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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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애니메이터, 영화 감독이다.
2. 생애
3. 그에 대한 평가
'''In stature, in influence, and the range and quality of his body of work,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 rival him.'''
위상, 영향, 그리고 자질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미야자키 씨와 어깨를 견줄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 존 라세터. 픽사,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전 CCO #
'''Miyazaki has taken the art of anime and brought it to new heights through an inimitable vision and sense of storytelling.'''
미야자키 씨는 모방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의 감각과 비전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새로운 경지로 올려 놓았습니다.
'''이건 못 이기겠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일부 일본 만화, 애니매이션 팬들을 제외하면 일본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99~2000년에 모노노케 히메가 서방 국가에서 개봉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계적으로 역대급의 찬사를 받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의 걸작들도 발굴되어 서방에 알려졌고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하야오 감독은 그만큼 거대한 존재입니다.
4. 성향
4.1. 작품 스타일
오오츠카 야스오의 작화 기술과 타카하타 이사오의 연출 기술을 모두 흡수해서 탄생한 연출, 작화 모두 다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전무후무한 괴물 애니메이터로 정리 가능하다.
'''혼자 다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징은 연출, 콘티를 잘하는데 그 자신이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를 했던 걸 봐도 알겠지만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보통 다른 사람들은 대충 그리는 콘티가 원화와 같은역할을 할 정도로 디테일하다. 아예 미야자키의 콘티는 만화책으로 내도 위화감이 없다. [4] 기획력도 있어서 기획도 스스로 하고, 시나리오도 자신이 체크하고 레이아웃도 자신이 잡고 콘티도 자신이 한다. 심지어 애니메이터들이 만든 원화가 실제로 사용되기 전에 그의 체크를 거치므로 작화감독까지 겸하고 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은 이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다 따로있다. 라이벌이라는 토미노마저도 기획, 연출, 콘티만을 담당하지 작화나 각본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의 애니메이터들은 그가 홀몸으로 하나하나 할 수 없는 동화, 원화와 배경의 디테일 추가, 채색 만을 하는 단순노동만을 담당하게 된다.
이런 특이한 작업 스타일 때문에 그가 연출한 작품은 캐릭터들의 외모, 움직임, 스토리까지 모두 미야자키란 게 티가 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영상과 이야기를 전부 자신이 원하는대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축복받은 재능을 가졌다. 미야자키의 작품은 즉 미야자키 머리 속에 있는 것 거의 그대로라는 것이다.
사실 이래서 체력에 한계가 있는 노년으로 갈수록 제작 기한이 늘어나고 있고 본인도 힘들어서 은퇴하겠다고 징징대지만 그럼에도 나이치고는 저런 작업을 소화해내는 엄청난 체력까지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5]
현대카드 컬쳐프로젝트 일환으로 유치된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진짜 레이아웃을 가져다 전시했는데, 작화지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사물들은 작화지 3-4장을 테잎으로 고정하여 통으로 사용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거대한 레이아웃 작품도 일부 있다. 일본에서 콘티집을 시중에 발매한 최초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미야자키라고 하니 말 다한 듯. 이렇게 자세하게 서술하는 타입인데도 작품을 제작할 때 "대충 적어놔서 미안합니다"라고 할때도 있다고 한다.
미야자키가 그린 원화는 미국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만화적인 과장을 허용한 표현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황당무계하거나 비현실적인 표현은 거의 없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토에이 동화 출신답게 동화(動畵)매수를 풍부하게 사용한 캐릭터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작풍을 보여준다.
일단 그가 감독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특유의 동화풍 그림체가 눈에 띄는데, 감정표현에서 입이 굉장히 커지거나 눈동자가 작아지는 다채로운 변화가 특징.
- 특유의 몽글몽글 꿀렁꿀렁거리는 실감나는 액체 질감표현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모노노케 히메의 사슴신 데다라봇치 버전, 센과 치히로의 오물신 이라든가 가오나시 광폭화라든가. 이런 몽글거리는 표현은 군중신에서도 볼 수 있다. 대규모의 인원이 하나의 점에 집중되어 부딪힐 때, 각각의 인물의 묘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조수가 부딪히듯이 표현한다.
- 머리 부풀리기
- 이런 몽글거리는 표현은 무생물에도 표현되어 파괴되는 표현을 보면 찢어지거나 갈라진다는 느낌보다는 뭉그러진다는 인상을 준다.
성장 환경 덕에 상당한 수준의 비행기 덕후로 그의 상당수의 작품들에는 비행기와 비행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그러한 성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붉은 돼지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작중 등장하는 비행기를 전부 그가 디자인했다.
마찬가지로 성장 환경 덕인지 모노노케 히메 같은 옛이야기풍 내지는 포뇨같은 정말 동화같은 배경이 아니면 작품에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무장이나 차량을 모델로 한 병기들이 자주 보여진다.
