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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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의 옛 국제센터빌딩 (현 LS용산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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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국제그룹 해체 사건
3.1. 참고 자료
3.2. 배경
3.3. 전개
3.4. 언론과 재계의 반응
3.5. 결과
3.6. 후일담
3.7. 대중매체에서
4. 로고
5. 기업 정신
6. 역대 그룹 임원
7. 계열사 목록
8. 산하 기관
9. 유사 사례
10. 바깥 고리
11. 같이 보기


1. 개요


1947~1985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대기업. 국제상사를 모태로 한 대기업이며, 동국제강그룹, 성창기업, 동명그룹, 연합철강, 태광그룹, 화승그룹 등처럼 부산에서 성장했다.

2. 역사


1947년 정미소를 경영하던 양태진 사장과 아들 양정모 상무가 부산에 설립한 국제고무라는 회사에서 왕자표 고무신 제조 사업을 모태로 성장시킨 기업집단이다.[1] 지주회사격의 기업은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였다. 1974년에는 진양화학이 독립한 후 이듬해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 총괄체제를 구축했고, 1977년에는 국내 최초로 냉연강판을 생산해낸 연합철강을 인수했고[2], 1979년에는 이상순(2011년 작고)[3]으로부터 원풍산업을 인수했고, 1983년 경기도 용인군에 그룹종합연수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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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그룹은 1980년대 초반까지 '''재계순위 7위에 등극하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5] '''부산 제1의 향토기업'''이었다. 위의 사진은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국제그룹 전시관의 전경으로, 전시관 규모가 이웃한 롯데그룹 전시관들과 비교해도 더 큰 규모였을 정도고,[6][7] 현대그룹 전시관의 규모와 비슷했을 정도로 재계에서의 위상이 대단했다. 1984년에는 서울특별시 도심의 노른자땅인 용산구 한강로2가에 20층이 넘는 규모로 독특한 외양으로 잘 알려진 용산의 국제센터빌딩(현 LS용산타워)을 완공하였으며, 과거 국제그룹이 단독 사용하던 본사 건물이었다.[8] 화학, 섬유, 건설, 종합상사 등 알짜배기 분야에 진출해 있었고, 프로스펙스 등의 유명 브랜드까지 보유했다. 계열사 조광무역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국내에 도입해 라이센스 생산,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래 후술될 사건으로 인하여 승승장구하던 그룹의 운명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3. 국제그룹 해체 사건



3.1. 참고 자료


- 경향신문 - <정경산맥: 한국경제 고속성장 20년의 명암> '국제그룹의 비극' (1991.6.29 ~ 8.24일자 연재)

3.2. 배경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다.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의 미명 하에 1985년 5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총 6차례 걸쳐 부실기업정리가 단행되었는데, 해운업을 필두로 조선, 합판, 섬유,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전두환이 물러난 1988년까지 모두 78개의 기업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되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 대해선 각종 특혜가 주어졌다. 이런 기업들은 대출원리금 상환을 유예받았고, 이자 지급과 조세를 감면받았다. 뿐만 아니라 종잣돈으로 불리는 '시드머니'를 비롯한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까지 주어졌는데, 이를 통해 재미를 본 것은 대부분 재벌그룹이었다. 이은숙 교수는 당시 30대 재벌에 인수된 기업이 부실기업 중 절반 이상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80년대에 정리된 부실기업의 부채는 모두 6조 8천억원이 넘었는데, 기존 대출원리금 상환유예액은 4조 2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조세감면액은 총 2조 1천억원에 달하였다. 시드머니는, 대출원금의 상환유예나 이자감면으로도 정리가 곤란한 업체에 대해 10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의 특별장기저리 융자로서 총 4608억원이 대출되었고, 시드머니에 대한 특혜시비가 있자 은행대출금 자체를 대손처리하여 원금을 탕감시켜주는 편법을 썼는데, 그 규모도 9863억원이나 되었다. 이와 같은 부실기업 처리과정이 은행의 부실채권과 대손처리로 인한 은행부실 가능성으로 부각되자 한은금융을 통하여 지원하였는데, 그 규모는 1조 7200억원에 달하였다.

- 원 출처: <1980년대 혁명의 시대(이혜영 편)> - '1980년대 한국경제의 구조(이은숙 글)' 파트 p198. 새로운세상. 1999.


3.3. 전개


'''첫째는 내가 미워서고, 둘째는 내 것 뺏어다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나눠주려고 그랬겠지요.'''

- 양정모 회장의 말.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6.

