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웨인라이트

 



1. 개요
2. 출생~전간기
3. 태평양 전쟁기
4. 평가


1. 개요


양차대전동안 활약한 미국군인. 태평양 전쟁 초기 더글라스 맥아더 미합중국 육군 원수의 후임으로 미 육군 극동군의 제2대 사령관으로 재직중 항복한 미군 장성이다. 패배했지만 잘 싸웠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물이다.

2. 출생~전간기


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 왈라왈라 출생인데 집안 자체가 군인 집안이었다. 풀네임이 웨인라이트 4세인 이유는 이미 가문에 웨인라이트 이름을 쓴 사람이 3명이나 있어서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조나단 웨인라이트로, 할아버지 조나단 웨인라이트 2세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였고, 큰아버지는 웨인라이트 주니어, 작은아버지는 웨인라이트 3세로 모두 장교 출신이었다. 아버지 로버트 웨인라이트는 육군 기병 장교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후 아서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부친)밑에서 참모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1906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를 선택, 1908년부터 1910년까지 필리핀에서 복무하며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세력들을 토벌하며 군공을 쌓았다. 이때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기 시작하여 1916년 대위로 진급했고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유럽원정군에 속하여 사단 참모로 종군했고 전후인 1920년에 귀국했다.
1920년 소령으로 진급[1]했고, 이후 기병학교 교관 등 기병 장교로 커리어를 쌓다가 1934년 기병학교교장, 1936년 기병연대장을 맡고 1938년에 준장으로 진급한 뒤 1940년 기병여단장까지 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아직 미국이 참전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웨인라이트는 중요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필리핀에 부임하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를 필리핀에서 가장 중요한 제12보병사단장(필리핀인 사단)[2]에 임명했다. 1941년, 극동군사령부가 신설되고 맥아더가 미 육군의 극동군 사령관[3]이 되면서 웨인라이트는 그의 휘하의 지역사령관이며 당시 기준으로 주둔군중 정예부대가 많이 편제된 루손 섬 북부를 담당하는 북부 루손군 사령관직[4]에 올랐다. 가장 중요한 위치였고, 맥아더도 웨인라이트를 그만큼 신뢰했다는 의미였다.

3. 태평양 전쟁기


개전 직후 웨인라이트는 루손 섬에 상륙한 일본군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며 지연전을 펼쳤으나 루손 섬 최남단 레가스피로 상륙한 팔라우 방면의 일본군 때문에 남북에서 협격,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맥아더의 명령대로 급히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이후 맥아더의 지휘하에 웨인라이트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 혼마 중장의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여 맥아더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고 2월 7일 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하지만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다시 바탄 반도로 향했고, 필리핀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워싱턴의 전쟁지도부는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 명령을 내린다.
맥아더 철수 직후 웨인라이트는 제2대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고[5]잔존병력을 재편하며 바탄의 방어전을 지휘했다.[6] 그러나 물자의 부족과 일본군의 증강 끝에 바탄 반도가 무너진다.(4월 9일) 일본군도 바탄 반도 공략 과정에서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바탄 반도 전투는 남방작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웨인라이트는 항복을 거부, 잔여병력과 함께 코레히도르 섬에 웅거하며 일본군이 뒷목잡게 만들었다. 웨인라이트는 항복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내려온 탈출명령[7]도 거부하였다. 맥아더에 이어 자신까지 철수하면 극동군은 물론 필리핀에도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웨인라이트는 그렇게 마지막 그 날까지 휘하 병사들을 독려하며 일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했고 끝내 일본군이 격전 끝에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 해안방어선을 돌파한 직후인 5월 7일에서야 항복한다.
웨인라이트의 분전은 개전 초기 전황에 여러 영향을 끼쳤는데, 일단 안 그래도 부족한 일본군 육군 병력 상당수를 필리핀에 붙잡아놓고 또 희생시켰다.[8] 일본군은 바탄 반도, 그리고 코레히도르 섬을 공략하기 위해 개전 이후 사실상 5개월여를 필리핀에 붙잡혀 있었고 그러는 동안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에서 전선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는 형편없는 졸전 끝에 항복한 싱가포르의 영국군 지휘관 아서 퍼시벌이나, 일본군이 섬에 상륙하자마자 항복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각 총독들과도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남방작전 기간 제일 먼저 공격받고 제일 마지막에 항복'''한 곳이 필리핀이었다.[9]
그러나 이 분전을 뒤로, 웨인라이트는 일본군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했다. 필리핀에서 항전 중인 아군에 대한 항복요구 방송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최소한 고위급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 그나마 위안이 있었다면, 바탄에서 항복한 이들[10]과는 다르게, 그와 코레히도르에서 항복한 다른 미군 장성 3명[11]은 '''바탄 죽음의 행진'''과 같은 강제 행군에 참여하진 않았고 항복 직후 상륙정으로 마닐라로 이송, 한 달 정도 억류되면서 일본군의 지시로 필리핀 각 지역의 잔존 아군들에 대한 투항 권고활동을 이행한 후 포로수용소로 직행되었다.

