기에 아시아 전선은 구식 무기의 처분장에 가깝게 인식해 무기의 질이 매우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미 구식 병기화된 마틸다 전차[4] 도 투입되자마자 '''이동 벙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인한 능력을 발휘했으니, 소수라도 전차가 있었다면이라는 달라졌을거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급강하 폭격과 근접 항공 지원의[5] 밥이 됐을 것이다. 이전 서술에서는 전차를 보고 도망친 영국군에게 마틸다가 있어도 소용없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위에서 보듯 대전차 무기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차와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쳐서 대전차전 무기를 갖춘 후 싸우는게 더 이득이다. 그리고 마틸다같은 전차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유리하다.
참고로 일본 측 기록에 나오는 싱가포르 전투 당시의 연합군 기갑은 '''브렌건 캐리어''' 등의 무한궤도가 달린 운반 차량이다. 또한 '''장갑이 차량을 전부 덮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단은 완전 무방비였다.''' 그냥 일본군의 장갑차 수준. 그나마 싱가포르에 뒤늦게 투입된 경전차 빅커스 Mk. E는 무장이 12.7mm 기관총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런 차량으로는 치하를 이론상으로밖에 격파할 수 없다. '''그 이하 장갑차 정도라면 모를까.'''[6] 그래도 치하의 후면 하부와 같이 취약점을 12.7mm 이상 구경의 철갑탄으로는 관통 가능하긴했다.[7] 하지만 전차의 후면으로 돌아가서 기관총탄을 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은륜 부대라고 불리는 자전거 부대까지 편성해서 전진을 하고 영국군이 다리를 끊는 걸 저지하고 공병들을 기둥으로 한 인간 다리를 세우면서까지 빠른 진격을 해내는 '''일본판 전격전'''[8] 을 하여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격했다. 결국 말레이 반도는 빠른 시간 내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결국 영국군은 수많은 물자와 병력을 잃고 싱가포르로 퇴각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물자를 상실했는지 말레이 반도 전격전 당시에 일본기가 영국제 연료를 비행기에 넣고, 영국제 항공 폭탄을 달고 영국군에게 폭격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넘어간 쌀이 무려 32만 5천톤에 달했다. 한 명의 병사에게 연 150kg씩 배급해도 20만명의 병사가 10년 버틸 수 있는 막대한 양이였다.
4. 싱가포르 함락
영국군은 싱가포르 방어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방어물과 중포대는 먼 바다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는 용도로 건설된 것이라서 말레이 반도 쪽의 육지에서 공격하는 것에 대항하기에는 위치도 안 좋을 뿐 아니라, 심지어 중포탄도 적 군함을 격침시킬 목적의 철갑탄이 대부분이라 좁은 해협을 건너오는 일본군 보병에게는 별 피해를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 싱가포르 섬 북쪽에 임시 진지를 가설하고 섬 전체의 해안선을 경계하느라 병력의 분산이 심해졌다. 영국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쉬운 섬 동쪽에 상륙할거라고 생각했고 일본군도 밤마다 트럭에 헤드라이트를 키고 섬 동쪽으로 갔다가 끄고 돌아오는 등의 방법으로 영국군이 동쪽에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도하 거리가 짧고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호르 해협의 맹그로브 지대에 5사단과 18사단의 13개 대대가 한꺼번에 상륙하여 호주군 22여단을 압도하고 상륙에 성공하였으며 근위 사단은 둑길을 상륙하던 시점에 사단장의 오판으로 상륙에 실패할뻔 했으나 호주군 지휘관의 단독적인 후퇴로 인해 상륙에 성공하면서 영국군과 격전끝에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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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군은 싱가포르섬의 수원지를 빼앗기는 등의 악재가 겹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아서 퍼시발 장군 등 영국군 지도부는 결국 일본군에 항복, '''개전 60여 일 만에 9만에 가까운 영국군이 포로가 되어버린다.''' 항복 회담장에서 퍼시발 장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 일갈했다고 알려진 '''"예스카, 노카?(예스냐, 노냐?)"'''라는 말은 한동안 일본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다만 야마시타 토모유키 본인은 소문을 부정하며 자신은 그렇게 압박주는 사람이 아니라며 꽤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회담 당시 통역관의 실력이 영 별로라서 버벅이자 답답해한 토모유키가 통역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냐, 노냐'로 간단히 물어 봐라."라고 말했는데, 이게 기자의 윤색을 통해 '예스카, 노카' 일화로 유명해진 것.