1983년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순직자 유자녀를 위한 장학재단으로 설립된 일해재단의 연간 운영비용조로 당시 돈 100억원(3년에 걸쳐 300억원)을 확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이 때 현대그룹삼성그룹이 15억을, 럭키금성그룹 등이 12억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사실상 이들 다음으로 거대한 기업 규모를 가진 국제그룹의 오너인 양 회장이 5억의 어음으로 퉁칠려고 하자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인 최순달[9]이 면박[10]을 준다. #
그 뒤 1984년 10월 하순, 새마음심장재단 성금 및 새마을성금을 기부할 때도 달랑 3억으로 때우면서 이미 전두환의 눈총을 받은 상태였다. 양 회장이 월간 말 1993년 10월호에서 낸 증언에 따르면, 이 때 만찬 자리에서 그는 전두환 내외 앞에 갑자기 10대 재벌에 속하지 않은 그룹총수 부부가 앉아 있어 의아해했다. 이후 전두환은 총 30억원[11]의 성금을 낸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1927~2000)에게 "장회장은 회사도 조그마한데 성금을 30억원이나 내셨습니다. 참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같이 참석한 재벌총수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뿐더러 분위기도 무거웠다. 그 증거로 10월 8일자 청와대 성금접수일지에는 '동국제강 새마음심장재단 20억원, 새마을성금 10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면 국제그룹은 그때까지 3억원밖에 못 내 청와대 성금납부실적 30위에 기록된 상황이었다.
이에 후계자로 내정된 사위인 김덕영 부회장은 이 때 꺼림칙했던 것도 있고 회사의 규모에 비해 모금액으로 5억은 눈치가 보인다며 10억원 정도로 맞추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기도 했지만 결국 양 회장이 11월경에 청와대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눈치보이는 모금액을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제공한 것이 화근이 되어 전두환의 미움을 사면서[12] 사망 플래그가 서고 만다. 또, 당해 초에 그가 일해재단 모금차 방문한 최순달에게 모금액수가 많다고 불평을 하거나 그해 여름에 준공된 양산 통도사 골프장과 관련된 새마을성금을 10억 연수표로 내서 이미 권력층에게도 눈총을 받았다.
그 후 12월 22일, 청와대에서 다음해 2월 12일에 있을 총선에 대비해 재계의 협조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재벌 총수들을 소집해서 만찬을 여는데 이 자리에 양 회장이 사고가 생겨 늦게 도착하고 만다. 부산에서 스케줄에 맞추어 서울행 항공편에 탑승했는데 때마침 내린 폭설로 인해 항공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늦었다고 한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양 회장에게 전두환이 했던 말이 가관이다. "우리 국제 양회장님은, 어디 외국이라도 갔다오셨나요?" 이에 양 회장은 도리어 "부산지역 경기가 낙후해 민정당 지지기반이 취약하니 임해공단을 건설해달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결국 그의 눈치 없는 말 한 마디가 국제그룹에 화가 될 줄은 몰랐고, 5일 만에 제일은행이 어음 78매 432억원을 부도 처리시킴으로써 국제그룹은 1차 부도사태를 맞았다.
국제그룹 출신 사이에 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 회장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이던 막내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양 회장이 즉시 미국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이 때 전두환이 재벌들을 소집했다는 것이다.[13]
청와대 측은 5공화국 후반의 권력 장악을 위해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압승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김영삼의 텃밭인 부산 지역이 선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였는데, 이 부산 지역의 표를 얻기 위해 전두환은 국제그룹의 기반인 부산으로 직접 내려가 양정모에게 선거를 위해 힘을 쓸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이 때 양정모 회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제사를 위해 전두환을 만난 다음날 바로 부산을 뜨게 되고 이 일로 전두환은 "대통령인 내가 부산에 있는데 멋대로 여길 뜨다니!"라며 또 한 번 분노한다.
이렇게 전두환에게 찍힐대로 찍힌 상황에서 2월 총선 직전 김대중이 갑자기 귀국하자 막판 선거 유세가 치열해졌고 결국 청와대측이 우려한대로 총선에서 김영삼을 비롯한 민추협계 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모든 선거구에서 신한민주당 의원이 당선되고 중선거구제였음에도 3개 선거구에서 민주정의당 후보가 3위 이하의 득표로 낙선함으로써 선거의 판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것이 전두환의 심기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어 버린다. 시기를 볼 때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잠시의 지체도 없이 국제그룹을 해체해 버리기로 결정한 듯하다. 국제그룹복원본부 측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84년 당시 전두환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양김씨의 민추협은 바람을 타고 있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2.12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황 때문에 10대 재벌에서는 수금이 잘 안됐다. 이때 재벌순위가 저 아래인 재벌 중에서 회사규모에 걸맞지 않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권력에 밀착한 재벌들이 있었다. 총선 때 이들에게 비자금을 받아 쓴 전두환은 이들에게 나눠줄 '''먹이'''가 필요했다. 그때 걸려든 것이 국제그룹이었다.

-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8.

