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모(1921)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국제그룹 2대 총수이다.
2. 일생
1921년 9월 13일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양태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했고, 1949년 부친과 함께 부산에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해 '''왕자표''' 고무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 와중에 군수품 생산으로 큰 돈을 모았다. 1963년 신발류와 비닐제품 생산업체 진양화학[1] 을 세워 1970년대초 신발 수출 붐을 타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따라 창업하고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연합철강[2] 등을 인수하며 재벌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초반 들어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1976~1985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및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내며 부산도시가스 및 항도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고, 198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1985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국제그룹이 해체되면서 주력 계열사였던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는 동국제강에, 국제상사 등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넘어갔다. 당시 정부 측은 그룹 해체 원인이 자체 브랜드 개발 실패 및 용산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전근대적 경영방식, 사우디 건설업 적자 등으로 보았으나, 세간에선 양 전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 등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난 것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이것이 그룹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이후 1987년에 '국제그룹 복원 추진위원회'를 세워 1988년부터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 소송[3] 을 벌여 1993년에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아 1994년에 한일합섬을 상대로 국제상사를 돌려받고자 '주식인도 청구반환 소송'을 냈으나 1996년에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고,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국제 계열사들을 많이 가져간 한일그룹, 극동그룹 등이 외환위기로 파산했기 때문이다.
결국 1998년 부산도시가스 사외이사 추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칩거하다가, 2009년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 발레리나 출신 배우 왕지원의 외조부다. 즉, 왕정홍 현 방위사업청장이 양정모의 사위다. 동생으로는 KPX그룹(진양화학) 회장 양규모와 양귀애 전 대한전선 명예회장[4] 이 있고, 자식으론 양희원 ICC 대표 등 2남 11녀가 있다. 사돈으론 김종호 신한종합금융 창업주와 사위 김덕영 두양그룹 창업주가 있다.
[1] 1974년에 동생 양규모에 의해 독립하여 현재의 KPX그룹이 되었다.[2]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창업주인 권철현(1925~2003)과 연관된 논란이 많았다.[3] 당시 소송 대리인이 조영래, 황인철 변호사였다.[4] 설원량 2대 대한전선 회장의 아내. 하지만 설 회장의 급서로 아버지와 남편-아들 그룹 모두가 분해되는 고통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