이탈리아 관련된 것들이 상당히 자주 나온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의 장교인 모우로와 군인들은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과 많이 유사하며, 붉은 돼지는 아예 배경이 이탈리아다. FIAT제 트럭과 군대, 공간적 배경 등 아무리 봐도 이탈리아. On Your Mark의 결말 중 탈출에 성공해 지상으로 나가는 결말에서 타는 노란색 컨버터블도 알파 로메오 차량이다.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부터가 이탈리아어인 Ghibli, 모래폭풍이라는 뜻. 이외에도 어딘가 모르게 이탈리아 냄새 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또한 페미니스트로서[6] 주인공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요 여성 등장인물들은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등 여러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고정적 성 역할의 전형적 여성 등장인물과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에코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로 분류된다.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관련 저널, 관련 KCI 등재 학술지 이러한 여성 등장인물의 강인하고 주체적 성격은 다음 자료에서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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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품 특성에 대하여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한 바가 있다.
소피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는 '남성으로부터 정복당해온 여성과 문명으로부터 고통 받는 자연이 닮았다고 믿기 때문'이며 '남자 주인공으로는 그냥 악과 맞서 싸우는 관습적인 이야기밖에 만들 수 없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또 주인공의 조력자나 조언자 포지션에 있는 할머니 캐릭터 역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라와 시타의 친할머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니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켄타의 할머니, 마녀 배달부 키키의 빵 만드는 할머니, 모노노케 히메의 무녀 히이사마 등. 그리고 가부장적인 태도의 남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에코 페미니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작품 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며 매우 신사적으로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가 있는 여성 애니메이터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스튜디오 지브리에 탁아소를 두기로 한 것도 유명한 일화. 그래서 그의 작품엔 여성 애니메이터가 매우 많이 참여한다.나의 많은 작품들에는 강인한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의존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나 조력자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구원자는 절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여성은 어느 남성과 같이 영웅이 될 역량이 있다. (Many of my movies have strong female leads - brave, self-sufficient girls that don't think twice about fighting for what they believe in with all their heart. They'll need a friend, or a supporter, but never a saviour. Any woman is just as capable of being a hero as any man.)
1957년에 만든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고 주연인 게르다보단 조연인 이름없는 산적 소녀에 매료되어 그의 여자 캐릭터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지만 칼을 뽑고 맹활약하며 겁이 없는 이 소녀는 종전 애니메이션에서 나약하던 여성 이미지와 상반되어서 잊을 수가 없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순수하면서도 주체적인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많이 내세우기도 하는데, 판의 미로에서 비극적이고 동화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2017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젊은 시절에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며 미야자키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너무나 놀랍고 아름답게 포착했다고 말했다. # 그러면서 미야자키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힘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인터뷰에서도 미야자키를 따라한 게 많다고 여러 번 말했을 정도이다. #
다만 입체적인 여성성의 표현이이 아닌 성 상품화의 영역으로 간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좀 존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도 성 상품화의 논란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 [7] 라이벌 토미노 요시유키는 "미야자키는 무의미한 장면에 간접적인 성 묘사를 넣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8]
사람이 달리는 장면을 그릴 때 진짜 빠르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동작에서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 달려도 페이스가 느려지지 않는다! 미래소년 코난같은 작품이야 만화적 과장이라고 치더라도, 바람이 분다같은 작품에서조차 100미터 10초 끊을 기세로 달린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가 평지도 아니고 험난한 산을 들개와 맞먹는 속도로 달려내려가는 장면을 보면 이건 아주 그냥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달리기다. 아시타카는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관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무술 만렙을 찍은 초인 중 하나니 이상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직후 들개가 느리다고 아시타카더러 올라타라고 일갈한 걸 보면, 아마 들개가 아시타카 속도에 맞춰주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적은 프레임으로 빠른 속도감을 보여줄 수 있고 해당 테이크를 빠르게 넘길 수 있으니 애용하는 노하우인 듯.
식사 장면이 자주 들어가며 음식을 매우 맛있게 묘사한다. 위꼴사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식사 장면을 넣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연출 의도지만 실제로 음식을 맛있게 그리는 건 타나카 아츠코라는 애니메이터이다. [9] 미야자키도 음식을 못 그리는 건 아니고 세계명작극장에서는 미야자키가 그린 음식 그림을 볼 수 있다. 타나카 아츠코가 더 맛깔나게 그리니까 맡기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세계명작동화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고 악한 캐릭터라고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악당을 그린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구제불능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라살 칼리오스트로, 코난의 레프카, 라퓨타의 무스카가 그러하다. 다만 이 셋은 사실상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성이 일치한다. 미야자키의 악역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캐릭터는 시대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지론이 있다. 그래서 캐릭터가 인기가 있다 해서 사자에상 시공에서 무한 반복으로 사골처럼 우려먹지 않는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면 메이와 사츠키는 결혼해서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다고 대답한다. 등장하는 캐릭터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당시의 시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상을 반영하되, 그렇다고 시대의 유행에 영합하지 않는다.