국제그룹의 부도는 자금난에 빠진 이 그룹에 대해 제2금융권에서 2,000억원이 넘는 여신을 회수한 게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이미 그룹 해체 결정 2개월 전인 1984년 12월 23일에 정부가 국제그룹에 대한 완매채 대환 지원방침을 철회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가 있어 '''정부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이 잘 알려진 상황이었으므로 어느정도는 예고된 위기였다. 실제로 국제그룹은 80년대 초반에 무리한 확장과 당해 초 계열사인 연합철강 창업주인 권철현과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소송비를 쓰는 바람에 유동성이 굉장히 부족해져서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으로부터 여러차례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부채비중이 900%를 넘어 당시 재벌로는 부채비중이 높은 편이었다.[14] 부채비중이 조금 높은것을 빼면 몇몇 부실 계열사 매각으로 충분히 회생이 가능했고 당시 은행감독원과 주거래은행이던 제일은행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두환에게 찍혀 버리는 바람에 결국 1985년 2월 21일 오전 10시에 재무부에 의해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쓰고 그룹의 전면 해체 결정이 발표되며,[15] 그 해 7월부터 21개 계열사들이 모두 청산되어 다른 기업들로 합병되며 정리되게 된다. 2월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부터 청와대 측에서 국제그룹에 은행 채권단을 보내는 등의 직접적인 액션을 취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2일''', 그리고 국제그룹 완전 해체가 발표될 때까지는 '''고작 1주가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에 제일은행장 이필선은 오전 10시 30분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재무부가 쓴 <국제그룹 정상화대책>이란 제하의 유인물을 마치 제일은행에서 작성한 것인 양 열심히 낭독했다.
훗날 국제그룹 해체 이유에 대해 김만제 당시 재무부 장관은 한국일보 <재벌이력서> 연재 당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결과다.''' 벌여놓은 일들이 수습되지 않았고 부실 구멍은 자꾸 커져갔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한푼 두푼 넣어서 될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해체당하게 된 것이 국제다.

-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3.4. 언론과 재계의 반응


국제그룹의 해체 당시 언론은 그러한 사건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1991년 7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국제그룹 해체 기사를 1면에 크게 싣지 말고 작게 보도하며, 재벌의 부도덕한 경영 및 족벌경영을 부각시키라는 보도지침 때문이었다. 문공부 홍보조정실과 청와대에 축소 보도를 요청한 김만제 재무부 장관은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작게 다루어 달라고 각 언론기관에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생각하면 애초부터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짓이다. 외국 언론과 기업들은 '선 인수방식 전면해체'란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걸 사실상의 파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 경제적 정책을 추진한 5공 정권이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린 것이다.
반면 재계의 경우, 재무부 측에서 각 경제단체에 일제의 논평을 삼가라는 엄포로 인해 양정모 총수가 회장으로 일하던 부산상공회의소도, 많은 회비를 받아가던 전국경제인연합회 역시 어떠한 의견도 피력하지 못했다. 재계의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공개적 논평은 국제그룹 해체 이후 3년이 넘은 1988년 5월 11일에 한국능률협회 주최 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처음으로 국제그룹 해체를 아래와 같이 정면 비판했다.

부실기업정리란 있을 수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와 합리적인 판단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5공화국의 부실기업정리는 완전한 실패작이다. 국제그룹의 경우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군을 일거에 분해시켜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국제그룹 20여 개의 업종 가운데 창업자에 의해 살릴 것이 없었다는 판단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 규모의 기업군을 부실기업으로 판정하려면 보다 객관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최소 1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경제정책가들은 그런 일을 다시는 해서는 안될 것이고 경제계도 다시 그렇게 당해서는 안된다.


3.5. 결과


1986년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금난에 빠진 국제그룹을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른바 '''국제그룹 정상화 대책'''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린 뒤 계열사 지분 처분까지 모두 위임받아 정해진 순서대로 국제그룹을 순식간에 처분해 버렸다.
모기업 국제상사를 비롯해 해운대/제주 하얏트[16] 호텔, 용산 국제그룹 사옥, 통도사 골프장 등을 소유한 남주개발, 신남개발, 원효개발 등은 한일그룹에, 국제상사 건설부문과 동서증권극동그룹에, 연합철강과 국제통운, 국제종합기계는 동국제강으로, 국제방직은 (주)동방, 국제제지는 봉명그룹, 조광무역은 서우산업[17], 동우산업은 대양물산, 성창섬유는 화승, 국제기술개발 및 원풍산업[18]우성그룹으로 넘어가는 등 쓸 만한 계열사들이 순식간에 모두 매각되었다.
특히 전두환에게 잘 보였던 한일합섬이 이 과정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으면서 재계 순위가 1984년 기준 26위에서 1986년에 1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그러나 한일그룹도 무리한 확장의 결과 부채비율이 1,039%까지 치솟으면서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5월 해체된다.
연간 순이익 50~60억을 내던 연합철강은 자산 규모나 매출이 인수자인 동국제강보다도 컸기에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초 김만제 재무부 장관은 연합철강과 국제통운(구 연합통운)을 2대 주주이자 원 소유주인 권철현에게 넘기고자 그에게 인수자금을 마련하라고 통보까지 했으나 전두환의 재가 과정에서 하루 만에 또 동국제강으로 넘어갔다. 이에 권 전 회장은 동국제강을 상대로 10여 차례나 소송을 제기했지만 연합철강을 돌려받지 못하고 2003년 눈을 감았다. 연합철강 분쟁은 권 전 회장의 아들 권호성 중후산업 대표가 연합철강 지분을 모두 동국제강에 매도하면서 마무리되었으며, 연합철강은 유니온스틸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14년 동국제강으로 합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6. 후일담


