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 갈등

 

1. 개요
2. 원인
3. 사례
3.1. 한국
3.2. 외국


1. 개요


말 그대로 계파 간의 갈등을 말하는 정치 용어. 내부 분열의 한 종류다. 끝끝내 하나의 당으로 묶이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분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만인이 서로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어나며, 독재나 왕정 국가에서는 독재 집단 내부적에서만 일어난다.

2. 원인


계파갈등의 원인은 매우 다양한 데 우선 자리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자리는 한정적이므로 자리를 차지하고 분배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뭉치고 분열한다. 이 과정을 단계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개개인들은 가지고 있는 자원에 따라 권력(자원 분배 권한)을 부여받지 않고, 모두 동등한 1인 1권력을 가지고 있다.

1. 가장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개개인들은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정당이라는 형태를 구성하게 된다. 연합하지 못한 자는 권력에서 배제된다. 이에 따라 많은 정당이 생겨난다.

1. 최종적으로 한 정당이 가장 큰 권력을 획득한다. 권력 정당은 이제 정책을 통해 떡고물을 분배해야 한다. 권력을 분배하려는데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떡고물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다.

1. 그래도 떡고물을 분배한다. 떡고물을 분배함으로서 타인을 설득하고 행동할 유인을 잃고 흩어진다. 다시 1로 돌아간다.

1. 떡고물을 분배하지 않고 다시 갈등(계파갈등)을 일으킨다. 갈등함으로서 중심을 잃고 흩어진다. 다시 1로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국가의 소멸까지 무한 반복되면서, 궁극적으론 그 누구도 장기 집권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계파 갈등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계파갈등은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때문에 국가의 효율이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는 악영향도 일어난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정치 이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정책을 정하는 것을 두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라는 하나의 당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일당 우위 정당제), 자민당이라는 틀 내에서 계파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한 정당 내에 교섭단체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는(복수교섭단체) 규정 역시 계파 내 세력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이다. 자민당의 파벌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3. 사례



3.1. 한국



3.1.1. 새정치민주연합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인 통합민주당 시절부터 갈등이 있었다. 통합민주당도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이 야권 통합과 같은 민주당계 뿌리라는 이유로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시절부터 이어져 온 갈등을 풀지 않고 합당해서 만들어 진 정당이다. 합당한 이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갈등이 더욱 커졌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신세력인 안철수 세력도 이 갈등에 합류하여 더욱 더 갈등이 심해졌다.
이쪽의 경우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대표되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으로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안철수는 야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새누리당 공격보다 자당 당 대표인 문재인을 더 많이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비노 세력들도 문재인을 공격했지만 안철수만큼은 하진 않았다. 이후 안철수와 친안과 호남중진들은 탈당하고 국민의당을 창당한다. 새정치민주연합에 잔류 세력은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한다.

3.1.2. 한나라당


18대 국회 기준, 당시 한나라당 내 계파는 박근혜의 친박계와 이명박의 친이계가 있었다. 이 당시에는 한나라당 주요 현역 정치인들이 대부분이 친이계였고 및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당적을 가졌던 상도동계 대부분이 친이계로 편입 되면서 이 세력이 매우 비대해, 안국포럼(김영우와 조해진 등이 안국포럼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등을 위시한 이명박 직계와,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를 위시해 모인 온건 보수성향 혹은 이재오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이재오계, MB정부 초반 제1실세이자 상왕으로 불렸던 이상득의 측근들과 다수의 영포라인으로 뭉친 이상득계로 친이계끼리도 분파가 형성돼 있었다.
여담으로 MB정부 초반에는 이상득계의 목소리가 강했으나 후반기로 들어갈수록 이상득의 권력이 내림세로 기울면서 이재오계의 세력이 강해졌고 이재오가 이상득을 밀어내고 제1실세로 등극하게 된다.
MB정부 초중반만 해도 친이계가 주류였으나,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친박계가 조금씩 원내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오르는 일도 있었고 2011년부터 다시 친박계가 성장하는 형태였고 MB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친이계 주도권의 형태가 계속되다가 2012년 총선 이전에 터진 박희태 돈봉투 파문과 최구식 사건 및 DDOS 사태 논란으로 범 친이계면서 당의 사령탑을 맡았던 홍준표가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함과 동시에 박근혜 비대위체제로 변모하면서 친이계가 몰락하여 비 당권파가 되고 친박계가 주류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이 마저 당권을 잡았다. 이후에는 친이는 친무나 남원정을 비롯한 기타 비박 세력들과 같이 움직이게 된다.