위대한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이며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헐리웃 감독들의 존경도 받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이들의 추천으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 그도 못 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음악. 음악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음악 분야의 거장 중 한 명인 히사이시 조에게 일임하였다. 성우 캐스팅도 직접 지명한 몇몇 캐스팅을 제외하면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에게 일임하며 별로 터치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4.1.1. 반전, 자연, 동심
작품들의 테마는 모두 자연을 파괴하지 말자, 전쟁을 하지 말자, 탐욕에 눈이 멀지 말자 식의 교훈적이며 교과서적인 내용이다. 동화풍 애니메이션조차 기존의 클리셰를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일에 안달이 난 마당에 민망할 정도로 교훈적이며 올바른 주제를 역설하는 작품을 만든다.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있으며 애니메이션 계의 고전을 만드는 거장으로 대우 받는다. 이런 작품 성향 덕에 가족끼리 보기에 좋은 애니메이션들이 많다.
다만 이러한 성향은 특유의 아나키즘, 반전주의, 생태주의에 근간한 코드이기도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이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사상을 가감없이 작품에 삽입하나, 그 코드를 모두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도 삽입한다. 때문에, 작품에 사상을 넣지 말라는 비판에 반대 논거로 자주 등장한다. 비슷한 케이스는 브이 포 벤데타 등 미야자키보다 코드가 더욱 전향적인 앨런 무어.
4.2. 픽사와의 관계
미야자키 하야오는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의 막대한 존경을 받고 있다. 존 라세터는 미야자키야말로 월트 디즈니와 함께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라며 찬사했다. 본인이 애니메이터였던 시절, 존 라세터는 당시 자신이 소속되어있던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모든 회사들이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용이다'는 고정관념에 빠진 것을 보고 크게 상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야자키의 첫 영화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 작품을 본 라세터는 이전에 월트 디즈니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심지어 청혼하기 전에, 아내가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루팡을 같이 봤다고 했을 정도로 라세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라세터는 미야자키의 모든 영화는 하나도 빠짐 없이 명작이고 한 사람이 이걸 다 상상하고 스토리 보드를 손수 그렸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라세터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때문에 에머리빌에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작품의 영어 더빙 감독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와 그의 동료와 제자 감독들이 맡기도 했다. 참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깡총거리며 뛰는 전등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픽사의 룩소 주니어의 오마주라고 한다. 한편 그에 대한 보답인지 2010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 3에서는 토토로 인형이 나오기도 했다.
4.3. 한국과의 관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종주의자에 한국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90년대에 하이텔 애니동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동호회에 계속 돌면서 전설처럼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런 내용이 온라인을 넘어서 퍼져가는 데는 모 밀리터리 소설에서의 묘사도 한몫을 했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며, 당시 일본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만들어진 헛소문이다.
미야자키가 한국을 싫어한다는 말은 예전에 한국 쪽에 하청을 줬다가 그 완성도에 실망했었던 일에 대한 표현이 완전 과장되면서 생긴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혐한인 것은 아니다. 이 양반은 평소에도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할 때 냉정하기로 유명해서 성우를 들들 볶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며 자기 아들의 작품에도 여과없는 혹평을 내린 사람이다. 또한 한국의 모 기자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인터뷰하곤 모든 답변이 단답형이라 성의가 없다며 그가 한국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고 했는데 # '''미야자키는 일본에서도 인터뷰를 그렇게 한다.''' 특별히 한국에만 성의 없이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원래 까칠한 사람이다. [10]
그리고 한국 쪽에 하청 주는 걸 꺼리는 것도 이젠 예전 이야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하던 시기에 스튜디오 지브리는 촉박한 스케줄 속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의 DR무비 쪽에 하청을 넘겼는데, 미야자키는 DR에서 만든 결과물에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얼마나 만족했는지 제작에 참여한 직원들만을 초청해 한국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시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DR무비 관계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다. 이후 DR무비는 고양이의 보은 등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에 꾸준히 참여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10억 받고 하청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내부 기밀이므로 흘려듣는게 좋다.[11]
벼랑 위의 포뇨에서 직접 한글 로고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한 것이라고.
바람이 분다가 한국에서 우익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반일감정은 혐한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나는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일감정 때문에 전쟁을 비판한 자신의 작품에 색안경을 끼고 보고있고, 니들이 그렇게 매사를 보니까 일본에서도 한국을 싫어하는 거다라는 발언. 상당히 불쾌해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바람이 분다는 반전을 테마로 한 작품임을 생각하면 이렇게 불쾌해 할 만도 하다. 실제로 바람의 분다는 우익들이 좋아할 만한 배경 소재일지언정 절대 우익들의 사상과 같거나 그에 동조하는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 소년의 꿈을 서서히 망가뜨려가는 내용은 우익들이 싫어할 만한 이야기다.
