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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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중세
2.2. 현대
3. 관광/교통
4. 사건사고
5. 기타


1. 개요


아랍어 بيروت
Beirut

레바논의 수도로 별명은 '''중동파리이다'''. 두바이가 뜨기 전엔 이 도시가 중동의 허브였고 프랑스풍의 유럽 같은 분위기로 각광받았다.
'''기원전 3000년'''에 세워진, 역사만 50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중동, 지중해 지역에서 중요한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다. 시의 인구는 36만이지만, 광역권에 그 6배인 220만 명이 밀집되어 있다. 면적은 약 20km²로 한 나라의 수도치고는 작은 편이다.[1]
레바논이 속한 레반트는 중동보단 '''근동''' 즉 가까운 아시아로 불리던 곳으로 그만큼 유럽과의 거리가 가깝다. 인도, 파키스탄, 이란이나 아라비아 반도에 비해 훨씬 더 유럽풍이 강하고 시차도 거의 동일 시간대이다. 사람들도 지중해 인종인 백인 아랍인이라 생김새도 여타 유럽인과 비슷하다.

2. 역사


베이루트는 성 지크프리트가 용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벽 위에 세워진 항구 도시이다.

2.1. 중세


1차 십자군 당시 베이루트는 파티마 왕조의 영토였다.
1099년 5월 말엽 십자군이 지나가자 베이루트의 영주는 그들에게 농지를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식량을 제공하였다. 이에 반해 시돈의 영주는 십자군을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였고 이후 티레, 아크레 등지의 영주들은 베이루트의 관례를 따랐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1110년 2월, 베이루트는 십자군에게 포위되었다. 5천의 주민들은 공격군의 공성탑을 수차례 파괴하며 결사적으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5월 13일, 도시가 함락되자 흥분한 십자군은 저항한 대가로 가차없는 학살을 자행하며 본보기를 보였다. 이후 베이루트는 십자군이 완전히 밀려나는 1291년까지 그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3세기 중반부터는 이벨린 가문의 중심지로서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도 독자적인 자치를 유지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어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으며 터키인들도 유입되었다. 터키에게는 이 도시가 지중해 방면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다.

2.2.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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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대의 도시 계획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약체화된 오스만 제국은 속주 여러 곳을 유럽 세력에게 두들겨 맞으며 빼앗기거나 할양해주며 쪼그라들었다. 이미 이집트-수단은 무함마드 알리의 독립으로 떨어져 나갔고 리비아아프리카 식민지들도 이탈리아-터키 전쟁으로 이탈리아에 넘겨야 했으며 이 곳도 결국 마그레브와 함께 프랑스에게 떼 주었다. 프랑스는 레반트 속주인 레바논, 시리아를 복속시켰다.

1943년레바논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중동의 금융과 교육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고[2] 동서양이 만나는 곳으로 불리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더구나 1970년대에는 '''오일머니'''가 아라비아 반도 각 국가에서 베이루트의 금융가와 부동산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경제 호황을 맞았고 특급호텔들이 줄줄이 지어졌다. 도시가 빠르게 팽창하면서 역사적인 건물들이 현대적인 고층건물들로 재개발되었다. 자연히 베이루트는 눈부신 스카이라인을 가졌다. 이 땐 아직 아랍에미리트가 발전하기 전이라 금융업은 베이루트에 의지했다.
그러나 레바논 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경제 성장의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으면서 결국 1975년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이슬람으로 내전이 발발하고 만다. 1977년 내전은 끝났지만 이때 도시는 동쪽은 기독교, 서쪽은 이슬람교로 분열되었고, 1982년에는 다시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도시는 한 번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베이루트 도심, 그중에서도 특급호텔들이 몰린 해변가는 전략적 요충지가 돼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가장 격렬했던 곳은 내전 발발 직전에 개장한 홀리데이 인 빌딩(Holiday Inn Building)으로 이 건물에서만 사상자가 3000명이나 나왔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침략, 그리고 극한 내전이 지속되자 마침내 1980년 미국이 개입했다. 미국은 레바논과 당시 관계가 가까운 우방인데다 미국인들이 많이 살던 도시가 베이루트였으므로 팔레스타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미국 자산을 보호하고 평화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미합중국 해병대를 보냈다. 그리고 옛 주인인 프랑스도 비슷한 시기에 인도적 간섭을 이유로 해군보병 및 특수부대 등으로 구성된 군을 파병하여 두 초강대국이 이 내전에 끼어들었다.
1983년 4월 18일,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이 자살 폭탄 테러를 당해 미국인 17명을 포함해 총 6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같은해 10월 23일 미군 기지와 프랑스군 기지에 폭탄 테러가 발생해 미 해병대원과 프랑스군 305명이 목숨을 잃는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은 헤즈볼라의 소행으로 보았다. 이후 미국은 헤즈볼라를 극혐하게 되어 어떻게든 뿌리뽑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헤즈볼라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 헤즈볼라 사령관 하산 나스랄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결집시켜 이스라엘군에 결사항전하도록 했다. 이렇게 레바논 내전은 미국, 프랑스, 이란, 이스라엘 심지어 시리아까지 힘 좀 쓴단 나라들이 한발 씩 걸치며 혼돈으로 치달았다.
레바논 전체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 내전은 1990년에야 끝났다. 지금도 종파들끼리 철저히 분리돼서 거주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주민들이 쌓은 장벽들이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북아일랜드벨파스트가 있다. 그나마 벨파스트는 평화 협정 후에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끼리 같은 학교에 다니는 등 교류를 하고 있지만 베이루트는 갈 길이 멀다. 당장 이 도시에서는 같은 기독교도도 사회 주류인 마론파 가톨릭과 비주류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성공회 등은 소외되었으며 이들 소수 기독교 교파들은 되려 무슬림과 사이가 좋을 정도다.
이때 이후 라피크 하리리 대통령의 지도 하에 재건이 추진되었고 레바논은 어쨌든 다시 일어서며 2000년에는 아시안컵까지 개최했다. 이스라엘이 대회 전 남부 국경에서 얼쩡거리며 위협하기도 했으나 사실 별 탈 없었다. 하라리 대통령은 2005년 암살당했고 이 때 배후로 시리아가 지목되며 레바논에 내전 이후부터 쭉 주둔해 오며 민중으로부터 침략군이라며 반감을 사던 시리아군도 철수했다.
현재의 베이루트는 중동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중동의 경제적 중심지 역할은 두바이도하아라비아 반도의 신흥국으로 넘어갔지만 레바논의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에 인근 국가에서 부호들을 비롯한 많은 중동인들이 향락(...)을 즐기러 와 중동과 아랍권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다. 실제로 다른 아랍 국가에서는 꿈도 못 꾸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랍 부자들, 특히 걸프 연안의 부호들이 부동산이나 요트 등 자산을 이 도시에 잔뜩 갖고 있다.
또한 레바논은 아랍권 가요계를 이끌 정도로 방송,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에 아랍권 전체에서 인기가 많은 가수들과 연예인들 다수가 베이루트에 거주지, 별장을 두고 있다. 덕분에 내전 전만큼은 못해도 중동 유수의 휴양 도시로 발돋움했으며 동(東)베이루트를 중심으로 고급 상점들과 레지던스, 아파트, 호텔이 즐비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건축 붐이 일어 새로 지어진 휘황찬란한 레지던스와 고층 건물들이 내전 때 훼손된 호텔 등과 함께 있는 대조적인 풍경도 있다. 예시 2010년대에는 시리아 내전IS의 테러 공격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하고 위험해졌다가 IS가 쫓겨나고 테러 조직으로 쪼그라들어 2020년대에 들어서자 다시 안전해졌다.
한편 레바논이 종파 갈등으로 연립 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정치적 불안이 심각한데다 몇 달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쌓여 위생상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IS가 거의 물러간 후에는 트리폴리에 비하면 개선된 편이다. 쓰레기도 다 치웠다.