결국 정치권력에 의해 거대 재벌 하나가 공중 분해된 결과가 됐고,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당시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전두환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그 사이 재무부 장관이나 제일은행 간부들이 전부 바뀐 탓에 1989년 부실기업정리 관련 청문회에선 출석한 사람들 중에서 해체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대신 증인 중 전두환 시절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인 사공일이 가장 주목을 받아 그가 핵심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으나 그는 정치적인 음모는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국제그룹과 대한선주 등 5공 시절 부실기업 정리 내용만을 시인하였다. 여기서 상당한 특혜성 금융지원 및 은행부실을 보전키 위한 한은금융 등의 조건이 밝혀졌지만 정치자금 수수 등을 둘러싼 알맹이만 빠져 국민들은 궁금증에 빠졌다.
또 같은 해 말 국회청문회 증언에서 전두환은 재무부장관의 국제그룹 해체안을 보고 받고 재가한 사실은 있으나, 부실기업 정리라는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며 항간의 소문에 대해 부정하였다. 또 국제그룹 해체에 관여한 이필선 제일은행장과 김만제 재무부 장관도 한국일보에 연재된 <재벌이력서>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그 당시 국제를 부도내 도산시키는 쪽으로 해결했더라면 양 회장은 아마 감옥에 갔을 것이다. 은행의 공신력을 감안해 밝히길 꺼렸지만 사실 국제그룹이 해체되기 전 4개월동안 지원했던 구제금융만도 2천억원이 넘었다. 그룹의 경영이 방만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경기 전망도 어두웠고 국제에 무한정 돈 대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일매일 돌아오는 어음이 수백억원 씩이었다. 양씨는 '설마 재벌을 망하게 하랴'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정치적 입김 얘기는 말도 안된다.

- 이필선 전 제일은행장의 말.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p314.

그룹을 부실하게 해놓고 경영을 잘해서 이를 풀려고 하기보다 청와대와 고위층 주위를 들쑤셔 해결하려 했다. 주거래은행이나 재무부에 한마디 안 한 것은 물론이다. 은행이나 당국을 우습게 봤거나 사태 자체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영은 부실한데 족벌경영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해결책으로 군 출신 인사를 동원할 생각도 했다. 결국에는 국제상사 사장도 지낸 손상모 씨에게 국제의 수습을 부탁했다. 그는 당시 미국 하버드 유학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부탁을 받은 손씨는 양 회장에게 가서 정부가 내놓은 수습방안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 회장은 "영감이나 사위를 모두 아는데 나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손씨를 통해 전달한 수습방안이 국제 해체의 시그널이 되었다.

- 김만제 전 재무부장관의 말.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 p313.

