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쿠 압둘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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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M Tunku Abdul Rahman Putra Al-Haj ibni Almarhum Sultan Abdul Hamid Halim Shah, 1903. 2.8 ~ 1990. 12.6
1. 소개
말라야 연방의 마지막,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 영국령 시절에는 독립운동가 민족주의를 제창하며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총리에 오른 인물. 비록 일부 실책이 있었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주도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말레이시아를 건국한 국부이다. 참고로 툰쿠 압둘 라만이 총리로 재임할 당시의 국왕이었던 이름이 매우 비슷한 말레이시아 초대 국왕 투앙쿠 압둘 라만과는 다른 사람이다. 투앙쿠가 툰쿠보다 좀 더 높은 경칭이다. 비유하자면 툰쿠는 전하, 투앙쿠는 폐하 정도. 말레이시아에서도 둘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2. 생애
1903년 크다 주 알로르스타르에서 태어났다. 크다의 왕실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크다의 제25대 술탄이었다. 어머니가 태국계인데 아버지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술탄에 오르지는 못했다. 나중에 자신의 조카인 압둘 할림[1] 이 크다 주 술탄이 되었고, 이후 양 디-프르투안 아공[2] 에 2번 오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카가 아공이 된 바로 다음 날, '''삼촌은 총리직 사표를 냈다'''는 점.
학창 시절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는데 당시 조국인 말라야가 영국에게 빼앗겼다는 점에 큰 서러움을 느끼고,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서도 그는 말레이인을 위해 대대적인 희생을 했으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탄압은 면했으나, 그 와중에도 탄압받는 자국민들을 위한 큰 노력을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온 자파르가 주도하고 있던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가입했고 곧바로 지도부에 들어갔다.
평화적인 독립을 위한 협상을 하고자 1954년 영국을 방문했으나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UMNO는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영국령 말라야의 마지막 총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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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8월 31일 독립광장에서 "독립!"을 외치는 장면. 역사적인 장면으로 유명한데 "독립!"을 무려 '''7번'''이나 외쳤다.[3]
1957년 8월 31일 말라야는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고 그는 독립한 조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다. 1963년 사라왁, 사바, 싱가포르(1965년 탈퇴)와 손을 합쳐 신설 말레이시아를 건국하였고 1967년 이웃나라들과 함께 아세안을 결성하였다. 1970년 사임한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90년 쿠알라룸푸르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7세.
3. 업적
오늘날 말레이시아에서는 후임자인 압둘 라작과 더불어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특히 툰쿠는 그 중에서도 '''독립의 아버지'''(Bapa Kemerdekaan)라고 불린다.
툰쿠의 몇 가지 업적을 꼽자면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립 운동"이다. 라작과 함께 툰쿠는 말라야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다했으며, 이후 영국과의 협상을 거쳐 말라야는 1957년 8월 31일을 기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이 외에도 오늘날 말레이시아가 있도록 해 준 장본인이 바로 툰쿠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디 툰쿠는 말라야의 독립을 주도한 사람이었고, 말라야의 총리로서 식민지 시대의 청산과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말라야는 한반도처럼 주변국들이 말라야보다 더 크고 국력이 더 셌다는 문제가 있었다. 안 그래도 독립 1년 전 인도네시아가 무주지였던 나투나 제도(그것도 말라야와 보르네오 사이에 있었다)를 불법 침공해 점거하면서 말라야는 지리적, 안보적 위험에 처해 있었다. 당연히 이런 말라야로는 국제 무대에 서는 것이 불가능했고, 때마침 보르네오 북부의 사라왁, 사바, 브루나이, 그리고 말라야에 편입되지 못한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또한 이 곳의 주민들도 경제적 향상을 원하고 있던 참이라, 툰쿠 입장에서는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 모두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현재 말레이시아를 건국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당초 사라왁과 사바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처음에는 반대했고, 브루나이는 강하게 찬성했으나 대신에 내부 좌익 세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일단 사라왁과 사바는 일병 "코볼드 위원회"를 설치해 이들 주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찬성이 압도하면서 이들의 가입은 확실했다. 허나 브루나이는 총선을 치렀는데 좌익 성향의 인민당이 압승하면서 가망이 없어졌고, 무엇보다도 브루나이가 요구한 자치 사항이 말라야 입장에서도 나름 위험하게 판단되어, 브루나이는 가입을 포기한다. 