4.4. 오타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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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와 모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타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자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세간 사람들에게 오타쿠 취급을 받지 않고 있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실망하거나 적대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립을 벌인 적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찬사를 받는 명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지만,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굉장히 강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들은 각자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그가 오타쿠나 모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타쿠에 대한 미야자키의 다른 발언을 첨가하자면,
"이런 건 말야 실제로 어린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그런 관찰 못하면 못 그리지.[13]
이걸 안하고 아무것도 못 보고, 자기 자아밖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일상생활만 보내고 있고. 인간관찰을 싫어하는 인간이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타쿠 소굴이 되는 거지."
다시 말해, 남이 만든 콘텐츠를 모방하며 세상을 이해하지 말고 자기 몸으로 세상을 보고 경험한 걸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고 콘텐츠를 만들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데, 콘텐츠가 묘사하는 내용은 아무리 정밀해봐야 세상의 저해상도 데포르메에 불과하다. 만약 고용주라면 후자보다는 전자를 고용하고 싶을 것이다. 상상이 제약받지 않고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뽑아낼 테니까."난 정열도 인생 경험도 없는 오타쿠를 고용할 생각은 없다. 불을 표현하려면 불을 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군가의 작품을 따라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애니메이션은 맡길 수 없다"
분명한 건 타인이 오덕을 자처하는 언동을 싫어한다는 점으로 이는 지브리 작품에 참여한 적이 있는 안노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려져 있고, 아소 타로 전 총리의 오덕 행적에 대한 질문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본인은 상당한 실력의 모델러이자 중증 밀덕후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만드는 프라모델이나 모형지 "모델 그래픽스"를 통한 단편 만화들의 주인공들은 창작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추축국 병기들이다. 이 때문에 이 양반도 마츠모토 레이지처럼 그 시절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쟁이나 혹은 무기 등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과거의 도시화/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동경에 가깝다. 출생 대목을 다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릴 때부터 비행기나 군인들을 많이 보면서 자란 탓에 무기나 군인 복장 등을 그리게 되면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보아 익숙한 양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년의 향수처럼 드러나게 되는듯하다.
참고로, 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언은 그만의 발언이 아니다. 신만이 아는 세계의 작가인 와카키 타미키도 이러한 생활을 했었고, 후에 당시 그때의 삶을 후회한다고 할 정도. 즉, 단순히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창조는 못하더라도, 모방이나 자신의 삶에 반영을 하려는 시도를 안하는 것에 대한 비판 정도로 인식을 하면 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모두가 록음악이나 힙합음악을 듣는다고 밴드나 래퍼, DJ가 될 필요는 없지만, 무작정 듣지 말고 직접 리뷰를 하거나, 악기를 다루는 시도를 하는 것은 해당 컨텐츠를 소비할때 자신을 녹여낼 수 있는 것 정도는 해야 되지 않냐는 것이다. 그냥 취미로 삼는 사람이 그래야 할 의무는 전혀 없지만, 그 취미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관련된 것을 배워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만 실제 경험하는 것을 중시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견해가 반드시 맞다고 보기도 힘들다. 후지코 F. 후지오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공부와 취재로 이를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 작품으로 이를 증명했으며 타카하시 루미코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력으로 커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경험하지 않으면 좋은 걸 못 그려내는 사람은 그냥 재능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사토 준이치처럼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영향으로 연출을 하는데도 좋은 평가를 받는 감독도 있으며 미야자키의 제자인 안노 히데아키도 오타쿠인데도 연출로는 어디가서 까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미야자키의 견해이며 이것을 진리라 보는 것은 좋지 못하다.
5.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5.1. 토미노 요시유키
미야자키와 가장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은 역시 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미야자키와 함께 양분했던 또 다른 거장, '''토미노 요시유키'''로 봐야 할 것 같다. 둘은 '''동기이자 라이벌'''로 여겨질 정도로 자주 싸우고 동시에 서로를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이한 건 토미노는 미야자키 작품을 나올 때마다 챙겨보며 얘기를 많이하는데 미야자키는 토미노 얘기를 별로 안 한다. 재밌는 건 두 사람 다 아버지가 전투기 제조를 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선 미야자키가 대중적인 것에 비해 토미노가 대중적이지 않지만 80년대에는 '''토미노가 우세했다.''' 그의 대표작인 기동전사 건담, 기동전사 Z건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의 연속적인 성공은 80년대 애니메이션계를 리얼로봇의 시대로 만들었으며 지금까지도 건담 시리즈가 '''40년''' 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14] 하지만 토미노는 그 시절에도 미야자키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으며 언젠가 자기 자리를 위협할 것이라 예언했고 그의 작품을 참고해서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실제로 역전되었다.