3.1.3. 바른정당


  • 친무 vs 친유&소장파&남원정[1]
어이없는 건 바로 위에 있는 새누리당에서 계파 갈등으로 분리된 정당인데 또 계파 갈등이 벌어졌고 일부는 위에 있는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친이계의 경우, 최측근으로 분류 되는 친이 원로들은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고 있었고, 바른정당의 경우에는 현역 친이계들이 이들과 같이 창당해서 친무와 친유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집권하면서 여권이 된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우군 역할을 하면서 범 여권이 된 정의당이명박 前 대통령을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목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바른정당의 친이계들은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 정병국을 제외하고 거의 다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했고, 2018년 1월에는 이명박의 최측근 김백준의 구속 직후 이명박이 피의자로 전환 되면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친이계의 본진이었던 늘푸른한국당 지도부들도 당을 해산하고 이재오를 비롯한 지도부들은 대부분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다만, 늘푸른한국당 내의 젊은 당원들이나 자유한국당에 대한거부감이 심한 당원들은 대부분의 지도부를 따라가지 않고 바른미래당으로 입당했다.

3.1.4. 더불어민주당


  • 더불어민주당 : 친문 vs 친이재명 → 강성 친문 vs 중립 회파 vs 강성 친이재명[2]
민주당에서 중도 좌파~중도 우파 성향[3]이자 주류인 친문 지지층과 중도 ~ 좌파 성향이자 비주류인 친이재명 지지층간의 갈등. 사실 여기는 정치인들 사이보다는 지지층간 갈등이 더 심하다.
19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대립하고 문재인이 경선을 통과 하자 반문재인 친이재명 지지자들이 문재인보다 성향에서 공통분모가 더 많은 심상정으로 빠지면서 다시 서로 감정이 나빠지다가 문재인이 결국 당선 되면서 갈등이 가라앉았지만, 제7회 지방선거의 경기도지사 경선 과정에서 친문 지지층이 전해철을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내려다 인지도에서 밀려서 이재명이 후보로 나오자 친문 지지층이 이에 불복 하면서 '''차라리 남경필을 찍자며''' 반이재명 투쟁을 하지만 결국 이재명이 압도적인 차이로 경기도지사에 당선 되었다.
2018년 전당대회에서 당내 보수파인 김진표가 이재명 탈당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하자 강성 친문들은 김진표로 결집 하면서 이재명을 내치려 하지 않는 이해찬을 비토했고[4][5] 호남 출신인 송영길은 잊혀졌지만 결국 압도적인 인지도와 강한 여당을 내세운 이해찬이 당선됐고 김진표는 민주당 내 호남당원들이 지지하는 송영길에게도 밀려서 3위로 떨어졌다.
이후 강성 친문들이 이해찬, 추미애등 기성 친문세력들을 친이재명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극문들이 비판받기 시작하고 다시 갈등이 고조된다. 이 파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경찰이 혜경궁 김씨를 김혜경이라 주장했음에도[6] 한때는 이재명을 맹비난했던 범친문 진영에서 이재명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둥 오히려 강성 친문이 자충수를 두었다는 평. 