이후 웨인라이트는 장성급 포로라는 이유로 대만을 거쳐 만주로 이송되었고[12]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구타와 모욕을 당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 선전잡지에 사진이 찍혀 나가는 굴욕도 당하고, 부족한 식량과 구타 등으로 인해 체중이 크게 빠지고 잔병도 생기는 등 엄청 고생을 했다. 장성급 포로가 '''영양실조'''에 걸렸을 정도니 말 다했다.
웨인라이트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국민들은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한 자신을 비겁자, 겁쟁이라고 욕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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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라이트를 포옹해주는 맥아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직후 만주는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 웨인라이트도 이 과정에서 석방되었고, 직후 도쿄로 옮겨졌고, 맥아더가 거처중인 호텔로 안내받았다.
그러나 웨인라이트는 항장인 자신이 무슨 염치로 옛 상관을 만나겠냐며 호텔 현관에서 머뭇거렸다. 이에 맥아더가 직접 현관으로 달려나가 포옹하며 웨인라이트를 격하게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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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뒤에 서 있는 웨인라이트[13]
이후 맥아더에 의해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초대받았고, 항복문서 서명에 사용된 만년필 중 하나[14]를 기념품으로 선물받았다. 9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며 사성장군이 되었고 그 직후 귀국하여 9월 13일에는 뉴욕에서 개선 기념 퍼레이드까지 열렸다. 상술했듯 웨인라이트는 조국이 자신을 겁쟁이, 비겁자로 여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나 조국은 그를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선전한 전쟁영웅으로 대우해주었다.[15] 같은 달 19일에는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으로부터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용전을 치하받으며 군인에게 최고의 영예라는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웨인라이트는 약간의 요양기간을 보내며 <<General Wainwright's Story>>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1946년에는 미 본토의 제4군 사령관을 맡았다. 4군은 미 본토 해안방어를 전담하며 전선에 보낼 병력들의 훈련, 재편을 맡는 부대로 전시에도 한직이었고, 평시에는 더더욱 그랬다. 장기간의 포로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전쟁영웅에게 마지막으로 군 사령관이라는 커리어를 주려는 예우차원의 직책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947년 8월 31일자로 퇴역했다.
이후 1953년 9월, 샌안토니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4. 평가