싱가포르는 무난히 가입했지만, 민족 구성 면에서 너무나도 달랐고(말라야는 말레이인 중심, 말레이시아는 부미푸트라 중심, 싱가포르는 중국인 중심),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하고 1965년 8월 9일 연방에서 쫓겨났다. 여기서 생각처럼 강한 리더쉽을 발휘하지는 못 한 점은 아쉽고, 무엇보다도 훗날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를 압도하는 선진국으로 번창하기는 했으나, 인종적 문제를 우려한 말레이시아 입장에서는 그리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라만 정권은 민족 분쟁의 시초라는 위치에 있었는데, 말레이인은 다수 민족이었으나 중국인에게 경제적으로 밀렸고, 말레이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인이 힘이 세지는 것을 심히 우려했다. 이를 감안한 라만은 중재에 들어가면서도, 말레이인을 일부 우대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심히 아쉬웠다. 중국인의 반발은 매우 심했고, 결국 싱가포르의 탈퇴로 이어졌으며, 이 중에서 라만을 극도로 반대하던 일부를 중심으로 민주행동당(DAP)이 창당되었다. 수뇌부인 림킷시앙은 형식상 "인종간의 평등"을 주장했으나, 뒤에서는 반말레이 사상을 선동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구호 중 하나였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인 우선"은 전형적인 파쇼 냄새가 강한 선동구호였다.[4][5]
결국 중국인 유권자들의 반란 속에서 1969년 총선은 DAP의 약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틈 탄 DAP는 5.13 사건이라는 인종 폭동을 주도했다. 라만은 빠르게 수습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이 당시의 계엄령 선포는 훗날 그가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였으므로 계엄령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만으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약한 리더쉽은 당 내에서 회의적으로 보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1970년 총리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여담으로, 사임 당시 군주는 '''자신의 조카'''인 압둘 할림이었다. 압둘 할림의 아버지가 툰쿠의 배다른 형제이다.
이처럼 인종 간의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독립 운동을 주도하고 무엇보다도 현대 말레이시아를 건국한 국부로서 라만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4. 마하티르와의 악연
당 내의 비주류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라만에게 만만치 않은 정적이었다. 겉으로는 말레이인 우대를 주장했지만, 그러면서도 라만 정권에 부정적이었고, 5.13 사건 전후로 라만을 "돼지"라고 비난했다가 UMNO에서 출당되었다. 이후 라작이 집권하면서 마하티르는 복당에 성공했으나, 이는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1981년 총리에 오른 마하티르는 자기 세력을 위시로 한 A조를 결성해, 라만-라작을 위시로 한 B조를 대거 숙청시켰다. 이 과정에서 라만은 마하티르를 비판했다가 찍혔고, 결국 B조가 쓸려나가는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탈당했다. 이후 라만은 46년 정신당에 가담했지만, 얼마 못 가 세상을 떴다.
다만 라만의 공은 마하티르도 인정은 했는지, 마하티르의 측근이 "라만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고 밝혔고, 국장과 함께 "독립의 아버지"로서 추앙을 받게 되었다. 비록 악연이어도 죽음만큼은 안타까웠던 부문.
하지만 라만이 마하티르를 출당한 점은 훗날 우연치 않게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비록 계파 갈등을 조장해 UMNO의 흑역사를 만든 마하티르였지만 그래도 UMNO의 원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한때 마하티르는 라만, 라작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3대 국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마하티르는 2015년 변절해 PH에 가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7년, 마하티르가 라만 시절 DAP에게 말레이인을 모독하라고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면서 마하티르의 평판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고도 2018년 5월의 총선거에서 무려 90대의 나이로, 말레이시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의 주인공이 되어 재집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5. 유산
툰쿠의 이름은 각계에 꼭 붙어 있다. 국부로서 어쩌면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툰쿠 압둘 라만 대학교(TARUC/UTAR)가 대표적. 다만 UTAR는 BN 산하의 중국인 정당인 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MCA)가 만든 사립 대학이고, 이 영향 탓에 학생들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그러나 요즘 중국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정작 이 학교의 학생들은 툰쿠를 비롯한 UMNO 자체에 부정적인 듯 하다.
코타키나발루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툰쿠 압둘 라만 국립공원이 있다.
[1] 툰쿠가 압둘 할림 부친의 배다른 형제이다.[2] 군주의 현지어 이름[3]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3번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7번이 맞다.[4] 당장 일제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구호로 사람들을 선동시켰다.[5] 훗날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인 마린 르 펜 또한 "프랑스 우선주의"를 내세우거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것을 보면 극우 냄새가 강한 것은 맞는 말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