나중에 퍼시발 장군은 일종의 보복 행위로서 미주리호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 참관 명목으로 나온다. 바탄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미 잡지에서 다루어졌었지만 의외로 졸장으로 이름이 남았다. 실제로 전시 중 중립국을 통해서 출간된 일본 포로 수용소 선전 잡지에서 웨인라이트와 즐겁게 낚시하면서 띵가띵까 노는 퍼시벌의 사진이 공개되며 여러모로 패장으로 알려졌다.
단, 웨인라이트는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가 대통령 직접 명령에 의해 탈출한 후 사방 천지에 적뿐이며 고립되고 부서져가는 코레이도르 요새에서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지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한동안 저항을 더 지속, 미국 내에서의 평가가 크게 나빠질 일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어찌 되었든 현지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 해군 지원까지 받던 퍼시발 장군이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래서인지 일본 항복 조인식 이후에는 영국의 주요 정치가, 저명 인사, 군인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웨인라이트가 전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대통령에게 '''명예 훈장'''을 직접 수여받고 제4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것과는 천양지차. 이는 힘이 세다고 시건방진 사촌인 미국인이나 자국보다 훨씬 열악한 국력을 가진 네덜란드보다도 위대한 영국의 군대가 '''먼저 백인 흉내를 내는 일본군에게 항복했다는 인종차별 의식이 적용된 괘씸죄가 아주 크게 작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퍼시발에게 주어진 전력의 상태라는 것은 숫자는 많아도 훈련과 사기가 부족한 인도인 - 호주인 부대를 주력으로 삼아 작전 기간 막바지까지 싸워야 했고, 지상군을 지원해야 할 공군력은 일찌감치 사라진 상태여서 싱가포르 방공만도 힘에 겨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싱가포르 공략을 위해 일본 육군, 해군이 동원한 항공기는 작전기만 617기고 예비기도 182기였지만, 영국 공군은 싱가폴과 말레이에 고작 246기만 전개시키고 있었고 그 주력도 F2A 버팔로같이 제로센에게 밀리는 것들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군 전력조차 작전 초반에 사라지면서 나중에는 '''싱가포르에 주둔한 해군은 육군에게 알리지 않고 해군 기지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기지 병력을 먼저 철수시켰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당장 '''영국 육군이 반도를 방어하는 가장 큰 전략적 목적이 오직 싱가포르 북안의 세레타에 건설된 거대한 해군 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고, 이를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려면 싱가포르 섬만 방어해서는 안되고 말레이 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군에게 해군이 해군 기지를 방폐하고 철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그 파괴조차 육군에게 떠넘긴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오히려 일본 해군은 말레이 해협 북단에서도 주정을 이용한 소규모 상륙전을 반복해가며 반도에서의 일본 육군 작전을 지원했고, 심지어는 페낭 섬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막아야 하는 영국 해군은 그냥 가만히 보기만 했다. 영국군의 막대한 물자 보급 물품 중에서도 1차 대전 이래 지상전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인정된 전차는 겨우 경전차 18대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퍼시발 자신은 작전 기간 내내 말레이 육군의 사령관으로 지휘했고 말레이와 싱가포르 전체의 영국 육군, 해군, 공군을 지휘하는 권한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퍼시발이 아니라 몽고메리가 말레이군 사령관이었더라도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방어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사가들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퍼시발은 1930년대에 말레이 식민지 육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올바른 전략적 판단에 의거한 제대로 된 방어 계획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말레이 육군 사령관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진행되는 사태에 질질 끌려다녔다. 특히 '''계속 후퇴만 요구'''하는 제3인도 군단장인 루이스를 휘어잡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영국군은 반도에서 지리멸렬한 전투만 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퍼시벌의 졸렬한 지휘는 그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는 전사가들조차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고, 이것만으로도 퍼시벌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넘쳐난다.
5. 전투 결과
이 패배로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및 그 주변의 식민지를 상실하였으며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까지 표현했다. [9]
이 전투로 싱가포르를 얻은 일본은 쇼난(昭南)이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쇼와(히로히토 당시 일본 덴노 재위기의 연호) 시대에 차지한 남쪽 땅이라는 뜻이다.
