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오브 웨일스

 

1. 영국 왕세자의 칭호
1.1. 역대 프린스 오브 웨일스
2. 영국 해군의 군함
3. 홍차의 한 종류


1. 영국 왕세자의 칭호


영어: Prince of Wales. [1]
웨일스어: Tywysog Cymru
[2] 대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즉, 영국왕세자에게 붙는 칭호이다. 현재 이 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 찰스 왕세자. 확정상속인에게만 수여되는 칭호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라도 왕의 장녀나 방계 친척 등에게는 수여되지 않아왔으며, 현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도 추정상속인이었기 때문에 웨일스 공을 거치지 않았다.[3] 영국 왕실이 2015년에 남녀 차별이 전혀 없는 '절대적 장자녀 상속제'로 왕위 계승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에 훗날 왕의 첫째 자식으로 태어난 장녀는 웨일스 여공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일단 지금 영국 왕실은 워낙 아들복이 많아[4] 가까운 시일 안에 웨일스 여공이 탄생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즉 엘리자베스 2세가 별세한 다음 새로운 여왕을 보려면 현재 왕실 구성원들을 볼 때 빨라야 22세기에나 가능할 것이다.
영국의 공작(Duke)과 혼동이 많으나 프린스(Prince)는 왕자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권자나 왕족, 소국군주, 작위로의 공작이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어쨌거나 이 프린스는 왕자의 의미가 아니라 영국 고유의 작위이다. 웨일스 공(公) 내지 대공으로 번역하는 것은 귀족 작위로서의 프린스를 대개 동양식 오등작의 비슷한 작위인 공이나 대공으로 번역하는 데서 온 것이다. 주한영국대사관은 웨일스 공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웨일스의 프린스란 작위는 13세기에 접어들어 웨일즈 지역을 통일한 러웰린(Llywelyn)이 스스로를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이라 칭한 데서 나왔고, 차후 잉글랜드의 헨리 3세가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면서 웨일스 공국(Principality of Wales)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헨리 3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무력으로 정복하면서 웨일스 공 역시 잉글랜드의 작위로 편입되었다.
영국의 왕세자가 웨일스의 프린스 칭호를 받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원래 웨일스는 프린스(Prince)라는 지배자의 명칭을 사용하며 잉글랜드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의 귀족들을 모아놓고 충성서약을 요구하였으나 웨일스 귀족들은 '''웨일스의 지배자는 웨일스 출생이며 웨일스어를 할 줄 알 것, 비행이 없어야 할 것''' 등의 조건을 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그 조건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1285년 왕비를 웨일스의 카나번 성으로 데려와 에드워드 2세를 낳게하고 웨일스 출신의 사람을 유모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웨일스의 귀족들을 불러들여 '''"이 아이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가장 먼저 하게 될 말은 웨일스의 말일 것이다."'''라 선언하였다. 이에 웨일스 귀족들도 만족하고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의 작위를 주었다. 이것이 이후 전통으로 굳어져 영국 왕세자의 명칭은 실제로 웨일스와는 별 상관 없어도 항상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가 되었다.

워낙 유명한 일화이기 때문에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역사가들의 연구 결과 '''후대에 창작된 내용'''.
에드워드 2세가 웨일스 원정이 한참 진행 중이던 시기 웨일스의 카나번 성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에드워드 1세는 말 안 듣는 웨일스 공국과 그에 복속된 제후들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있던 시기였기에 웨일즈 귀족들이 저런 요구를 했다간 바로 밟아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2세가 웨일스 공 작위를 수여받은 것은 1301년으로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직후 상징적인 의미에 따라 직접 서임한 작위이다. 저런 내용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어쨌든 에드워드 1세 이후 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2세도 부왕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이나 왕세자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웨일스 공 칭호를 수여하였고, 후대 왕들도 이를 따라하면서 일종의 관례로 자리매김하였고 이후 잉글랜드 왕가에서 왕위 계승 순위 1위인, 장차 왕이 될 왕족에게 부여하는 칭호로 굳어졌다. 중세 이후로는 명목상 칭호에 머물렀지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의 제안이 영향을 미쳐 웨일스의 카나본 성에서의 책봉식을 부활시켜, 1911년 미래의 에드워드 8세, 1969년 찰스 왕세자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책봉식이 있었다.

