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옥
1. 개요
梁紅玉
(1102년 ~ 1135년)[1]
북송 말기, 남송 초기의 여성 장수. 회안 초주 출신. 참고로 홍옥이라는 이름은 야사 기록. 정사에는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고 양부인으로 불렸다.
2. 생애
송휘종 숭녕 원년인 1102년에 태어났으며 집안은 대대로 장수 출신이었지만 방랍의 난 때 전투를 이길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로 부친과 조부가 목이 달아나 죄인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기원으로 들어가서 기녀로 일하다가 그 당시에는 하급 장수였던 한세충을 만났다가 그가 군대를 지휘하는 위치에 머무르게 되자 그의 처가 된다. 이후 한세충이 송고종 건염(建炎) 3년(1129년)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아들 한량과 함께 묘부의 인질이 되었는데 엄하게 비밀로 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때 주승비가 묘부를 속여 말하길 태후에게 아뢰어 두 사람을 보내면 한세충을 회유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고 묘부가 이를 받아들여 그녀를 안국부인(安國夫人)에 봉해 한세충을 불러들여 영접하려 했는데 양홍옥은 잽싸게 성밖으로 탈출해 한세충과 만났다. 물론 이후 묘부와 유정언은 한세충에 의해 박살...
송고종 건염 4년인 1130년에 남편인 한세충과 함께 명을 받아 경구를 지켰으며 완안종필(완안올출, 완안우추)이 임안을 공략한 후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강을 도하해 북쪽으로 돌아가려다가 결국 부부가 주밀하게 배치한 송군과 조우하여 진강에서 회전을 펼쳤다. 양홍옥은 사졸들의 앞장에 서서 십 수장 높이의 망루에 올라 날아드는 화살을 무릅쓰고 친히 북을 울려 작전을 지휘했다. 금군이 비록 군사 수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으나 결코 송나라 수군이 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결국 송군은 밤 사이에 벌어진 십여차례의 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금군이 장강 도하작전에 실패한 후에 황천탕에서 송군에 의해 철통과 같이 48일간 포위되어 여러 번에 걸쳐 강화를 시도했으나 모두 송군에 의해 거부당했다. 당시 양홍옥은 병사들을 지휘함과 동시에 손수 만두를 빚어 많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두의 양이 많지 않으니 마음(心)에 점(點)이나 찍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게 점심, 딤섬의 어원 중 하나라고 한다.##
한편 완안종필은 그 사이 물길을 뚫어 도주하고 바람이 멈춘걸 기회로 큰 해함이 움직이지 못하자 불화살을 쏘아 송군이 혼란한 틈을 타 돌파하고 절강으로 후퇴했다. 어쨌거나 적은 군사로 10만 대군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는데 양홍옥은 표를 올려 남편 한세충을 탄핵했다. 송고종은 이를 두텁게 위무하고 칭찬했으며 매우 총애해 한세충을 위하여 관직을 더하고 잔치를 베풀었고 또한 양홍옥을 양국부인(楊國夫人)으로 봉했다. 양홍옥이 올린 탄핵표는 남송학자 나대경(羅大經)의 저서 학림옥로(鶴林玉露)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부인이 전후 황제께 글을 올려, 아뢰니 "세충은 기회를 잃어 적을 놓쳤으니, 죄책(罪責)을 원하옵니다."
3. 말년
그녀의 몰년에 대해선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남송의 문인인 이심전(李心傳, 1167~1244)이 지은 남송 초기를 다룬 편년체 역사서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의 기록으로 1135년 3월 한세충이 회동선무사(淮東宣撫使)로 초주(楚州)에 주둔할 때 같이 가 부인양씨가 친히 직박으로 집을 삼아(夫人梁親織薄為屋) 그곳을 재건하던 중 5개월만인 1135년 8월 26일(양력 10월 6일)에 졸했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론 명나라의 문인 장사유(張四維, 1526~1586)가 지은 전기(傳奇) 쌍열기(雙烈記)에 기록된, 한세충과 초주에 십여년간 주둔하던 중에 악비가 주전파의 대신인 진회의 모함으로 죽은 이후 한세충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자 함께 소주로 낙향하였으며 한세충이 졸한지 2년만인 1153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다.
