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류샨 열도 전역
1. 개요
알류샨 열도 전역은 태평양 전쟁의 일부로, 1942년 6월 3일부터 1943년 8월 15일까지 14개월여간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지칭한다.
2. 배경
알류샨 열도 전역은 당연히 일본군에 의해 계획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대전략은 미드웨이 제도 점령을 통한 중부 태평양 공세, 그리고 뉴기니 전역을 통한 남부 태평양 공세와 함께, 알류샨 열도에 대한 북부 태평양 공세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이러한 대전략은 남방작전의 완벽한 성공, 실론 해전을 통한 인도양의 영국 함대의 위협 제거로 일본 해군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태평양 전역의 공세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후지다 미츠오 중좌가 쓴 전후 회고록에서는 알류샨 열도 공세가 양동작전이라고 했지만, 일본군의 북부 태평양 공세는 AL 작전으로 명명된 단독 공세작전이었다. 대본영은 AL 작전을 통해 혹시 모를 미군의 알류샨-쿠릴 열도 방면의 공세를 사전에 차단함으로서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을 확실하게 차단하고, 혹시 모를 (당시 중립국이자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소련과 미국의 연계를 방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물론 미드웨이 제도 공략하려는 MI 작전과 동시에 시행하였기에 후지다 중좌의 회고대로 양동작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대본영은 그냥 ''''미국이 미드웨이 방어에 몰빵하느라 알류샨은 텅텅 비었겠지?'''' 생각하여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작전을 동시에 진행했을 뿐이었다.
대본영의 계산대로 미국은 알류샨 열도를 방어할 능력이 전무했다. 본토에 가까운 군항 더치하버에는 그래도 다수의 함정과 항공기가 있었지만 항모나 전함은 1척도 없었다. 당장 항공모함이 없어서 산호해 해전에서 두들겨맞고 전치 2달 진단 끊은 요크타운을 긴급수리해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하는 판국에 알류산 열도 방어에 주력함을 투입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장 일본군이 목표로 한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는 주둔하는 무장병력은 한 명도 없었다. 키스카 섬에 기상관측요원 10명이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항공기나 함정 등 미국의 방어태세는 더치하버와 알래스카 본토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영향도 있었는데, 해당 조약에서 미국은 자국의 본토 서해안, 하와이 제도, 알래스카 외 지역에서 요새나 군항설치 추가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알류샨 열도는 해당 조약에서 알래스카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이 워싱턴 군축조약을 파기한 이후에는 요새와 군항 공사를 할 자유가 생겼지만 그마저도 더치하버 중심으로 이뤄졌다.
1940년도에나 간신히 제13해군 관구가 설립되는대 전력은 포함 찰스턴을 기함으로 '''개조어선''' 3척으로 시작했을 정도로 순위권 밖 대우였다
3. 전개
3.1. 1942년
1942년 6월 3일, 일본 해군 제2기동부대 소속 항공모함 류조와 준요가 더치하버를 공습하는 것으로 알류샨 열도 전역이 시작되었다. 짙은 구름의 방해, 그리고 투입한 항모 전력의 한계로 대규모 공습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더치하버의 주요 항만시설과 유류저장고를 성공적으로 폭격했다.
정찰기를 통해 제2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도 즉시 항공기들을 보내 이들을 공격했으나 당시 정예 파일럿들은 다 미드웨이 제도에 가 있었고, 아직 개전 초반이라 파일럿들의 실력이나 교리도 충분히 확립되지 않아서 공격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6월 4일, 제2기동부대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로부터 알류샨 열도 공격을 중단하고 즉시 미드웨이로 남하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당연히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였다. 이 명령에 따라 제2기동부대는 더치하버 공습을 중단하고 남하를 준비했으나 직후 '''명령을 번복'''한다는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연합함대 지도부는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에 제대로 멘붕해서, 제2기동부대가 미드웨이까지 재배치되는 시간조차 생각지 않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명령 번복에 따라 6월 6일 오전 6시에서 7시에 거쳐 일본군은 키스카 섬에 상륙, 주둔 중인 미군 기상관측반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섬을 점령했다. 애투 섬에서는 항로를 잘못 잡는 등 약간 장애가 있었지만 6월 7일에 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한편, 키스카 섬의 기상관측반으로부터 기상관측보고가 들어오지 않자 미군 지휘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6월 10일 수상기모함에서 카탈리나 비행정을 이륙시켜 정찰비행을 실시, 두 섬을 일본군이 점령했음을 확인한다. 피꺼솟한 미군은 즉시 육군항공대 소속 B-17, B-24 폭격기를 동원하여 두 섬에 폭격을 가했지만 그놈의 안개와 구름 때문에 성과는 미미했고, 약 1달 후에 폭격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미군은 두 섬의 일본군을 가만히 냅두지 않았다. 전투기와 잠수함 등을 동원하여 적극적인 초계와 정찰을 하였다.