3. 관광/교통


베이루트로의 진입은 베이루트 국제공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남쪽으로는 전쟁을 겪었던 이스라엘이고, 동쪽과 북쪽은 내전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는 전쟁 중인 국가 시리아,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지중해가 펼쳐져 있기에 이동 방법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보면 된다.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이다.
베이루트의 주요 관광지로는 루슈 락(Rouche Rock), 아메리칸 대학교 베이루트 캠퍼스(American University of Beirut/AUB)[3], Nijeh square 등이 있다. 나이제 스퀘어(Nijeh square)는 위의 사진 중 가장 마지막 것으로 주변에 이슬람 모스크, 마론파 성당, 정교회 예배당 등 각종 종교시설이 모여있는 독특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구도를 잘 잡아서 사진을 찍으면 여러 종교 시설이 한번에 보이게끔 찍을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사회 주류인 마론파도 교황의 수위권을 따르는 가톨릭이라 성모상을 흔히 볼 수 있다. [4]
나이제 스퀘어(Nijeh square)에서 바다 쪽으로 가면 "I LOVE BEIRUT"라는 팻말이 있는 SOUKS라는 쇼핑몰이 있는데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답게 자유분방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히잡을 둘러 싼 여자부터 탱크탑이나 나시티를 입고 돌아다니는 젋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젊음의 거리로 서울특별시로 치면 명동이나 강남, 홍대, 이태원 격이다.
자연경관으로는 루슈 락(Rouche Rock), 람레트 알바이다 해변(Ramlet al-Baida beach)이 있으며 루슈 락에서는 배타고 바위를 가까이 들어가보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베이락이라고도 하는데 현지인들은 잘 못 알아듣는다.
해변가를 주변으로 고급 리조트, 호텔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으며, 맛있는 맛집도 많은 편이다. 다만 한국인의 입맛에는 약간 안 맞을 수도 있는데 할랄 푸드의 특성 상 피를 다 빼버리는 조리법을 쓰기 때문에 한국 특유의 마블링이 살아있는 고기는 없다.
아메리칸 대학 베이루트 캠퍼스(AUB)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광경 또한 멋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다.
사회간접자본 자체가 내전 탓에 형성조차 안 되어 있다. 두바이두바이 메트로를 운행하고 도하도 도하 경전철을 개통해 운행하기 시작한 것과 달리 여기는 대중교통 그딴 거 없는 곳으로 우버를 부르거나 노선이 부실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야 하며 그냥 속 편하게 공항에서 렌트카를 이용해 자가운전을 하고 다니는 편이 낫다.

4. 사건사고



4.1.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5. 기타


GTA 시리즈3D 세계관에서 리버티 시티의 자매결연 도시로 나온다.

[1] 참고로 20km²는 강남'''구''' 면적의 약 절반에 불과하다. [2] 이 도시에 무려 아메리칸대학 중동캠퍼스가 들어섰다. 두바이가 뜨기 전에는 여기가 두바이 같은 곳이었다.[3] 아메리칸 대학교는 위키러의 주류인 한국의 10-20대 어린 세대들에게는 인지도가 거의 없지만 원래 법과대학, 경영학과 등 사회과학계열이 강세고 동문들도 유명인사가 여럿 있는 유서 깊은 동부 대학이다. 워싱턴 D.C에 있다. 신한공사 총재를 역임한 정환범 선생도 이 학교에 유학했다. 한국에서 인지도가 거의 없어서 이 학교에 한인 비중은 낮은 편이다.[4] 가톨릭이 주류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여기에 오면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분위기나 기후 그리고 사람들 생김새까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