일단 송사 한세충 열전에 따르면 한세충이 무녕안화군절도사(武甯安化軍節度使), 경동회동로선무처치사(京東淮東路宣撫處置使)로 초주(楚州)에 관청을 세운것은(置司楚州) 송고종 소흥 6년인 1136년의 일이고 이때 한세충이 풀숲(가시나무)을 헤쳐 군부를 세우고 병사들과 함께 요역을 했으며 그녀가 친히 직박으로 집을 삼았단(世忠披草萊[2] ,立軍府,與士同力役,其夫人梁氏親織薄爲屋)기록까지는 있고[3] 그 이후의 기록은 여기서 없어져서 언제 죽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한세충 열전에 따르면 소흥 11년인 1141년에 초주(楚州)에 한세충이 있은지 10여년에 병사는 근 3만명에 금인들이 감히 이곳을 범하지 못했다고 나와있다. 이후 같은 소흥 11년에 악비(岳飛), 장준(張俊)과 함께 불려 입조하여 추밀사(樞密使)가 되면서 병권을 박탈당했고 화의(和議)에 반대하면서 진회(秦檜)가 나라를 그르친다고 상소했다. 나중에 파직되어 예천관사(醴泉觀使)로 쫓겨났으며 이때부터 사직상소를 올리고 은퇴하여 두문불출하면서 군사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때로 나귀를 타고 술병을 찬 채 서호(西湖)를 돌아다녔고 한다. 송사 악비전에 따르면 악비가 억울하게 죽자 진회에게 따지며 “‘꼭 없다고 하겠느냐.(莫須有)’는 말로 어찌 천하 사람들을 설득하겠느냐!”고 말했다.
일단 요록에도 나온 기록은 송사에도 나오는데 연도가 약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송사는 소흥 6년에 한세충이 초주에 관청을 설치하고, 군부를 세웠다고 써놓고서는 11년인 1141년에 쌍열기 기록처럼 한세충이 초주를 금인들로부터 십여년간 지켰다고 써놨다. 그러니까 요록, 쌍열기, 송사가 이상하게 다들 조금씩 삐딱선을 타고 있는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송사와 요록에 그녀의 기록이 일치하기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전자의 기록을 취해 1135년으로 기록하고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도 이쪽 기록을 더 신뢰하고 있다. 간혹 후자의 기록을 취한 경우도 있으며 나무위키에서도 1153년쪽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4. 기타
기녀 출신으로 국부인까지 임명된 입지전적인 인생을 살았던지라 훗날 기녀들에게 대단히 숭배받았다. 영렬부인묘(英烈夫人廟)라는 양홍옥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두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기녀들은 절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에서 위소보가 모십팔과 만나 염효들과 싸우러가는 장면에서 양홍옥의 사당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 13 PK에서 고대무장으로 추가되었는데,[4] 여장군이란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일러스트가 굉장히 요염하다. 전법은 5포인트를 소모해 공격력 30, 사기 10, 기동력 30을 올려주는 질주지휘고 이상위명은 재덕겸비이다. 능력치는 통솔 88, 무력 67, 지력 89, 정치 76. 특기는 문화 5, 설파 6, 교섭 6, 언변 7, 인덕 4, 신속 5, 분전 7, 연전 6, 병기 4, 수영 7, 귀모 6으로 전체적으로 좋은 무장. 무관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일기 레벨은 없으나 일기토도 가능하다. 이왕 일기토를 시킬거면 사사와 인연 쌓기를 통해 일기레벨과 무력을 좀 키울 것. 병종 특성은 창/기/궁 모두 AAA라 중신특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병종 S급으로 나올수 있으며, 능력치와 내정, 전투 특기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책사, 관리, 무인, 장군 어느 쪽으로도 육성이 가능한 만능형 무장이다.
남편인 한세충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데 웃기는건 둘이 부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NPC 무장은 자기들끼리는 결혼하지 않으므로 NTR 걱정은 안해도 되지만... 참고로 등장하는 여성무장 중 통무지정 합계가 가장 높다. 2위는 당연히 손상향...
토귀전 2 중문판 특전 미타마로 추가되기도 했다.#
Totally Accurate Battle Simulator에도 유닛으로 등장했는데, 애초에 게임이 병맛이다보니 언월도를 들고 돌진하여 적들을 썰어버리며 빙빙 돌기도하고 토네이도도 일으키는(...) 해괴한 유닛이 되었다.