허나 이후 강성 이재명 지지자들이 반문을 외치며 갈라지며 범친문 친이재명 지지층과 반문 친이재명 지지층도 갈라치며 계파가 사실상 크게 3세력으로 쪼개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당세의 99.99%가 넘는 대다수는 중립이거나 친문이자 친이재명이 겹치는 온건파들이다[7]. 양극단의 극소수들이 큰소리를 내고있는 것이다. 2019년 6월 5일에 시험적으로 열린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서도 이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기사
안철수가 호남 중진들을 데리고 나갔고, 문재인 정부가 여러 논란으로 지지율이 떨어져도 최소한 문재인에게 투표했던 40% 초중반대의 고정 지지층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2020년 기준으로 다른 당에 비하면 내부분란이 무척 적은 편이다. 계파 갈등이 당의 지지율을 깎아 먹던 걸 기억 하는 친문 지지자들은 이러면 중도층이 내부 갈등이 터지는 야당보다는 안정적인 여당에 힘을 실어준다며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한겨레의 성한용 선임기자가 내부총질이 없으면 정치 역동성이 사라지고 비주류 계파가 정권을 잡아왔다며 비판 하는 사설을 쓰기도 했지만사설 친문 지지자들은 이 사설에 매우 부정적이다.[8] 결국 21대 총선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대승하면서 친문이 전성기 시절 친박보다 더한 강력한 힘을 가진 상태다.
다만 친문 지지층이 지지하던 조국김경수가 재판 중이고, 이낙연이 강력한 대선 주자로 올라가면서 이낙연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명이 대법원에서 무죄취지 파기환송되면서, 대선주자 지지율 2위로 박빙까지 치고올라오거나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이낙연을 추월하기도 하는 등 양강 구도가 시작되려는 상황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층끼리에서 보면 이낙연이 50%의 지지를 받고있는데, 이재명은 30%정도뿐이라서, 친문성향의 사이트나 국민들은 "이거 일부러 국민의 힘이나 야당 지지자들이 일부러 이낙연을 대선에서 배제하려고 이재명으로 일단 역선택하는거 아니냐."는 설을 제시하고있다. 하지만 국민의힘 지지층 대다수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지지하는 상태며, 이낙연이 이명박근혜 사면 발의 논란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후퇴 논란 등으로 인해 호남과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이재명의 지지율이 오르는 상태다.
2021년 1월 6일에도 당 홈페이지의 당원 게시판에서 딴지일보 사용자가 '당대표 퇴진요구 찬반투표'란 글을 만들었고, 이에 대항해 이낙연을 지지하는 당원이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출당' 찬반투표를 만드는 대결이 펼쳐졌다. 즉 친문 지지자들과 친이재명 지지자들 간의 대결이 벌어진 것. # 정확히는 이낙연 지지자와 이재명 지지자의 싸움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21년 2월 들어선 이재명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제 문제에 대해 이낙연, 정세균, 임종석 등이 반박하는 등 이재명과 당내 인사들의 갈등도 표면으로 떠올랐다. # 또한 이재명의 탈당설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일단 이재명 본인은 '민주당이 없으면 이재명도 없다'라며 탈당설을 일축했다.