토미노는 안노 히데아키와의 대담에서 '''"그 인간은 자기가 로리콘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해야 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5] 로리콘 취미[16]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로리콘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 여기서 안노는 "토미노 선생님의 작품은 토미노 선생님께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x를 덜렁거리며 춤을 추는 느낌이라 존경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선생님의 작품은 '나 지금 벌거벗었다~'라고 외치면서도 하반신에는 멋드러진 팬티를 입고 있는 느낌"이라고 비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면서 멋부리고 있는 느낌이라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대담에서만큼은 안노가 폭주하며 미야자키를 까고 토미노는 오히려 미야자키를 옹호하는 느낌이었다. 동년배인만큼 그 기분만큼은 전부 이해를 한다고. 오히려 머리도 좋고 기술도 있으며 센스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까지. 로리콘 취향에 관한 부분만 빼고(…).
토미노의 또다른 작품인 성전사 단바인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곤충들을 모티브로 한 생물체와 메카닉들이 나오는 것과 시기를 보면 거의 확실하다. 전투메카 자붕글은 미래소년 코난을 의식한 것이었고 브레인 파워드는 모노노케 히메를 의식하고 있다. 반대로 미야자키 작품에는 토미노의 영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우시카의 거신병 연출은 토미노의 기동전사 건담과 유사한데 이건 거신병을 그린 안노 히데아키가 '''중증 건덕후'''라서 그런 것.
또한 토미노 요시유키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두 사람은 일견 관계가 없어보이지만 같은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연출을 배우던 입장으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빨강머리 앤, 꼬마 너구리 라스칼, 미래소년 코난 같은 몇몇 작품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다.[17] 어떤 강연에서 토미노가 미야자키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미야자키 본인에게 말해도 괜찮다. 아는 사이이므로' 같은 이야기도 하고. 오시이 마모루 말로는 미야자키와 토미노는 평소에도 전화해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이며 공적으로 말은 안 해도 미야자키는 토미노를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무시 프로덕션을 매우 싫어하는데 [18] 유일하게 좋아하는 인물이 토미노라고. #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성향이 '''정 반대'''이다. 토미노는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삶에 어느정도 공헌할 것이라고 보고 SF작품을 주로 만들지만 미야자키는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본질과 관계가 없으니 자연과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야자키는 많은 제작비로 많은 동화 (부드러운 움직임)을 넣는 작품을 선호하지만 토미노는 어떻게든 동화 작업에 들어가는 컷수를 줄이는 연출 방법을 많이 창시하고 그쪽을 선호한다. 또한 미야자키는 데즈카 오사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지만 토미노는 긍정적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미야자키는 로리콘이며 토미노는 연상을 좋아한다(...) 정말 정반대의 두 사람.
토미노는 미야자키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래소년 코난이라고 하며 "이건 이길 수 없다." 라는 패배감을 맛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미야자키의 작품은 전부 열외가 없이 미래소년 코난만도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다가 바람이 분다를 보고 다시 패배감을 맛봤다고 극찬했다.
미야자키와 타카하타 이사오는 다른 연출가에게 콘티를 발주해도 그 완벽주의 때문에 마음에 안 들어 다 뜯어 고쳐 쓰고 콘티를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토미노가 그린 콘티는 그래도 건질 게 있어' 라면서 살리는 쪽으로 갔다고 한다. [19]
5.2. 안노 히데아키
미야자키, 토미노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또다른 거장인 안노 히데아키와는 허물없는 제자 사이. 안노 히데아키는 원래 토미노 같은 감독이 되려고했지만 토미노와는 취향이 맞지 않아 제대로 연출 기술을 사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야자키하고는 밀덕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사적으로 친해지고 많은 연출 기술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둘은 그냥 서로 스승과 제자라는 걸 미디어에 공언하고 다닐 정도이다.
안노가 무명이었던 시절 미야자키 아래에서 다양한 하청작업과 그림을 그리며 일을 배웠는데 이때 나온 결과물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 전투씬이었다. 나우시카의 인기 덕에 미야자키는 안노가 루키가 된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이 나우시카 제작초안 중에 해저 2만리를 모티브로 한 네모 선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게 폐지되면서 이 계획을 기반으로 안노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제작하게 되고 외적 연출 자체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많이 따왔다. 당시 이미 천공의 성 라퓨타가 개봉했었는데 두 작품의 모티브가 애초에 같았기에 결과물도 상당히 유사한 작품이 되었다. 이것때문에 둘 사이의 트러블이 생겼었다는 루머가 돌 정도. 어쨌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성공이 가이낙스와 안노를 양지로 이끌었다는 걸 생각하면 안노를 실력있는 작화가에서 '뛰어난 연출력을 갖춘 감독'으로 만든 계기도 결국 미야자키가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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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노의 첫 번째 총감독 작품인 톱을 노려라!에 자신이 참여했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포스터가 그대로 등장하는 등, 확실히 나우시카에 대한 애정과 팬심, 존경심이 큰 듯 하다.