▲ 1969년 찰스 왕세자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책봉식 기록영화
그러나 찰스 왕세자의 후처 카밀라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Princess of Wales)임에도 불구하고 언론 등에서는 웨일스 공비로 부르지 않는데, 웨일스 공비는 대체로 찰스 왕세자의 전처 다이애나 스펜서를 가리켰고, 찰스가 카밀라와 재혼한 과정이 깔끔하지 못해 왕실에서도 감히 이 타이틀을 다이애나한테 떼서 카밀라에게 붙여줄 엄두도 못 낸다. 따라서 카밀라를 호칭하는 가장 격이 높은 작위는 '왕의 맏며느리' 격식에 해당하는 콘월 공작부인·로스시 공작부인(스코틀랜드) 칭호다.
비슷한 경우로 영국 왕의 차남에게 수여되는 작위인 요크 공작(Duke of York)이 있으며, 현 요크 공작은 엘리자베스 2세의 차남 앤드루 왕자이다. 이상하게도(어떻게 보면 다행이게도(?))[5] 역대 요크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준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남성 상속인이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앤드루 왕자 또한 현재 딸만 둘이라 작위를 물려줄 수 없다.[6]
유럽 중 태자(세자)에게 전용 작위를 주는 다른 사례로, 프랑스 왕국의 경우 도팽, 스페인 왕국의 경우 아스투리아스 공, 벨기에의 경우 브라방 공,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 타르노보 공, 신성 로마 제국로마왕[7]이다. 도팽은 원 뜻이 돌고래이며 돌고래 문장을 쓰는 비에누아 백작의 별칭으로 프린스 오브 웨일스처럼 원래는 왕실 구성원의 작위가 아니었으나, 비에누아 백작이 도피네[8]를 프랑스 왕에게 판 것을 왕이 세자 전용으로 써먹은 것이다.
2019년 6월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영국 찰스 왕세자와 만난 후의 트위터에서 이 칭호를 '고래의 왕자'(Prince of Whales)로 썼다가 국내외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9]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는 이에서 따와 타르가르옌 가문의 왕세자들은 대대로 드래곤스톤 공으로 임명받았다.
전쟁사, 특히 2차대전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이 칭호에서 따온 영국 군함의 함명으로 기억된다.