3.1.5.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 한국의 거의 모든 진보정당들은 심각한 계파 갈등을 겪어 왔다. 이는 작게는 당 내 갈등에서부터 크게는 분당과 신당 창당까지 진보진영 내부의 크고 작은 분열을 야기했다. 다만 이는 특정 인물을 기반으로 한 계파 갈등이라기보다는 이념과 정치 노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의 양상이 크므로 '정파 갈등'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합하다.
진보당 사건 이후 실질적인 첫 제도권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당 내 갈등 구도는 8~90년대 학생운동노동운동의 내부 정파 구도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크게 자주파로 칭하는 NL[9]과 평등파로 칭하는 PD[10]의 갈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11] 처음 민주노동당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과 90년대 초반부터 진보정치운동을 해 왔던 노회찬 등 범PD로 분류되는 인물들이었지만, 군자산의 약속 이후 전국 NL계열 단체들의 총연합회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집단으로 당에 입당하여 패권을 장악하려 시도함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천연합이 일으킨 용산지구당 사태를 비롯하여 각 지역 지구당에 해당 지역에 살지도 않는 NL 또는 다함께 활동가들이 집단으로 입당하여 지구당을 장악하는 등의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다. 이 당시 민주노동당은 제17대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하여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내부에서는 분당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고조되어 가던 당 내 갈등은 2006년 당 내 NL 인사들의 일부가 북한에 민주노동당 당원 명부를 정파별로 정리해서 넘긴 일심회 사건이 터지며 급속도로 커져 나가기 시작하고, 2007년 대선 후보 선출 경선 과정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NL들은 머릿수와 조직력에서 우세했으나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만큼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기에 결국 셋 중 가장 정파성이 약한 권영길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여 '코리아 연방'이라는 슬로건을 이끌어냈다. 권영길은 51 대 49 정도의 근소한 차이로 심상정과의 결선투표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2002년 대선보다도 떨어지는 수준의 득표를 얻어 참패하고, 머지않아 심상정을 비대위원장으로 한 혁신비대위가 구성되나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은 당 내 NL들의 거센 반대에 가로막혀 채택되지 못한다. 결국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를 위시한 PD 계열 활동가들과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을 탈당 후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노심조와 당 내 좌파 당원들의 탈당으로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평등, 평화, 생태, 연대라는 야심찬 슬로건으로 출발했으나, 제18대 총선에서 0.06%라는 근소한 차로 봉쇄조항에 걸려 원내진입에 실패한다.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울산 북구 조승수 의원의 당선으로 원내정당이 되기는 했지만 당 내 갈등의 싹은 역시나(..) 무럭무럭 자라나고만 있었다.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등장한 국민참여당 등 야권 세력과의 연대 여부를 쟁점으로 하여 찬반 여부에서 파벌이 갈리기 시작했는데 2010년 지방선거가 그 갈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였다. 당시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심상정 후보는 당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당과의 야권연대에 호의적이었고, 결국 당원들과의 소통 없이 선거 하루 전 유시민 후보 지지선언을 한 후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12] 이 당시 심상정 후보는 당원게시판 등지에서 당원들의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지방선거가 끝난 이후 본격적인 야권 통합 논의가 시작됨에 따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논의하게 되는데, 지도부를 제외한 많은 수의 당원이 통합에 반대함에 따라[13] 당 내 갈등 양상이 본격화된다. 결국 진보신당은 2011년 열린 당대회에서 진보대통합 안건을 부결시키게 된다. 이에 반발한 노심조를 비롯한 일부 활동가들은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라는 그룹을 차리고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진보신당에 남은 이들은 19대 총선을 독자적으로 치러낸 후 득표율 미달로 정당등록이 취소됨에 따라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사회당과의 합당을 거친 후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당명을 개정한다.