당시 국제그룹의 수많은 인재들도 인수합병에 따른 강제이직을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특히나 부산의 다른 신발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스카웃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양 회장의 사위 김덕영은 국제그룹 시절 인사들을 모아다 1986년 두양상사를 세워 1990년대에 두양그룹으로 거듭났으나 1997년 김현철 스캔들 사건에 휘말려 몰락한 흑역사를 맞았다.
국제그룹이 해체되는 날 양정모 회장은 이게 다 자신 탓이다. 운명을 받아들이자 라고 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그룹 해체 사실을 발표 30분 전에야 통고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양 회장의 부인은 녹내장으로 눈이 멀어가고 있었는데 미국의 병원에 수술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수술시기를 놓치면 영영 앞을 못 보게 되는 상황인데도 전두환 정권은 출국을 시켜주지 않았으며, 양 회장의 사위들, 국제그룹 소속 전문경영인들 역시 출국금지로 묶였다. 또 임직원들이 연대보증을 선 것도 해제해 주지 않아 그들의 집이 넘어갈 판이었다.
이에 양 회장은 완강히 버티다가 마침내 이런 문제들을 포함한 몇가지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합의 각서 아래 각종 경영권 양도 문서, 주식매매 계약서 등지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양 회장의 장남 양희원 ICC 대표는 "그들은 부친을 도장 찍는 기계처럼 여겼다."고 표현했다. 순식간에 알거지가 된 양 회장 일가는 친구와 친지들의 남모르는 도움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어디 하소연할 데 없어 2년 6개월 간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산 양 회장은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빛을 보면서 9월에 '국제그룹 복권 추진위원회'를 세워 그룹 복원운동에 나섰다. 1988년 4월에 양 회장은 서울민사지방법원에 국제그룹 해체는 정치적 동기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진행했는데, 경향신문 1991년 7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이를 진행한 이유가 나온다.
이후 8년 동안 양복 한 벌 해 입지 않고 2,300원 짜리 도시락으로 버티며 끈질기게 법정 투쟁을 한 양 회장은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가 국제그룹 해체를 '위헌'으로 판정하자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에 1994년, 양 회장은 한일그룹으로부터 국제상사를 되찾기 위해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진행했으나 1996년 대법원에서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 간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법원의 논리로 인해 패소 판정을 받았다. 이후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며 국제상사 등 당시 강탈당한 그룹 계열사들이 다른 기업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바람에 다시 소유권을 반환하지 못했다. 결국 국제그룹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허상으로 남게 되었고, 양 회장도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부산에서 칩거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치 권력이 돈에 환장하면 기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비운의 사례이며, 이 이후로 재벌들이 5공세력의 기선제압에 몸사리기로 일관하며 정치자금을 성실히 바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런 식으로 돈을 뜯긴 재벌들은 이를 보상키 위해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이들의 몫을 걸레 짜내듯 쥐어짜내야 했고, 이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파업으로 저항하면 자금을 받은 정권이 나서서 마구잡이로 짓밟아 해결해주는 판국이 벌어졌다. 실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8년 5공청산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서 '국제그룹 해체를 보고서 정치자금 상납 액수를 두배로 올렸다'고 증언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정치자금 납부는 여전하여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에 연루된 40여개 기업 총수들이 검찰에 불려가는 결과를 맞았으며,[19]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출범했음에도 국제그룹의 후폭풍인 기업들의 납죽 엎드림은 꽤나 계속되었고, 현대그룹 자금지원 중단 등 정부의 '기업 길들이기'도 여전했다.
문민정부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자부할 정도는 되었지만 여전히 정치문화는 행정부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고, 삼당합당으로 인해 5공의 인력풀의 일부가 문민정부로 계승되었기에 기업들은 국제그룹의 멸망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청와대에서 김영삼이 기업 총수들에게 "칼국수[20]좀 먹읍시다"라고 말만 꺼내면, 총수들은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달려갔다. 이것이 세간에서 불리는 '칼국수 오찬' 혹은 '칼국수 회동'이다.
2002년 대선 시즌 도중 "차떼기 사건"이 벌어진 후, 2004년부터 정부는 기업이 정당에 기부하지 못하도록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따라서 기업은 더 이상 적어도 법적으로는 정치자금을 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치자금 헌납이 드러났고, 박근혜 정부 내내 CJ그룹이나 한진해운 같은 사례처럼 '기업 길들이기' 사례도 있었다.
김호진 고려대 교수는 저서 <한국정치체제론>에서 자본가계급이 전두환 정권의 강압정치에서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재벌이 전두환 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해 정경유착 관계를 형성했다고 해석했다.[21]
최근 들어 롯데그룹의 부산 지역에 대한 기여율의 결여와 후계자 대결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실상 일본 기업이라는게 드러나면서 '''"국제그룹이 롯데그룹을 대신해서 부산을 대표해야 했었다"'''라는 의견과 함께 재평가를 받고 있다.

3.7. 대중매체에서


  • 1993년 8월 29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재연극 형식으로 다룬 바 있는데, 양정모 회장 역은 배우 김진해, 전두환 역은 박용식 등이 각각 담당했다.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 제 33~34회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바 있다.
  •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 52~54회에서도 부실기업을 재계에서 퇴출시키고 다른 회사에 인수, 합병시키는 일명 '퇴출기업 리스트'에 국제그룹이 대표적 예시로 나온다. 역사대로 대통령 눈 밖에 난 것이 원인이다.[22] 그 뒤 부실기업 정리 장면에서 몇번씩 이름이 적혀있다. 드라마에는 나오진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아마 부실기업으로 정리됐을 듯.[23]

4. 로고


모기업 국제상사가 1979년에 낸 사사 <국제상사 삼십년사>에 따르면, 그룹 로고는 모기업인 국제상사의 영문 명칭 'International Chemical Company'의 약자인 ICC를 미려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타원형의 둘레는 두 개의 C자가 유연히 결합되도록 한 것이며 한가운데 I는 International의 머릿글자인 것이다. 여기서 타원형은 지구를, 알파벳 I는 문자 그대로 '나'를 뜻하는 'I'를 의미하며 두뇌가 있는 나, 즉 ICC맨이 긍지를 가지고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국제그룹의 모든 종업원이 하나의 원을 이루며 구심적인 연대를 형성하며 국제가족의 일원임을 말해 주기도 한다. [24]