말레이와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에서 작전하면서 노획한 거대한 물자들로 인해 일본군은 이후의 공세조차 보급은 현지 조달을 위주로 세우게 되었는데, 유럽인에 의한 식민화 이전부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명화된 물자가 풍부한 이들 지역과는 달리 과달카날, 솔로몬이나 뉴기니는 훨씬 궁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싸운 일본군은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싱가포르에서 노획한 온갖 사치품과 군수 물자로 일본군은 영양 상태가 매우 좋아지고 장비도 충실해졌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은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전선에서는 차가 없어서 사단장 이하는 모두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사령부 참모들은 위관급 장교까지도 노획한 고급 승용차를 배차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싱가포르 지역은 영국이 탈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독일과의 싸움에 우선 집중해야 했던 영국의 처지로는 태평양이나 인도양에서 본격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시기는 1945년 초에나 가능했고, 따라서 싱가포르의 탈환은 1945년 가을에나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연합군의 반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들은 재수 없게 격전지로 증원간 병력이나 일부 수상함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놀고 먹다가 전쟁이 끝나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병력이 격전지로 차출되었고 1945년에 들어서 연이은 폭격에 전후에는 말레이 진격전이나 싱가포르 점령시 벌인 잔학 행위('''주로 화교에 대한 학살''')에 대한 전범 재판으로 인해서 그렇게 편한 말로는 겪지 못했다.
6. 기타등등
당시 야마시타의 참모로는 이전부터 온갖 작전상의 독단과 패착을 연발했던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있었는데, 마사노부에게 너무 시달린 야마시타는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리고 "절대로 이 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말라"고 평가했다. 자세한 건 츠지 마사노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8사단 사단장은 훗날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 무타구치 렌야가 기용되었다.
싱가포르는 당시 일본에 함락된 2월 15일을 '총력안보(total defence)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민방위 관련 태세의 점검과 대국민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기준에서 외국의 무력 점령을 받은 유일한 사례였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되었던 점을 반영한 듯.
[1] 이때 동원된 전투기가 일본 육군의 신예기인 하야부사들이다. 이전 항목에는 제로센을 동원했다고 나오는데 제로센은 해군 항공대 함재기다. 하야부사랑 제로센이 거의 똑같이 생겼다보니 일본 국민들도 헷갈려 하야부사의 공적도 먼저 활약하기 시작한 제로센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작전을 세우기 위해 엄밀히 적기를 식별해야할 미군들도 하야부사랑 제로센을 자주 헷갈렸다.[2] 주로 스코틀랜드 연대 예하였다.[3] 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이 영국군 휘하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영국은 약속하던 인도 자치를 어겼던 기억이 있던 터라 해외 주둔 인도인들은 대충 복무하면 그만이다라는 시각이 가득했던 점도 컸다.[4]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까지 독일군은 애를 먹었지만, 초반의 이야기일 뿐이다.[5] 당시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하야부사와 Ki-51 습격기(급강하 폭격기) Ki-21 폭격기등을 주로 운용했는데 250kg 폭탄을 장착 가능한 급강하 폭격기선에서 정리가 가능했다. 아무리 마틸다라도 250kg 폭탄을 맞으면 대파된다.[6] 일본군에서 전차 판정도 못받는 장갑이 빈약한 장갑 차량들은 어느 정도 50구경이 먹히긴 했다.(물론 소련, 영국, 이탈리아 할 것 없이 이런 탱켓류 차량은 운용되었다.) 치하는 그래도 명색이 전차였기에 기관총탄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7] 일반 보병이 철갑탄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8] 합동군사대학교에서 편찬하는 군사평론에서도 말레이전 당시 일본군의 진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일본판 전격전이라고 평가된다. 당시 일본군의 정보기관과 부족한 시간을 적극 활용하여 현지 적응 훈련 및 지침서 하달 등 일본군의 준비태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니 장교로 입대하거나 업무를 마치고 약간 시간이 남는 행정병이 있다면 한 번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만일 입대를 했는데, 둘 다 아니다? 도서관에 관련 내용이 있는 과월호가 도서관 한구석에 짱박혀 있기를 빌자.[9] 2차세계대전 재조명이라는 다큐에서는 퍼시벌의 항복으로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수 세기 동안 지켜온 위신은 고작 몇 주 만에 사라졌다고 대차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