3.1.6. 대한민국 정당 내 계파 갈등의 역사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발생한 최초의 정당 내 계파 갈등.
이재학계는 자유당 내에서 온건파를 대표했고 이기붕계는 자유당 내에서 강경파를 대표했다.
이후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김영삼과 상도동계는 신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와 합당하여 밑의 민주자유당이 된다.
  • 민주자유당: 민주계 vs 민정·공화계[14]
김영삼의 집권 이후 군사정권 출신 인물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민정·공화계 일부의 항복을 받아내고[15]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이후 군사정권출신들을 항복시키거나 숙청시키는 과정에 반발한 김종필과 이에 호응한 민정·공화계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 신민당(1994년): 김동길계(통일국민당 출신) vs 박찬종계(신정치개혁당 출신)
  • 한나라당: 이회창계 vs 상도동계+이기택계 vs 소장파(남원정) → 친이 vs 친박
  • 새천년민주당: 비노 + 동교동계 vs 친노 + 개혁파 세력(천신정)[16]
이후 친노 세력이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
  •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계 vs 김근태계(민평련)[17]
  • 자유선진당: 이회창계 vs 심대평계(구 청구동계)& 이인제계 vs 민주당 출신[18]
  • 통합진보당: 경기동부연합 vs 인천연합 & 참여계 & PD
이후 반경기동부연합 세력과 반진보당 세력들은 탈당하고 진보정의당을 창당하게 된다.
통진당 사태 이후 여러 정파의 연합정당으로 만들어진 정의당은 굉장히 복잡한 정파갈등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크게 보면 노동당 탈당파인 평등사회네트워크를 주축으로 노동 대표성을 지닌 진보좌파 등 범PD 그룹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 인천연합과 광주전남연합 일부를 위시한 범NL 그룹이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진보너머와 참여계 역시 양대 정파만큼 세가 강하지는 않으나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대 국회 기준, 새누리당 내 계파는 박근혜의 친박이 있었고, 비박계에서는 친이명박계의 좌장 이재오를 중심으로 모인 친이계, 당시 새누리당 대표를 역임한 김무성을 중심으로 모인 친무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유승민을 중심으로 모인 친유계가 비박계의 주류 계파였다. 민정·공화계의 후신인 친박 vs 범민주계의 후신인 비박과 같은 구도가 된다.
이후 친조 세력들은 탈당하여 대한애국당을 창당한다.
저 위에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계파 갈등으로 분리된 정당인데 또 계파 갈등이 벌어져서 동교동계는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이 되고 친안계는 바른정당과 합당하여 바른미래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민주평화당통합진보당에서 떨어져 나온 정의당과 손잡고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을 만든다.
이 역시 민주계의 후신 vs 민정·공화계의 후신 간의 계파 갈등이다. 그러나 나경원, 심재철 등의 일부 범친이 중진들은 김무성&홍준표에게도 반발 중이다.
애초에 바른정당친유, 하태경계와 국민의당친안, 손학규계가 함께 만든 정당이라 우려가 많았는데 역시나 2018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당 내 불협화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현재 제21대 총선 이전에 이들은 자유한국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리흡수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분석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결국 2019년 9월 30일 유승민 의원이 비당권파 12명의 의원들과 함께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모임을 만들어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2020년 바른정당계가 새로운보수당을 차리면서 최종적으로 갈라섰다.
2018년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는 안철수 대표에 반대해 민주평화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당선된 정동영대표를 주축으로한 정동영계와 박지원의원을 주축으로 한 박지원계간의 갈등이 발생하게된다. 결국 박지원계는 대안정치연대를 만들고 집단 탈당한다. 이 대안정치연대는 이후 대안신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2020년 민생당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손학규 대표가 안철수에게 복귀시 대표직에서 물러나 전권을 주겠다는 이전 약속을 완전히 뒤집고 안철수 전 대표의 입국 이후에도 대표직을 내려놓지 않으며 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김관영, 김성식 의원이 탈당했으며, 손학규계에 속했던 이찬열 의원까지 탈당했다. 더 나아가 손학규는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등 호남계 정당들과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안철수계 비례대표 의원 8인이 셀프 제명하는 사태[19]까지 벌어졌으며, 안철수계 권은희 의원도 탈당하였다. 이후 여러 갈등 끝에 민주평화당, 대안정당과 민생당을 새로 창당했다.
창당 과정부터 갈등이 있었다. 3당이 통합 정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갑자기 비토를 날린 것. 결국 우여곡절 끝에 손학규가 백기투항하면서 각 정당에서 1명 씩을 대표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우여곡절 끝에 신설합당을 하였다. 그러나 창당 1개월도 안 돼서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극심한 계파 갈등을 겪게 되었다. 김정화 대표 등 구 바른미래당계는 참여에 극렬히 반대하지만 나머지 유성엽, 박주현, 장정숙 등 구 민주평화당계와 구 대안신당계는 참여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결국 구 민주평화당계와 대안신당계가 주축이 되어 참여를 결정한 최고위원회의를 두고도 적법성 시비가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몸싸움까지 벌어지고 서로를 비난하는 등 창당 4주도 안 되어 분당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리고 민생당은 21대 총선에서 의석을 하나도 못 얻고 멸망했다.
  • 미래통합당 - 국민의힘 : 구 바른미래당계(유승민계&소장파 vs 안철수계&손학규계 일부) vs 구 비박(홍준표계&김무성계 vs 친이[20]) vs 구 친박(황교안계&강성 친박[21])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시절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결국 21대 총선에서 120석 선이 무너지고 민주당에게 180석을 허용하게 된다.