5. 기업 정신


  • 경영이념(1982년 제정): 성취동기 개발, 공존공영의 실천, 합리정신의 구현
  • 사가 <국제가족의 노래>: 작사는 김경한, 작곡은 이상근이 맡았다.
(1절)고난과 시련을 딛고 넘어서 인화와 신념으로 커가는 국제
쉴새없이 울리는 생산의 메아리에 내일을 다짐하는 민족의 기업
터전은 닦였네 끈질긴 의욕의 국제그룹
(2절)땀 흘려 보람 찾는 우리의 기치 성실과 신의로써 얻은 이 번영
세계를 주름잡는 영광을 이룩한 힘 그칠 줄이 있으랴 내일의 왕자
터전은 굳었네 인화와 단결의 국제그룹
(3절)조국의 번영은 곧 나의 영예 사명은 무겁도다 겨레의 기업
우애로 굳게 뭉쳐 뻗어가는 우리 힘 기필코 누리리라 복된 내일을
기리자 그 이름 영광의 내 일터 국제그룹

6. 역대 그룹 임원


  • 회장
    • 양정모 (1976~1985)
  • 부회장
    • 김덕영 (1983~1985)
  • 종합기획실장
    • 김덕영 (1984~1985)
  • 종합조정실장
    • 김병구 (1975~1977)
    • 함태암 (1977)
    • 이웅근 (1977~1980)
    • 한윤구 (1980~1981)
    • 이만우 (1981~1983)
    • 이상운 (1984~1985)
    • 이춘무 (1985)

7. 계열사 목록


  •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 1986년 한일그룹에 인수됐으나, 1998년 부도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6년 LS그룹으로 매각됐다.
    • 무역/신발부문: 프로스펙스 및 아티스가 주력이며, 2007년엔 아티스 브랜드를 분사시켰다.
    • 건설부문: 구 국제종합건설. 1984년 합병됐다가 이듬해 그룹 해체 후 1986년 극동그룹에 매각되어 과천개발과 합쳐져 '국제종합건설'로 변경됐으나, 1998년 부도 후 이듬해부터 법정관리를 거쳐 2002년 학산건설에 인수됐다. 이듬해 국제건설, 2004년 학산건설을 거치다가 'HS홀딩스'로 출범하자 분사해 'IC코퍼레이션'으로 바꾸고 2006부터 2년 간 디시인사이드가 일부 지분을 갖기도 했다. 이후 회사가 어려워져 2009년에 '국제개발'로 출범하자 또다시 '국제건설'로 분할됐으나 2012년 회생절차를 밟았으나, 이듬해 국제개발과 같이 파산 수순을 밟았다.
  • 국제방직: 1985년 해체 후 동방그룹에 매각되어 1993년 '동방방직', 1997년 '동방T&C', 2000년 '동방생활산업'으로 각각 변경했다가 2019년 (주)동방에 합병됨.
  • 조광무역: 리바이스 OEM 생산/판매업체로, 1986년 서우산업에 인수되어 '한주통산'이 되었으나 1997년에 부도남.
  • 국제제지(현 아세아제지): 구 삼양지업. 1985년 해체 후 아세아시멘트에 매각됨.
  • 신동제지: 1984년 국제제지에 합병됨.
  • 풍국화학: 그룹 해체 후 개인에게 매각됨.
  • 성창섬유(현 화승T&C): 그룹 해체 후 1986년 화승그룹으로 매각됨.
  • 국제종합기계(현 국제기계): 구 유신기계공업. 1985년 그룹 해체 후 동국제강에 넘어갔다가 2016년 동양물산에 매각됨.
  • 연합철강공업: 1964년에 권철현이 부산에서 일본 차관을 들여 창업했다가 1977년에 창업주가 외화 밀반출 및 탈세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영권을 인수함. 1985년 해체 이후 동국제강에 인수되어 전전 사주인 권철현 2대 주주와 경영권 분쟁에 시달리다 2003년 권철현 사망으로 동국 측이 그의 주식까지 인수했고, 2004년부터 유니온스틸로 바뀌었다가 2014년에 동국제강으로 합병됨.
  • 연합물산: 옛 연합철강 계열사로, 그룹 해체 후 1986년 한일그룹에 매각됐다가 1997년 성창F&D로 인수되어 '밀리오레'가 됐으나, 2006년 그 회사와 합병됨.
  • 국제제철
  • 원풍산업(현 넥센타이어): 그룹 해체 이후 이듬해 우성그룹에 인수됐고, 모방사업부는 1993년에 국제기술개발로 넘겼다.
  • 국제기술개발(현 킹텍스): 구 국제종합엔지니어링. 그룹 해체 이후 이듬해 우성그룹에 인수했으나, 1993년에 우성산업으로부터 모방부문까지 양수했다.
  • 국제개발: 1981년 국제종합건설에 합병됨.
  • 국제토건: 1985년 그룹 해체 후 청산됨.
  • 성신토건: 이하 동일함.
  • 신남개발: 부산 해운대 하얏트호텔 운영업체로, 1986년에 한일그룹에 매각됐다가 1998년 그룹 부도 후 1999년에 호텔이 '진산애셋H&M'으로 넘어갔고, 법인은 2001년 폐업됨.
  • 원효개발(현 동일리조트): 통도컨트리클럽(현 통도파인이스트CC) 운영사로, 1986년 한일그룹에 매각된 후 1993년 '한일리조트'가 됐으나 1998년 그룹 부도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4년 동일건설에 매각됨.
  • 남주개발: 제주 하얏트호텔 운영업체로, 1986년 한일그룹에 매각됐다가 1998년 그룹 부도 후 2000년에 호텔을 아주그룹으로 넘기고 법인이 청산됨.
  • 보고산업: '빅사운드' 카세트 레코더로 유명한 전자업체로, 1982년 국제상사에 합병됨.
  • 국제상선: 그룹 해체 후 1986년 서주해운으로 넘어갔으나, 1992년에 폐업됨.
  • 국제통운: 구 연합통운. 그룹 해체 후 1986년 동국제강으로 넘어갔다가 2010년 동국통운(현 인터지스)에 합병됨.
  • 동우산업: '거북표 씽크대'로 유명한 주방용구 제조업체. 1986년 대양금속에 매각됨.
  • 국진기업: 양식기 제조업체로, 1979년 농기계사업부가 원풍산업에 합병됨.
  • 동서증권: 그룹 해체 이후 극동건설에 인수됐으나, 1997년 부도맞고 이듬해 '동서호라이즌증권'이란 청산법인으로 전환하고 2017년 폐업됨.