본래 이 지역의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다보니 니미츠 제독과 킹 제독은 이곳을 적당히 봉쇄하고 더 중요한 일에 매달리려 했다. 하지만 미국의 아마추어 군사전문가들이 이곳을 통해 일본군이 미 본토로 처들어 올 수 있다는 설을 언론에 자주 기고했고, 일반 시민들도 듣도 보도 못한 아시아 섬들과 달리 (듣보잡 촌구석이라곤 하지만) 미국 본토에 자리잡은 일본군에 관심이 많았다. 여기에 낚인 정치가들 훈수까지 들어오자 태평양 전선이 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즈음에 본격적인 토벌 작전을 준비했다.
한편, 대본영은 키스카, 애투 섬의 점령을 유지한다는 계획을 새로이 내놓았다. 본래 AL 작전의 목표는 북부 태평양에서 가해질 미군의 공세위협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더치하버 공습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데다 알류샨 열도 최서단 두 섬에서 제대로 된 군사기지를 확인하지 못하여 미군이 북부 태평양을 공격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점령부대를 도로 철수시키기만 하면 작전은 종료될 터였으나, 일본군은 그러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실추된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병크라는 평가와, 과달카날 전투 등 남태평양 전역에서 투입될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는 주의견제용이라는 평가가 혼재한다.
일본군은 초기 점령부대의 배가 되는 병력을 파병하여 최종적으로 병력 6천여 명에 수상기들이 키스카 섬에 주둔배치되었다. 미군도 이에 맞서 잠수함 활동을 강화하고, 구축함들이 키스카 섬 해안까지 달려들어 포격을 퍼붓는 등 압박을 가했으며 키스카, 애투 섬 동쪽 애닥(Adak) 섬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과달카날 전투가 본격화되자 비교적 여유가 있는 알래스카 방면의 주요 함정들과 구형 S급 외 모든 잠수함까지 니미츠가 과달카날로 빼돌려서(...) 미군은 본격적인 탈환전을 시도하지 못하고 구형 잠수함과 육군 항공기로 공격하는 정도에 그쳤다.
3.2. 1943년
3.2.1. 미군의 압박 강화
미군은 1943년부터 키스카, 애투 섬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사이먼 B. 버크너 장군의 지휘 아래 애닥 섬에 이어 키스카 섬에서 동쪽으로 140 km 떨어진 암칫카(Amchitka) 섬에 상륙하여 새로운 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수상기들과 B-17, 24 폭격기들이 중심이 된 항공작전에 전투기들이 가세하고 그 규모 또한 곱절이 된다는 의미였다. 미군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하여 손쉽게 활주로와 기지를 건설한 반면, 두 섬을 점령한 지 반년이 넘은 일본군은 순수인력만 투입하다 보니 여전히 활주로 공사가 지지부진하여 몇 안 되는 수상기에 의존해야 했다.
더군다나 과달카날 전투가 마무리되어 태평양 함대는 전력의 여유가 생기자, 그 여유를 알류산 열도로 보내었다. 물론 주력함을 파견하진 않았으나 중순양함급 함정들이 배치되자 일본군이 느끼는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3월 26일, 두 섬에 증원병력과 물자를 보내려던 일본군 함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 함대간 전투(코만도르스키예 제도 해전)가 있었다. 양측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일본군이 병력과 물자 보급에 실패하여 사실상 미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대본영은 책임을 물어 5함대 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를 예편시키고 가와세 시로 중장을 임명했다.