열악한 환경에서 선전했기에 영웅으로 인정받은 장군이다.
표현은 이렇게 했지만 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웨인라이트는 물자, 병력, 화력 모든 것이 열세인 상황, 심지어 워싱턴의 전쟁지도부조차 필리핀을 포기하고 본인에게 철수를 지시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쳤다. 맥아더 철수일을 기준으로도 웨인라이트는 무려 2달을 더 버텼고, 바탄 반도가 무너진 이후에도 그 작은 섬에서 1달을 저항하여 일본군의 필리핀 완전 점령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아울러 인격적으로도 대인배여서, 코레히도르에서 항전할 때도 무조건 싸우라고 명령하기보단 오늘 하루만 더 버텨보자는 식으로 부하들을 설득시켰기에 존경받았고, 훗날 맥아더가 자신의 명예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섭섭해 했을 뿐 화를 내진 않았으며 여전히 맥아더를 신뢰했고 맥아더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지지하기도 했다.
[1] 대전중 임시중령까지 올랐으나 말 그대로 임시중령이었기에 전후 대위로 원상조치되었다.[2] 다수의 필리핀인 스카웃 장병들과 미군 단위 부대가 혼성된 사단급 부대로 당시 필리핀 주둔군중 정예 전투부대였다.[3] 여담으로 태평양 전쟁 개전 시점 당시만 해도 맥아더는 통합전구사령관이 아니었다. 단지 극동지역의 미국 육군만을 총괄하는 육군(+ 육군 항공대- 간접지휘)의 전구사령관이었지 타 군종(해군,해병, 우방국 군대)에 대한 지휘권은 없었다. 맥아더 본인의 계급도 진주만 기습시점에선 3성장군에 불과했고 그와 협력관계였던 필리핀에 같이 주둔했던 미 해군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이었던 하트 제독(대장)이 계급이 더 높았다. 다만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초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잃고 미해군,공군의 손실이 커지면서 아직 많은 지분을 갖던 맥아더의 육군이 주류가 되면서 T/O에서 남는 해,공군병력들이 보병부대로 재편되어 필리핀 방어 중기부턴 맥아더가 실질적인 전구사령관이 되었고 그가 호주로 탈출하고서 남서태평양군 총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통합군사령관이 된것이다.[4] 지휘상으로는 그냥 군단장이라고 보면된다.[5] 원래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농성중인 거점들의 사령관 몇명에게 지휘권을 분할해주고 호주에서 총괄 지휘를 하려고했으나 워싱턴의 수뇌부는 바탄군의 사령관이었던 웨인라이트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며 맥아더의 후임자로 임명했다.[6] 맥아더가 호주로 탈출한 후 웨인라이트는 코레히도르로 임지를 옮겨 필리핀 전체에 대한 지휘를 담당했고 맥아더의 포병참모였던 킹 소장이 승계하여 바탄반도의 병력들을 지휘하고 그의 이름으로 항복한다.[7] 사실 이 명령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웨인라이트는 그 대신에 공식적으로는 보급 목적으로 코레히도르 섬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극소수의 비행정과 잠수함들이 떠날때 휘하 장병들중 필수탈출인원을 선정하여 수십명을 내보내는 것엔 성공했다. 그중엔 종군기자도 있었는데 웨인라이트는 그에게 필리핀에서의 미군들의 활약과 사투를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지길 바라는 것과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전하는 메세지를 부탁했다. - 웨인라이트 회고록(영문판/1946년) 참조[8] 일본 육군 대부분은 중국 전선에 있었고 남방작전에 투입할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9] 이러한 배경엔 미군의 전략에도 영향이 있었는데 일본을 패망시키려면 아시아인, 원주민들의 호의가 필수적이라고 봤고 이것을 위해선 전쟁 초기에 일본군에게 명백히 밀려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선보여야 한다고 봤다. 또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미군 수뇌부는 고립된 필리핀에 어떻게든 보급과 구원시도를 계속 했으나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의 제공,제해권을 빠르게 장악해서 실패했다.[10] 장성급으로는 루손군 사령관 킹 소장 이하 사령부 참모, 군단, 사단장들, 독립부대장 총합 15명 내외[11] 전구 참모장 비브 준장, 코레히도르 섬과 주변 섬 요새 3곳의 사령관 무어 소장, 전구 보급사령관 드레이크 준장[12] 여기서 아서 퍼시벌과 만나 이후 행보를 같이 하게 된다.[13] 옆의 장군은 함께 포로생활을 한 영국의 아서 퍼시벌 장군이다.[14] 맥아더는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만년필을 사용했다. 그중 한개를 받은 것. 같이 초대를 받았던 인물이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영국군의 아서 퍼시벌이었는데, 퍼시벌도 그 만년필을 한 자루 선물 받았다.[15] 이것이 그와 비슷한 신세였고, 같이 포로 생활을 했던 아서 퍼시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퍼시벌은 석방 이후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졸전했다며 거세게 비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