1.1. 역대 프린스 오브 웨일스


'''이름'''
'''출생'''
'''사망'''
'''재임'''
'''에드워드 2세'''
카나번의 에드워드
1284년 4월 25일
1327년 9월 21일
1301년 2월 7일 ~ 1307년 7월 7일
흑태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1330년 6월 15일
1376년 6월 8일
1343년 5월 12일 ~ 1376년 6월 8일
'''리처드 2세'''
보르도의 리처드
1367년 1월 6일
1400년 2월 14일
1376년 11월 20일 ~ 1377년 6월 22일
'''헨리 5세'''
몬머스의 헨리
1386년 9월 16일
1422년 8월 31일
1399년 10월 15일 ~ 1413년 3월 21일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1453년 10월 13일
1471년 5월 4일
1454년 3월 15일 ~ 1471년 4월 11일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1411년 9월 21일
1460년 12월 30일
1460년 10월 31일 ~ 1460년 12월 30일
'''에드워드 5세'''
요크의 에드워드
1470년 11월 4일
1483년?
1471년 6월 26일 ~ 1483년 4월 9일
미들햄의 에드워드
1473년
1484년 3월 31일 또는 4월 9일
1483년 8월 24일 ~ 1484년 3월 31일 또는 4월 9일
아서 튜더
1486년 9월 20일
1502년 4월 2일
1489년 11월 29일 ~ 1502년 4월 2일
'''헨리 8세'''
헨리 튜더
1491년 6월 28일
1547년 1월 28일
1504년 2월 18일 ~ 1509년 4월 21일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튜더
1537년 10월 12일
1553년 7월 6일
- ~ 1547년 1월 28일
헨리 프레더릭 스튜어트
1594년 2월 19일
1612년 11월 6일
1610년 6월 4일 ~ 1612년 11월 6일
'''찰스 1세'''
찰스 스튜어트
1600년 11월 19일
1649년 1월 30일
1616년 11월 4일 ~ 1625년 3월 27일
'''찰스 2세'''
찰스 스튜어트
1630년 5월 29일
1685년 2월 6일
1638년 - 1641년 ~ 1649년 1월 30일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1688년 6월 10일
1766년 1월 1일
1688년 7월 4일 ~ 1688년 12월 11일
'''조지 2세'''
조지 어거스터스
1683년 11월 10일
1760년 10월 25일
1714년 9월 27일 ~ 1727년 6월 11일
프레더릭 루이스
1707년 2월 1일
1751년 3월 31일
1729년 1월 8일 ~ 1751년 3월 31일
'''조지 3세'''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
1738년 6월 4일
1820년 1월 29일
1751년 4월 20일 ~ 1760년 10월 25일
'''조지 4세'''
조지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1762년 8월 12일
1830년 6월 26일
1762년 8월 19일 ~ 1820년 1월 29일
'''에드워드 7세'''
앨버트 에드워드
1841년 11월 9일
1910년 5월 6일
1841년 12월 8일 ~ 1901년 1월 22일
'''조지 5세'''
조지 프레더릭 어니스트 앨버트
1865년 6월 3일
1936년 1월 20일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8세'''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천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1894년 6월 23일
1972년 5월 28일
1910년 6월 23일 ~ 1936년 1월 20일
찰스 필립 아서 조지[10]
1948년 11월 14일

1958년 7월 26일 ~ 현재

2. 영국 해군의 군함



2.1. 킹 조지 5세급 전함


[image]
기공
1937.1.1
진수
1939.5.3
취역
1941.1.19
침몰
1941.12.10
기준배수량
38,000톤
길이
227미터
너비
31미터
최고속도
28노트
주무장
356mm 4연장포 2기 / 연장포 1기 (10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군함. 어원은 당연히 영국 왕세자의 칭호. 네임쉽조지 5세이므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명이 에드워드 8세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2번함으로, 1941년에 취역한 영국의 최신예 전함이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에 참여했고 덴마크 해협 전투에서 비스마르크가 쏜 주포탄에 함교가 피격당하고 4연장 주포탑들이 기계적 문제 등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더는 전투를 속행할 수 없어서 퇴각한 뒤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가 귀환하여 6주간 수리를 받았다. 막 취역하여 혹독한 첫 전투를 치렀는데 퇴각하기 전 한방을 제대로 먹여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 도망가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11][12]
이후 수상 윈스턴 처칠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만나러 갈때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타고 갔으며, 지중해 지역의 호송작전에 참여하여 이탈리아의 공군기를 격추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공이 가시화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Z 기동부대(Task Force Z)를 조직하여 파견하였는데, 이때 기함 역할을 맡았다. 원래 Z부대에는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포함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항해중 좌초로 수리해야 될 일이 생겨서 결국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항공모함이 따라가지 못한 대신 동남아 지역의 항공대로부터 지원을 받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F2A 버팔로 중심으로 편성된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국 공군은 일본군에게 거하게 털려서 항공력을 지원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일본군을 견제하려고 당당히 출항하였지만 항공지원이 없는 바람에 같이 따라간 순양전함 리펄스와 함께 일본 해군항공대의 육상공격기들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격침당했다. 존 리치 함장과 필립스 제독은 살아남지 못했다. 배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을 결심하고 일부러 배에 남았다는 설도 있고 리치 대령의 경우 퇴함을 지휘하고 마지막에 탈출했으나 너무 늦어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걸 '말레이 해전'이라고 하며, 2차대전에서 전함의 몰락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꼽고 있다.
일본군은 말레이 해전 '''승전 당일'''에 이를 소재로 한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를 만들어서 뉴스에서 불렀다. 같은 해전에서 가라앉은 HMS 리펄스와 함께 후렴구에 등장한다.
굽시니스트는 이것을 1 항목과 연관시켜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찰스 왕세자로 표현하고 '이건 다이애나의 몫이다'라고 외치는 육상공격기에게 공격받은 것으로 묘사하였다.
함장인 존 리치 대령의 아들 헨리 리치(1923~2011)가 해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배속되었으나 아버지 존 리치 대령이 함장으로 부임하면서 순양함 HMS Mauritius로 전출갔고 싱가포르로 배치되었다. 이후 말레이 해전에서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말레이 해전이 벌어지기 2일 전까지 같이 수영도 했었다는 것을 보면 부자 관계는 좋은 편이었던 모양. 여하튼 이후 듀크 오브 요크에 탑승해서 노스 케이프 해전에 참전하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으며 포클랜드 전쟁때는 해군 참모총장이었고 그해 퇴역했다. 최종 계급은 해군 원수.
전함소녀벽람항로에도 등장한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전함소녀), 프린스 오브 웨일즈(벽람항로) 참조.