이후 일본군은 애투, 키스카 두 섬에 대한 '''해상보급을 포기하고 잠수함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한편, 미군은 키스카 섬에 대한 탈환을 최우선에 두고 2개 보병사단을 준비했으나 상륙함과 수송선이 부족하고 당시 기후상 한 번정도만 상륙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 키스카 섬보다 수비대가 훨씬 적을 것으로 판단되는 애투 섬을 먼저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3.2.2. 애투 섬 탈환 (5.11~30)
애투 섬의 일본군은 육군 303독립보병대대를 중심으로 활주로 건설 임무를 맡은 공병 1개 대대, 대공포부대 등이 혼재되어 총 병력이 2600여 명이었다.
미군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Operation Landcrab로 명명한 애투 섬 탈환작전에 지상군 1만여 명은 물론, 왕립 캐나다 공군에게 지원까지 받아가며 항공기 2~300여 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이후 드디어 수리가 완료된 '''전함 네바다, 펜실베이니아, 아이다호'''에 호위항공모함 나소가 가세하였다.
5월 11일 상륙 후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우세 속에 순조롭게 진격하였고, 궁지에 내몰린 일본군 잔여병력은 5월 29일 새벽을 틈타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다.
이 반자이 어택은 태평양전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투입된 미 육군 병력이 본토에서 훈련을 마치고 투입된 신병들이었고, 아직 과달카날 전투 외에는 일본군과 지상전 경험이 충분치 않다 보니 반자이 어택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주의전달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1]
이 덕분에 일본군은 전선의 미군 야전지휘소와 야전병원을 쓸어버리고 미군 보급창을 목표로 돌격했다. 하지만 보급창의 미군 공병대대는 '참호선과 기관총'이라는 정석적인 반자이 어택 대응법으로 맞서 쓸어버렸다.
결국 5월 30일을 기해 애투 섬 전투는 종료, 일본군 수비대는 전멸했다.
3.2.3. 키스카 섬 탈환 (8.15~22)
애투 섬을 탈환한 미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애투 섬 탈환으로 키스카 섬의 고립은 더더욱 확실해졌다. 연합함대는 '''함대결전'''을 위해 남은 전력을 긁어 모아 알류샨 열도로 보내려 하였으나 항해 도중 히요가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트리거의 어뢰에 명중되어 본토로 예인되자 포기해버렸다. 미드웨이 해전에 금쪽같은 정규항모 4척을 날려버린 연합함대는 히요까지 항행불능이 되자 싸울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더군다나 애투 섬을 탈환한 미군은 5월 29일부터 활주로 공사에 들어가 불과 11일 만인 6월 8일에 활주로를 완공했다! 일본군은 1년 가까이 완공 못한 데에는 일본군이 지반조사를 개판으로 한 것도 큰 이유였지만, 일본군이 불도저 등 중장비가 없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지역 지반이 다들 개판이라 미군도 알류산 열도 지역에 급하게 건설한 비행장은 착륙하던 폭격기가 10 m나 튀어오를 지경이라 중장비를 동원해 지반을 차곡차곡 다져야 했다.
이후 6~7월에 걸쳐 미군은 엄청난 항공기를 배치하여 폭격을 퍼붓고, 중순양함들이 직접 해안으로 다가가서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잠수함과 뇌격기들이 키스카 섬 주위 해상을 철두철미하게 감시하여 접근을 시도하려는 함정들을 악착같이 차단했다.
한편 대본영은 애투 섬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5월 19일에서야 알류샨 열도 철수를 결정했으나 '''철수시킬 수단이 없었다.''' 함대결전 시도는 히요의 뇌격으로 무산되었고,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함에 따라 수상접근도 매우 어려웠다.