8. 산하 기관


  • 국제그룹종합연수원: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고매리 소재. 그룹 해체 후 한일그룹에 넘어가 국제상사 산하 국제인력개발원이 됐으나, 1992년 중소기업은행에 부지가 매각됨.

9. 유사 사례


  • 동명목재 : 국제그룹과 동향기업이며, 5공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먼저 사라진 재벌이다.
  • 명성그룹 : 5공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먼저 사라진 재벌이다.
  • 삼호그룹 : 삼호아파트로 유명한 재벌. 5공 시기에 비슷한 이유로 1984년에 해체되어 주축인 (주)삼호는 대림그룹으로 넘어갔다.[25] 가수 조덕배의 작은아버지 조봉구(1919~2009) 씨가 이 그룹의 총수였다.
  • 대한선주 : 서주우유로 유명한 윤석민 회장이 1973년에 대한해운공사를 전 사주 김연준(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그 사람이다)으로부터 인수한 국내 굴지의 해운 기업이었으나, 1980년대에 불어닥친 해운업의 불황으로 인해 경영난이 겹치자 이에 전두환 정부가 1987년에 제정한 '해운산업 합리화조치'에 따라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한진그룹에 인수되어 한진해운과 합병했다. 그러나 전두환 퇴임 이후 5공 비리 폭로에 편승한 윤석민 전 회장이 대한선주가 5공에 정치자금을 안 바쳐서 망했다고 '해운산업 합리화조치'가 위헌이라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으나, 1995년에 헌법재판소는 '문제 없다'고 일단락했다. 참고.

