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헬 로마노
1. 생애
1.1. 선수 생활
앙헬 로마노의 빛나는 커리어와 어울리지 않게 선수 생활 초기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10년 몬테비데오의 프로팀인 나시오날에서 센트랄을 상대로 데뷔 무대를 가졌는데 로마노는 3골에 관여하며[2] 기량을 뽐냈다. 하지만 단 한경기에만 출전하는데 그치고 중앙 우루과이 철도 크리켓 클럽으로 이적하여 우루과이 리그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2년 동안 3경기 출전에 그쳤고 라플라타 강을 건너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의 로마노는 엘 로코로 불렸다고..
5년을 떠돌던 로마노는 친정팀 나시오날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포텐이 터져 주력 공격수로 자리매김하였고, 나시오날을 10년 동안 8번 챔피언으로 이끈다.
1925년에는 우루과이 리그가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었고[3] 소속팀 나시오날은 유럽으로 투어를 다녔다. 9개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38개의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카탈루냐 챔피언 FC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챔피언 제노아 CFC 스포르팅 리스본, 라피드 빈, 스파르타 프라하 등 여러 유럽 팀들과 시합을 가졌고, 26승 7무 5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나시오날의 원정은 유럽에서 큰 화제였고 라피드 빈과의 경기에서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미하엘 하이니슈가 직접 맞아주기도 했다.
1.2. 국가대표
로마노는 월드컵을 제외하면 당시 축구 선수로서 들 수 있는 트로피는 전부 들어보았다. 특히 코파 아메리카에서 6회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기록은 단연 역대 코파 아메리카 최다 우승 기록이다. 또한 초기 우루과이의 선수들과 함께 올림픽에서 우승하였는데, 이 기록은 월드컵 이전의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것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로마노는 여기에서 3골을 기록하였다.
로마노는 17년간 총 69회의 A매치를 치렀으며 마지막 A매치에서 당시 최다 출전자였던 헝가리의 임레 쉬로서를 제치고 최다 출전자 자리를 차지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69경기의 A매치 출전횟수는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A매치를 치르지 않는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69경기 출전횟수는 정말 많은 횟수이고, 2차 대전 이전에 선수 생활을 했던 선수들 중 그보다 더 많은 출전 횟수 기록은 스위스의 세베리노 미넬리,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정도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은 우루과이에서 58년을 묵고 1985년에 깨진다.
은퇴할 때 우루과이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도 그가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록은 후배 엑토르 스카로네가 경신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명성을 날렸다. 주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였으나 센터 포워드도 소화 가능했던 선수로 알려져 있다. 우루과이와 나시오날에서 참 많은 출장수를 기록한 대체 불가능의 자원.
3. 뒷 이야기
- 1925년 당시 유럽 투어를 돌 때 브라질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도 자신의 소속팀과 함께 유럽 투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팀이 유럽에서 시합하지는 않았다.
4. 수상
4.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9회: 1911(CURCC), 1915, 1916, 1917, 1919, 1920, 1922, 1923, 1924(이상 나시오날)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4회: 1913, 1918, 1921, 1929(나시오날)
- 코파 콤페텐시아 우승 4회: 1915, 1919, 1921, 1923(나시오날)
- 명예 컵 우승 3회: 1915, 1916, 1917(나시오날)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해트 트릭으로 기록되어있다[3] 정확히 말하면 라이벌 페냐롤이 주축이 되어 창설한 우루과이 연합으로 인해 리그가 쪼개졌고, 이견차를 좁히지 못하여 리그가 취소가 되었다.[4] 명단에는 있지만 출전하지는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