3.2. 외국


특히 통일원주민당은 과거 UMNO 소속의 총리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만든 정당이다. 당시 야권에서 엄청난 비토를 받았는데, 정작 지금은 그런 야권과 손을 잡고 아예 권력에 등극했다. 하지만 그들 내에서도 잡음이 많은지, 결국 지금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민정의당 내부에서도 안와르와 아즈민 간의 당권 싸움이 불거지고 있다. 특히 아즈민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안그래도 터져 나온 갈등이라는 불에 기름을 끼얹게 된 것.
2020년 기준 호헌파는 입헌민주당으로 넘어갔고, 개헌파는 국민민주당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1] 이중 남경필은 2018년 1월에 탈당을 하고, 홍준표 대표의 연락을 받고 얼마 후에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원희룡은 2018년 4월에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게 된다.[2] 이라지만 진정한 강성 친이재명은 민주당 내에서는 매우 적다.[3] 안희정이 성폭행 의혹으로 순식간에 몰락 하면서 친문계가 민주당 내 보수파를 흡수했다.[4]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김진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부터 계속 민주당에서 활동 했지만 민주당 내 보수파이자 개신교 관련 논란 때문에 친노친문 지지층 사이에서도 상극에 가까워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정치인이다. 순전히 이재명을 탈당시킨다고 해서 강성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 호의적이 되어버린 것이다.[5] 다만 이 일은 친문 내에서도 강성 친문들에 대한 반발과 비토 정서가 대폭 상승하는 계기가 됐다. 강성 친문들이 민주당 내 주요 정치인들 다수를 이재명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격하며 그들의 눈을 찌푸리게 했던 것도 있고, 원체 보수적 성향과 개신교 논란, 거기다 온건, 중도 성향 친문 내에선 굉장히 무능한 인물이라는 인식까지 있던 김진표를 지지하는 강성 친문의 행태에 온건, 중도 성향 친문들이 강성 친문들이 당을 죽이고 있다고 여기고 폭발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들 온건, 중도 성향 친문들은 강성 친문들을 극문이라고 지칭하고 저들이 권순욱 등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이며 해당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강성 친문과 크게 대립하였다.[6] 후에 결국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7] 그리고 사실 강성 친이재명의 다수는 민주당과 거리가 멀다.[8] 이들 대부분, 특히 30대후반이상은 대부분이 친노출신이었으며, 이들은 당시 여당이던 열린 우리당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들이받았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내부총질에 해당한다고 보이는 의원에겐 가차없다.[9] 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10] People's Democracy(민중민주)[11] 그 외에도 IST(국제 사회주의자 경향)의 노선을 따르는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등의 내부 그룹이 있었으나, 큰 구도는 NL과 PD의 대립 구도였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용지에는 이미 이름이 찍혀나온 상태로, 유시민 후보는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꽤 큰 표차로 패배하고 만다.[13] 진보신당의 당원 대다수는 민주노동당에서 갈등을 겪고 온 이들이었으므로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에 부정적이었고, 좌파들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후신으로밖에 볼 수 없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는 그보다 더(..) 부정적이었다.[14] 민정계와 공화계 모두 같은 박정희의 세력을 뿌리로 하던 세력이었고, 이들은 추구하는 사상도 대체적으로 일치했으나, 결정적으로 의회주의를 지지하는지의 여부가 달랐다. 수장이 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였던 민주정의당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단결을 추구했고, 그나마 독재정권이 아니었던 시절 민주공화당을 이끌었던(그리고 군복을 벗은 지도 오래 됐고) 김종필이 만든 신민주공화당은 의회의 대통령 권한으로부터의 철저한 분리를 추구했다.[15] 민정계 중에서 YS 밑으로 들어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윤환최병렬이 있다.[16] 다만 개혁파나 대선당시에 친노였음에도 천신정과의 반목이 있던 인사나 당 사수파들은 잔류했다. 김상현, 조순형 같은 원로나 추미애가 이런 행보를 펼쳤다. 반면 애초에 후단협이었던 박병석, 설송웅, 김명섭 등이 열린우리당에 동참하기도 했고.[17] 친노계는 이 시기만 해도 중간보스격인 정동영계, 이해찬계, 김한길계, 천정배계, 정세균계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기에 민평련 세력(1세대 운동권/김근태계)와 486세대(2세대 운동권/우상호, 임종석 등)이 가세하여 서로 지분을 나눠먹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여러 중진들이 끼어있는 형태였고.[18] 특히 이상민 의원은 재선의원 시절에 자유선진당 소속이었음에도 사실상 민주당 의원들과 일치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띄며 독자행보를 보였고, 의원수 1석이 모자랐던 선진당은 독자행보를 펼치던 이상민을 제어하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구 민주계의 조순형이나 이용희, 권선택, 김창수 같은 열린우리당 출신들이 선진당 당론을 따라가던 것과 대조적.[19] 그러나 이 셀프제명은 이후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여 무효로 판단하면서 이들 의원들은 도로 민생당 소속이 되었다.[20] 심재철, 나경원[21] 김진태, 김태흠, 서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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