2.2.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


2011년 6월 30일에 기공되고 2019년 12월 10일에 취역한 영국의 신형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의 2번함에도 같은 이름이 붙을 예정이다. 2017년 9월 8일에 진수되었다. 그래도 이름이 이름인지라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 2번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진수식에는 찰스 왕세자 부부도 참석했다. 진수식의 백미인 샴페인 투척은 찰스 왕세자의 현 부인이자 콘월 공작부인인 카밀라가 거행했다.
어비스 호라이즌에 등장했다.

3. 홍차의 한 종류


트와이닝의 홍차중 하나로 중국 기문을 베이스로 하여 약한 훈연향이 나는 홍차다. 바디감이 약해 가볍고 섬세한 맛을 가지고 있다.
[1] 실제로 POW로 줄여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뜻이 뜻인지라...[2] 실제로 prince의 의미를 왕자로만 알고 있는 번역자가 번역할 경우 '웨일스 왕자'로 오역되기도 한다. 하필이면 또 영국 역사상 이 작위를 받는 사람이 어지간하면 왕자가 맞기도 한지라...[3] 그동안 Princess of Wales는 (여성 본인이 후계자, 즉 왕세녀가 아닌) 왕세자비에게만 수여되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가 고민하였다고 한다.[4] 왕세자, 왕세손, 왕세증손까지 모두 아들이며, (외손녀, 외증손녀 등을 제외한)직계 공주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녀 앤 공주와, 여왕의 장손 윌리엄 왕세손의 장녀 샬럿 공주뿐이다.[5] 현 왕의 차남이 이 작위를 장남에게 물려주는 경우와, 현 왕이 죽고 나서 그 장남(차남의 형)이 새 왕이 됐는데 이 새 왕이 아들이 둘 이상 있어 차남이 있는 경우 그 차남에게 요크 공작의 타이틀을 주는 경우가 충돌할 수 있기 때문.[6] 왕위계승 순위 1위인 찰스 왕세자의 차남 해리 왕자는 현재 왕족 지위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차기 요크 공작위는 왕위계승 순위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의 차남 루이 왕자가 물려받을 확률이 크다.[7] 로마왕은 원래 대관식을 치루기 전의 신성 로마 황제를 의미한다.[8] 비에누아 백작이 도팽으로 불리면서 비에누아 백작령 역시 도피네로 불렸다.[9] 고래를 뜻하는 영어 단어 "whales"와 작위명 "Wales"의 발음이 웨일즈로 비슷한 것에서 나온 해프닝이다.[10] 역대 프린스 오브 웨일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하고 있다. 몇년이나 왕 노릇을 할까 궁금함.[11] 비스마르크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주포탄에 비장갑부위인 함수를 맞아 함수 연료탱크가 파손, 연료 누출로 항속거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침수 때문에 함수가 눈에 띄게 잠겨 전투에 지장이 생기는 등 통상파괴작전 속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작전을 포기하고 브레스트로 항로를 돌렸다.[12]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쟁 때문에 내장공사를 완전 마치지 못하고 작전에 참여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배에는 내장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민간인 탑승자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