가와세 시로 중장은 예하 1잠수전대의 잠수함들을 투입하여 약간의 보급품을 전달하고 병력들을 철수했으나 잠수함을 이용한 철수를 시작한 지 약 1달만에 잠수함 3척을 미군 대잠망에 의해 잃고, 그 과정에서 함대참모까지 잠수함과 함께 전사하자 잠수함 철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탈출시킨 병력은 820여 명이고 잔존 병력은 6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군의 계속된 폭격과 포격, 그리고 철수선단의 접근 실패에 사기가 떨어져 키스카 섬을 무덤으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와세 시로 중장은 '''어차피 실패한 구출작전, 육군 눈치보여 시도는 해야했고 누구 대충 방패막이 할 잉여 없나?''' 하며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패배 책임으로 물러난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을 끌고 왔다. 그런데 기무라가 엄청난 대박을 쳐서 키스카 섬 수비대를 전원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무라 마사토미 항목 참조.
일본군이 이미 탈출한 줄도 모르고 미군은 8월 15일 상륙작전을 개시, 섬을 수색한 뒤 허탕쳤음을 인정하고는 8월 22일 키스카 섬 탈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3.3. 이후
키스카 섬 탈환을 마지막으로 알류샨 열도 전역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다만, 탈환한 키스카 섬에서 발진한 미군기가 일본령 쿠릴 열도를 공습하기도 하고 이에 맞서 일본기가 반대로 알류샨 열도를 공습하는 정도의 소규모 충돌은 지속되었다.
이후 미군은 알류샨 열도를 거점으로 하는 북방 공격루트를 검토했다. 일본이 알류샨 열도 공격을 계획한 그 걱정대로, 알류산 열도를 발판 삼아 쿠릴 열도를 공격하고 나아가 일본 본토로 진공하는 계획이었다. 쿠릴 열도 북부에서 가장 큰 섬이며 슘슈 섬 바로 서쪽에 있는 파라무시르(Paramushir) 섬은 쿠릴 열도의 일본군 주요 거점이자 함대집결지로 쓰였기에 미군은 파라무시르 섬을 공략하여 알류샨 열도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고, 추후 상황을 보아 쿠릴 열도를 따라 남하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일본군도 반대로 진격하는 작전은 불가능이라 판단해 고려조차 안 한 작전이고 맥아더나 니미츠 모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보는 일본군 자신들이었다.(...) 키스가 섬 함락 이후 대본영은 미군이 상술한 루트를 따라서 쿠릴 열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진공하진 않더라도, 일본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북부에서 위협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쿠릴 열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1943년 6월 대본영은, 예상되는 미군의 쿠릴 열도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쿠릴 열도의 요새화'''를 결의했고 이를 위해 안 그래도 털리고 있던 수송선 다수를 쿠릴 열도로 할당했으며, 다수의 수비대를 빼내어 쿠릴 열도로 재배치했다. 당장 슘슈 섬 전투만 해도 일본 육군은 그 작은 섬에 귀한 1개 사단과 11전차연대(보유전차 64량)을 배치하고 있었다.
4. 기타
- 미칠 듯한 무더위와 끔직한 정글, 문명과 동떨어진 외딴 섬의 이미지가 강한 태평양 전쟁에서 상당히 이질적이게도 동계작전이 이뤄진 곳이다. 북극의 추운 날씨와 나무 하나 없는 황야는 태평양 전쟁에선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전장. 사실 미군은 유럽전선에서도 스칸디나비아 같은 북극권에서 전투를 치뤄본 적은 없기에 대전기 미군의 유일한 동계 전역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그 외에 미군이 '제대로 겪은' 동계작전이라면 장진호 전투 정도.
- 이 혹한은 특히 예정에도 없는 점령과 장기 주둔에 나서게 된 일본군에게 심각했다. 미군은 그래도 알래스카 등지에서 쓰던 방한복이라도 보낼 수 있었고 보급로가 열려 있었지만, 일본군은 본토의 겨울에 대비한 방한복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애투 섬, 키스가 섬 점령 직후 일본 열도를 통틀어서 고양이 공출을 단행했다. 고양이 가죽을 방한복 안감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해당 글의 저자 말대로, 애투 섬의 일본군들은 전멸했으니 애꿎은 고양이들만 희생되었다.
- 1942년 6월 3일 더치 하버 공습 당시 격추된 제로센 한 기가 미군에 노획되고, 미군은 이 제로센을 신나게 굴리며 대처법을 찾아내었다.
[1] 또한 워낙 추운 지방이라 안개가 연막탄 역할을 해줬기에 안개가 겆히기 전까지는 미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