이후 안노가 토미노/미야자키같은 거장밑이 아닌 감독으로서 독립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제대로 된 초대박을 냈을 때 미야자키는 그에게 "'''솔직하게 만들어서 좋았다.'''"는 한줄 평을 남기기도 했고, 다른 방송에서는 "너는 너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에반게리온으로 증명했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0] 하지만 안노가 에바를 작업하면서 너무나 힘들어했던 것을 미야자키는 알고 있었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시점에서는 "다시는 에바에 손도 대지 말아라"며 에바 후속작업을 만류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안노 본인의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지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에 대해서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안노는 결국 다시 하고 말았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으나 결국엔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모 잡지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인생 최고의 애니메이션 10가지를 고라고 할 때 당당히 미래소년 코난을 골랐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연출을 보면 오히려 안고르는게 이상할 정도.
미야자키도 안노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자주하면서도 토미노가 안노를 까는 것과 달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안타까움과 걱정이 담긴 발언이 많으며 그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지내기도 하고 자신의 후계자로서 은근히 점찍어둔 것으로 보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도 안노가 하겠다고 하자 썩 괜찮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안노가 미야자키를 능가하진 못했어도 따라하는 건 가능하기 때문이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안노 히데아키와 토모나가 카즈히데 정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5.3. 오시이 마모루
한국에선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토미노는 라이벌, 안노는 제자 격이라면 오시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의 친구라 할 수 있다. 미야자키는 평소 자신과 영화, 종교, 철학, 밀리터리에 대한 교양이 비슷한 인물이 없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때 스즈키 토시오는 나이 차는 나지만(열살 차이) 교양 수준이 맞는 사람으로서 말친구로 삼으라며 오시이 마모루를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수준이 똑같아서 말이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견해는 완전히 달라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반대의견을 늘어놓으며 몇시간 씩 토론을 하고 언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미야자키는 오시이 마모루를 좋아했고 나이차가 꽤 남에도 [21] 두 사람은 친구로 남았고 서로 정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여행도 같이가는 사이로 발전했다. 오시이를 미야자키의 제자라 하기엔 애매한데 작품 활동 초기부터 미야자키와 오시이는 서로의 경지가 비슷함을 인정하고 있다. 더 배울 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알게되지만 두 사람은 작품 성향과 내용부터가 완전히 달라서 도저히 융화될 수 없다.
두 사람의 작품론은 완전히 달라서 서로의 작품에 대한 비판도 많은 편이다. 당시의 애니메이션 잡지에서도 이 두 사람의 대담과 서로의 작품 비판을 정기적으로 실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와 독설 배틀은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서로 작품에 대한 비판을 나누고 있다. 한국에선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비판이 너무 날이 서 있고 독해서 두 사람이 별로 친하지 않은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론 이런 대담은 서로 껄껄 웃으면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미야자키 작품은 연출 외에는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도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과 천공의 성 라퓨타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자신의 작품에서 따라하기까지 했고 미야자키는 "이 자식 내 걸 따라했구만"하고 반응했다고. 미야자키는 오시이의 시끌별 녀석들 TV판과 우르세이 야츠라2 뷰티풀 드리머를 극찬한 바 있다.
6. 논란
7. 포스트 미야자키
존 라세터의 말대로,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 미야자키 하야오 급의 영향력을 보여준 감독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100억 엔은 기본으로 흥행했지만 2016년 너의 이름은.이 개봉할때까지 이 100억엔을 넘은 작품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제외하곤 단 한 작품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지브리 스튜디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전체에서도 꽤 큰 고민으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그의 후계자가 나오지 않는 건 점점 대중적인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위치가 아슬아슬해진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곤 사토시와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이 세계 3대 영화제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2010년대에는 명맥이 끊긴 상태. [22]
특히 콘 사토시는 만든 작품이 모두 예술성, 작품성 모두 높은 평을 받는등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포스트 미야자키를 이끌 차세대 감독으로 꼽혔으나, 47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해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게 되었다. 완벽 주의자인 오시이 마모루도 자신의 눈에 찰만한 실력의 애니메이터 들이 없거나 나이 문제로 활동을 줄이자 애니메이션 활동을 거의 접어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했었으나 허사가 된 일도 많았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후배 감독을 키우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23] 그에 대한 일화는 스튜디오 지브리 항목 참조.
그나마 대중성 면에서 따라갈만한 감독은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가 있어 이 두 사람이 거론되나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타일과 사상이 완전히 다른 감독이며 이들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역에 도달하였는가는 많은 이견이 있다. 무엇보다 호소다 마모루와 신카이 마코토는 둘 다 연출자에 가깝고 미야자키처럼 작화까지 하는 괴물이 아니다.