10. 바깥 고리



11. 같이 보기



[1]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국제그룹이 해체되자 양정모 회장(배우 한인수)이 낡은 고무신을 꺼내 신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 건 이 때문.[2]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원 소유주인 권철현(1925~2003) 회장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권철현 회장이 박정희에게 반대의사를 보이자 찍혀서 경영권을 빼앗겼고 어부지리로 국제그룹이 인수했다고 한다. 한편 권철현의 사촌동생이 하나회 멤버이자 전두환과 육사11기 동기인 권익현이다.[3] 그는 원풍 매각 직후 부산주정공장(구 대선발효)를 기반으로 일산실업을 세우게 되었다.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이 그의 사위이다.[4] 사진 왼쪽을 잘 보면 롯데가 보인다. 과거의 동그라미에 L 3개 들어간 로고도 보인다.(참고로 이 로고는 2011년까지 사용되었다.) 얼핏 봐도 국제가 더 큼을 짐작할 수 있다.[5] 최근의 재계순위로 환산해 본다면 롯데그룹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6]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재벌그룹 독립전시관은 딱 10개만 허용했다. 그 안에 들었다는 것.[7] 오늘날 롯데그룹은 과거 국제그룹의 위상과 비슷한 수준의 재벌이 되었지만, 국제그룹이 잘나가던 19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롯데그룹은 재계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중견 재벌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에 참가할 당시 롯데그룹의 재계 랭킹은 '''49위'''였다고 한다. 다만 일본에도 야구단을 소유중이었고 회장 신격호의 재산은 일본 거품경제의 부동산 가치 급상승 버프로 세계 4위 부자였다. 80년대 후반 포춘지의 세계 재산 순위에 Over 1 Billion - Japan - Takeo Shigemitsu가 있다.(일본인으로 나옴) 조금 더 내려보면 KoreaChung Ju-Young/heavy industry, Lee Byong-chull/trading, retailing, consumer electronics가 있다. 여담으로 신격호는 업종이 무엇으로 되어있냐면 '''candy making'''(...), retailing 그리고 롯데는 일본 롯데가 또 있기에 그때도 그리 작은 회사는 아니었다. 당시엔 일본 롯데가 한국 롯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고 그때문에 신격호도 일본롯데를 신동주에게, 한국롯데를 신동빈에게 맡겼다고 한다.[8] 1980년대만 해도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강변에서 바라볼때 이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일 정도로 한눈에 잘 보였지만 90년대 들어서 한강변의 아파트가 재건축되고 , 2000년대 들어서 주상복합아파트 등이 건설되는 등 높은 건물이 들어서 여의도 강변에서는 볼 수 없다. 참고로 이 건물은 국제 해체 후 한일합섬에 넘어갔다. 사유는 전두환에게 잘 아부해서.(...) 그러나 여기도 외환위기때 해체. 이후 LS그룹이 한일합섬을 인수하며 저 건물도 가지게 된다. 다만 LS 본사는 안양 LS타워. 케이블 업계 경쟁사인 대한전선도 안양 평촌롯데백화점에 붙어있는 고층 빌딩에 있었으나 삽질을 거듭한 끝에 돈이 없어서 3년만에 이사갔다.[9] 전두환과 대구공고 동기이며, 유명한 과학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발사를 주도한 인물.[10] 아들은 미국 유학 가서 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라를 위한 일에는 야박하다고 비아냥조로 면박을 준다.[11] 새마음심장재단에 20억, 새마을성금 10억원을 각각 냈다.[12] 이쯤되면 양정모가 대놓고 전두환에게 뻐큐를 날린거나 다름없다. 보통 어음은 위치가 낮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니...[13] 이마저도 출국금지로 묶여서 못 갈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머나먼 타지에서 사경을 헤메는데 아버지를 못 가게 막는 건 그 악랄한 신군부가 보기에도 너무 인륜에 어긋난다 싶었는지 출국을 허가했다. 하지만 마침내 아들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14] 당시 평균이 500%대라고 한다. 참고로 부실공기업이라며 온갖 비난을 다 받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의 2011년 상반기 기준 부채비율이 550% 정도다. 하지만 80년대는 엄청난 호황기로 경제가 수직성장하던 시절이었으니, 부채비율이 높다고 내일모레 부도날 상황은 아니었다.[15] 주거래 은행이자 채권단 대표 은행인 제일은행조차도 해체 결정 발표 전날에 통보를 받았을 정도로 국제그룹 해체 결정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16] 당시에는 '하이야트'라 표기했다.[17] 전 (주)대우 무역부문 사장 박세영이 운영한 무역회사.[18]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유신독재시기 대표 민주노조로 언급된 원풍모방 노조가 바로 본사 모방공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것이다.[19] 드라마 제5공화국 33회 초반에 보면 노태우의 부정축재 공판에 관한 이야기가 2분 가량 나온다.[20] 김영삼은 정기 모임, 국빈 대접, 특별 회동 자리에서 칼국수를 즐겨먹곤 했는데, 실제로 칼국수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소탈한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도 이용했다.[21] <한국정치체제론>. 김호진 저. 박영사. 1997. p311.[22] 퇴출기업 선정에 관여한 조필연의 입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23] 최종 선정된 게 21개 기업인데, 국제그룹은 이 21개에 들어갔을 것이다.[24] 저시절만 해도 국제상사는 영문표기를 위 영문표기, 혹은 약어인 ICC를 사용했지 Kukje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 안했는데, 소비재를 제조하더라도 소비재의 브랜드를 각인(왕자표 신발, 프로스펙스 등)시켰지 회사의 사명을 앞에 내세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Kukje라는 표현을 대거 사용한 것은 앞의 서울무역박람회 시절부터. 그때까지만 해도 국제그룹이 재계 수위권 기업이라는 것을 일반 소비자들은 거의 몰랐다. 사명이나 그룹보다는 브랜드명을 앞세웠기 때문. [25] 2000년대에 지어진 삼호아파트에 'e편한세상' 브랜드가 붙은 것도 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