호소다 마모루 본인은 '포스트 미야자키'라는 말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류 작품같은 것은 미야자키씨가 하면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는 장래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었고, 스튜디오 지브리 연수생 시험에도 응모했다가 불합격한 경험이 있는 그는 '미야자키씨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초기작에 한해서'라고 밝혔다. 미야자키 감독작에서는 이웃집 토토로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다만 국제적인 주목도로 따지면 가장 유력한 후보에 가깝다. 미래의 미라이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는 등, 해외 시장에서 지명도를 올리고 있는 추세기 때문.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감독 때문이 아니라 제작팀[24] 덕분이라고 말하고,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불리는 것에는 '어느 나라에 가도 그런 질문을 받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며 같은 방향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것을 목표로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참고로 호소다 마모루와 신카이 마코토는 '''미야자키에게 뭘 배운 적이 전혀 없다.''' 호소다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연출 기술을 배웠고 신카이는 독학으로 배웠다. 제자는 커녕 전혀 별개의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미야자키에게 직접 뭘 배운 사람들은 안노 히데아키, 카타부치 스나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코사카 키타로 같은 사람들이다. 호소다 마모루 작품이 미야자키 작품처럼 보이는 건 예전에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 참여했던 애니메이터와 같이 작업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주로 이 둘만 인지도가 높아 둘만 거론되지만 일본에서는 하라 케이이치, 유아사 마사아키, 카타부치 스나오 도 애니메이션 작가로 가능성이 높은 감독으로서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들도 자신들이 포스트 미야자키라는 거에 대해선 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부정하고 있다.
사실 포스트 미야자키란 것은 결국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잡지 같은 곳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만들어낸 일종의 떡밥에 가까우며 진지하게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일본에선 이를 두고 바이럴 마케팅 전문 회사인 덴츠에서 자신들이 스폰서를 하고 있는 호소다 마모루와 신카이 마코토를 밀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애초에 천재 크리에이터 개인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타인이란 존재는 없다.
8. 경력
참가 작품 리스트 일본 작화 위키 참조
8.1. 스튜디오 지브리
8.2. 그 외
- 소년 닌자 바람의 후지 마루 (1964) - 원화
- 레인보우 전대 로빈 (1966) - 원화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1968) - 원화·장면 설계 (레이아웃)
- 장화신은 고양이 (1969) - 원화
- 하늘을 나는 유령선 (1969) - 원화
- 비밀의 아코짱 (1969) - 원화
- 무민 (1969) - 원화(21, 23화)[29] 원작자가 이 버전의 무민 애니를 싫어하는데 캐릭터의 성격이 원작과 다르고, 특히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화를 그린 에피소드는 전투기나 탱크 같은 전쟁병기가 잔뜩 나와서 무민의 세계관을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 동물 보물섬 (1971) - 아이디어 구상, 설정, 디자인, 원화
- 루팡 3세(1기 TV시리즈) (1971) - 원화·연출 (실질적인 2쿨 감독)[30] 9, 14, 15, 16, 17, 18, 19, 21, 23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1972) - 원안, 캐릭터 디자인, 각본, 레이아웃, 원화
- 정글 쿠로베 (1973) - 캐릭터 원안[31]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우천 서커스 편 (1973) - 원안, 캐릭터 디자인, 각본, 레이아웃, 원화
- 사무라이 자이언츠 (1973) - 원화[32]
- 황야의 소년 이사무 (1973) - 원화
-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1974) - 장면 설정·화면 구성, 레이아웃. 전편 참여
- 플랜더스의 개 (1975) - 원화 15
- 엄마찾아 삼만리 (1976) - 화면설정, 레이아웃 전편 참여
- 꼬마 너구리 라스칼 (1977) - 원화 4, 5, 6, 10,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4, 25, 26, 27, 28
- 루팡 3세(2기 TV시리즈) (1977) - 각본·총콘티·연출 145, 155화 작화가 극장판 급으로 루팡 팬 들이 최고로 꼽는 에피소드 1,2위다. 미국에선 이 2 에피소드만 따로 비디오로 출시하기도 했다.
- 미래소년 코난 (1978) - 감독·캐릭터 디자인·메카닉 디자인·총콘티·연출·장면 설정
- 빨강머리 앤 (1979) - 장면 설정·화면 구성 레이아웃. 1~15까지 참여하고 그만두었다.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1979) - 감독·각본
- 철인 28호 (1980) - 원화(8화)
- 명탐정 홈즈 (1985) - 감독·총콘티·연출·각본. 직접 연출한 것은 3, 4, 5, 9, 10. 직접 연출한 편은 극장판 급.
9. 수상내역
10. 관련 인물
흔히 미야자키는 후계자를 못 키웠다는 소리가 많은데 '''잘못 알려진 소리다.''' 아래에 제자 리스트가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제자들도 상당한 실력파이다. 제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연출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에게는 투덜대면서도 기술을 가르쳐주긴 했다는 증언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단지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와 타카하타 이사오 작품이 아니면 다른 연출가는 감독할 작품도 없고 투자자도 안 붙으니 회사를 나갔을 뿐이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제자들이 능력을 보이면 퇴사를 권고한다고 한다. 미야자키가 제자를 못 키우는 게 아니고 미야자키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유사한 스타일의 제자를 키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오오츠카 야스오 - 그림 스승
- 타카하타 이사오 - 파트너. 연출 스승
- 스즈키 토시오 - 프로듀서
- 히사이시 조 - 음악
- 미야자키 고로 - 아들
- 야마모토 니조 - 미술감독
- 토미노 요시유키 - 라이벌. 같이 작업한 작품도 많다.
- 오시이 마모루 - 친구 겸 라이벌.
- 야스다 미치요 - 채색
- 연출 제자
- 애니메이터
11. 기타
- 미야자키는 그의 강연에서, 자신은 비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이랬으면 좋겠는데"라는 것을 늘 만들고 싶어하며, 그런 것밖에는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인한 바 있다.
- 한편 그는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저지른 여러 학살 및 갖가지 일들과 비교하면서 역시 일본인 전체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이상주의는 전쟁의 본질 속에 작가 자신이 말해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미래적 희망들의 동화적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작품 중에는 그런 모습들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해 더없는 웃음과 유쾌함을 보여주는 때가 많았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해 대놓고 반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1988년에 출간된 본인의 책에서 그는 "나는 디즈니 영화가 싫다. 디즈니 영화는 입구와 출구의 넓이와 높이가 같다. 관객을 우습게 보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라고 발언하였다. #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비디오 게임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이 게임의 내용이 나우시카가 건십에 탑승하여 벌레들을 학살하는 내용의 게임이었던지라 게임이라는 존재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는 도시전설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으나, 해당 게임은 평화적인 교섭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벌레는 피해다녀야지 죽이면 감점을 받거나 게임이 일찍 끝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문서를 참조. 참고로 미야자키는 80년대에 이미 애니메이션은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미래에는 비디오 게임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는 내용의 칼럼을 쓴 바 있으며 미야모토 시게루와 대담을 하면서 게입 산업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게임에 부정적인 라이벌 토미노 요시유키와는 정반대.
- 코라의 전설의 백합 엔딩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마코(코라의 전설) 3번 항목 참조.
- 고등학생 시절 밀덕 잡지에 기고한 글이 발굴되기도 했다.
- 오너캐는 흔히 안경 낀 돼지로 나온다. 메인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사내 엽서 등에서 나오며, 모 단편 애니메이션에서는 하야오 본인이 해설역으로 나온 이 캐릭터의 성우를 맡았다.
- 1989년 발매된 ova 애니메이션 <발튜스티아의 빛>은 지브리식 그림체의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와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의 작품이다.[33]
- 90년대 초반, 국내 영화잡지에서는 그의 이름을 미야자키 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었다.[34]
-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와 창작 방식을 더 알고 싶다면 황의용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는 책을 추천한다. 절판된 책이므로 도서관에서 찾아야하겠지만.
- 오시이 마모루는 미야자키가 마블 코믹스 영화를 보냐는 질문에 "반미주의자인 미야자키 씨가 캡틴 아메리카 같은 걸 볼 리가 없다. 아예 존재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라고 하면서도 "슈퍼맨, 배트맨 같은 DC 코믹스 쪽은 본 것 같다." 고 말했다. # 루팡 3세 2기 시리즈 마지막화와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온 로봇 디자인의 모델이 플레이셔 스튜디오가 제작한 슈퍼맨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로봇이란 설도 있으므로 적어도 슈퍼맨은 보긴 본 모양.
- 상당한 골초이다. 작업할 때도 회의할 때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건물 흡연이 금기시 되는 2000년대 이후로도 알게 뭐야 라고 계속 피워 다큐멘터리나 취재 영상에서도 작업 중 자연스럽게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서 미야자키의 책상 주변에는 공기청정기를 2대를 설치했다. 루팡 3세에서도 흡연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어린이들이 담배를 나눠 피기도 하며 바람이 분다에선 등장인물들이 담배를 뻑뻑 핀다. 이는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흡연에 관대한 사회인 점도 있다. 일본 내에서는 식당에서도 부모 앞에서 자식이 같이 맞담배를 피기도 한다.
- 2000년대 이후 신작을 내면 국제 영화제에 반드시 초청되는 감독이나, 유독 칸 영화제랑 인연이 없다. 하야오 감독 애니 중 칸에서 상영된 애니는 2008년 회고전에서 상영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전부. 2010년대 후반부터 동료 타카하타 이사오 (가구야 공주 이야기), 후배 오시이 마모루 (이노센스), 코사카 키타로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 호소다 마모루 (미래의 미라이), 심지어 아들 미야자키 고로 (아야와 마녀)까지 관련 인물들은 칸에 초청받았는데 [35] 정작 본인은 초청이 없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신 베니스 영화제 단골로 꼽힌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작품은 전부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을 정도.
- 픽사에서 메시지 보드를 선물하였는데, 몬스터 주식회사 주인공과 토토로가 같이 있는 모습이다.사진
- 2021년 1월 9일, 스튜디오 주변을 산책하는 모습이 구글어스에 포착된 것을 일본의 한 트위터리안이 공개하였다. # 얼굴은 프라이버시 보호때문에 모자이크되어 있지만 입은 옷이나 뒷모습만 봐도 빼도박도 못하게 미야자키 하야오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